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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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IMPERATOR CAESAR AVGVSTVS ΒΑΣΙΛΙΆΔΕΣ | |
초대 | |
말대 | |
존속 기간 |
1. 개요 [편집]
로마 황제는 제정 로마를 통치하던 황제이다. 임페라토르(Imperator), 카이사르(Caesar), 아우구스투스(Augustus), 바실레프스(Βασιλεύς) 등 다양한 칭호로 불렸다.
기존의 관례와 전통을 의미하는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이 중시되던 로마 공화국에서 군주로서의 로마 황제가 단번에 출현할 수는 없었으며, 제정으로의 변화는 기존 로마 공화정의 헌정질서가 점차 유연화되고 붕괴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후 공화파, 그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으로부터 로마 공화국 시기 존재했던 여러 관직과 명예로운 호칭들을 수여받았다. 이 과정은 개별적으로 들여다봤을 때에는 기존 공화정의 법률과 관례의 틀 안에서 적법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나, 전체 그림을 살펴보면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재위 기간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에게 군 통수권, 신변불가침권, 원로원 결의에 대한 거부권 등 권한을 집중하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사실상 제국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귄위와 법적 권한, 무력을 확보하였다. 나아가 아우구스투스는 이 관직과 호칭들을 후계자 티베리우스에게 세습하는 데 성공하여, 사실상 제정 로마의 초대 황제로 간주된다.
초기 로마 황제들은 로마 공화정의 전통이 남아 있던 상황에서 표면상으로나마 원로원의 일원임을 자처했기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초기 제정을 프린켑스 체제(Principatus: 영어로 Principate: 한국어로 원수정)로 부르기도 하나, 군인 황제 시대를 끝내고 황제 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후대 황제의 제정은 별 이견 없이 도미나투스 체제(Dominatus: 영어로 Dominate: 한국어로 전제정)이라고 부른다.
기존의 관례와 전통을 의미하는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이 중시되던 로마 공화국에서 군주로서의 로마 황제가 단번에 출현할 수는 없었으며, 제정으로의 변화는 기존 로마 공화정의 헌정질서가 점차 유연화되고 붕괴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후 공화파, 그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으로부터 로마 공화국 시기 존재했던 여러 관직과 명예로운 호칭들을 수여받았다. 이 과정은 개별적으로 들여다봤을 때에는 기존 공화정의 법률과 관례의 틀 안에서 적법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나, 전체 그림을 살펴보면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재위 기간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에게 군 통수권, 신변불가침권, 원로원 결의에 대한 거부권 등 권한을 집중하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사실상 제국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귄위와 법적 권한, 무력을 확보하였다. 나아가 아우구스투스는 이 관직과 호칭들을 후계자 티베리우스에게 세습하는 데 성공하여, 사실상 제정 로마의 초대 황제로 간주된다.
초기 로마 황제들은 로마 공화정의 전통이 남아 있던 상황에서 표면상으로나마 원로원의 일원임을 자처했기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초기 제정을 프린켑스 체제(Principatus: 영어로 Principate: 한국어로 원수정)로 부르기도 하나, 군인 황제 시대를 끝내고 황제 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후대 황제의 제정은 별 이견 없이 도미나투스 체제(Dominatus: 영어로 Dominate: 한국어로 전제정)이라고 부른다.
2. 칭호 및 성격 [편집]
로마 황제가 취하던 칭호는 임페라토르(Imperator, IMPERATOR), 카이사르(Caesar, CAESAR), 아우구스투스(Augustus, AVGVSTVS), 프린켑스(Princeps, PRINCEPS), 도미누스(Dominus, DOMINVS)[1], 바실레프스(Βασιλεύς), 아우토크라토르(Αὐτοκράτωρ) 등 여럿이 있다.
로마 황제라고 함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황제와는 거리가 멀다. 정확히는 당시 서양에서는 로마가 황제라는 개념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즉 "전제군주정 및 제국에서 황제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을 로마가 만들어 가고 있었고 이것이 중세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우리가 아는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 하늘의 아들(天子, 천자)이라 불리며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황제와는 다르게 로마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없었으며 단지, 시민 한 명이 여러 공직에 선출 및 겸임되거나 세습될 뿐이었다. 이는 로마가 공화정의 역사가 길기 때문이었다. 당장 언급한 위의 칭호들 역시도 군대 총사령관(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문 출신(카이사르), 원로원이 올린 칭호인 존엄한 자(아우구스투스), 원로원 중 으뜸시민(프린켑스 세나투스)이라는 뜻일 뿐이다. 즉, 고대 로마인의 생각을 빌어 보면, 명문가인 카이사르 가문의 일원이 군대 통수권과 최고 제사장 등을 겸임하며 호민관 권한을 일부 받고서는 원로원 발언권 1순위의 시민 자리를 꿰찬 것이 바로 황제인 것이다.
이런 느슨한 관직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로마의 정치체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미나투스 체제(전제정)를 이루기 전까지 프린키파투스 체제(원수정)라고 부른다. 또한 편의상 황제라고 칭하지만 사실상 로마 황제는 후임자를 지목할 수 있는 종신 대통령제에 가깝다. 이러한 구조는 고대 말 도미나투스를 지나 중세 로마에 이르러 거의 완전히 전제군주정으로 탈바꿈했음에도 자신들을 '공화정'이라고 부르는 근간이 되었다. 즉, 로마 황제들은 자신들을 신들[2]과 인간 어느 한 사이의 존재로 신격화시켰음에도 동시에 여전히 여러 공직들을 역임하는 제1의 시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3] 이 관념이 중세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던 덕분에 로마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 뒤 그들의 문화가 서유럽에 전파되어 르네상스를 이루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유럽이 근대 계몽시대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로마의 황제는 공화정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유산이 현대 민주정 체제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로마 황제가 공직을 역임하는 형태였고, 로마의 공직은 선거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그 공직자가 사라지면 누구든지 취할 수 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이미 한 사람이 여러 공직을 역임했고 그것을 견제할 의회였던 원로원의 권한이 줄어든 이상[4] 누구나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는 로마 황제가 호민관 권한인 신체 불가침권을 가지고 있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일개 로마 시민을 어떠한 승인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로마 황제로 추대하는 것이 항상 가능했으며 그 수준도 군사력을 가진 집단인 로마군 중에서 1개 군단 수준으로 소수인 병력 정도만 동원하면 충분했다. 추대받는 사람도 로마 시민이고 추대하는 사람도 로마 시민이므로 원칙상으로는 법적인 문제가 없었다.[5] 그리고 현임 로마 황제의 측근이어야 할 원로원과 로마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도 이런 구조적 약점을 활용해서 오히려 현임 로마 황제를 폐위시킬 목적으로 서로 협력해서 새로운 로마 황제를 옹립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 역사는 네 황제의 해나 군인 황제 시대 같은 여러 혼란기가 잦았다.[6]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느슨한 시스템 덕분에 테트라키아(사두정치) 같은 황제를 여럿 둔다거나 정제와 부제를 둔다는 등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로마 제국에 필요했던 조치를 수행하는 일들도 가능했다. 로마 제국이 넓고 국경선이 너무 길어서 사방에서 적이 몰려오면 긴급 조치 및 현장에서의 빠른 판단과 행동을 위해 황제급 권한을 가진 인물이 각자 로마의 국경선을 나누어서 군관구로 삼고 동시에 대응을 할 필요가 높았기 때문에 조성된 것인데 타국에서는 국왕의 권위가 실추되고 내전이 벌어지며 나라가 갈라질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아서 못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사두정치라는 이름 하에 상당한 기간동안 해당 제도를 유지했고 결국 내전이 벌어져서 사두정치가 해체된 후 다시 단일황제 체제로 돌아갔으나 이후에도 공치제와 같은 식으로 변형된 방식을 사용할 수 있었다.
로마 황제는 주로 원로원 회의를 주재하고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프린켑스 세나투스로서의 역할, 각 속주의 군대를 지휘하는 임페리움 마이우스 보유자로서의 권한, 호민관으로서 거부권과 신변불가침권을 보장받는 트리부나키아 포테스타스라는 이름의 특권, 로마 국가종교의 수장 역할을 하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의 권한을 개별적으로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아 황제로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호칭 및 관직들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되는 과정에서 황제 개인이 행사하는 하나의 권위 및 권한으로 묶이게 되었다지만 이는 본래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요소였으며, 따라서 로마 황제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호칭이나 관직 중 일부 또는 전부를 황위 계승자나 유력한 측근들에게 부여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보다 약간 격이 낮은 것으로 간주되어, 제위 계승 후보자 또는 때때로 몇몇 유력한 황족에게도 이 호칭이 수여되었다. 황족이 아니어도 부여된 경우도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로 진군해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등극한 뒤, 브리타니아와 갈리아를 장악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지리적 위치로 인한 협공을[7] 피하기 위한 회유책으로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해 사실상 부황제로 인정했다. 물론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알비누스는 얼마 후 급한 불을 끈 세베루스가 교전을 걸어 와 패배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우구스투스는 보통 황제에게만 허락된 존호였으나, 현직 황제가 생존중임에도 황위 계승이 사실상 확정되어 실권을 행사하는 경우 후계자에게 아우구스투스 존호가 부여되는 경우도 때때로 있었다. 이런 경우 제국의 후계자는 공동 황제로 간주된 적도 있었다. 사두정치를 통한 제국 사분할로 유명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서방과 동방에 각각 한 명의 아우구스투스(흔히 정제(正帝)로 불린다)와, 한 명의 카이사르(흔히 부제(副帝)로 불린다)를 두어 상하관계를 바탕으로 업무를 분담하도록 했다.
이러한 로마 황제의 다양한 칭호는 갈바 때부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형태로 합쳐져서 정착되었다. 갈바 이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후예로서 카이사르를 가문명에 가깝게 사용했다. 하지만 갈바와 그 후임인 오토는 카이사르와 혈연적 접점이 없었음에도 카이사르 칭호를 썼고, 이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플라비우스 왕조, 그리고 이후 황제들에게까지 이어졌다.[8]
이렇게 로마 제국의 황제는 다른 황제와는 다른 특징이 많았으므로 훗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들도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는 로마 황제(Kayser-i Rum)라고 자칭했다. 물론 유럽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지만 로마 제국식 관점에서 본다면 로마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가문이 팔레올로고스 왕조에서 카이으(kayı) 부족의 족장 출신인 오스만 1세의 왕조로 바뀌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종교, 주류 민족, 문화 등 여러가지 면에서 완전히 다른 국가였으므로 오스만 제국을 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경우는 없다.
