홀로코스트(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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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특수작전집단
1942년 우크라이나 이반호로드에서 촬영. 아이를 부둥켜안는 어머니의 등에 총을 겨누는 특수작전집단의 이 사진은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1. 개요2. 개괄사3. 명칭과 어원4. 수용소
4.1. 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4.2.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4.3. 형벌 수용소 (Straflager)4.4. 환승 수용소 (Durchgangslager)4.5. 나치 독일 외 다른 국가들이 운영한 강제수용소
5. 희생자 수6. 진행7. 방식8. 가해 주체9. 전후 반응10. 유대인 분류 기준11. 언어적 위장12. 알려진 피해자들
12.1. 희생자12.2. 생존자
13. 기타14. 관련 어록15. 홀로코스트를 다룬 매체16. 관련 문서17. 둘러보기

1. 개요 [편집]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또는 쇼아(השואה)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이 주도하고 파시스트 협력자들이 동참하여 벌인 유대인을 향한 제노사이드를 일컫는다. 이로 인해 약 6백만 명의 유대인 민간인과 포로들이 살해되었으며 당시 유럽 내 약 9백만 명의 유대인 중 2/3가 사망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대인 외에 나치당이 보기에 우생학적으로 열등하거나 반체제적이라고 여겨진 사람들 또한 함께 기소 및 학살되었으며, 폴란드인소련인슬라브인, 롬인, 동성애자, 장애인, 공산주의자들 또한 조직적으로 살해되었다.

2. 개괄사 [편집]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을 기반으로 한 나치즘을 바탕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자 유대인들을 향한 탄압과 차별을 제도적으로 도입했다. 1933년에는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에 대한 국가적 보이콧이 이뤄졌고, 1935년 도입된 뉘른베르크 법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향한 법적 차별이 가해졌다. 이러한 전국적 차별 아래 1938년 수정의 밤 등의 반유대적 폭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롬인을 몰아넣은 구역인 게토가 형성되어 사회적 배척과 격리가 이뤄졌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독일이 동쪽으로 확장하며 특수작전집단이 동유럽 점령지의 유대인과 정치범들을 학살하는 역할을 맡아 총 130만여명의 민간인을 대량총살했다. 또한 나치 독일의 점령지와 파시스트 동맹국들의 영토에 강제수용소가 지어졌으며, 이곳에 수감된 유대인들은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투입되어 과로사, 아사, 병사하였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최종 해결책'으로서 모든 유대인의 절멸이 결정됨에 따라 수감자들은 가스실을 이용한 방법을 중심으로 하여 대량학살되었다. 그러한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로는 나치 점령 폴란드에 설치된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 소비보르, 헤움노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식적 기소와 학살은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유대인 민간인과 포로들은 가스실, 총살, 강제 노동, 계획된 영양실조, 생체실험, 죽음의 행진 등의 방법을 통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고, 이로 인해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어 당시 유럽 내 약 9백만 명의 유대인 중 2/3가 사망했다.

홀로코스트가 다른 독재국가들의 학살보다 질적으로 더 나쁘게 평가받는 이유는 독재국가들의 학살은 보통 독재자의 개인적인 권력을 위한 숙청이거나 독재자 개인의 무능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적인 참사였지만 홀로코스트는 특정 민족 자체를 '물리적으로 말살'시키겠다는 목표를 지니고 국가의 주요 조직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한 체계적인 전쟁범죄였기 때문이다. 아돌프 히틀러 뿐 만 아니라 경찰, 군대, 친위대, 나치당, 행정부, 과학자, 기업인, 언론인, 의사, 판사들까지 체계적으로 이 행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으며 국가 전체가 범죄 집단이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연합국 측에서 나치의 지도부를 단순히 패전국의 책임으로 규정하지 않고 "반인륜 범죄" 혐의로 규정하고 처벌했던 것이다.

3. 명칭과 어원 [편집]

  •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어원은 고전 그리스어로 '번제(燔祭)'를 뜻하는 '홀로카우스토스(ὁλόκαυστος)'로, 제물을 불에 태워 그 연기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영어에서 홀로코스트를 유대인 대학살이란 의미로 쓸 때에는 원칙적으로는 앞에 정관사 the를 붙여 표기한다.
  • 최종 해결책(Endlösung, Final Solution)
    학살의 주체였던 나치 독일에서의 공식 독일어 명칭은 '최종 해결책'이라는 뜻의 '엔틀뢰중(Endlösung)', 정확히 말하자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라는 뜻의 '엔틀뢰중 데어 유덴프라게(Endlösung der Judenfrage)'로, 은유를 통해 대량 살해를 목적으로 함을 감추고 있다. 현재도 독일에서 최종 해결책이라는 용어는 홀로코스트를 칭하는 또다른 고유명사로 인식되며,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다른 유럽권 언어에서도 비슷하여, 영어로 '파이널 솔루션(Final Solution)'은 홀로코스트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인식되어 터부시된다.
  • 크르반 이로프(Khurbn eyrope, חורבן אײראָפּע)
    이디시어로 '유럽의 파괴'를 의미한다. 크르반(חורבן)이란 단어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 포라이모스(Porajmos)
    롬어로 '삼키다'를 의미한다. 또는 사무다리펜(Samudaripen, 대량 학살)이라고 부른다. 나치의 집시 대량 학살을 묘사할 때 사용한다.
  • 자그와다 지도프(Zagłada Żydów)
    폴란드어로 '유대인 파괴'를 의미한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지배하면서 벌인 비유대계 폴란드인을 향한 광범위한 전쟁범죄 행위와 구분하는 단어이다.
  • 포린텔센(Förintelsen)
    스웨덴어로 '말살'을 의미한다.

4. 수용소 [편집]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죽음의 186계단

이 곳에서 수감자들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거나 낙석에 맞아 죽는 등 '노동을 통한 절멸'로 죽어나갔다.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

이 수용소는 가스실이 없었지만 수 만명에 달하는 수감자들이 매우 열악한 위생상태와 영양실조로 인해 사망했다.

4.1. 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 [편집]

죽음의 수용소(Todeslager)라고도 한다. 나치가 세운 수많은 수용소가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는 아래의 6곳이고 그 외는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이다.

다른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도 부차적으로 인체실험이나 학살 등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이루어졌으나, 절멸수용소는 1차적인 목적이 노동이나 교화, 형벌이 아니라 살인(절멸)을 목적으로 운용되던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강제 수용소와 차이가 있다.#

"라인하르트 작전의 일부"로 표기되는 절멸수용소들은 1942년 3월 부터 1943년 11월 까지 운영되었던 수용소들을 지칭한다. 나치의 국가보안본부장(RSHA)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도한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 절멸로 확정된 뒤, 세 곳의 절멸 수용소가 건설되었고 루블린 SS 경찰 지도자인 오딜로 글로보츠닉이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이 세 곳의 절멸수용소들은 여타 나치 강제수용소의 강제노동이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와 같은 '선별 작업' 조차 전무했으며 오로지 대량학살을 위해 가동되었다.[3] 특히, 1942년 4월에서 12월 사이에 단 8개월 동안 무려 유대인 120만 명을 학살해내 역사상 가장 빠른 대량학살률을 선보였다.[4] 이 세 곳의 절멸수용소들은 라인하르트 작전이 종료되자, 증거인멸 차원에서 폐쇄되었다. 하지만, 전후에 극소수의 생존자들의 증언과 발견된 나치의 공문서를 바탕으로 세 곳의 위치가 특정되게 되었고 그 장소에서 다수의 건물 터와 유골들이 발견되게 되면서 나치가 은폐한 절멸수용소로 밝혀지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에 비해 낮은 인지도로 인해 '잊혀진 죽음의 수용소(Forgotten Camp)'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다.

이 절멸수용소들은 "가해자들의 심리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대규모 가스실과 소각장을 구현해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가스실을 가동하는 SS 대원들도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5] 친위대 총수 하인리히 힘러는 이들에게 특히 육류 위주로 많은 식량과 술을 공급해 이들의 '심신을 달래려고' 했다. 그래서 생명과 가장 거리가 먼 공간임에도 SS 대원들을 위한 '일상적인 공간'들이 배치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경우 SS 대원들을 위한 카페는 물론 동물원까지 건설했으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의 수용소 바로 옆 저택에는 화단은 물론 수영장까지 있었다.
네메시 라슬로 감독의 헝가리 영화사울의 아들》 의 도입부에서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가스실 시퀀스. 열차로 이송되어 비르케나우에 도착한 희생자들이 존더코만도들의 안내를 받아 수용소 내로 들어오면 친위대 장병들은 거짓말로 그들을 안심시킨다.[6] 그동안 희생자들은 탈의하고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에 수용된다. 문이 닫히는 즉시 치클론 B 가스가 투입되며, 안에서 사람들이 가스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동안 존더코만도들은 희생자들의 짐을 모아 정리한다.

나치는 강제 노동 수용소들의 존재는 인정했고 신문에서도 숨기지는 않았지만 절멸 수용소들의 존재는 아예 부정되었고 절멸 수용소들의 간부들은 비밀 유지 서약을 해야 했다. 이는 나치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끔찍한 행위이며 국제적으로 지탄받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영내
독일 점령지 수용소

4.2.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 [편집]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는[8] 나치가 점령한 각국에 소재하였으며, 1차적인 목적은 나치에 반하는 인물들의 형벌 및 교화, 노동이라는 점에서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강제 노동 수용소는 부차적으로 인체실험, 총살 등이 행해지긴 했어도 주된 운영목적은 아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형이나 기아, 질병, 피로때문에 사망률이 높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일부 수용소의 사망인원은 절멸수용소에 비견할 정도이나, 목적과 경향성 등에서 차이가 있어 절멸 수용소와 구분된다.

강제 노동 수용소는 나치 독일 법무부에서 운영하는 교도소와 관할권이 달랐으며, 나치 친위대 해골부대(Totenkopfverbände)의 관할 구역이었다. 나치 독일의 교도소에선 '적어도' 형사법에 따른 관리가 이루어진 반면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는 나치 독일의 법 테두리를 벗어나는 초법적인 조치가 이어졌으며 해골부대원들은 강제 노동 수용소 수감자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아돌프 히틀러가 그들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했고 책임의 면제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절멸 수용소와 달리 강제 노동 수용소는 나치 독일 내에서도 비밀이 아니었으며, 독일 국민들은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간다면 '매우 혹독한 일'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느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 것이 강제 노동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집단 살인이 발생하는 장소라는 사실 만큼은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이었다.