3. 역사 [편집]
3.1. 아우구스투스의 권력 장악, 권위 수립 [편집]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 옥타비우스 투리누스가 그의 양자로 입적됨과 동시에 그의 물질적, 정치적 자산을 모두 상속받게 되었다. 이 중에서 카이사르의 물질적인 자산 중 대부분이 옥타비우스 투리누스[9], 즉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으로 전 로마인에게 분배되었다. 이 행위를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확실하게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으면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강력하고 폭넓은 정치적 지지라는 막대한 자산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금전적, 정치적 유산을 모두 상속받은 뒤, 제2차 삼두정치가 끝난 이후 라이벌이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몰락시켜 로마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활한 정치꾼답게, 악티움 해전 개선식 거행 후 가장 절묘한 시점에 공화정 복귀를 깜짝 선언하였다. 로마 원로원은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이후로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최고지도자 한명의 독재 체제하에 놓여 있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이런 발표를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의 선언에 원로원은 매우 기뻐했다.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존칭인 "아우구스투스 Augustus"를 선사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내려 주자고 한 원로원 의원은 안토니우스파에서 옥타비아누스파로 갈아탄 이후 과할 정도로 충성을 맹세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였다.
그러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계속해서 로마의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아우구스투스에게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이끌던 군단들의 중~상급 장교들과 동방/서방의 속주 및 동맹국 지도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양아버지 카이사르에게서 물려받은 끈끈한 클리엔테스 관계로 묶여 있었고, 후술하듯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정복한 속주들의 대부분의 총독직을 싸그리 겸임했다. 로마 공화국의 군대 과반이 아우구스투스 개인을 따르는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공식적인 직위 여부를 막론하고 탄탄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 아버지 카이사르에게서 상속받은 상당한 재산 이외에도,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집트를 격파하고 그 당시 공화국 식량의 1/4을 공급했던 이집트를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개인 영지로 흡수했기 때문에[10]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공화국 경제의 상당한 부분과 수도 로마의 식량 공급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지도자로서 해야 할 각종 사업을 원로원 대신 추진하기 시작한다. 당장 원로원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방치했던 본토 이탈리아 내의 가도(街道)정비를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모두 처리해 버렸다. 심지어 어느 해의 로마 국고는 상당 부분이 아우구스투스 개인이 기부한 금액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로마 공화정에서 그렇게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던 퇴직병들의 봉급 문제도 이집트가 황제 직속령이 되고 퇴직금 액수가 법으로 정해지게 되면서 점차 해결되기 시작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국 체제에서도 계속해서 집정관직을 연임하면서 권한을 쥐고 있었고 해가 지나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막대한 권위를 가져다 주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사망하면서 최고 제사장 자리도 아우구스투스가 차지했다. 이 과정을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위를 이용해 원로원 안에 새로 구성된 10인의 사제를 지명되는 일을 대리해 모두에게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위가 오직 본인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내보였다. 그 결과, 그는 레피두스 사후 이 자리를 쉽고 자연스럽게 얻고, 종교 분야의 우두머리라는 타이틀로부터 나오는 권위까지 집어 삼킨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황제라는 자리를 창조했다. 그리고 위에서 정리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아우구스투스가 14년 사망한 이후까지의 매우 긴 통치기간을 정리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면서 눈에 보이도록 추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연스럽고, 상황에 맞게 본인이 최고 권력을 쥐고 항구적으로 세습할 환경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았으며 점차적으로 자신이 군림할 수 있는 이유를 교묘하고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만들어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이 남긴 자서전 <업적론>을 통해 임페라토르를 총 21번 병사들에게 선포받아 누렸고, 기원전 43년 처음 받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한때 매형인 숙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힘으로 제압한 악티움 해전 승리 후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됐음에도, 이전의 임페라토르와 구분될 본인만의 임페라토르 자리에 필요한 것이 없었다. 특히, 그는 절차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이 컸다. 그래서 상술한 대로, 공화정 회복과 권력 이양을 로마 원로원 앞에서 보여줬다. 그러면서 그는 이때 아우구스투스라는 아주 좋은 타이틀을 받고, 이 전 과정 속에서 주도면밀하게 자신이 원한 것을 모두 새로 받는 형태로 받아냈다.
그 과정은 가히 현대 독재자들의 귀감이 될, 그야말로 예술적인 정치공학의 정수라 할 만했다. 먼저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에서 자신의 라이벌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수도 로마로 개선한 뒤,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에 출석하여 자신의 모든 초법적 권한을 내려놓고 공화정으로 복귀할 것을 선언해, 원로원 추대로 프린켑스가 되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두 번의 조정 헌법을 입안하고, 이를 통과시킨다. 그리고 1차 조정 헌법에 이은, 2차 조정 헌법이 통과된 직후인 일명 "제2차 조정"부터 그는 절차상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론상 임페라토르이며 프린켑스인 그가 전대미문의 대권력을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을 유지시킨 채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넣게 된다.
먼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권력 이양 속에서 삼두정치 하에 받은 비상대권을 포기하면서, 새롭게 10년 동안의 기간을 설정해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지방의 전 속주와 함께 이집트, 키프로스 일대의 임페리움을 합법적으로 받고, 무기한 자동연장 형태로, 포기할 수 없는 식으로 지배권을 선사받는다. 그는 아그리파, 마이케나스 등 극소수 친구, 최측근들과 함께 이 조치를 위해 기원전 27년 개선식 전까지 거의 4년 가까이 많은 고민을 했다. 여기에서 그에게 공화정 질서 회복과 공화국 유지라는 것을 일깨운 이가 동갑내기 친구를 넘어 군사적 협력자인 아그리파였다. 그는 냉정한 아우구스투스에게 분명하게 로마의 역사, 현재 정국을 상기시켰고, 이는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따라서 그가 화려한 개선식 후 예정된 발표에서 실리와 명분을 모두 얻은 일은 4년의 준비 속에서 얻어낸 결과물과 같았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이때 본인 추종자들의 도움 아래 군사적으로 중요한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일대와 경제적인 기반이 될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먼저 손아귀에 넣었다. 이어 그는 자신을 지지한 평민, 일반 군인들이 민회 안에서 지지 의사를 표명한 상황을 이용해, 본인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다는 식으로 집정관에 출마하는 쇼를 한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체제의 회복과 평온을 천명한 기원전 27년 이후 한동안 "더 이상의 내전과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집정관에 연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것이 1차 조정헌법 입안, 통과 후 시작된 기원전 27년의 소위 "제1차 조정"인데, 아우구스투스는 보다 완벽한 판을 짜기 위해 아그리파와 함께 원로원 정원을 확정하고 임면권을 행사하면서 원로원 안에서 반대 목소리를 나오지 못하게 처리한다. 따라서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조카 마르켈루스, 양자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 히스파니아 여행을 하고 돌아온 기원전 24년까지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를 비운 상황에서도 어떤 식의 반격도 하지 못한다.
물론, 원로원 역시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바보는 아니었고, 의심을 했다. 이 의심은 아우구스투스가 약 5년 동안 집정관을 연임하고, 조정 헌법이라고 불린 새로운 공화정 체제에 대한 의구심이 커질수록 위기가 됐다. 임페라토르는 최고 군사지도자였지만, 아우구스투스가 프린켑스 세나투스인 것 역시 말장난이라는 의심은 원로원이 공화정 복귀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이유가 됐다. 이런 가운데 기원전 23년, 귀국 1년도 못 되어 과로에 시달린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휩쓴 열병에 걸려 거의 죽다가 살아 난다. 그는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오고 가는 식으로 열을 내리는 치료법으로 기운을 되찾는데, 그는 회복 과정에서 자신이 친구 아그리파와 함께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직후부터 기원전 27년 조정헌법 통과까지 심혈을 기울인 체제적 결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의 불만을 줄이고, 본인이 가진 지위가 가진 한계를 보완할 목적으로 기원전 23년 제2차 조정헌법을 입안해 통과시킨다. 이를 위해 그는 더 이상 집정관에 출마하지 않기로 선언했다.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그는 집정관직을 내려놓고, 더 이상 자신이 총독(프로콘술 Proconsul)이 아닌 속주들에 개입할 수 있는 집정관으로서의 권한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 권한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에 질서를 가져다준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써 반대급부로 두 개의 특권을 요구했다. 또 2차 조정헌법으로 불릴 새로운 체제 개헌 아래 이를 구체화했다. 바로 자신에게 모든 속주와 본국 이탈리아를 임지로 하는 "총독의 최고 임페리움(Imperium Proconsulare Maius,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11])" 또는 줄여서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주어 원로원 속주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에 "로마 시민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면"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줄 것[12] 그리고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마찬가지로 혼란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이 국정의 주요한 문제를 다스릴 수 있도록 자신에게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을 수여할 것이었다. 본래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에게 주어지던 신변불가침권(Tribunicia Sacrosantitas, 트리부니키아 사크로산티타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당 권리는 일종의 면책특권으로, 호민관의 신변을 공격하거나 호민관을 임기 중에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매우 강력했다. 그런데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자신에게 호민관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수여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감찰관(Censor, 켄소르)의 권한 중 일부를 자신에게 수여했는데, 이는 인구주택총조사에 해당하는 통계를 낼 권한과 귀족이거나 관직을 역임하여 자격을 획득한 사람들 중 원로원 의원을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이었다. 감찰관의 권한은 매우 크므로 필요한 일부만 받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혼자서 원로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헌법상 지위를 바꾸고, 2차 조정헌법으로 알려진 개헌을 했다. 하지만 무언가 찝찝했는데, 이때 로마에서 전염병, 기근이 발생한다. 이때 이 전염병에 걸렸다가 회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전염병, 기근 발생 속에서 혼란에 빠진 민심 회복에 힘썼다. 그는 사비를 들여 모범을 보였는데, 이를 지켜본 로마 서민, 군인들은 그에게 "집정관을 앞으로 못 맡으면 독재관 책무라도 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하고, 원로원에게 이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2차 조정 헌법 속에서 파트리키임에도 사실상 종신 호민관이 된 발표 속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던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권한 아래 원로원을 소집해 민회에서 법안을 발의하고, 모든 법령을 거부할 수 있음에도, 이런 민심과 요구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추가로 독재관 권한과 매년 갱신되는 사실상의 영구 집정관 직을 수여받았다. 그는 로마와 이탈리아 안에서 집정관을 맡지 않고도, 그들보다 위엄있는 사람이 됐고, 로마 시민권자로 구성된 일반 군인과 퇴역병 가족들의 일방적 지지 속에서 군대 통수권과 함께 군대 통제에 필요한 명망까지 이때 저절로 받게 된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스스로는 모든 속주의 통제권을 원로원에게 되돌려준다고 선언하고, 독재관 직을 준 로마 서민의 요구를 임시라고 규정하면서 귀감을 얻게 됐다. 그와 동시에 그는 본인만이 가진 힘을 활용한다. 당시 로마에서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자신 이외에는 당시 변방에 해당하던 갓 정복한 속주들을 안정시킬 능력이 없었는데, 그는 2차 조정헌법과 기원전 22년 민회와 서민들이 쥐어준 추가 지위를 마치 원로원 대표 자격으로 봉사하겠다고 했다. 이때의 일들을 묶어 소위 제2차 조정이라고 한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사비로 행정관들을 고용해, 당시 로마가 관료제 취약 문제로 각 속주의 총독이 각자 재산을 써가며 사비로 행정관들을 고용한 일을 해결해줬다. 또 그는 단호하지만 항상 존중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원로원 안에서 의심을 품은 이들을 설득하고 견제하고 적절하게 구슬렸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그는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반역법을 다루고 재무관 자격에서 본인과 일가를 중상모략한 원로원, 기사계급들을 손보는 식으로 본인에게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철저히 보여줬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원로원은 몇몇 "혼란스러운" 속주들을 10년간 통제할 권한을 집정관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갓 정복된 갈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부족이 남은 히스파니아, 그리고 막강한 가상적국 파르티아에 맞서야 하는 시리아 등 로마 제국 대부분의 군사적 명령권이 필요한 속주를 관례적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임명권과 면직권을 주도록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모든 속주들의 총독을 겸임하게 된 자신의 권한으로 원로원 의원이나 에퀴테스 계급의 능력자들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해서 확실하게 장악한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후일 우리가 황제 속주라고 부르는 속주 임명권을 1차 조정헌법 체제에서와 달리 2차 조정헌법 후 일들 속에서 영구적으로 장악했고, 집정관으로서의 권한 외에도 그가 당시 로마제국 속주의 과반을 자신의 임지로 확보한다. 이는 곧 2차 조정 헌법 수정 속에서 속주에 따라가는 로마 군단의 지휘권 역시 대부분(26개 중 20개)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휘하에 들어온 결과로 이어진다. 즉, 2차 조정 헌법 체제 이후부터, 아우구스투스는 임페라토르라는 지위 속에 군사권 외의 행정, 사법에 관한 임페리움을 넣으면서,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황제의 전형을 완성했다. 그래서 2세기 후반 ~3세기 중반의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렇게 평하면서, 임페라토르가 로마인이 싫어하는 왕을 대신한 대체 칭호와 가깝게 됐음을 기술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금전적, 정치적 유산을 모두 상속받은 뒤, 제2차 삼두정치가 끝난 이후 라이벌이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몰락시켜 로마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활한 정치꾼답게, 악티움 해전 개선식 거행 후 가장 절묘한 시점에 공화정 복귀를 깜짝 선언하였다. 로마 원로원은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이후로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최고지도자 한명의 독재 체제하에 놓여 있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이런 발표를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의 선언에 원로원은 매우 기뻐했다.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존칭인 "아우구스투스 Augustus"를 선사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내려 주자고 한 원로원 의원은 안토니우스파에서 옥타비아누스파로 갈아탄 이후 과할 정도로 충성을 맹세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였다.