일각에선[9] 소련굴라그와 비교하면서 양비론의 논리를 펼치긴 하나 그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소련의 굴라크도 인권 유린과 참혹한 현실이 있긴 했으나, 적어도 형기가 정해져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학살이 목적은 아니었다. 반면, 나치의 강제 노동 수용소는 절멸 수용소와 방식과 규모가 달랐을 뿐 유대인에 대한 학살 그 자체가 목적 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나치는 이를 '노동을 통한 절멸'로 지칭했다.

나치가 강제 노동 수용소에 대해 어떻게 접근했는지는 나치 친위대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발언이 잘 증명하고 있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의 과정에서, 독일군의 감독하에 동유럽에서 유대인의 노동부대를 편성해야한다. 남녀별 대규모의 노동부대 안에서 노동이 가능한 유대인은 철도건설에 투입되지만 대부분은 자멸에 의해 결핍되겠지. 최후의 생존자는 의지가 강한 인간이니 그들에 대해서는 상응한 대응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도태에 맡겨서 방치하면, 새로운 유대인의 피가 후세에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 1942년 반제 회의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발언.

제2차 세계 대전 중후반기에는 숙련공들이 크게 부족해지자 나치는 강제 노동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강제 동원해 군수 공장에서 노역을 시켜 군수품을 생산하게 강요했다. 이게파르벤, BMW, 지멘스, 크루프, 라인메탈, 다임러-벤츠, 폭스바겐. 휴고 보스 등 독일의 유명한 기업들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나치는 독일 내에 설립된 수용소에 한정해서[10] 강제 노동 수용소들에게 등급을 부여해서 수감자들에 대한 대우 강도를 달리했다. 하지만 가장 낮은 등급에서 조차 수 많은 인권 유린과 학살이 발생했으므로 사실상 유명무실한 등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들은 등급을 막론하고 죽어나가는 운명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1등급 수용소: 가장 낮은 수용소 등급으로 다하우, 작센하우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수감자들에 대한 통제 강도가 다른 노동 수용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으며 정치범들이나 중범죄자들은 운이 좋으면 석방될 수도 있었다.[11] 그러나 이 곳에서도 영양실조, 질병, 즉결총살과 가스실 처형이 발생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2등급 수용소: 나치 정권에 더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된 '중한' 정치범, '보호 구금'이 필요한 인물, 그리고 일부 '반사회적' 수감자들이 대상이었다. 이 곳의 통제 강도는 1등급 보다 훨씬 가혹했으며 이 곳에 수감된 독일인들은 디를레방어 여단과 같은 무장친위대 형벌부대로의 입대 말고는 석방될 기회가 없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부헨발트, 플로센뷔르크, 라펜스브뤼크, 노이엔감메 등이 이에 해당했다.
3등급 수용소: 나치 이념에 따라 '교화가 불가능하고 가장 위험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반복적인 중범죄자, '반사회적' 인물, 그리고 정권에 가장 적대적이라고 판단된 정치범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노동을 통한 절멸 (Vernichtung durch Arbeit)"이라는 개념이 가장 노골적으로 적용된 곳이다. 수감자들은 채석장과 같은 가장 위험하고 고된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으며, 의도적으로 최소한의 식량만을 배급받았다. 사실상 수감자들을 의도적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설계된, 가장 치명적인 등급의 수용소였다. 독일인이라도 이 곳에 수감된다면 수용소에서 석방될 기회 조차 없었으며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나츠바일러-슈트루트호프가 이에 해당되었다.

4.3. 형벌 수용소 (Straflager) [편집]

게슈타포고문 등의 수단으로 수감자들을 굴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단기 수용소 내지 고문실.

4.4. 환승 수용소 (Durchgangslager) [편집]

4.5. 나치 독일 외 다른 국가들이 운영한 강제수용소 [편집]

5. 희생자 수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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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역사학자 | 미국 벌링턴

'노선 지침' 제587호입니다.[45]
특수 열차를 운행하려면 항상 작성해야 했던 서류죠.
587번이라는 숫자가
그 전에 얼마나 많은 지침이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여기 아래에는 누어 퓌어 덴 딘스트게브라우흐(Nur für den Dienstgebrauch)라고 쓰여 있어요.
'내부 관계자용'이라는 뜻인데
기밀의 정도로 따지자면 사실상 하급 수준에 해당하죠.
그런데 제가 놀랐던 부분은
죽음의 열차와 관련된 서류인데도,
이것뿐만 아니라 다른 서류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기밀'을 뜻하는 단어 게하임(Geheim)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문서에 '기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그걸 읽는 사람들이 그게 뭔지 더 궁금해해서
아마도 더 많은 의심을 사게 됐을 겁니다.
주의란 주의는 다 끌었겠죠.
이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심리적인 차원에서 명심해야 했던 게
수행하고 있던 임무를 절대로
명명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무 말 말고 그냥 하라는 거였죠.
뭘 하는지 부인하지도 말고요.
그래서 '내부 관계자용'이라고 적혀 있는 겁니다.
여기 보시면 이 서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데요.
'Bfe'. 기차역을 말하죠.
이 노선에만 기차역이 총... 8개나 돼요.
여기가 트레블링카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마우키니아 기차역입니다.
그러니까 라돔(Radom)을 지나서 바르샤바 구역까지
이렇게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도
문서를 수신한 곳이 8곳이나 되는 거죠.
여기 8개의 역을 지나갈 때마다
각 기차역 담당자에게 통보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한 장이면 충분한 것을 왜 두 장씩이나 썼을까요?
여기 보이는 PKR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죽음의 기차를 뜻하는 약자예요.
그런데 트레블링카에 열차가 도착하면
곧바로 비워냈기 때문에
거기서 새로 출발하는 빈 열차가 하나 더 생기게 되는 거죠.
아시다시피 비어 있다는 뜻인 단어 레어(leer)를 나타내는
알파벳 L이 여기 이렇게 표시되어 있고요.

뤽라이퉁 데어 레어추게스(Rückleitung der Leerzuges)
'빈 기차의 귀환'이라고 쓰여 있군요.

여기 보세요.
숫자를 매기는 방식에서 교묘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9228번에서 9229번, 이어서 9230번, 9231번, 9232번.
전혀 특별할 것 없이
일반 열차를 운행하는 거나 다름없었던 거죠.

죽음의 열차였는데도요!

네, 죽음의 열차였는데도 말이에요.

이제 이 부분을 살펴보시면
어느 한 게토에서 내부를 비우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거기서 기차가 출발해 트레블링카로 향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942년 9월 30일 4시 18분에 출발한 거죠.
적어도 계획된 일정표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11시 24분에 트레블링카에 도착해요.
이건 길이가 아주 긴 열차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늦게 도착한 거고요,
여기 '50G' 표시가 보이시죠.
사람들을 가득 채운 화물칸이 50개였다는 뜻입니다.
중량이 굉장히 '무거웠던' 수송이었던 거죠.
트레블리카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24분,
오전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15시 59분에 열차가 다시 출발합니다.
그사이에 기차에 실려 있던 것을 내리고
청소까지 한 다음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거죠.
그렇게 빈 기차에 다시 일련번호를 매긴 거고요.
그러니까 이 기차는 오후 4시경에
트레블링카에서 또 다른 작은 도시를 향해 출발했고
그곳에서 또 다른 희생자들을 실은 겁니다.
그리고 여기 보시면
새벽 3시에 다시 트레블링카를 향해 출발해서
다음 날 도착했어요.

그러면 이 두 열차가 같은 열차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아 그럼요. 같은 열차죠. 이 둘은 같은 열차입니다.
매번 번호만 바뀐 거고요.
그렇게 트레블링카로 다시 돌아가고 나면
새로운 수송이 또 있었겠죠.
도착하자마자 다른 곳으로 다시 출발하는 식이었던 겁니다.
매번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방식으로 운행을 반복했으니까요.
이 기차는 또다시 트레블링카로 돌아가서는
최종적으로 9월 29일 쳉스트호바에 도착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거죠.
이게 바로 '노선 지침'이라고 부르던 서류입니다.
열차 안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는 가정으로 계산을 하면
이런 식으로 '노선 지침'을 한 번 시행할 때마다
약 1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만 명은 훌쩍 넘을 것 같은데요!

최소한으로 잡아서요.

그런데 이런 문서에 이렇게까지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실제로 트레블링카에 다녀온 입장에서
거기 현장과 이 문서를 동시에 보니까...

지금 제가 이 종이를 이렇게 손에 들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이건 서류 원본이에요.
당시 행정을 집행하던 관료들도
이걸 두 손으로 직접 들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죠.
유물이나 다름없습니다. 남아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요.
죽은 사람들은 더는 말이 없으니까요.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의 희생자 이송 과정에 대한 사학자 라울 힐베르크의 설명.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 195~199p에서 발췌
나치 독일은 유대인 절멸에 관한 명령과 보고를 서면으로 기록하는 것을 꺼렸기에 학살 명령 다수는 구두로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생산된 수많은 문서들은 1944년경부터 조직적으로 삭제되었으며, 학살과 관련된 여러 시설들 또한 의도적으로 해체되거나 파괴되었다. 이 외에도 광범위하게 벌어진 집단 학살 사건들과 그 희생자들에 대한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렇기에,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피학살자 수를 집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재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집계는 주요 집단 매장지에서 발굴된 희생자 수, 독일 제국철도의 운송량과 운송 횟수, 그리고 전후 집계된 인구를 이민자 숫자와 전쟁 전 인구수와 비교하는 연구 등을 토대로 한 추정치에 기반한다.

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발표한 희생자 숫자는 다음과 같다. 해당 박물관은 전후의 인구 집계 결과를 토대로 추산하였다.
인종과 집단에 따른 홀로코스트 희생자 수
인종 또는 집단
희생자 수
비고
600만 명
소련 민간인
약 700만 명
130만명의 유대계 소련인 포함
약 300만 명
5만명의 유대계 소련군 포함
비유대 폴란드 민간인
약 180만명
5만~10만명의 폴란드 엘리트 계층 포함
세르비아 민간인
312,300명
격리시설 장애인
약 25만 명
약 25만 명
약 1900명
최소 7만 명
추축국 점령 지역의 파르티잔레지스탕스
불명
수백 및 수천 명
상기된 재범죄자 및 비사회인격장애인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또한 해당 박물관에서는 유대인들의 사망 장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통계를 제시한다.
장소에 따른 유대인 희생자 수
장소
희생자 수
비고
약 100만명
약 925,000명
434,508명
최소 167,000명
156,000 ~ 172,000명
폴란드 총독부 지역의 총살 작전
최소 20만 명
바르테란트 관구 지역의 총살 작전
최소 2만 명
기타 강제수용소들
최소 15만 명
독일에 점령된 소련 지역에서의 총살 작전 및 가스 밴
최소 130만 명
소련에서의 총살 작전
약 55,000명
소련으로 추방된 독일, 오스트리아 및 체코계 유대인
세르비아에서의 총살 및 가스 밴
최소 15,088명
크로아티아에서 우스타샤 정권의 총살 또는 고문
23,000 ~ 25,000명
게토에서 사망
최소 80만 명
기타
최소 50만 명
1) 1939년에서 1940년까지 폴란드에서 살해된 이들
2)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살해된 이들
3) 헝가리의 노동대원으로 사망한 이들
4) 전간기 독일오스트리아반유대주의 운동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
5) 1940~41년간 루마니아 철위대에 의해 살해된 이들
6) 전쟁 후반 6개월간 죽음의 행진에서 사망한 이들
7) 독일 점령지역에서 숨어 지내다 살해된 이들

홀로코스트 과정에서 과정에서 유대인 외에 나치당이 보기에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자들, 혹은 반(反)나치즘적이라고 여겨진 사람들 또한 함께 기소 및 학살되었다. 그러한 예로 1938년 시행된 장애인 학살인 T4 작전의 경험을 거친 인력들이 독소전쟁 발발 이후 홀로코스트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폴란드인 등 슬라브족 또한 학살당하여 약 180~190만 명의 비(非)유대계 폴란드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46] 연합군이나 레지스탕스의 포로, 특히나 유대인, 슬라브인, 유색인 포로의 경우 현장에서 처형되거나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로 보내졌다.

소위 '집시'라고 불리는 롬인들도 주요 학살 대상 중 하나였으며, 최대 50만여명이 학살되어 유럽 롬인의 절반 가량이 사망하였다.[47] 이 롬인 학살은 롬어로 '파괴'를 뜻하는 '포라이모스(Porajmos)'라고 불리기도 한다.[48]

나치당을 정치적 이유로 거부한 공산주의자 등의 정치범들도 함께 학살되었다. 남성 동성애자를 위시한 성소수자들 또한 학살 및 수감되었다.[49]

이러한 나치의 기소에 의해 사망한 총 희생자의 수는 홀로코스트로 사망한 유대인 600만여 명을 포함하여 약 1,100만 명이다. 좀 더 넓게 정의할 경우 동부전선에서 군사작전 중에 죽은 민간인을 제외한 나치 점령지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소련인까지 포함해 약 1,700만 명까지 추정하기도 한다.[50]

6. 진행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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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방식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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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해 주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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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기획하고 주도적으로 학살한 주체는 히틀러를 주축으로 한 나치 독일 정부와 그 군대임이 분명하지만, 그 외의 추축국들이나 추축국의 괴뢰국, 점령지의 자생적인 파시스트들로 이루어진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과 '풀뿌리 부역자들' 또한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직접적으로 살인에 관여되지 않은 독일의 단체나 민간인들 또한 반유대주의에 깊게 경도되어 유대인을 향한 차별, 탄압, 추출 등 학살에 참여했다.

유대계 미국인 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은 "독일 교회와 내무부는 유대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대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대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라고 기록했다.[51]

또한 대학교는 유대인 교수 해고, 철도 회사는 수용소행 열차 운영, 화장(火葬) 회사는 수용소의 대규모 화장터 지원, 제약 회사는 수감자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 참가 등 학살에 대한 대규모 동조가 이뤄졌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구조적 악이 나치의 전체주의를 기능하게 했다는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다.

9. 전후 반응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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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며 그 실상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근대의 첨단이었던 서구 기계 문명의 기술력과 행정력이 철두철미하게 특정 부류의 인간을 말살한다는 발상에 쓰였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반면교사로 남게 되었다.

이에 1945년 종전 이후 유엔세계 인권 선언이 1948년 발표되는 등 인권 수호와 차별 반대라는 국제적 합의가 맺어졌다. 현재의 독일연방공화국은 학살의 주범인 나치가 민주적인 절차로 정권을 장악했다는 점을 들어 방어적 민주주의 운영에 적극적이며 홀로코스트 부정론이 위법이다.[52]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야만이다"라고 말한 바 있듯, 홀로코스트는 인간 이성의 합리성, 그리고 기술의 발달에 대한 낙관주의를 철저히 부정시킨 점에 있어 실존주의, 비판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현대 인문학 사조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 되었다.

10. 유대인 분류 기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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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언어적 위장 [편집]

나치는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하고, 학살을 마치 "정상적인 행정적 절차"처럼 위장하려고 했다. 이 용어들은 사후 나치의 기록물들을 토대로 이들의 범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다.
  • 제국 기밀 업무(Geheime Reichssache): 홀로코스트를 은폐하기 위해 학살 관련 서류에 기본적으로 기입된 문구였다.
  • 최종 해결(Endlösung): 유대인 전체를 물리적으로 말살하겠다는 표현이다.
  • 보호 감찰(Schutzhaft): 겉으론 평범한 사법적 절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제수용소에 유대인이나 정치적 반대자들을 가두는 행위를 지칭했다.
  • 보호 감찰관(Schutzhaftlagerführer): 겉으론 구금시설의 간수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슈츠슈타펠의 강제수용소 담당 부대원인 해골부대(Totenkopfverbände)원들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위장술에 불과했다.
  • 특별 처우(Sonderbehandlung): 총살이나 가스실 처형, 인체실험 등으로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것을 기술적 절차로 위장한 표현이다.
  • 특수차량(Spezialwagen): 겉보기엔 일반적인 특수 목적 차량 같아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동차 배기가스로 사람들을 학살하는 가스 트럭을 지칭한다.
  • 이주/재정착(Umsiedlung 또는 Auswanderung/Aussiedlung): 유대인을 동유럽 강제수용소나 학살장소로 강제이송시키는 것을 지칭했다. SS 국가보안본부 산하 부서인 ‘국가 중앙 유대인 이주청(Reichszentrale für jüdische Auswanderung)’이 이 “업무”의 핵심기관이었으며 아돌프 아이히만이 해당 조직의 수장이었다.
  • 정화(Säuberung): 학살이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 노동 배치(Arbeitseinsatz): 강제 노동 수용소로의 이송이나 노예 노동을 지칭했다. Arbeit macht Frei와 같은 맥락이다.
  • 선별(Selektion): 수용소에 도착한 수감자들을 노동 가능자즉시 처형 대상으로 나누는 과정을 뜻한다.
  • 소독(Desinfektion): 수감자들을 독가스로 학살하는 것을 마치 수용소 내 정상적인 '위생 조치'인 것처럼 위장하는 표현이다.
  • 샤워실(Duschraum): 가스실을 위장하기 위한 표현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위장 표현이다.
  • 처리(Verarbeitun): 학살당한 시신들을 화장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을 위장하는 표현이다. 학살당한 유대인에게서 금이빨을 뽑는 것 역시 '처리'로 포장되었다.
  • 평화화(Befriedung):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인 평화 유지 작전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동유럽에서 유대인 공동체와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을 지칭했다.
  • 도적 소탕 작전(Bandenbekämpfung): 겉보기에는 현지 무뢰배들을 소탕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르티잔을 소탕하고 유대인과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을 지칭했다. 만약 '도적 소탕 작전 훈장(Bandenkampf-Abzeichen)'을 지닌 자가 있다면 십중팔구 동유럽에서 학살에 가담했다는 소리이다.
  • 집중(Konzentration): 유대인을 강제수용소에 가두는 것을 지칭했다.
  • 정리(Aufräumung): 학살 후 시체를 제거하거나 증거를 인멸하는 것을 지칭했다.
  • 이송(Transport): 유대인을 열차에 태워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행위를 지칭했다. '이송'이 기록된 서류에는 이송된 유대인들이 어떻게 되는 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 기소 면제(Immunität vor Strafverfolgung):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들이 휘하 병사들에게 강조했던 표현으로 유대인 그리고 '열등인종'을 대상으로 인권유린에 관한 그 어떤 행위를 해도 처벌받지 않을 것을 약속한 표현이다. 국가 폭력이 무제한적으로 표출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의학 연구(Medizinische Forschung): 끔찍한 인체실험을 언어적으로 위장하기 위한 표현이다. 그 외에도 치료 실험(Heilversuche), 군사 의학 연구(Militärmedizinische Forschung), 특수 실험(Sonderexperimente) 등으로 마치 정샹적인 과학 실험인 것 처럼 교활하게 위장했다.

12. 알려진 피해자들 [편집]

12.1. 희생자 [편집]

12.2. 생존자 [편집]

13. 기타 [편집]

  • 홀로코스트 덕분에 건국에 급물살을 탄 이스라엘은 정작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박대하고 있다. '나약해서 나치에 붙잡혔다', '도살장에 가는 양처럼 아무 생각 없이 기차를 탔다' 등의 비난을 하면서 '비누'라고 놀렸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나 이란과의 대립 등에는 시도때도 없이 홀로코스트의 과거를 꺼내들지만 정작 현재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이스라엘 정부의 박대 속에 1/3이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 세계인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
  • 산업적 학살을 위해 독가스를 사용한 최초의 국가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아니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통령[54]이던 당시의 프랑스 제1공화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클로드 리브(Claude Ribbe)[55]이 2005년 저술한 '나폴레옹의 범죄들: 히틀러를 위한 청사진'에 따르면, 1801년 나폴레옹의 명을 받고 출동한 르클레르의 프랑스군은 아이티 혁명을 잔혹하게 진압하곤 포로들을 가스실로 개조한 함선의 선창에 처넣어 이산화황으로 질식시켜 살해했다. 학살에는 아이티 화산지대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유황 덩어리들을 이용했다. 그리고는 가스선을 먼 바다로 몰고 나가 시체들을 바다에 갖다 버린 뒤 다시 돌아와 다음 희생자들을 살해했다.

    아이티는 프랑스 제1식민제국의 주요 수입원이었고, 그 핵심에는 아이티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있었다. 이 플랜테이션은 노예들을 통해 운영되었는데 프랑스 혁명의 자유 사상을 접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기존의 흑인들을 그대로 놔두면 노예 노동에 방해가 될 것이었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반란 세대를 모조리 제거하고 자유 민권 사상에 물들지 않은 새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오고자 했다. 하지만 한 섬의 인구 전체를 신속하게 말살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연구 끝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가스실 학살법이 고안되었다. 리브는 그렇게 설치된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티 흑인들이 10만 명을 상회하며 더 나아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주장한다.