그러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계속해서 로마의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아우구스투스에게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이끌던 군단들의 중~상급 장교들과 동방/서방의 속주 및 동맹국 지도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양아버지 카이사르에게서 물려받은 끈끈한 클리엔테스 관계로 묶여 있었고, 후술하듯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정복한 속주들의 대부분의 총독직을 싸그리 겸임했다. 로마 공화국의 군대 과반이 아우구스투스 개인을 따르는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공식적인 직위 여부를 막론하고 탄탄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 아버지 카이사르에게서 상속받은 상당한 재산 이외에도,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집트를 격파하고 그 당시 공화국 식량의 1/4을 공급했던 이집트를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개인 영지로 흡수했기 때문에[10]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공화국 경제의 상당한 부분과 수도 로마의 식량 공급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지도자로서 해야 할 각종 사업을 원로원 대신 추진하기 시작한다. 당장 원로원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방치했던 본토 이탈리아 내의 가도(街道)정비를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모두 처리해 버렸다. 심지어 어느 해의 로마 국고는 상당 부분이 아우구스투스 개인이 기부한 금액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로마 공화정에서 그렇게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던 퇴직병들의 봉급 문제도 이집트가 황제 직속령이 되고 퇴직금 액수가 법으로 정해지게 되면서 점차 해결되기 시작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국 체제에서도 계속해서 집정관직을 연임하면서 권한을 쥐고 있었고 해가 지나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막대한 권위를 가져다 주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사망하면서 최고 제사장 자리도 아우구스투스가 차지했다. 이 과정을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위를 이용해 원로원 안에 새로 구성된 10인의 사제를 지명되는 일을 대리해 모두에게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위가 오직 본인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내보였다. 그 결과, 그는 레피두스 사후 이 자리를 쉽고 자연스럽게 얻고, 종교 분야의 우두머리라는 타이틀로부터 나오는 권위까지 집어 삼킨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황제라는 자리를 창조했다. 그리고 위에서 정리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아우구스투스가 14년 사망한 이후까지의 매우 긴 통치기간을 정리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면서 눈에 보이도록 추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연스럽고, 상황에 맞게 본인이 최고 권력을 쥐고 항구적으로 세습할 환경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았으며 점차적으로 자신이 군림할 수 있는 이유를 교묘하고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만들어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이 남긴 자서전 <업적론>을 통해 임페라토르를 총 21번 병사들에게 선포받아 누렸고, 기원전 43년 처음 받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한때 매형인 숙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힘으로 제압한 악티움 해전 승리 후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됐음에도, 이전의 임페라토르와 구분될 본인만의 임페라토르 자리에 필요한 것이 없었다. 특히, 그는 절차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이 컸다. 그래서 상술한 대로, 공화정 회복과 권력 이양을 로마 원로원 앞에서 보여줬다. 그러면서 그는 이때 아우구스투스라는 아주 좋은 타이틀을 받고, 이 전 과정 속에서 주도면밀하게 자신이 원한 것을 모두 새로 받는 형태로 받아냈다.
그 과정은 가히 현대 독재자들의 귀감이 될, 그야말로 예술적인 정치공학의 정수라 할 만했다. 먼저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에서 자신의 라이벌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수도 로마로 개선한 뒤,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에 출석하여 자신의 모든 초법적 권한을 내려놓고 공화정으로 복귀할 것을 선언해, 원로원 추대로 프린켑스가 되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두 번의 조정 헌법을 입안하고, 이를 통과시킨다. 그리고 1차 조정 헌법에 이은, 2차 조정 헌법이 통과된 직후인 일명 "제2차 조정"부터 그는 절차상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론상 임페라토르이며 프린켑스인 그가 전대미문의 대권력을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을 유지시킨 채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넣게 된다.
먼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권력 이양 속에서 삼두정치 하에 받은 비상대권을 포기하면서, 새롭게 10년 동안의 기간을 설정해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지방의 전 속주와 함께 이집트, 키프로스 일대의 임페리움을 합법적으로 받고, 무기한 자동연장 형태로, 포기할 수 없는 식으로 지배권을 선사받는다. 그는 아그리파, 마이케나스 등 극소수 친구, 최측근들과 함께 이 조치를 위해 기원전 27년 개선식 전까지 거의 4년 가까이 많은 고민을 했다. 여기에서 그에게 공화정 질서 회복과 공화국 유지라는 것을 일깨운 이가 동갑내기 친구를 넘어 군사적 협력자인 아그리파였다. 그는 냉정한 아우구스투스에게 분명하게 로마의 역사, 현재 정국을 상기시켰고, 이는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따라서 그가 화려한 개선식 후 예정된 발표에서 실리와 명분을 모두 얻은 일은 4년의 준비 속에서 얻어낸 결과물과 같았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이때 본인 추종자들의 도움 아래 군사적으로 중요한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일대와 경제적인 기반이 될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먼저 손아귀에 넣었다. 이어 그는 자신을 지지한 평민, 일반 군인들이 민회 안에서 지지 의사를 표명한 상황을 이용해, 본인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다는 식으로 집정관에 출마하는 쇼를 한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체제의 회복과 평온을 천명한 기원전 27년 이후 한동안 "더 이상의 내전과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집정관에 연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것이 1차 조정헌법 입안, 통과 후 시작된 기원전 27년의 소위 "제1차 조정"인데, 아우구스투스는 보다 완벽한 판을 짜기 위해 아그리파와 함께 원로원 정원을 확정하고 임면권을 행사하면서 원로원 안에서 반대 목소리를 나오지 못하게 처리한다. 따라서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조카 마르켈루스, 양자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 히스파니아 여행을 하고 돌아온 기원전 24년까지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를 비운 상황에서도 어떤 식의 반격도 하지 못한다.