    단, 논란은 존재한다. 당시 르클레르의 프랑스 진압군이 아이티에서 인종 청소 수준의 대량학살을 벌이고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가스실'에 관한 주장은 근거가 매우 약하다. 역사학자 대부분은 이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령 아이티 혁명사에 관하여 가장 큰 권위자인 로랑 뒤부아(Laurent Dubois) 버지니아 대학 교수가 2012년에 출판한 역사서인 '아이티: 역사의 후폭풍(Haiti: the Aftershocks of History)'에 가스실 관련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리브의 주장은 투생 루베르튀르의 전기작가였던 빅토르 쇨쉐르(Victor Schoelcher), 19세기 사학자 토마 마디유(Thomas Madiou) 안토인 메트랄(Antoine Métral) 그리고 주스트 샹세라테(Juste Chancelatte) 네 명의 주장에서 근거하나 이들 모두 다 자신들의 서적에서 가스실 학살의 정확한 근거나 출처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을 이어받은 리브 또한 심화된 조사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또한, 설령 나폴레옹의 가스실 학살이 사실이라 한들, 그것이 10만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는 주장과 히틀러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리브의 주장은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비약이다. 때문에 이 주장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유대인의 시체에서 지방을 짜내 비누를 만들었다는 것은 도시전설이다. 자세한 것은 "인체 비누" 문서 참고.[56] 반면 유대인들의 머리카락으로 카펫을 만들거나 가죽을 벗겨 전등갓과 책 커버 등을 만들었다는 것은 실화다. 일제 코흐 문서 참고.
  •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운송수단은 철도였는데 가축을 싣는 화물칸에 말 그대로 가축수송과 같이 운송했다. 그 와중에 나치가 정식으로 열차표를 팔아서 철도운임비를 뜯어낸건 덤. 독일국영철도는 이에 적극 동원되었으며 점령지인 프랑스, 벨기에의 SNCF, 벨기에 국철도 마찬가지로 동원되었다. 물론 점령지의 철도 관련자들은 철도에 사보타주를 해 가면서 이에 저항했다.
  • 아트 슈피겔만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과 전후 세대인 그 아들(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충격적인 실화가 나오는데 전쟁이 끝난 후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는데도 유대인 학살이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면서 귀금속과 돈, 돈될 만한 물건들은 나치가 갖고, 가질 수 없는 토지나 집, 공장은 폴란드인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유대인들이 돌아오자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차지한 집과 토지를 돌려주기 싫었던 폴란드인들은 돌아온 유대인을 죽이거나 추방시켰다. 작중 나오는 대사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런 꼴을 당하려고 그 지옥을 빠져나온 거죠." 이런 일들은 전쟁이 끝난지 1년이 지나서야 폴란드가 안정을 찾자 중단되었다.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에서는 살아돌아온 유대인이 고향에 있는 자기 집을 되찾으려고 하자 그 유대인의 집을 차지하고 있던 새 주인은 그 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보물을 찾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폴란드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지배당하거나 협력했던 모든 국가들에서 있었다.
  • 탈출, 혹은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되자 굶주려 있던 유대인들은 연합군이나 민간인들이 주는 음식을 먹다가 토사곽란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못먹어 작아져 있던 위장이 갑자기 많은 음식을 섭취하게 되니까 놀란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고칼로리 음식을 먹이기보다는 죽이나 수프처럼 몸이 소화하기 쉬운 유동식을 먹인 다음에 기운을 차리게 만드는 것이 정석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나치의 만행에 분노한 이지 중대원들이 유대인들에게 독일 민간인들에게서 징발한 빵과 치즈를 나눠주다 군의관에게 제지받는 장면이 있다. 그나마 서방 연합군은 이 정도였지만 의료체계 및 수준이 뒤떨어지는 데다 작전 환경 특성상 기름이 매우 많은 전투식량을 보급받았던 소련군은 유대인들에게 먹을 것을 지급했다가 유대인들이 그걸 먹고 죽어서 당황했다는 기록이 간간히 있다. 대숙청으로 굴라크에 끌려갔었던 소련군들마저도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보고 경악했다. 소련의 굴라크는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합리적인 면은 있었다. 그러나 나치는 "수용소=사형장"이라는 공식이 적용되어 소련보다 더 비인간적으로 운영되었다.
  • 1944년 7월 소련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를 점령하면서 처음으로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이런 학살극을 보고 소련은 놀라서 별도의 조사위원회를 꾸려서 조사했고, 모든 자료를 기록하고 영상으로 만들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소련과는 별개로 1943년에는 폴란드 국내군 요원으로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비톨트 필레츠키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가 담긴 비톨트 보고서를 제출했고, 1944년엔 아우슈비츠를 탈출해 스위스에 도착한 슬로바키아 유대인들[57]이 헝가리 유대인 기자 죄르지 만들[58]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의외로 서방 측에선 보도가 소련보다 늦었는데, 너무 어마어마한 내용이라 연합군의 지원을 더욱 요구하려는 프로파간다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서방 연합군이 실상을 알게 된 것은 해를 넘겨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해서, 오르드루프(Ohrdruf) 수용소와 부헨발트 수용소에 도달하게 되면서였다. 연합군도 이런 참극에 놀랐고, 사령관들이었던 아이젠하워, 패튼, 브래들리는 그걸 믿지 못해서 오르드루프 수용소를 직접 보러 방문하기도 했다.[59] 그 보고가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연합군은 기자들에게도 이를 보게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 유대인 중 상당수가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향했다. 이와 관련된 음모론도 많다.
  • 홀로코스트로 인해 아르헨티나가 헌법을 개정했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주한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르헨티나 국적은 한 번 취득하면 영원히 포기를 못하도록 헌법을 개정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아르헨티나 정부는 자국으로 향한 유대인들에게 자국 국적을 준 뒤 철저히 보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전 후 아르헨티나는 나치 전범들에게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60]
  • 홀로코스트의 최고령 생존자인 앨리스 헤르츠좀머가 2014년 2월 24일에 11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앞서 언급된 것처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동성애자, 집시, 공산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장애인, 정치범, 이외 나치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설령 독일 국적의 독일인일지라도 비국민 딱지를 받고 여기에 포함되었다. 특히 집시들은 '포라이모스(Porajmos)'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유명한데, 적어도 80만 이상이 죽거나 이로 인해 유럽내 집시 인구가 소수민족 중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한 수준으로 줄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많다. 다만 집시들은 유대인과 다르게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국방군 등에 의한 무자비 학살의 대상으로 희생당한 사람도 많고,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여 사망자수가 유대인보다 훨씬 부정확하다. 그래도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고 1944년 8월 2일 하루에만 4,000여 명의 집시들이 학살됐다. 지금도 살아남은 집시들은 '집시들의 날'을 제정해서 이들의 희생을 추모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희생에 대한 동정여론은 모두 유대인들에게 돌아갔고, 독일스위스의 배상금은 유대인 희생자도 아닌 시오니즘 단체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건국비용으로 소모되었다.[61]
  •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은 5,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주로 게이들이 많이 학살되었다.[62] 전후 배상도 가장 차별받은 케이스였는데, 당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유럽, 아니 세계의 사회적 시선은 그야말로 벌레 보듯한 시선이었기 때문이다[63]. 오히려 나치가 남겨둔 동성애자 신상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 후에도 계속 차별을 받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에야 동, 서독에서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나치는 이들에게 분홍색 역삼각형 문양을 붙였는데, 이것을 뒤집은 분홍색 삼각형은 핑크 트라이앵글(Pink Triangle)이라고 하면서 게이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 대량 학살이야 인류 역사상 흔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수백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64] 영화와 미디어 사업을 꽉 쥐고 있는 게 유대인들이었던 만큼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소재로 나왔다. 하지만 중동에서는 요새국가화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는 데다가 해외의 유대계들도 이에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짓을 터뜨려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과거 나치랑 다를 바가 뭐냐."라는 비난의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덕분에 홀로코스트는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불쌍한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날아가버려서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가 나오면 호불호가 갈리는 등 예전만한 평가를 못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디파이언스와 1943년 유대인 게토 봉기를 다룬 영화 업라이징.[65]
  • '정말 600만이 죽었나'라는 책에선 실제론 이 수치가 매우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최대로 추산해봐야 40만이 넘지 않는다고 하는데… 문제는 이거 저자가 영국민족전선(British National Front)의 부의장과 당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던 사람이라는 것. 이 영국민족전선은 오스왈드 모슬리가 이끌던 영국 파시스트 연합 출신 인물이 세운 단체로 쉽게 말해서 영국의 네오나치들이다. 정당은 백인만 가입할 수 있고, 정책도 백인을 제외한 사람들의 이민을 금지한다는 등 극우 파시스트에 인종차별 성향을 보인다. 당연히 이 책에도 객관적인 시각따윈 없고, 그 어떤 역사학자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 다만 학살자 수가 부풀려져 있다는 주장이 위에 네오 나치 같은 또라이가 아닌 이들도 제기한 사항이다. 이를테면 1950년대 이스라엘에서도 200~400만 정도로 추정했다는 것. 그런데 학살자 수를 더 늘려서 배상금을 더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유대인이자 조부모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노르만 핀켈슈타인이다. 당연히 나치에 대해서는 이를 갈고 있으며 학살극의 존재를 분명히 인정한다. 다만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돈벌기 사업으로 쓰며 피해자 상당수에게 돈을 안 주며 엉뚱한 사람이 가로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핀켈스타인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책자로 피해 보상금을 일부 시오니즘 극단주의자들 배를 채우게 했다고 비난하며 나아가 팔레스타인에서 나치가 하는 짓을 유대인이 벌인다고 비난하고 있다. 놈 촘스키 또한 유대인이지만 그도 1950년대 200~400만이 갑자기 수가 늘었다면서 돈 더 달라고 하곤 그걸로 이스라엘 건국과 일부만 배를 채운 더러운 보상금이 되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2010년대에 이스라엘은 학살 피해자가 더 있다고 주장하며 돈 더달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독일이 그동안 준 돈은 뭐냐며 이번에는 안 준다고 맞서고 있고 노엄 촘스키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비난했다.
  • 홀로코스트 여파는 폴란드의 민족 구성을 완전히 바꿔 놓을 정도였다. 폴란드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직전만 하더라도 유대인이 약 3백만 명 가량 거주하여 유대인 비율이 상당히 높은 나라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일찍 나치 점령지가 되었고, 대규모 수용소를 건립하는 등 가장 혹독하게 학살이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죽거나 외국으로 도피했기 때문에 종전 직후에는 이전의 1%인 3만 명조차 남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현재 폴란드는 인구의 대부분이 폴란드계이며 유대인은 극소수인종이 되었다.[66]
  • 이러한 유대인 학살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명백한 범죄행위이지만, 그것이 과장됨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찜찜한 진실 또한 존재한다. 우선,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애도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 반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제2제국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이나 마지마지 운동 당시의 초토화 작전에 관해서는 2010년대까지 '미안하기는 한데 배상이나 공식적 사과 같은 건 좀 그런데...' 식의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유대인이 상대적으로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크다는 점(반대로 오늘날의 나미비아탄자니아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덜하고 저개발국인 점)과, 유대인 중 학살의 주 대상이 되었던 아슈케나지/세파르디 또한 백인인 반면[67] 중남아프리카에는 흑인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일종의 국가적/인종적 차별이 아닌가, 또한 오늘날 이스라엘이 저개발국이거나 유대인의 영향력이 오늘날처럼 막강하지 않았으면 독일이 진정한 사과를 했을까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는 시선도 있지만 독일이 자신들이 거의 전멸시킨 집시들의 보호에 유럽 국가중 제일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점이나 체코 침공날이나 2차대전 발발일인 9월 1일과 종전기념일날 폴란드체코 그리고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벨라루스, 러시아 등이 추모를 하는 것을 보아 앞선 시선에 대한 반론이 강한 편이다. 물론 이런 독일의 모습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가면이라고 비난하는 시선이 가장 큰 피해를 본 동유럽에서 강하게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 연합군의 전쟁 중 벌인 범죄나 다른 독재자들의 학살을 빌미로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물타기 하려는 자들도 있다. 아니, 꽤나 많다. 하지만 여타 독재정권에 의한 희생자는 그들이 직접적으로 지시한 학살 또한 정치적인 의미의 학살로, 자신의 체제에 반하는 자나 또는정적이라는 '계층'또는 '정치집단'을 타깃으로 했다. 따라서 이는 사실 역사적으로 계층 간의 반목이나 정치적인 대립이 발생했을 시에 우발적으로, 또는 계획적으로 숱하게 일어났던 학살들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이러한 학살은 보통 대립 상황이 수그러질 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나치의 경우 어느 한 인종 자체를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생적인 '존재 가치'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전무후무하다. 강도살인묻지마 살인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처럼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다른 학살들과는 다르게 취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 학살의 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타국을 침공하면서 이루어졌지만, 결정적으로 본국에 살던, 독일 국적을 가졌고 자신을 스스로 독일인으로 여기던 유대인들까지 학살한 사례는 나치가 유일하다.[68]
  • 네오 나치들이나 영국윈스턴 처칠에 대한 반감을 가진 좌익들에 의해 벵골 대기근이 자주 거론되며 물타기가 이루어지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보통 '독일로부터 영국을 구한 윈스턴 처칠은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의 인도 침략을 우려해 벵골 지역의 쌀을 모조리 뺏어가고, 수백만의 벵골 지역의 주민을 굶겨 죽임으로써 학살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인도가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처칠은 이를 묵살하고, 미국과 호주가 벵골 지역에 대해 도움의 손길을 뻗었으나 처칠은 상륙 불허로 대답해 무려 700만의 인구를 굶겨 죽인 적이 있다.'라는 말들이 나도는데,[69] 이것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당시 대기근이 일어난 1943년은 일본 해군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전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안전한 수송루트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였고 일본군의 버마 공세로 인해 육지 수송로도 위험한 상황이었다.[70] 심지어 42년에는 작물 병충해와 태풍이 같이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영국 정부도 식민지 인도를 상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43년 9월부터 기아를 막으려고 했으나 탁상행정이었고 이렇게 지원을 온 식량들도 지방 지주와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적이던 인도의 지방관들이나 인도 제국의 제후국들 사이에 소속감 따위는 없었기에[71] 원조 물자를 공평하게 분배하기보다는 제 하나 살기 위해 식량을 마구 빼돌린 것. 심지어 위에서 식량 수송을 거부했다는 말과 다르게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호주를 통한 물자지원을 요청했고 전선에 투입되는 물자를 줄여서 기아 대책을 추진했지만 부족해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출처] 홀로코스트처럼 특정 인종의 말살을 위해서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의도적으로 대기근을 발생시켰다고 볼 여지는 전혀 없다. 게다가 공식적인 기록에 나타나는 300만 내외의 희생자를 유대인 학살 피해자 수보다 많은 700만으로 부풀리는 것에서도 악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 유명한 프로레슬링 매니저 폴 헤이먼의 모친이 생존자들 중 한명이다.
  • 2020년에 네덜란드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던 당시 이런 유대인 절멸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는 못해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던 독일인들이 꽤 있었다.[74] 그런데 사실 그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유대인이 불쌍하다거나 인권에 대한 것이 아니라[75] 다름아닌 유대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연합군의 보복을 두려워한 것인데, 당시 나치 독일의 군인과 민간인들 다수가 영국과 미국은 유대인 자본가들에게, 소련은 유대인 공산당원에게[76] 지배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77] 또한 홀로코스트의 강도에 대해서도 견해 차이가 있었는데 한 독일군 포로는 전쟁 당시 아버지와의 대화를 회상하면서 자신은 독일 내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동의하지만,[78]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죽일 줄은[79][80]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아버지는 이런 짓을 계속 벌이면 언젠가는 보복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 홀로코스트가 벌어질 당시 나치 독일은 동맹국인 일본 제국에도 이를 제안하기도 했다. 상하이 등 일본의 점령지에 거주하던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제안한 것. 하지만 신멸작전 등에만 관심이 있었지 유대인을 딱히 신경쓰지 않던 일본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81], 점령지 거주 유대인들을 상하이 게토(무국적 난민 제한 구역)에 대충 수용하고 모른 척 하는 선으로 끝냈다. 상하이는 원래부터 많이 이주해서 살던 이라크 왕국 출신의 바그다드 미즈라힘 유대인과 더불어 러시아 제국반유대주의가 심한 해외 국가에서 탈출하거나 스기하라 지우네 등이 구출해낸 유럽 유대인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중화민국 시절인 1930년대부터 일종의 난민 캠프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2차 대전이 공식적으로 발발한 이후 나치 독일은 요제프 마이징거를 시켜 일제의 '관대한' 유대인 정책 대신 유대인 학살을 종용하며 압력을 넣었는데, 일제는 1938년 타국의 유대인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근거로 이를 거부하는 대신 1941년 상하이 전체를 점령한 이후 유대인 이민을 일시적으로 차단한 뒤 상하이 게토를 만들어 해외발 유대인 난민 2만 3천여 명을 강제 이주 및 수용하게 되었다. 유럽처럼 대량학살이 이루어지거나 심각한 인권 탄압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통금 등의 제한은 걸려 있었으며 이로 인해 질병, 사고로 사망하거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례도 있다. 이 곳에 있던 일부 유대인들은 대전 말기로 갈수록 점점 심한 통제를 가하는 일제에도 반감을 가져 연합국에 협력하거나 일제에 대한 사보타주를 행하기도 했다.

14. 관련 어록 [편집]

14.1. 가해자 [편집]

유대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Und wenn die jüdischen Zeitungen heute noch glauben, durch versteckte Drohungen die nationalsozialiste Bewegung einschüchtern zu können, wenn sie heute glauben, unsere Notverordnungen umgehen zu dürfen, sie sollen sich hüten! Einmal wird unsere Geduld zu Ende sein, und dann wird den Juden das freche Lügenmaul gestopft werden.
... 그리고 아직도 유대 언론들이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위협할 수 있고 우리의 방어 조치를 회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인내심도 바닥날 것이고, 유대인들의 거짓되고 건방진 주둥이를 닥치게 할 것입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33년 2월 10일 포츠담 스포츠궁전 나치당 집회 개회사)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1천만 명의 유대인, 아니 세상의,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만 나와 동료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만 나와 내 동료들이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난 단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멍청한 놈에 불과했을 겁니다. 나는 나치 당원들과 똑같이 생각했으며, 함께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총통 각하께서는 유대인의 물리적인 말살을 명하셨다.

나는 유대인을 소개시키고 유대 인종을 말살하려고 한다. 말로는 쉽다. 모든 당원들이 '우리는 유대 인종을 제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것은 당의 계획이니까. 우리는 유대인을 제거할 것이다.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다.

강제수용소가 우리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확실하다.
It is certain that concentration camps had a bad reputation with us.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 최고사령부 독일군이 벌이고 있는 전쟁은 엄청난 개혁의 전쟁이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 사상의 세계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견제 없이 발전할 수 있었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유대인과 그들의 악당들의 인종 감염 세균을 모두 직접적으로 근절하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유럽 국가들이 해결하지 못한 유대인 문제는 이제 독일과 전유럽을 위한 국가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1941년 3월 28일 라디오 연설)#
전 제가 한 행동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전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해치려고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그곳에 있었지요.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소장, 프란츠 슈탕글
기술적으로 (유대인 학살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수를 박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인 자체가 가장 적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30분이면 2,000개의 머리를 처리할 수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불태우기였습니다. 살인은 쉬웠습니다. 그들을 방으로 몰아넣기 위해 경비원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샤워를 기대하고 들어갔고 물 대신 독가스를 켰습니다. 모든 것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의 소장, 루돌프 회스
아우에: "우리가 늘 옳았던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동부에서 유대인을 집단으로 죽였을 때 말이에요."

슈나이더: "그건 분명 잘못이었어요. 아니, 잘못까지는 아니더라도 외교적으로 좋지 않았어요. 나중에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우에: "우리가 탄탄한 기반을 닦은 후에 말이죠."

슈나이더: "그 일은 나중을 위해 남겨 둘 수도 있었어요. 유대인은 아직도 영향력이 세니까요. 특히 미국에서요."

두 독일군 장교가 1944년 8월 7일 포로수용소에서 나눈 대화를 영국군이 도청한 내용.
유대인을 쫓아내자고 하면 저는 제일 먼저 참여합니다. 기꺼이 동참하지요. 그들을 독일 바깥으로 몰아낼겁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때려죽이는 거지요?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땐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자, 이제 우리가 권력과 힘을 가졌고 전쟁에서 이겼으니 이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영국을 지배하는지 알죠? 유대인이에요. 미국은 누가 지배하죠? 유대인이에요. 그리고 볼셰비즘, 그것이야말로 유대교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죠.

에르빈 외스팅 대령, 마인츠핀텐 공군 기지 사령관. 1945년 4월 포로수용소에서 한 말. 위의 대화와 함께 당시 홀로코스트에 '반대'하던 독일인들의 심리가 어떠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미니오이어: 그들은 내의만 남기고 옷을 몽땅 벗었고, 여자들도 속옷만 빼고 옷을 벗었어요. 그 다음에 게슈타포가 총질을 했어요. 유대인은 모조리 처형되었습니다.

하르텔트: 속옷만 입고요?

미니오이어: 네.

(...)

하르텔트: 기관총으로 쐈나요?

미니오이어: 기관단총으로도요. (...) 우리는 어떤 예쁘장한 여자가 총살당할 때도 거기 있었어요.

하르텔트: 애석하군요.

미니오이어: 무자비하죠! 그녀는 자신이 총살당할 걸 알고 있었죠.(...)