물론, 원로원 역시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바보는 아니었고, 의심을 했다. 이 의심은 아우구스투스가 약 5년 동안 집정관을 연임하고, 조정 헌법이라고 불린 새로운 공화정 체제에 대한 의구심이 커질수록 위기가 됐다. 임페라토르는 최고 군사지도자였지만, 아우구스투스가 프린켑스 세나투스인 것 역시 말장난이라는 의심은 원로원이 공화정 복귀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이유가 됐다. 이런 가운데 기원전 23년, 귀국 1년도 못 되어 과로에 시달린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휩쓴 열병에 걸려 거의 죽다가 살아 난다. 그는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오고 가는 식으로 열을 내리는 치료법으로 기운을 되찾는데, 그는 회복 과정에서 자신이 친구 아그리파와 함께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직후부터 기원전 27년 조정헌법 통과까지 심혈을 기울인 체제적 결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의 불만을 줄이고, 본인이 가진 지위가 가진 한계를 보완할 목적으로 기원전 23년 제2차 조정헌법을 입안해 통과시킨다. 이를 위해 그는 더 이상 집정관에 출마하지 않기로 선언했다.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그는 집정관직을 내려놓고, 더 이상 자신이 총독(프로콘술 Proconsul)이 아닌 속주들에 개입할 수 있는 집정관으로서의 권한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 권한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에 질서를 가져다준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써 반대급부로 두 개의 특권을 요구했다. 또 2차 조정헌법으로 불릴 새로운 체제 개헌 아래 이를 구체화했다. 바로 자신에게 모든 속주와 본국 이탈리아를 임지로 하는 "총독의 최고 임페리움(Imperium Proconsulare Maius,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11])" 또는 줄여서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주어 원로원 속주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에 "로마 시민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면"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줄 것[12] 그리고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마찬가지로 혼란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이 국정의 주요한 문제를 다스릴 수 있도록 자신에게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을 수여할 것이었다. 본래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에게 주어지던 신변불가침권(Tribunicia Sacrosantitas, 트리부니키아 사크로산티타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당 권리는 일종의 면책특권으로, 호민관의 신변을 공격하거나 호민관을 임기 중에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매우 강력했다. 그런데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자신에게 호민관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수여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감찰관(Censor, 켄소르)의 권한 중 일부를 자신에게 수여했는데, 이는 인구주택총조사에 해당하는 통계를 낼 권한과 귀족이거나 관직을 역임하여 자격을 획득한 사람들 중 원로원 의원을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이었다. 감찰관의 권한은 매우 크므로 필요한 일부만 받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혼자서 원로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헌법상 지위를 바꾸고, 2차 조정헌법으로 알려진 개헌을 했다. 하지만 무언가 찝찝했는데, 이때 로마에서 전염병, 기근이 발생한다. 이때 이 전염병에 걸렸다가 회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전염병, 기근 발생 속에서 혼란에 빠진 민심 회복에 힘썼다. 그는 사비를 들여 모범을 보였는데, 이를 지켜본 로마 서민, 군인들은 그에게 "집정관을 앞으로 못 맡으면 독재관 책무라도 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하고, 원로원에게 이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2차 조정 헌법 속에서 파트리키임에도 사실상 종신 호민관이 된 발표 속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던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권한 아래 원로원을 소집해 민회에서 법안을 발의하고, 모든 법령을 거부할 수 있음에도, 이런 민심과 요구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추가로 독재관 권한과 매년 갱신되는 사실상의 영구 집정관 직을 수여받았다. 그는 로마와 이탈리아 안에서 집정관을 맡지 않고도, 그들보다 위엄있는 사람이 됐고, 로마 시민권자로 구성된 일반 군인과 퇴역병 가족들의 일방적 지지 속에서 군대 통수권과 함께 군대 통제에 필요한 명망까지 이때 저절로 받게 된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스스로는 모든 속주의 통제권을 원로원에게 되돌려준다고 선언하고, 독재관 직을 준 로마 서민의 요구를 임시라고 규정하면서 귀감을 얻게 됐다. 그와 동시에 그는 본인만이 가진 힘을 활용한다. 당시 로마에서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자신 이외에는 당시 변방에 해당하던 갓 정복한 속주들을 안정시킬 능력이 없었는데, 그는 2차 조정헌법과 기원전 22년 민회와 서민들이 쥐어준 추가 지위를 마치 원로원 대표 자격으로 봉사하겠다고 했다. 이때의 일들을 묶어 소위 제2차 조정이라고 한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사비로 행정관들을 고용해, 당시 로마가 관료제 취약 문제로 각 속주의 총독이 각자 재산을 써가며 사비로 행정관들을 고용한 일을 해결해줬다. 또 그는 단호하지만 항상 존중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원로원 안에서 의심을 품은 이들을 설득하고 견제하고 적절하게 구슬렸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그는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반역법을 다루고 재무관 자격에서 본인과 일가를 중상모략한 원로원, 기사계급들을 손보는 식으로 본인에게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철저히 보여줬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원로원은 몇몇 "혼란스러운" 속주들을 10년간 통제할 권한을 집정관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갓 정복된 갈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부족이 남은 히스파니아, 그리고 막강한 가상적국 파르티아에 맞서야 하는 시리아 등 로마 제국 대부분의 군사적 명령권이 필요한 속주를 관례적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임명권과 면직권을 주도록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모든 속주들의 총독을 겸임하게 된 자신의 권한으로 원로원 의원이나 에퀴테스 계급의 능력자들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해서 확실하게 장악한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후일 우리가 황제 속주라고 부르는 속주 임명권을 1차 조정헌법 체제에서와 달리 2차 조정헌법 후 일들 속에서 영구적으로 장악했고, 집정관으로서의 권한 외에도 그가 당시 로마제국 속주의 과반을 자신의 임지로 확보한다. 이는 곧 2차 조정 헌법 수정 속에서 속주에 따라가는 로마 군단의 지휘권 역시 대부분(26개 중 20개)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휘하에 들어온 결과로 이어진다. 즉, 2차 조정 헌법 체제 이후부터, 아우구스투스는 임페라토르라는 지위 속에 군사권 외의 행정, 사법에 관한 임페리움을 넣으면서,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황제의 전형을 완성했다. 그래서 2세기 후반 ~3세기 중반의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렇게 평하면서, 임페라토르가 로마인이 싫어하는 왕을 대신한 대체 칭호와 가깝게 됐음을 기술했다.
"이런 식으로 시민과 원로원의 권력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손에 넘어갔고, 그의 시대부터 엄밀히 말하면 두세 사람이 나중에 집권하게 되더라도 '군주'라는 가장 정확한 이름이 되도록 했다."
"로마인들이 군주제라는 이름을 너무 싫어해 임페라토르를 독재자나 왕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공식적으로 보유한 직위 및 권한은 다음과 같다. 먼저 명예직인 원로원 제일인자(Princeps)와 별 실권은 없지만 종교적으로 상당한 권위를 주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대부분의 속주들의 총독(Proconsul)직과 그에 딸려오는 군단들에 대한 임페리움, 자신이 총독인 속주들과 자신이 총독이 아닌 속주들 그리고 본국 이탈리아 전역에서의 임페리움 마이우스, 그리고 호민관 특권과 감찰관 특권. 이 모든 직위와 권한들 자체는 로마 공화국에 이미 있었다.
- 프린켑스(원로원 제일인자)는 원로원의 의원들 가운데 으뜸이란 뜻으로 본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같이 로마 공화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에게 수여되는 유서 깊고 명예로운 호칭이다. 물론 실권보다는 명예가 더 크기는 했으나 프린켑스 세나투스는 원로원에서 현대의 국회의장과 같은 역할을 부분적으로 수행했으며, 원로원을 대표해 외국과의 교섭을 맡았다. 때문에 기원전 28년 프린켑스로 취임하며 아우구스투스는 상징적 국가원수의 권한과 권위를 확보하였다.
-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는 왕정 시대 국왕이 가지던 제사와 종교의례의 최고지도자직을 계승해서 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있었던 직위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도 최고 제사장에 당선되어 암살당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고 이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차지했으나, 정계에서 은퇴당한 그가 기원전 13년 사망하면서 아우구스투스가 가져오게 된다. 고대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던 비불루스가 종교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모든 공무를 거부하고 카이사르의 행위가 무효라고 선언하는 등 종교가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때문에 최고 제사장은 기본적으로는 프린켑스처럼 명예직이었으나, 종교적 분쟁이 있을 때 함께 일하는 신관들의 총의를 모아 오늘날의 헌법재판소와 유사한 역할[13]을 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권위를 드높이는 것 외에도, 반대파가 종교적 이유를 내세울 경우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 제사장은 가치가 있었다.
- 프로콘술(총독)직은 로마가 제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처음으로 속주를 설치한 이래로 유서 깊은 직위였다.
-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총독의 최고 임페리움)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로마의 모든 속주 총독들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직권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신설한 것이지만 이 권한의 밑바탕이 된 총독의 임페리움이라는 개념은 로마 시민 모두에게 친숙했다.
- 켄소르(감찰관). 아우구스투스가 이 직위에 연속으로 취임한 것인지 그 특권만 받은 것인지는 학자들의 이견이 분분하지만 당대에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된 감찰관은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인구주택총조사를 실시하는 것이 주 업무이지만, 이 과정에 밝혀진 재산과 비리 등을 고발하여 원로원 의원의 직위를 상실시키는 것과 인구 조사를 통해 드러난 재산과 도덕성 등의 기준을 바탕으로 의석을 대체할 만한 사람을 추천하는 권한, 즉 원로원 의원의 사실상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재산, 도덕성과 자질을 근거로 귀족을 기사계급으로 강등시킬 권한도 있었다. 재산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덕성이니 자질이니 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원로원과 귀족 상대로 엄청난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찰관은 유구한 전통을 가지는 직위였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직위와 권한은 이미 로마 공화정 내에서 합법적으로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동시에 겸임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는 국가원수로서의 권위와 군 최고통수권, 그리고 입법부에 대한 인사권과 거부권까지 사실상의 군주로서 필수적인 세 권리를 합법적으로 모두 거머쥐었다. 현대로 비교하자면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군을 사유화하고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이 총리,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방부장관, 행정안전부장관, 경제부장관, 검찰총장, 주요 광역자치단체장, 종교지도자 자리를 모두 혼자 겸임하여 독재를 시작한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이 전대미문의 권한 집중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는 바야흐로 역사상 가장 독특한 군주정 중 하나인 로마 제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 외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개선장군으로서 평민들에게 막대한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아우구스투스는 한 가지 권한을 더 얻어낸다. 기원전 22년에 수도 로마에 식량난이 터져서 로마 전체가 혼란에 빠진 때가 있었는데, 평민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이와 같은 대 재해가 닥쳤을 때의 고대 로마의 전례에 따라 독재관에 취임하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출석하여 겸손하게 독재관 직위를 사양하는 대신 자신의 이집트 영지와 자신이 총독으로 부임해 있는 속주들로부터 대량의 식량을 공수하여 단번에 문제를 해결했다. 같은 일이 기원후 8년에도 터지자, 아우구스투스는 "보급 장관(Praefectus Annonae, 프라이펙투스 안노나이)" 직위를 신설하고 자신이 취임하여 로마 시민들의 목숨줄을 움켜쥐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수여받은 사실상의 제국 전역에 적용되는 임페리움 마이우스에는 한 가지의 부가효과가 더 있었다. 본래 개선식은 전쟁에서 이기거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 그 군단들의 임페리움을 보유하고 전투를 지휘했던 최고사령관이 개선장군이 되어 로마를 행진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거의 모든 로마 군단들의 최고사령관은 아우구스투스였다. 만약 아우구스투스가 총독 대리로 전선에 파견한 사령관이 군공을 세우면, 그것은 고스란히 공식적으로 그 군단들의 총사령관인 아우구스투스의 군공이 되어 개선식을 올릴 권리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주어졌다. 물론 현지 사령관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긴 했으나 명예와 영광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돌아간다는 것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얻은 시점부터 사실상 개선식은 오직 아우구스투스 혼자만이 올릴 수 있었고,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임기 중에 개선식을 여러번 벌여 평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높였다.
3.2. 군 통수권의 독점, 임페라토르 호칭의 정착 [편집]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는 현직 집정관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고위관직(Magistratus, 마기스트라투스)"들의 임페리움을 필요 시 직권으로 덮어쓸 수 있는 임페리움이다. 원래 1년 임기의 집정관이나, 또는 위기시에 독재관에게만 아주 짧게 부여되던 이런 광범위한 임페리움은, 야심가들의 꼼수나 지속되는 내전 때문에 임페리움 마이우스로 이름을 바꿔 기한을 늘려가며 점차 상설직으로 변하는 흐름을 거쳐 결국 황제의 영구적 권한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천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지만, 제정으로의 변화는 기존 로마 공화정의 헌정질서,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이 점차 유연화되고 붕괴되는 흐름의 연속선상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로마 공화정 시기 집정관을 포함하여 모든 로마의 정무관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임지와 임무 범위 내에서 임페리움을 보유한다.[16] 하지만 그보다 상위에 있는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이 요구하면 권한을 양보해야 했다. 가장 높은 임페리움은 독재관(Dictator, 딕타토르)의 것이었고, 독재관의 임페리움은 로마 공화국의 모든 것을 임지로 가진다. 다만 공화정 중기까지는 위기 때만 임명되는 6개월 임기의 비상설 독재관이 다른 정무관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다음이 집정관(Consul, 콘술)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전 공화국에 대한 임페리움을 가졌으나, 동료 집정관이 반대하거나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할 때는 이 임페리움을 뜻대로 사용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총독(Proconsul, 프로콘술)의 임페리움은 집정관 다음이며, 특정 속주와 그에 속하는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다.
공화정 전통이 유지되던 공화정 중기까지는 예외적 상황에서 독재관이 취임할 때를 빼면 집정관이 정국을 주도했으나, 공화정 후기 정쟁이 격화되고 전란이 장기화되는 상황이 닥친다. 공화정 후기의 정치적 거물들은 집정관에 취임한 상태에서조차 상대 붕당의 집요한 반대, 특히 호민관의 거부관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들은 점차 반대가 불가능한 독재관의 비상대권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17] 결국 술라와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6개월의 임기 대신,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에 취임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다만 술라와 카이사르 이후 독재관은 공포와 독선의 대명사가 되었고, 누구나 탐낼법한 초법적 권한이 있음에도 독재관 취임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임페리움 마이우스는 비록 새로 등장한 권한이기는 하나, 이와 같이 광범위한 영역에 대해 다른 총독들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임페리움을 특별법 형식을 빌어 수여하는 일은 전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양아버지의 정적인 폼페이우스다. 원로원은 지중해의 해적 소탕작전 당시 폼페이우스에게 그가 총사령관으로서 로마제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해야 했는데,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에 취임시키는 대신 특별법을 통해 "바다와 해안의 속주와 군대에 대한 3년 임기의 임페리움을 부여한 적이 있다. 물론 폼페이우스는 절대적 권한을 효율적으로 행사해 3개월 만에 임무를 완수하고 깔끔하게 이 전대미문의 임페리움을 내려놓았다. 다만 이는 특정인에게 장기간 임페리움을 부여할 수 있는 선례가 되어, 공화정 헌정의 붕괴로 이어지는 단초가 된다. 이를 본받은 2차 삼두정치의 구성원들은 제국을 셋으로 나눈 뒤 각자의 영역에 대한 5년 임기의 임페리움을 민회로부터 부여받아 전권을 행사하였다. 이후 안토니우스와의 내전 과정에서 삼두정치 구성원들에게 부여되었던 임페리움이 확장되어, 옥타비아누스에게 본국 이탈리아, 제국의 전체 속주와 군대에 대한 임페리움 마이우스가 부여되었다.
결국 내전 승리 후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제국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구실을 들어, 이탈리아와 안정된 후방의 임페리움은 내놓았지만 죽을 때까지 전방 속주와 주둔군에 대한 지휘권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다만 아우구스투스가 요구한 "총독의 최고 임페리움", 또는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는 다른 총독들의 임페리움보다는 높지만 집정관이나 독재관의 임페리움보다는 낮았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 안배로, 국가의 최고권력인 집정관이나 독재관의 임페리움보다는 낮으니 명목상 '최고 권력을 가진 독재자'의 이미지는 크게 희석되는 것이다.
애초에 아우구스투스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만 설치되는 비상설직(에 따르는 비상대권)과 국가적 영웅들에게 부여된 선례가 있는 특권과 존칭을 받았을 뿐이긴 하다. 그걸 한 몸에 집중시키고, 임기를 없앴을 뿐이지만 어찌됐든 공화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는 않았다. 호민관의 권리 회복을 외치며 내전에 나섰지만 결국 카이사르도 호민관의 거부권을 완력 행사로 무력화시킨 것처럼, 자신들도 절대 견딜 수 없던 호민관의 거부권만 빼면 공화정 국체의 핵심 요소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제정 시대에도 형식상 로마의 최고위 정무관은 당연히 집정관이었다. 때문에 내각제 국가의 명예직 대통령이 의전상 총리보다 앞서고 때때로 비상대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제정 시대에도 집정관은 매우 권위가 있었고 모든 귀족들이 꿈꾸는 자리였다. 또 제정 초중기까지도 잔존했던 집정관직의 권위 때문에, 내전기나 집권 초 권력이 불안정하던 황제들은 가급적 집정관 직을 겸임하여 반대파의 준동을 미연에 방지하려 애썼다. 그러다보니 원로원의 유력 인사들은 황제가 집정관 직에 자주 취임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지 않았고 이를 두고 갈등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자신들에게 돌아갈 집정관 T/O가 줄어들고, 황제가 이론상이긴 해도 공화정 시기부터 내려오는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들을 존중하며 정국을 운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방해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추가된다. 임시직인 독재관이야 임명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집정관 역시 황제가 겸임하거나 황제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사가 사실상 '임명'되는 상황에서 1년마다 바뀌며 심지어 제정 시대에는 집정관이 임기 1년을 채우는 일이 매우 드물어져 더더욱 황제의 권한을 견제하기가 힘들어졌다. 공화정 시대에 비해 늘어난 속주와 군대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총독으로 부임할 전직 집정관급 인사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정관들은 몇 달, 심하게는 며칠만 잠깐 재임한 뒤 보궐(Suffectus) 집정관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18] 그리고 집정관은 혼자서만 뽑히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황제 편을 들면서 반대할 동료가 있는 집정관의 임페리움이 발휘되는 것은 어려웠으며 설득이 안되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집정관 1명이 사임하면 다른 집정관도 사임하는 제도를 이용해서 골치아픈 자를 집정관 직책에서 쫒아냈다.
그러므로 집정관의 임페리움이 형식상 우위에 있다지만, 임기가 없는 종신직에 집정관과는 달리 임페리움을 공유하거나 견제할 사람도 없는 황제의 최고 총독 임페리움을 눌러버리는 상황이 일어나기 힘들어진 것이다.[19]
이런 상황에서 임페리움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임페라토르가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칭호로 정착되었다. 한때 임페리움 보유자를 의미하던 Imperator(임페라토르)는 공화정 후기 군 사령관, 그 중에서도 개선식의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존칭이 되었다. 내전 이후 아우구스투스에게 대부분의 속주와 주둔군에 대한 임페리움 마이우스가 부여되어 속주의 군 지휘관은 최고 임페리움을 가진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인으로 격하되었다. 자연스럽게 두 차례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둬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무공을 세웠고, 임페리움을 독점하게 된 아우구스투스만이 임페라토르로 불리게 되었다.
단순히 사령관 또는 개선장군을 일컫는 말이었던 임페라토르가 황제의 대표 호칭이 된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으나, 이 호칭에는 군주의 호칭이 되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쉽게 범접할 수 없을 수준으로 높은 권위가 있었다. 실제로 마리우스나 술라,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 등 화려한 전공을 올려 임페라토르로 환호받았던 이들은 독재자로 군림, 왕으로 등극하게 될 거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았다.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유권자이기도 했던 군단병들이 사령관을 자발적으로 "임페라토르!"로 부르며 환호하는 것은, 사령관에게 로마 귀족의 최고 영광이었던 개선식을 치를 자격이 있다고 승인하는 관례였다. 이후 개선식에서 군단병들과 전 로마인이 개선장군을 임페라토르로 칭하며 환호하는 일은 개선장군에게 부여되는 가장 특별한 영예였다. 또 특정 개인이 공화국을 뛰어넘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을 매우 경계했던 로마 공화국에서, 예외적으로 개선장군은 개선식 당일만큼은 종교적 권위를 드러내는 분장과 의상으로 치장하고 신에 가까운 존재로 추앙받았다. 따라서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에게만, 그것도 인생의 절정인 승리와 개선의 순간에만 허용되는 초월적 영예와 선망이 집약된 호칭이었다.[20]
로마 공화정 시기 집정관을 포함하여 모든 로마의 정무관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임지와 임무 범위 내에서 임페리움을 보유한다.[16] 하지만 그보다 상위에 있는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이 요구하면 권한을 양보해야 했다. 가장 높은 임페리움은 독재관(Dictator, 딕타토르)의 것이었고, 독재관의 임페리움은 로마 공화국의 모든 것을 임지로 가진다. 다만 공화정 중기까지는 위기 때만 임명되는 6개월 임기의 비상설 독재관이 다른 정무관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다음이 집정관(Consul, 콘술)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전 공화국에 대한 임페리움을 가졌으나, 동료 집정관이 반대하거나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할 때는 이 임페리움을 뜻대로 사용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총독(Proconsul, 프로콘술)의 임페리움은 집정관 다음이며, 특정 속주와 그에 속하는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다.
공화정 전통이 유지되던 공화정 중기까지는 예외적 상황에서 독재관이 취임할 때를 빼면 집정관이 정국을 주도했으나, 공화정 후기 정쟁이 격화되고 전란이 장기화되는 상황이 닥친다. 공화정 후기의 정치적 거물들은 집정관에 취임한 상태에서조차 상대 붕당의 집요한 반대, 특히 호민관의 거부관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들은 점차 반대가 불가능한 독재관의 비상대권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17] 결국 술라와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6개월의 임기 대신,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에 취임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다만 술라와 카이사르 이후 독재관은 공포와 독선의 대명사가 되었고, 누구나 탐낼법한 초법적 권한이 있음에도 독재관 취임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임페리움 마이우스는 비록 새로 등장한 권한이기는 하나, 이와 같이 광범위한 영역에 대해 다른 총독들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임페리움을 특별법 형식을 빌어 수여하는 일은 전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양아버지의 정적인 폼페이우스다. 원로원은 지중해의 해적 소탕작전 당시 폼페이우스에게 그가 총사령관으로서 로마제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해야 했는데,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에 취임시키는 대신 특별법을 통해 "바다와 해안의 속주와 군대에 대한 3년 임기의 임페리움을 부여한 적이 있다. 물론 폼페이우스는 절대적 권한을 효율적으로 행사해 3개월 만에 임무를 완수하고 깔끔하게 이 전대미문의 임페리움을 내려놓았다. 다만 이는 특정인에게 장기간 임페리움을 부여할 수 있는 선례가 되어, 공화정 헌정의 붕괴로 이어지는 단초가 된다. 이를 본받은 2차 삼두정치의 구성원들은 제국을 셋으로 나눈 뒤 각자의 영역에 대한 5년 임기의 임페리움을 민회로부터 부여받아 전권을 행사하였다. 이후 안토니우스와의 내전 과정에서 삼두정치 구성원들에게 부여되었던 임페리움이 확장되어, 옥타비아누스에게 본국 이탈리아, 제국의 전체 속주와 군대에 대한 임페리움 마이우스가 부여되었다.