하르텔트: 그리로 갈 때 옷을 입고 있었어요?

미니오이어: 네, 아주 예쁘게 옷을 입었어요. 근사한 여자였어요.

(...)

하르텔트: 그 여자와 물론 빠구리도 떴겠지요?

미니오이어: 빠구리도 떴죠. 하지만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죠. 그건 늘 있는 일이에요. 일이 지나치면 안되니까요.[85]

1943년 12월 영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크릭스마리네 기술하사 헬무트 하르텔트와 이병 호르스트 미니오이어의 대화 중 일부. 여기서 나오는 학살은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이다. 죙케 나이첼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김태희 역, 민음사, 2015)에서 발췌.
1942년 6월 5일 베를린.
제국 기밀 업무(Geheime Reichssache)

현재 사용중이며 생산중인 특수차량(spezialwagen)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

1941년 12월 이래로 세 대의 특수차량을 이용해 97,000명을 처리했고 차량에 별다른 결함은 없었음. (중략) 이전의 사례들로 판단컨데, 다음의 사항들이 개선되면 좋을 것임.

1) 과잉압력을 막고 일산화탄소가 빠르게 퍼지게 하기 위해 차량 후방 벽면의 위에다 10x1cm의 구멍을 뚫을 필요가 있음. 압력 과잉은 밖에서 이 구멍을 막는 덮개를 여닫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음.

2) 통상 적재 시 평방미터 당 9~10명임. 사우러(Saurer) 사[86]의 더 커다란 차량에도 그리 많이 적재하진 않음. 과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적재 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때 차량 안정성에 문제가 있음. 적재공간의 축소가 필요해 보임. (중략) 이를 위해 지금껏 했던 것처럼 화물의 양을 줄여선 안됨. 화물의 양이 줄면 남는 공간에도 일산화탄소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가동 시간'이 늘어나게 됨. 반면 적재공간이 줄면, 공간이 완전히 화물로 가득찬 상태이므로 '가동 시간'을 줄일 수 있음. 제작자들과의 회의에서 적재공간을 줄일 경우 무게중심에 문제가 생겨 앞 차축에 과부하가 걸릴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사실 적재공간의 화물들이 가동 중에 언제나 뒷문으로 몰리기 때문에 무게중심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음. 따라서 앞 차축 과부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음.

4) 차량 내부 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밀봉된 배수구를 설치해야 함. 배수구의 지름은 20~30cm로 하고 여기에 사이펀을 설치해 '가동 중에' 액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 함. 파이프 위에는 거름망을 설치해 오물에 의해 막히는 것을 방지해야 함. 큰 오물들은 가동 후 차량을 청소할 때 배수구의 뚜껑을 열어 제거할 수 있음. 적재공간의 바닥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도록 해서 오물들이 중앙으로 모아져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함.

6) 적재공간 내 램프를 더 철저하게 보호해야 됨. 램프에 철망을 씌워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함. 램프는 필요 없다고 없애버리자는 말도 있음. 하지만 관찰 결과, 문이 닫히려 할 때 깜깜해지기 시작하면 화물들은 언제나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기에 문을 닫기 어려워짐. 이는 화물들이 어둠 속에서 조금의 빛이라도 드는 곳으로 향하려 하기 때문임. 또한 어둠으로 인한 공포로 화물들이 소음을 일으킴. 따라서 가동 초기엔 램프를 켜 두는 것이 더 적절함. 또한 야간 운영과 차량 내부 청소에도 도움이 됨.

상기한 사항들은 수리를 위해 입고될 경우에만 적용될 것임. 이미 주문한 10대의 사우러(Saurer) 사 차량들에는 가능한 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임. 제작사는 회의 때 사소한 몇가지를 제외하고 개조가 당장 이루어지긴 어렵다고 함. 따라서, 10대 중 최소한 한대의 개조를 위해 다른 제작사를 알아본 결과 호엔마우트에 있는 회사가 적격이라고 제안함. 현 상황에서 이 차량의 개조엔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임.

II D 부서장 SS 상급돌격대지도자 발터 라우프(Walter Rauff) 귀하.
서신 전문
독일어 원문

빌리 유스트 친위대 국가보안본부(RSHA) 간부가 발터 라우프에게 보낸 가스 밴에 관한 문서

대량 학살을 다분히 전문적이고 행정적인 '은유'로 담담히 묘사한다는 점에서 더욱 끔찍함을 안겨준다.

14.2. 피해자 [편집]

여자들과 노인들이 거리에서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우리에겐 아무 힘이 없고, 길거리에서 우리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너무나 약하다.

폴란드 유대인의 회상
“캠프에서의 첫날 밤은 절대로 잊지 못한다. 나의 인생을 긴 밤으로 물들여버린 그날, 일곱 번 저주하고 일곱 번 회개했다...나의 신을 죽이고, 나의 영혼을 짓밟고, 내 꿈을 먼지로 만들어버린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절대로 이것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신만큼 오래 산다고 해도.”

난 내 눈을 의심했다. 20세기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마치 중세를 보는 듯 했다. (중략) 우리 젊은 유대인들은 비와 추위에 떨며 나라를 지켰다. 이러한 일을 역겨워할 전우들은 없는가? 우린 길가를 걸으며 과거에 함께 좋은 일들을 많이 했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제 만족스런 미소를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중략) 이런 변화는 불과 몇 시간 안에 일어났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하고 아껴 온 이 나라와 사람들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했다. 난 더 이상 독일인이 아니었다. 아니, 최소한 독일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몇 시간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갑자기 깨달은 것일 뿐이다. 한때나마 이들(독일인)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적의를 감춰왔던 이들을 신뢰한 것이 부끄러웠다. 순간 이 거리, 아니 전 도시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때 기분은 형언하기가 어렵다.

에드빈 린다우[88][89]
구덩이가 커서 마치 여기 파인즈 호텔[90]의 수영장 같았지. 그리곤 헝가리 유대인들을[91] 실은 열차가 계속 도착했단다. 그래도 이 구덩이에 쳐 넣어지기 전에 가스실에서 끝을 본 사람은 운이 좋은 편이었어. 다른 사람들은 살아서 무덤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했으니까. 거기서 일하던 죄수들은 산 사람, 죽은 사람 가릴 것 없이 휘발유를 퍼부었지. 그리고 불타는 시체에서 나온 기름을 다시 퍼부어 가지고 더 잘 타게 했단다.

이미 일어난 사건은 바꿀 수 없다. 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건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14.3. 목격자 [편집]

라인강을 건너 독일에 들어서자 갑자기 중세시대에 온 것 같았다. 나는 20세기 대명천지에 그 잔혹한 범죄들이 어떻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미군 병사의 증언[92][93]
근처에 수용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너무나도 잘 위장해놔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도 저기 바로 밑에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도 몰랐거든요.

신원미상의 독일인[94]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무덤을 파게 했다. 독일인들도 모두 거기에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도 자기들은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빡빡 우기길래 나는 당신들도 똑같은 살인마라고 소리쳐줬다.

미 육군, 레슬리 브라운 병장[95]
이미 살아있는 해골로 변한 수감자들을 대하는 나치들의 형언할 수 없는 증오에 나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소련 육군, 107보병사단장 바실리 페트렌코 대령. 바실리 페트렌코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를 해방하는 작전에 참전했다.[96]

14.4. 관련인 [편집]

미친 생각이라는건 알지만 때때로 난 내가 부모님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같이 가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실제로 알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분들보다 편안한 삶을 살았다는 일종의 죄책감 같은 거겠지. 내 칠흑같은 꿈보다 더 비참했던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게 얼토당케 여겨지는 때가 많아. 그것도 만화로 말이야! 내가 소화해낼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쩐지 다 잊어버려야할 것 같아. 내가 결코 이해할 수도, 형상화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 같아. 내 말은, 현실이 만화로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거야... 너무 많은 게 누락되고 왜곡되는 거지.

14.5. 증언 영상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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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증거 자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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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홀로코스트를 다룬 매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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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관련 문서 [편집]

17. 둘러보기 [편집]