결국 내전 승리 후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제국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구실을 들어, 이탈리아와 안정된 후방의 임페리움은 내놓았지만 죽을 때까지 전방 속주와 주둔군에 대한 지휘권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다만 아우구스투스가 요구한 "총독의 최고 임페리움", 또는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는 다른 총독들의 임페리움보다는 높지만 집정관이나 독재관의 임페리움보다는 낮았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 안배로, 국가의 최고권력인 집정관이나 독재관의 임페리움보다는 낮으니 명목상 '최고 권력을 가진 독재자'의 이미지는 크게 희석되는 것이다.
애초에 아우구스투스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만 설치되는 비상설직(에 따르는 비상대권)과 국가적 영웅들에게 부여된 선례가 있는 특권과 존칭을 받았을 뿐이긴 하다. 그걸 한 몸에 집중시키고, 임기를 없앴을 뿐이지만 어찌됐든 공화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는 않았다. 호민관의 권리 회복을 외치며 내전에 나섰지만 결국 카이사르도 호민관의 거부권을 완력 행사로 무력화시킨 것처럼, 자신들도 절대 견딜 수 없던 호민관의 거부권만 빼면 공화정 국체의 핵심 요소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제정 시대에도 형식상 로마의 최고위 정무관은 당연히 집정관이었다. 때문에 내각제 국가의 명예직 대통령이 의전상 총리보다 앞서고 때때로 비상대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제정 시대에도 집정관은 매우 권위가 있었고 모든 귀족들이 꿈꾸는 자리였다. 또 제정 초중기까지도 잔존했던 집정관직의 권위 때문에, 내전기나 집권 초 권력이 불안정하던 황제들은 가급적 집정관 직을 겸임하여 반대파의 준동을 미연에 방지하려 애썼다. 그러다보니 원로원의 유력 인사들은 황제가 집정관 직에 자주 취임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지 않았고 이를 두고 갈등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자신들에게 돌아갈 집정관 T/O가 줄어들고, 황제가 이론상이긴 해도 공화정 시기부터 내려오는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들을 존중하며 정국을 운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방해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추가된다. 임시직인 독재관이야 임명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집정관 역시 황제가 겸임하거나 황제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사가 사실상 '임명'되는 상황에서 1년마다 바뀌며 심지어 제정 시대에는 집정관이 임기 1년을 채우는 일이 매우 드물어져 더더욱 황제의 권한을 견제하기가 힘들어졌다. 공화정 시대에 비해 늘어난 속주와 군대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총독으로 부임할 전직 집정관급 인사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정관들은 몇 달, 심하게는 며칠만 잠깐 재임한 뒤 보궐(Suffectus) 집정관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18] 그리고 집정관은 혼자서만 뽑히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황제 편을 들면서 반대할 동료가 있는 집정관의 임페리움이 발휘되는 것은 어려웠으며 설득이 안되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집정관 1명이 사임하면 다른 집정관도 사임하는 제도를 이용해서 골치아픈 자를 집정관 직책에서 쫒아냈다.
그러므로 집정관의 임페리움이 형식상 우위에 있다지만, 임기가 없는 종신직에 집정관과는 달리 임페리움을 공유하거나 견제할 사람도 없는 황제의 최고 총독 임페리움을 눌러버리는 상황이 일어나기 힘들어진 것이다.[19]
이런 상황에서 임페리움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임페라토르가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칭호로 정착되었다. 한때 임페리움 보유자를 의미하던 Imperator(임페라토르)는 공화정 후기 군 사령관, 그 중에서도 개선식의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존칭이 되었다. 내전 이후 아우구스투스에게 대부분의 속주와 주둔군에 대한 임페리움 마이우스가 부여되어 속주의 군 지휘관은 최고 임페리움을 가진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인으로 격하되었다. 자연스럽게 두 차례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둬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무공을 세웠고, 임페리움을 독점하게 된 아우구스투스만이 임페라토르로 불리게 되었다.
단순히 사령관 또는 개선장군을 일컫는 말이었던 임페라토르가 황제의 대표 호칭이 된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으나, 이 호칭에는 군주의 호칭이 되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쉽게 범접할 수 없을 수준으로 높은 권위가 있었다. 실제로 마리우스나 술라,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 등 화려한 전공을 올려 임페라토르로 환호받았던 이들은 독재자로 군림, 왕으로 등극하게 될 거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았다.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유권자이기도 했던 군단병들이 사령관을 자발적으로 "임페라토르!"로 부르며 환호하는 것은, 사령관에게 로마 귀족의 최고 영광이었던 개선식을 치를 자격이 있다고 승인하는 관례였다. 이후 개선식에서 군단병들과 전 로마인이 개선장군을 임페라토르로 칭하며 환호하는 일은 개선장군에게 부여되는 가장 특별한 영예였다. 또 특정 개인이 공화국을 뛰어넘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을 매우 경계했던 로마 공화국에서, 예외적으로 개선장군은 개선식 당일만큼은 종교적 권위를 드러내는 분장과 의상으로 치장하고 신에 가까운 존재로 추앙받았다. 따라서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에게만, 그것도 인생의 절정인 승리와 개선의 순간에만 허용되는 초월적 영예와 선망이 집약된 호칭이었다.[20]
3.3. 직위와 칭호의 세습, 제정의 제도화 [편집]
아우구스투스가 수여받은 직위들 중 임페리움 마이우스와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재산이었다. 즉, 로마 공화국의 상속법에 따라 그는 자신이 지정한 사람에게 이 전대미문의 막강한 권한을 상속해 줄 수 있었다.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대통령 직위 자체는 상속되는 것이 아니지만, 각료·국회의원·법관·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인사권과 국군통수권, 국회 입법에 대한 거부권 등은 현직 대통령이 자기 후계자에게 상속할 수 있으며, 이 권한을 상속받은 사람에게 국회가 대통령 직위를 사후승인 같은 느낌으로 부여하는 형식이었다.
현대 민주공화국 국민의 관점에서 공직을 재산으로 여겨 친족에게 상속한다는 개념은 미친 일 같겠지만 전근대에는 그다지 특이한 개념이 아니었다. 애초에 세습군주정 자체가 권력을 사유재산으로 취급함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관직을 돈을 주고 산 일종의 재산으로 여겨 자식에게 물려주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유럽의 공작, 후작, 백작 등의 작위도 그 유래가 로마 시대 관직에서 비롯되는 것들도 있다.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는 치세 후반기가 되면, 어떤 로마인도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한 로마인이 됐다. 본인은 《업적론》에 단 한번도 조상들의 관습에 어긋난 일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술라, 카이사르조차 대놓고 휘두르지 못한 것을 교묘한 술수로 완전히 장악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개인을 넘어선 포메리움(pomerium)이었다. 포메리움이란 '도시(로마 시)와 로마 공화국이 통제하는 도시 주변의 종교적 경계'를 뜻했다. 법적인 측면에서는 전통적으로 오직 로마는 포메리움에서만 존재했고, 그 너머의 모든 것이란 단순히 로마에 속한 영토, 즉 속주와 동맹국 정도만을 의미했다. 따라서 로마인이 말하는 국가란 곧 포메리움이 미치는 영역을 의미했다.[21] 또 "존엄한 본국"인 포메리움 안에서는 모든 로마인은 무기를 휴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치세 후기가 되면 이 포메리움을 완벽히 손에 넣고 법리적으로 본인과 포메리움을 동일시 시키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그의 앞과 그 주변에서 무기를 휴대하는 것은 일반인에게는 금지되었으며, 오직 본인과 그의 직접 지시를 받는 프라이토리아니 경호대에게만 허용되었다. 그는 호민관 특권에 포함된 신변 불가침권 외에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했는데, 단순히 호민관 특권으로만 보호되던 시절에는 그는 민형사상 면책특권을 누리며 그 개인에 대한 침해만이 내란죄나 내란목적살인죄로 처단되었을 뿐이지만, 포메리움과 동일시된 이후로는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 자체가 반역죄로 처벌되게 되었으며 그에게 적대하는 자는 원로원이 그라쿠스 형제에게 그러했듯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었다.
물론, 이를 위해 그는 수십년 동안 이를 천천히 체득하는데 많은 정치적 사건을 경험해야 했다. 로마법 체계 내에서 많은 논리적 비약과 적절한 입법을 통해 "아우구스투스=국가"로 해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암살 미수 음모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반역죄를 활용했다. 기원전 80년 술라가 자신의 무소불위 권력을 쥘 때의 절차를 거울 삼아 서기 4년 전후로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권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아우구스투스가 또 한 가지 마련해둔 권력의 장치는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개념이었다. 그가 양자로 삼은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사망 이후, 그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전남편 소생의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입양하고 공석이 된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자리에 혈육인 클라우디우스를 앉혔다. 이때 그는 이 두 사람을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묶어두었는데, 이를 통해 양자 티베리우스의 계승권을 확실히 잡아둠과 동시에 자신의 혈육들에게도 자신의 권위가 상속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둔다.
그리고 자신 일가의 또 다른 칭호로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자", 즉 게르마니쿠스라는 큰 권위를 내포한 이름을 내세웠는데, 이는 자신이 친아들이라고 여겨 후계자로 점찍어두었던 대 드루수스(티베리우스의 동생)가 게르마니아 공략을 통해 얻었던 명예로운 칭호였으나 대 드루수스가 요절하자 대 드루수스의 장남의 프라이노멘(개인이름)을 아예 게르마니쿠스로 삼아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하였다. 즉,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될 남자는 게르마니쿠스라는 명예로운 이름과 대 드루수스의 좋은 이미지까지 물려받도록 조치해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도 제대로 작동하여 티베리우스 황제와 그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달리, 대 드루수스와 그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및 게르마니쿠스의 세 아들(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칼리굴라)은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대 드루수스가 처음 받은 존칭 '게르마니쿠스'로 불리면서 아우구스투스 직계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인식됐다.
그는 본인과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요절한 대 드루수스, 살아 있는 티베리우스 그리고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를 콕 집어 포메리움과 모스 마이오룸의 모범자이자 수호자로 규정하면서 아우구스투스 가문으로 명명했다. 이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클라우디우스 등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동일시되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및 중역의 자리를 마련해주어 친위세력으로 육성함과 동시에,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범주를 통해 황제위 (즉, 위의 임페라토르를 비롯한 모든 직책을 겸임하게 될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 계승권과 가까운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간의 구분 역시 교묘하게 만들어 두었다.
이와 같은 분배를 통해 그는 임페라토르, 호민관 특권, 폰티펙스 막시무스 등의 직책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가 물려받는 것으로 구체화시켜 합법적으로 이 직위를 세습시킬 수 있는 구도를 잡아두었다. 따라서 이 직책들은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 직위가 돌아가는 순서인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순으로 합법적으로 세습되도록 설계되었다. 이때 죽은 대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일원으로 포함된 덕분에 후일의 클라우디우스 1세가 제위를 승계할 기반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공화정 전통 그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공화정 시기의 기억이 남아 있던 당대 로마인들에게 임페라토르는 여전히 개선장군만이 일시적으로 받을 수 있는 대단히 영예롭고 선망받는 호칭이었다. 이 호칭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위뿐만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전공이 뒷받침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화정 후기에는 사소한 공을 세운 지휘관들조차 개선식을 위해 휘하 병사들에게 자신을 임페라토르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당장 그런 무리한 요구 자체가 빈축을 샀으며 정치적 사정으로 이런 경우에도 개선식이 허용되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당연히 당대 로마인들도 이름뿐인 개선식과 '임페라토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빠르게 잊혀졌다. 따라서 작은 공적을 들먹이면서 억지로 개선식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었고 이는 자신의 후계자들이 모두의 경외를 살 권위를 갖기를 원했던 아우구스투스의 그림과는 맞지 않았고 나아가 황제의 정통성까지 흔들리게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제정이 확립된 시대의 후대 황제들과는 달리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등 후계자 후보들을 최전선에 파견해 앞으로 받게 될 임페라토르 호칭에 어울리는 군공을 쌓도록 하고, 개선식을 치러주며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은 일정 수준 정도로는 성과를 거두어서 아우구스투스가 원래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던 대 드루수스는 그의 판단, 계획대로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1세 같은 스타일의 병력운용, 능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는 낙마 사고로 현직 집정관 신분으로 약식 개선식 직전 요절했다.
그리고 부적절한 경우도 많아서 티베리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밑에서 군사 참관 수업을 시작으로 경력을 쌓은,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만 20세도 안 된 나이에 동방 시찰과 대 파르티아 외교 교섭이라는 나이에 비해 매우 무거운 임무를 맡았다가 실패하고 객사했고,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군복무를 위해 히스파니아로 가던 중 중간 기착지 마르세유에서 병사했다. 이중 가이우스 카이사르 사례는 비슷한 나이 대의 대 드루수스가 알페스 산맥 파견 근무 후 갈리아 전역을 관할한 총독 역을 맡김과 비슷했다.
워낙 무리했던 조치라서 가이우스의 후계자 등극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투스가 노망이 나 자기 핏줄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욕심에, 함량미달 철부지를 내세웠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후의 제위 후계자들은 가이우스 나이 때 로마에서 제왕수업을 받았지 노회한 정치인에게나 어울리는 막중한 임무를 받고 외지에 파견되지는 않았고, 나이에 비해 지나친 부담이었다는 점은 참작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핏줄들을 매우 아끼기는 했지만, 권력구도 문제에서는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판단을 일관되게 해온 아우구스투스가 유독 두 손자에게만 팔불출 할아버지처럼 굴었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우구스투스가 두 후계자들을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미증유의 제위세습을 위해 급히 실적을 만들어야만 하던 사정이 있었다. 공화정기의 기억이 남아 있던 시기에 원로, 실력자와 영웅들에게 수여되던 관직과 명예로운 호칭[22]들로 정당화되던 황제 자리를 사상 최초로 세습하려면 이에 걸맞은 실적을 쌓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실패는 개인적 역량부족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시대상황으로 인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음도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서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이런 임무를 무리하게 맡긴 건, 아우구스투스의 높은 기대 때문이기도 했으니 자신이 고작 18살에 혼란의 도가니탕이자 위험도가 매우 높은 로마의 정치판에 올라가서 아우구스투스까지 올라갔으니 자신의 핏줄이라면 그 때에 비해서는 난이도가 한참 낮은 수준의 난관을 돌파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믿은 것이다. 자수성가해서 큰 일을 이룩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도 본인만큼은 아니지만 뛰어난 인재로 착각하고 임무를 부여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실수로 보통 이런 경우에는 해당인의 수준이 천재 소리를 들을 수준으로 높으므로 일반인에 대한 기준점을 너무 높아서 수재급 인물을 일반인 수준으로 본다는 문제가 있다.[23]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귀국을 거부하고 그곳에서 아르메니아 사건으로 입은 상처로 요절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양손자들로 누나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들인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후일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주목했다. 이는 엄연히 원로원, 로마 귀족적 전통상 친혈육 후광, 보호자로 있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술한 특성상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형제는 아직 군복무 경험이 없고, 이중 둘째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그에게 큰 고민을 안겼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집권 뒤 꾸준히 쓴 《업적론》에서 '내 아들'이라고 계속 언급해온,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중간 다리로서 살아생전 이를 물려주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서기 12년 10월,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24]의 이름으로 거행된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으로 화려하게 공개한다.
물론 이때도 그는 공화정의 전통과 자신의 정치적 기술을 교묘히 섞어 사용했다. 먼저 아우구스투스는 40년 넘게 개인이 단독으로 로마 통치권을 합법적으로 쥐고, 죽을 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그 통치권을 물려주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는 수십년동안 지속된 아주 자연스럽고 교묘한 작업이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인들은 자연스레 그와 그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카이사르 가문)의 승계를 겉으로는 반대하지 못했고, 이를 원로원조차 과반수 이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건 후대의 사건에서도 입증되는데 서기 41년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이 유피테르 신전에서 소집될 당시, 원로원 회의에서는 대부분 참석자들은 공화정 복귀를 원했다. 그렇지만 정작 회의 내내 공화정이 유지되고 있는데, 굳이 선언해야 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계속 나왔을 정도로 그 해석에 대해 논의가 계속되었다. 또 "이 기회에 카이사르 가문 사람 내 남자 후계자에게 나라를 맡겨선 안 된다."라는 말이 나왔고 이 부분도 주제로 논쟁을 이어갔는데, 대략 결론은 "임페라토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가장인 아우구스투스의 사유재산이며 따라서 그 권한은 카이사르 가문의 가장이 상속받아야 한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도 부모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며, 율리우스 씨족이 클라우디우스 씨족이고 카이사르 가문이 네로 가문인건 자명하다. 클라우디우스도 카이사르 가문 소속 남성인데 반대할 이유가 없으며,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식이었다.
또 그는 정적 제거 수단으로 두 가지의 무기를 만들어내거나 지위를 이용해 활용했다. 그것이 바로 율리우스 간통법과 반역 처벌법인데, 반역죄 처벌법은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 '제1차 국가 조정' 조치 후 원로원에게 합법적으로 국가 원수로 인정받으면서 얻어낸 결과이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기원전 2년 '파테르 파트리아이(조국의 아버지)'라는 거창한 칭호를 원로원에게 수여받아 로마 공화국의 재건자이자 공화정 회복의 수호자로 확고하게 올라섰다.
이렇게 모든 작업을 자연스레 마무리지은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5년 이래 제위계승계획을 순조롭게 꾸밀 수 있었다. 그는 76회 생일을 앞두고 완벽하게 본인이 가진 임페라토르라는 합법적 지위 등을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고스란히 물려줬다.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공화정 시대의 전통처럼 스스로 나이가 고령임을 들어 연회와 원로원 회의에 참가하지 않는 등 공적 업무에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와 본인의 두 혈육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를 위한 각종 영예와 특권을 합법적으로 자연스레 받아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는 임페라토르 직을 유지했으며, 군통수권과 호민관 특권 등도 내놓지 않았다. 그는 포메리움의 현세이자 상징이었기 때문에 공식 활동을 줄여 나가도, 영원히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
이런 까닭에 혼란스러운 내전없이 14년 8월 19일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의 추인아래 로마 건국 이래 최초의 부자상속으로 권력을 쥐게 된다. 물론, 이런 순조로움을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며칠 전 프라이토리아니를 티베리우스 사저 주변에 배치해 경호하게 한다. 그러면서 두 근위대장을 두 집정관에게 보내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충성한다."는 충성서약을 받아낸 뒤, 두 집정관을 압박해 원로원을 소집하라고 한 뒤, 두 집정관이 자발적으로 원로원 전체에게 '일개 원로원 의원'임을 무한하게 강조한 티베리우스에게 단체로 충성을 다짐하는 자리를 만들게 했다.[25] 또 자신의 장례식에 프라이토리아니를 각 대대별로 도열하게 하고, 아우구스투스 가문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단체로 외치게 하면서 로마 시가지를 행진하도록 했다. 여기에 덧붙여 티베리우스 이후에도 자신의 혈육과 가문이 그 다음 순위의 임페라토르라는 것도 얻어냈다.
현대 민주공화국 국민의 관점에서 공직을 재산으로 여겨 친족에게 상속한다는 개념은 미친 일 같겠지만 전근대에는 그다지 특이한 개념이 아니었다. 애초에 세습군주정 자체가 권력을 사유재산으로 취급함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관직을 돈을 주고 산 일종의 재산으로 여겨 자식에게 물려주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유럽의 공작, 후작, 백작 등의 작위도 그 유래가 로마 시대 관직에서 비롯되는 것들도 있다.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는 치세 후반기가 되면, 어떤 로마인도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한 로마인이 됐다. 본인은 《업적론》에 단 한번도 조상들의 관습에 어긋난 일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술라, 카이사르조차 대놓고 휘두르지 못한 것을 교묘한 술수로 완전히 장악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개인을 넘어선 포메리움(pomerium)이었다. 포메리움이란 '도시(로마 시)와 로마 공화국이 통제하는 도시 주변의 종교적 경계'를 뜻했다. 법적인 측면에서는 전통적으로 오직 로마는 포메리움에서만 존재했고, 그 너머의 모든 것이란 단순히 로마에 속한 영토, 즉 속주와 동맹국 정도만을 의미했다. 따라서 로마인이 말하는 국가란 곧 포메리움이 미치는 영역을 의미했다.[21] 또 "존엄한 본국"인 포메리움 안에서는 모든 로마인은 무기를 휴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치세 후기가 되면 이 포메리움을 완벽히 손에 넣고 법리적으로 본인과 포메리움을 동일시 시키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그의 앞과 그 주변에서 무기를 휴대하는 것은 일반인에게는 금지되었으며, 오직 본인과 그의 직접 지시를 받는 프라이토리아니 경호대에게만 허용되었다. 그는 호민관 특권에 포함된 신변 불가침권 외에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했는데, 단순히 호민관 특권으로만 보호되던 시절에는 그는 민형사상 면책특권을 누리며 그 개인에 대한 침해만이 내란죄나 내란목적살인죄로 처단되었을 뿐이지만, 포메리움과 동일시된 이후로는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 자체가 반역죄로 처벌되게 되었으며 그에게 적대하는 자는 원로원이 그라쿠스 형제에게 그러했듯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었다.