[1]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인종청소를 행했던 중동전쟁은 아랍에서 재앙이라는 뜻인 나크바라고 부른다.[2] 끔찍하게도 검게 그을린 듯한 자국은 희생자들이 가스에 고통스러워하며 벽을 긁어대면서 손톱이 빠져 흘렀던 핏자국이다.[3] 베우제츠,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수용소 수감자들의 사망률은 99%였으며, 어차피 이 수용소에 도착하는 모든 수감자들은 극소수의 존더코만도들을 제외하면 즉시 학살되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와 같은 전기철조망도 없었으며 경비도 그렇게 삼엄하지 않았다.[4] Stone, Dan (2023). The Holocaust: An Unfinished History (1st ed.). Pelican Books. p. 191. ISBN 978-0-241-38871-6.[5] 이는 복수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는데, 홀로코스트 생존자 블라덱 슈피겔만의 증언을 다룬 만화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도 뉘른베르크 출신의 SS 대원이 유대인 수감자 블라덱에게 (다른 SS 대원들과 달리) 꽤 친하게 굴다가 어느 날 "비르케나우(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 다녀왔다"면서 반쯤 정신이 나가서는 이전과 달리 닥치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근무했던 SS 대원이었던 프란츠 수호멜(Franz Suchomel)도 초기에 배치받고 나서 그 참상에 충격을 받고 맨정신으로는 근무할 수 없는 지경이라 술에 항상 취한 채로 근무해야 했다고 증언했다.[6] 우선 위생을 위해 샤워를 실시한 후, 각자의 직무능력에 따라 적합한 일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안내한다. 샤워를 마친 후 본인의 옷을 찾을 수 있도록 옷걸이 번호를 기억하라는 말을 통해 별 일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머뭇거리는 희생자들에게는 식사로 나온 수프가 식고 있다고 재촉한다. 물론 이렇게도 진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친위대원들이 몽둥이질을 가하면서 그들을 강제로 가스실에 밀어넣는다.[7] 루블린 절멸수용소로도 불린다.[8] Arbeit(아르바이트) 자체는 '노동'만을 의미하나, 본 맥락에서는 실태를 고려하여 '강제 노동'으로 번역한다.[9] 비단 일부 네티즌들이나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의 주장 뿐만 아니라 에른스트 놀테 같은 독일의 역사 수정주의 학자들도 진지하게 주장하던 바였다.[10] 폴란드와 같은 점령지에서 설립된 강제 노동 수용소들에선 등급 분류 조차 없었으며 매우 가혹한 대우가 이어졌다.[11] 동성애자들도 거세를 조건으로 강제 수용소에서 석방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12] '부헨발트의 붉은 마녀'로 악명높은 일제 코흐가 이 수용소의 간부중 하나였다.[13] 이전에는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위성 수용소로 시작했고 이후에는 부헨발트의 위성 수용소 역할을 했다.[14] 카메라 회사 아그파가 수용자들을 데리고 노예 노동을 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가 언니 마고 프랑크와 함께 여기에 수감되었다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16] 5주 가량만 사용한 임시 수용소였기 때문에 특이하게도 그냥 여관 건물을 징발해다가 수용소로 사용했다.[17] 마우트하우젠 강제 노동 수용소(KZ-Mauthausen)는 오스트리아 린츠 근처의 마우트하우젠 마을에 위치해 있으며, 오스트리아 합병 직후인 1938년에 설치되었다. 근방에 있던 40개 이상의 수용소 시스템에서 중심 역할을 했으며, 독일 나치 SS 친위대가 직접 관리하던 곳이었고, 1940년에는 수용소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카테고리3 수용소로 분류되었다. 특히 이 수용소에는 스페인 제2공화국 출신 공산주의자들, 폴란드인, 오스트리아인, 네덜란드군 포로, 독일 정치범 등 다양한 국적과 신분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약 33만 명이 수감되었으며, 그 중 12만 명 이상이 죽었다. 이와 관련하여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라는 책이 출간되었고, 이 책을 원작으로 2018년 넷플릭스에서 동명의 영화로 개봉되었다. 더 자세한 정보는 공식 박물관 사이트 참조# 여담으로 안네 프랑크와 같이 살던 소년 페테르 반 펠스(페테르 판 단)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18] 마우트하우젠의 보조 수용소 역할이었다.[19] 원래는 부헨발트의 보조 수용소 역할이었다. 이후 독립 수용소가 된다.[20]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전신격인 초기 수용소.[21] 오룔에 있던 교도소로 원래는 19세기 러시아 제국 시절에 세워진 유서깊은 교도소였다. 나치가 독소전쟁 중 오룔을 점령한 후 인수하여 강제 수용소로 사용하였다. 해방 후에는 반대로 추축국 포로들을 수감하는 포로수용소가 되었다.[22] 말리 트로스테네츠 수용소처럼 절멸 수용소로 분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마찬가지로 희생자 숫자나 경향 등에서 논쟁이 많다.[23] 원래 프리비슬린스키 시절 러시아 제국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범수용소로 훗날 게슈타포가 인수하여 사용했다.[24]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그 수용소다. 아몬 괴트가 수용소장으로 있었고, 오스카 쉰들러가 구해낸 유대인들도 대다수가 이곳에 있었다.[25] 1943년 후반기부터는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의 보조 수용소가 되었다.[26]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의 보조 수용소였다가 독립 수용소가 되었다.[27] 슈츠슈타펠 기지를 겸했다.[28] 최소 4천 여명의 롬인들이 이 곳에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로 옮겨져 사망했다.[29] 최소 5백 여명의 롬인들이 이 곳에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로 옮겨져 사망했다.[30] 1941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만들어졌고 추후 총살 등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행해졌으므로 절멸수용소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희생자 숫자나 경향 등에서 타 강제 노동 수용소에 비해 뚜렷히 구분되는 측면이 없어 최신 경향에서는 위의 6곳만 절멸수용소로 분류하고 있다.[31] 1,734명은 종전 전까지 부헨발트 등 타 수용소로 보내져 사망했다.[32] 크로아티아 독립국과 공동 운영.[33] 크로아티아 독립국과 공동 운영. 이후엔 통제권을 크로아티아에 넘겼다.[34] 1943년까지 비시 프랑스가 운영. 비시 프랑스가 멸망한 이후에는 슈츠슈타펠이 넘겨받아 운영했다. 알로이스 브루너가 한 때 이 곳의 사령관으로 있었다.[35] 1942년까지 비시 프랑스가 운영. 이후엔 독일이 넘겨받아 6,800여명의 수감자를 아우슈비츠로 넘겨 죽였다.[36] 1942년까지 비시 프랑스가 운영.[37] 1942년까지 비시 프랑스가 운영.[38] 1942년까지 비시 프랑스가 운영.[39] 1942년까지 비시 프랑스가 운영. 이후엔 독일이 넘겨받아 6,400여명의 수감자를 아우슈비츠로 넘겨 죽였다.[40] 노더니와 실트는 노이엔감메 수용소의 보조 수용소 역할을 했다. 영국 본토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상륙을 당한 적은 없었지만 만약 상륙이 이루어질 경우 영국 본토 내 유대인 역시 학살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41] 이탈리아는 이외에도 1932년까지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아게다비야나 마르사 브레가, 솔루크 등 식민지인들을 수감하기 위한 수용소를 여럿 만들어 운영했다.[42] 일반적인 수용소가 아닌, 환경이 너무 자유로워서 지역 의인들에 의해 독일 절멸수용소로 갈 인원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신 이들을 보낼 일종의 피난소 격 수용소로 선택될 정도였던 곳이다. 캄파냐에 수감된 인원들은 동네 주민들에게 이웃사촌 취급을 받으며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고, 음식, 옷, 금전적 형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 외출, 면회도 자유였고 유대인 의사들 덕분에 의료 서비스도 받을 수 있었으며 종교 및 예술 활동도 자유였다. 자체 도서관, 축구팀도 있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국가 파시스트당 서기가 유대인들이 너무 편하게 살고 있다고 경찰에게 항의할 정도였고, 당시 캄파냐 시장, 주교와 경찰서장은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독일의 마수에서 구하기 위해 이들을 캄파냐에 대신 수용시켜놓고 모른 척 발뺌하기도 했다.[43] 원래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제2공화국 망명객 및 패잔병들을 수용하기 위해 관리하던 곳으로, 이후엔 비시 프랑스가 자발적으로 4천여명의 독일발 유대인 난민들 및 정치범, 공산주의자들을 잡아 수용했다. 비시 프랑스가 무너지고 프랑스가 해방된 후에는 반대로 나치 협력자들과 독일 포로들을 가두는 데 이용되었다. 1946년 폐쇄되기 전에는 반독 투쟁을 하던 스페인 제2공화국 인사들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애먼 스페인 투사들이 다시 잡혀 들어가기도 했다. 5,500명의 수감자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사망했다.[44] 알렉산다르 1세루이 바르투 암살에 참여한 우스타샤 테러리스트 미요 바비치가 설립했다.[45] 강제개행된 부분은 오류가 아니며, 클로드 란츠만이 일부러 그렇게 구성했다. 이탤릭체 부분은 란츠만 감독 본인의 대사이며 기본 서체는 라울 힐베르크의 대사다.[46] "Polish Victims". Holocaust Encyclopedia.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47] "Holocaust Encyclopedia – Genocide of European Roma (Gypsies), 1939–1945"[48] 다만 해당 용어를 거부하는 롬인 권익 활동가나 역사학자들도 존재한다. 러시아나 발칸 반도의 롬인 활동가 일부는 '포라이모스'라는 단어가 동유럽의 상당수 롬어 방언에서 '능욕' 내지는 '강간'을 의미하는 '포라비페(poravipe)'와 유의어로 쓰인다는 점을 들어 해당 용어를 거부한다. 대체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단 살해'을 뜻하는 '사무다리펜(samudaripen)' 혹은 '로마니 홀로코스트'와 같은 중립적인 표현을 제안한다.[49]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동성애를 불법화한 동서독 정부에 의해 나치의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수감되었다. 유럽에서의 동성애자 인식이 나아진 것은 최소 68운동 전후이다.[50] A figure of 26.3 million is given in Service d'Information des Crimes de Guerre: Crimes contre la Personne Humain, Camps de Concentration. Paris, 1946, pp. 197–198. Christopher Hodapp, Freemasons for Dummies, 2005; Raul Hilberg,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2003; Martin Gilbert, Atlas of the Holocaust, 1993; Israel Gutman,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995.[51] Berenbaum, Michael (2005). 《The World Must Know: The History of the Holocaust as Told in the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ISBN 978-0801883583.[52] 오향미 (2011). “독일 기본법의 "방어적 민주주의" 원리 : 그 헌법이론적 논거의 배경”. 《의정연구》 (한국의회발전연구회).[53] 1917년에 영국이 밸푸어 선언을 하기는 했지만 영국이 약속을 안 지킨 게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안 지켰어도 그만이었다. 심지어 당시 영국밸푸어 선언 전인 1915년에 이미 맥마흔 선언으로 이중계약까지 한 상태였으니 말이다.[54] 프랑스 제1공화국의 최고지도자는 한국어로 통령이라 번역된다. 대통령은 제2공화국의 나폴레옹 3세부터이다.[55] 카리브계 프랑스 작가.[56] 가죽을 벗겨서 책(나의 투쟁)을 만들었다거나, 나치 전범 중 1명인 한스 뮌히는 유대인 시체가 잘 타지 않자 유대인들을 시켜 시체의 지방을 짜내 시체에 부었다는 등의 루머가 있다.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면서 시체에서 나오는 기름을 다시 퍼부어 더 잘 타게 했다는 말은 있다.[57] 같이 탈출한 유대인인 루돌프 브르바알프레트 베츨러는 독일이 패망한 뒤 각각 캐나다와 체코슬로바키아에 정착해서 천수를 누렸다.[58] 이탈리아식 이름은 조르조 만텔로. 2차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에 정착. 스위스를 통해 유대인들을 피신시켰다.[59] 이런 광경을 목격한 패튼은 건물 뒤로 돌아가서 구토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괄괄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장군답게, 그 지역 근처에 사는 독일인 수천명을 모조리 불러모아서, 강제로 그러한 학살광경을 보게했다.[60] 물론 에리히 프리프케딘코 사키치같이 학살에 대해 선을 넘는 발언을 밥먹듯이 하는 인사들은 국적 유지고 뭐고 추방해 버렸다.[61] 다만 생각해보면 당시 집시들을 대표하는 단체가 없어서 배상을 요구받지도 않았으니 배상할 여지가 없었고 유럽에서 절대 다수의 유대인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단체가 바로 이스라엘을 세운 시오니스트 단체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62] 이건 당시 서양에서 여성은 2등국민으로 취급되어 동성애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63] 에니그마를 해독하기 위해 콜로서스를 개발하여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 영국앨런 튜링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소도미법에 고발되어 화학적 거세를 받았을 정도다.[64] 제국주의 시절 때의 학살도 이야기가 많지만, 그래도 멸절을 목표로 학살을 저지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수탈이 기근으로 이어지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하는 간접적인 희생자가 가장 많고, 직접적인 학살도 잔혹해봐야 반항하는 지역 하나를 본보기로 말소하는 정도지 그 인종 자체를 없애버리겠다고 저지른 경우는 없다.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 당시에는 심지어 동맹을 맺은 원주민들에게 그 대가로 자치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틀락스칼텍이 대표적인 예.[65] 하지만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경우 같은 홀로코스트를 주요 내용으로 삼았지만 일방적으로 유대인 옹호와 나치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열한 유대인', '좋은 독일인' 등 보다 작품을 입체적이고 중립적으로 만들어 놓아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66] 더 결정적으로,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 영내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2차 대전 전까지 이 두 민족은 폴란드의 주된 소수 민족이었다.) 거주 지역이 소련에 넘어가면서 폴란드인이 97%를 차지하는 거의 단일 민족 국가가 되어 버렸다.[67] 베타 이스라엘의 사례와 같이 모든 유대인이 백인인 것은 아니다.[68] 홀로코스트 희생자 중에 1차 대전독일군으로 참전해 황제에게 훈장을 받은 참전용사도 있었다. 당시의 독일 국적의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가 아무리 심해졌다고 하지만, 우리가 독일을 위해서 전쟁에 참전해줬는데 설마 우리를 죽이겠어?"라는 생각에 독일을 떠나지 않은 유대인이 많았다. 그런데 나치는 정말 독일을 위해 싸워준 자국민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했다.[69] 물리학자 마두스리 무케르지의 서적에서 인용된 내용이다.[70] 해당항목을 보면 42년 1월부터 43년 5월까지 추축군이 인도양에서 약 87만톤의 영국과 연합군의 상선을 격침시켰다고 나온다. 현 항목은 수정되어 2018년 1월 10일 이전의 내용에 기재되어 있으며 현재 항목에는 당시 일본군의 인도양 진출때문에 수송의 어려움에 관한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다. 연합군도 43년 1월이 되어서야 전쟁물자 투입과 연합군 장병들의 투입 비율을 조율하는 카사블랑카 회담을 열었다. 즉 43년 기준이면 연합군이 반격을 막 시작할 때였다. 일본 해군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44년이었다.[71] 이는 인도인들이 열등하다거나 특별히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다. 인도는 인도 제국 이전까지 하나의 확고한 정치체제를 길게 유지하며 동질성을 구축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동족 의식이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아대륙 내의 수많은 다양한 언어 사용자들과 민족들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의 신도들은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수많은 집단들을 외형적으로나마 한데 묶은 것이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이며, 인도인이라는 개념은 이 거대한 틀 내에서 수많은 민족들이 간디와 네루를 중심으로 뭉쳐서 영국에 저항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즉 지리적 의미의 인도 개념과 달리 민족적 의미의 인도는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는다.[출처] Churchill and Roosevelt, Volume 3: The Complete Correspondence, Warren F. Kimball, 117p[73] 출입국관리법 제11조 1항 : 법무부장관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외국인에 대하여는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 (중략) 7.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사이에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정부의 지시를 받거나 그 정부와 연계하여 인종, 민족,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사람을 학살ㆍ학대하는 일에 관여한 사람
가. 일본 정부
나. 일본 정부와 동맹 관계에 있던 정부
다. 일본 정부의 우월한 힘이 미치던 정부
[74] 내용출처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민음사.[75] 당시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당장 출처인 책에 나오는 내용 중에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독일군들의 대화들이 적혀있는데, 그 중 하나에서 독일군 포로들은 히틀러의 무능함을 비판하면서 그가 잘한 일은 유대인 정책밖에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76] 독일은 공산주의를 창시한 카를 마르크스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소련을 유대볼셰비즘이라고 부르며 독일군을 아시안 몽골로이드와 유대 볼셰비즘으로 부터 인류에서 가장 우월한 아리아인의 문화를 지키는 군대라고 포장했다.[77] 《나치의 병사들》에 나온 어느 두 독일군 장교 포로들의 대화를 보면 동유럽에서 벌인 유대인 학살을 두고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해도 되는 일을 너무 성급하게 저질렀다며 외교적인 불이익이 클 거라고 걱정하는 말이 나온다. 특히 유대인의 영향력이 강한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고있다.[78] 나치집권 시기 카톨릭 주교들이 주도하는 T-4 프로그램 반대 시위가 자주 일어났지만 유대인 추방에 반대하는 시위는 없었다.[79] 수용소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동유럽 점령지에서 무장친위대가 벌인 유대인 민간인 학살을 두고 얘기한 것이다.[80] 단 독일의 일반인들은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이뤄지는가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살수용소 현장을 직접 보라고 미군이 독일인들을 끌고 왔을 때 자기들은 몰랐다고 변명한 사람들이 많았던 건 유대인을 거기 끌고 가서 강제노역시키다 필요없어지거나 저항하면 죽인다는 걸 몰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처음부터 분류기준에 따라 노약자와 아이들을 가스실로 보내고 나머지도 처음부터 죽이는 걸 목적으로 노동력만 잠시 쥐어짜는 수준이었다는 걸 몰랐다는 의미이다. 나치는 유대인 수용소에 대해 겉으로는 강제노동수용소라고 선전했고, 학살도 SS가 주도하고 국방군은 외곽경비만 맡아서 자세한 실상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많은 나치 전범들이 유대인 학살수용소에서 근무했음에도 자기는 자세한 건 모른다고 말한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81] 오히려 일제는 유대인들을 꼬드겨 복어계획 등을 세워 만주국에 자금 조달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하려 했다.[82] 히틀러빠이기 이전에 극단적인 인종주의 선동가였던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도 이 말을 한 바 있다. [83]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나치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온갖 악행을 일삼았고, 홀로코스트가 시행되게 한 반제 회의를 직접 주도했다.[84] 친위대 국가지도자(Reichsführer-SS)로 히틀러 밑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을 진두 지휘한 최고 책임자 중 하나이다. [85] 당시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인간 취급하지 않아 유대인 여성을 강간할 경우 '인종 오욕'죄로 처벌하였으나, 대부분의 독일군들은 강간한 후 유대인 여성을 죽이거나, 학살하기 전 다 벌거벗긴 상태에서 강간한 뒤에 '처리'하는 편법을 썼다. 이 때문에 유대인 학살을 주로 하던 친위대나 국방군 부대들의 경우 다른 부대에게 호색한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86] 스위스의 차량 제작 회사. 사우러 사가 직접 가스 밴을 제작한 건 아니었고 사우러 사의 트럭을 독일의 Gaubschat Fahrzeugwerke사가 가스바겐으로 개조했다. 사우러 사의 제품 외에 르노, 오펠 사의 트럭이 가스바겐으로 개조되었고 이렇게 전쟁 중에 개조된 가스바겐의 수는 약 20여 대로 추정된다. 즉, 이 가스바겐들 상당수는 처음부터 유대인을 죽일 목적으로 만든 차량이 아니었단 뜻이다.[87] 생몰년: 1928 ~ 2016. 실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비극을 통해서 양친과 여동생과 사별하였던 아픔이 있으며 그 비극담을 통해서 '흑야(원제 : NIGHT)'와 '새벽(원제 : DAWN)'을 펴냈다. 국내에서는 가톨릭출판사에서 한국어 번역본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그러나 시오니즘을 주장하며 팔레스타인인을 죽여야 한다는 등의 발언으로 결국 나치랑 비슷해졌다는 비난을 받았고, 1987년 로널드 레이건이 서독을 방문하여 2차대전 참전군인 추모 묘지를 참배한 것을 나치에 대한 숭배라고 비난하다가 미국에서도 나치가 아니라 강제 징병당해 나가 싸워야하던 이들을 추모하는 묘지를 참배한 것을 나치라고 부를 셈이라면 차라리 독일인 모두를 나치라고 다 죽이자고 하라는 비난을 들었으며, 노벨 평화상 수여가 잘못되었다는 비난도 많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 2000년에는 버나드 메이도프의 사기로 수백 억이 넘는 재산을 다 잃는 등 늘그막에 심각하게 고생하다가 2016년 7월 2일 병사했다.[88] 출처 : Germans No More: Accounts of Jewish Everyday Life, 1933-1938[89] 서프로이센(West Prussia) 지역에서 가게를 운영했던 유대인이다. 훈장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1차 대전 당시 공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당시 독일에 대한 배신감이 어떠했는가 짐작할 수 있다.[90]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버린 1980년대의 블라덱 슈피겔만손놈 행각을 부리는 호텔을 의미한다.[91] 살러시 페렌츠의 집권 이후 30만에 달하는 헝가리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한 것을 의미한다. 고로 이때의 증언은 홀로코스트의 말기였던 1944년 8월 이후에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92] 알기쉬운 세계 제 2차세계대전사 중.[93] 실제로 대부분의 학살 수용소는 독일 영토에 세워졌고, 그 외에 일부가 폴란드에 세워졌기에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설마 홀로코스트 같은 조직적 말살이 이뤄질 거라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직적인 말살 시설이 있다는 것이 비밀이었을 뿐이고, 유대인을 끌고 가서 죽인다는 건 유럽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94] 직접적인 수용소 관리는 친위대 병력들이 맡았지만 외곽 경비나 수송 작업에는 친위대 뿐만 아니라 국방군도 관여되어 있었다. 자세한 건 몰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략 짐작은 가능했을 것이다. 관련 서적들을 보면 "소각 연기가 마을 쪽에 나오지 않게 해 달라" 등의 민원 기록들이 남아 있으므로 쉬쉬하지만 다들 알 건 아는 상황임을 충분히 방증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대인이라면 모조리 학살하는 것은 몰랐을 수 있다. 독가스용 재료인 치클론 B가 대량으로 수용소에 들어가는 걸 보고 소독약품을 반입하는 줄 알고 '수용소가 매우 위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라고 나치는 지속적으로 선전하였으니 말이다. 당대 사람들도 '노동수용소 = 죽음' 이란 건 알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제 21기갑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한 한스 폰 루크의 회고에 따르면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수용소로 끌려갔을 때 게슈타포와 친위대의 연줄로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손을 쓰는 모습이 나온다. 나치가 집권한 이후 게슈타포가 체포한 반체제 인사들이 수용소에서 반신불구가 되거나 아예 영영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당대 독일인들은 수용소에 들어가면 사실상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것까지는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조직적으로 죽이는 건 몰랐을 수 있다.[95] 학살을 방조 내지는 동조했던 민간인들을 제3자인 미군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대목.[96] 굴라그로 대표되는 스탈린의 공포정치 속에서 살아온 소련군 조차 나치의 대량 학살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97] 홀로코스트를 맞먹을 정도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잔인하게 죽인다.[98] 사실 이쪽도 나치에 빌붙었던 세력이니 간접적인 나치즘 홀로코스트라고 볼 수 있다.[99] 홀로코스트를 체험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이 고안한 심리치료 기법이다.[100]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이에 관련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후에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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