물론, 이를 위해 그는 수십년 동안 이를 천천히 체득하는데 많은 정치적 사건을 경험해야 했다. 로마법 체계 내에서 많은 논리적 비약과 적절한 입법을 통해 "아우구스투스=국가"로 해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암살 미수 음모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반역죄를 활용했다. 기원전 80년 술라가 자신의 무소불위 권력을 쥘 때의 절차를 거울 삼아 서기 4년 전후로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권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아우구스투스가 또 한 가지 마련해둔 권력의 장치는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개념이었다. 그가 양자로 삼은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사망 이후, 그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전남편 소생의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입양하고 공석이 된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자리에 혈육인 클라우디우스를 앉혔다. 이때 그는 이 두 사람을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묶어두었는데, 이를 통해 양자 티베리우스의 계승권을 확실히 잡아둠과 동시에 자신의 혈육들에게도 자신의 권위가 상속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둔다.
그리고 자신 일가의 또 다른 칭호로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자", 즉 게르마니쿠스라는 큰 권위를 내포한 이름을 내세웠는데, 이는 자신이 친아들이라고 여겨 후계자로 점찍어두었던 대 드루수스(티베리우스의 동생)가 게르마니아 공략을 통해 얻었던 명예로운 칭호였으나 대 드루수스가 요절하자 대 드루수스의 장남의 프라이노멘(개인이름)을 아예 게르마니쿠스로 삼아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하였다. 즉,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될 남자는 게르마니쿠스라는 명예로운 이름과 대 드루수스의 좋은 이미지까지 물려받도록 조치해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도 제대로 작동하여 티베리우스 황제와 그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달리, 대 드루수스와 그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및 게르마니쿠스의 세 아들(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칼리굴라)은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대 드루수스가 처음 받은 존칭 '게르마니쿠스'로 불리면서 아우구스투스 직계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인식됐다.
그는 본인과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요절한 대 드루수스, 살아 있는 티베리우스 그리고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를 콕 집어 포메리움과 모스 마이오룸의 모범자이자 수호자로 규정하면서 아우구스투스 가문으로 명명했다. 이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클라우디우스 등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동일시되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및 중역의 자리를 마련해주어 친위세력으로 육성함과 동시에,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범주를 통해 황제위 (즉, 위의 임페라토르를 비롯한 모든 직책을 겸임하게 될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 계승권과 가까운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간의 구분 역시 교묘하게 만들어 두었다.
이와 같은 분배를 통해 그는 임페라토르, 호민관 특권, 폰티펙스 막시무스 등의 직책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가 물려받는 것으로 구체화시켜 합법적으로 이 직위를 세습시킬 수 있는 구도를 잡아두었다. 따라서 이 직책들은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 직위가 돌아가는 순서인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순으로 합법적으로 세습되도록 설계되었다. 이때 죽은 대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일원으로 포함된 덕분에 후일의 클라우디우스 1세가 제위를 승계할 기반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공화정 전통 그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공화정 시기의 기억이 남아 있던 당대 로마인들에게 임페라토르는 여전히 개선장군만이 일시적으로 받을 수 있는 대단히 영예롭고 선망받는 호칭이었다. 이 호칭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위뿐만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전공이 뒷받침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화정 후기에는 사소한 공을 세운 지휘관들조차 개선식을 위해 휘하 병사들에게 자신을 임페라토르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당장 그런 무리한 요구 자체가 빈축을 샀으며 정치적 사정으로 이런 경우에도 개선식이 허용되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당연히 당대 로마인들도 이름뿐인 개선식과 '임페라토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빠르게 잊혀졌다. 따라서 작은 공적을 들먹이면서 억지로 개선식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었고 이는 자신의 후계자들이 모두의 경외를 살 권위를 갖기를 원했던 아우구스투스의 그림과는 맞지 않았고 나아가 황제의 정통성까지 흔들리게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제정이 확립된 시대의 후대 황제들과는 달리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등 후계자 후보들을 최전선에 파견해 앞으로 받게 될 임페라토르 호칭에 어울리는 군공을 쌓도록 하고, 개선식을 치러주며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은 일정 수준 정도로는 성과를 거두어서 아우구스투스가 원래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던 대 드루수스는 그의 판단, 계획대로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1세 같은 스타일의 병력운용, 능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는 낙마 사고로 현직 집정관 신분으로 약식 개선식 직전 요절했다.
그리고 부적절한 경우도 많아서 티베리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밑에서 군사 참관 수업을 시작으로 경력을 쌓은,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만 20세도 안 된 나이에 동방 시찰과 대 파르티아 외교 교섭이라는 나이에 비해 매우 무거운 임무를 맡았다가 실패하고 객사했고,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군복무를 위해 히스파니아로 가던 중 중간 기착지 마르세유에서 병사했다. 이중 가이우스 카이사르 사례는 비슷한 나이 대의 대 드루수스가 알페스 산맥 파견 근무 후 갈리아 전역을 관할한 총독 역을 맡김과 비슷했다.
워낙 무리했던 조치라서 가이우스의 후계자 등극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투스가 노망이 나 자기 핏줄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욕심에, 함량미달 철부지를 내세웠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후의 제위 후계자들은 가이우스 나이 때 로마에서 제왕수업을 받았지 노회한 정치인에게나 어울리는 막중한 임무를 받고 외지에 파견되지는 않았고, 나이에 비해 지나친 부담이었다는 점은 참작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핏줄들을 매우 아끼기는 했지만, 권력구도 문제에서는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판단을 일관되게 해온 아우구스투스가 유독 두 손자에게만 팔불출 할아버지처럼 굴었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우구스투스가 두 후계자들을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미증유의 제위세습을 위해 급히 실적을 만들어야만 하던 사정이 있었다. 공화정기의 기억이 남아 있던 시기에 원로, 실력자와 영웅들에게 수여되던 관직과 명예로운 호칭[22]들로 정당화되던 황제 자리를 사상 최초로 세습하려면 이에 걸맞은 실적을 쌓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실패는 개인적 역량부족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시대상황으로 인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음도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서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이런 임무를 무리하게 맡긴 건, 아우구스투스의 높은 기대 때문이기도 했으니 자신이 고작 18살에 혼란의 도가니탕이자 위험도가 매우 높은 로마의 정치판에 올라가서 아우구스투스까지 올라갔으니 자신의 핏줄이라면 그 때에 비해서는 난이도가 한참 낮은 수준의 난관을 돌파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믿은 것이다. 자수성가해서 큰 일을 이룩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도 본인만큼은 아니지만 뛰어난 인재로 착각하고 임무를 부여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실수로 보통 이런 경우에는 해당인의 수준이 천재 소리를 들을 수준으로 높으므로 일반인에 대한 기준점을 너무 높아서 수재급 인물을 일반인 수준으로 본다는 문제가 있다.[23]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귀국을 거부하고 그곳에서 아르메니아 사건으로 입은 상처로 요절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양손자들로 누나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들인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후일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주목했다. 이는 엄연히 원로원, 로마 귀족적 전통상 친혈육 후광, 보호자로 있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술한 특성상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형제는 아직 군복무 경험이 없고, 이중 둘째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그에게 큰 고민을 안겼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집권 뒤 꾸준히 쓴 《업적론》에서 '내 아들'이라고 계속 언급해온,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중간 다리로서 살아생전 이를 물려주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서기 12년 10월,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24]의 이름으로 거행된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으로 화려하게 공개한다.
물론 이때도 그는 공화정의 전통과 자신의 정치적 기술을 교묘히 섞어 사용했다. 먼저 아우구스투스는 40년 넘게 개인이 단독으로 로마 통치권을 합법적으로 쥐고, 죽을 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그 통치권을 물려주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는 수십년동안 지속된 아주 자연스럽고 교묘한 작업이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인들은 자연스레 그와 그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카이사르 가문)의 승계를 겉으로는 반대하지 못했고, 이를 원로원조차 과반수 이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건 후대의 사건에서도 입증되는데 서기 41년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이 유피테르 신전에서 소집될 당시, 원로원 회의에서는 대부분 참석자들은 공화정 복귀를 원했다. 그렇지만 정작 회의 내내 공화정이 유지되고 있는데, 굳이 선언해야 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계속 나왔을 정도로 그 해석에 대해 논의가 계속되었다. 또 "이 기회에 카이사르 가문 사람 내 남자 후계자에게 나라를 맡겨선 안 된다."라는 말이 나왔고 이 부분도 주제로 논쟁을 이어갔는데, 대략 결론은 "임페라토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가장인 아우구스투스의 사유재산이며 따라서 그 권한은 카이사르 가문의 가장이 상속받아야 한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도 부모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며, 율리우스 씨족이 클라우디우스 씨족이고 카이사르 가문이 네로 가문인건 자명하다. 클라우디우스도 카이사르 가문 소속 남성인데 반대할 이유가 없으며,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식이었다.
또 그는 정적 제거 수단으로 두 가지의 무기를 만들어내거나 지위를 이용해 활용했다. 그것이 바로 율리우스 간통법과 반역 처벌법인데, 반역죄 처벌법은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 '제1차 국가 조정' 조치 후 원로원에게 합법적으로 국가 원수로 인정받으면서 얻어낸 결과이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기원전 2년 '파테르 파트리아이(조국의 아버지)'라는 거창한 칭호를 원로원에게 수여받아 로마 공화국의 재건자이자 공화정 회복의 수호자로 확고하게 올라섰다.
이렇게 모든 작업을 자연스레 마무리지은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5년 이래 제위계승계획을 순조롭게 꾸밀 수 있었다. 그는 76회 생일을 앞두고 완벽하게 본인이 가진 임페라토르라는 합법적 지위 등을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고스란히 물려줬다.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공화정 시대의 전통처럼 스스로 나이가 고령임을 들어 연회와 원로원 회의에 참가하지 않는 등 공적 업무에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와 본인의 두 혈육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를 위한 각종 영예와 특권을 합법적으로 자연스레 받아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는 임페라토르 직을 유지했으며, 군통수권과 호민관 특권 등도 내놓지 않았다. 그는 포메리움의 현세이자 상징이었기 때문에 공식 활동을 줄여 나가도, 영원히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
이런 까닭에 혼란스러운 내전없이 14년 8월 19일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의 추인아래 로마 건국 이래 최초의 부자상속으로 권력을 쥐게 된다. 물론, 이런 순조로움을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며칠 전 프라이토리아니를 티베리우스 사저 주변에 배치해 경호하게 한다. 그러면서 두 근위대장을 두 집정관에게 보내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충성한다."는 충성서약을 받아낸 뒤, 두 집정관을 압박해 원로원을 소집하라고 한 뒤, 두 집정관이 자발적으로 원로원 전체에게 '일개 원로원 의원'임을 무한하게 강조한 티베리우스에게 단체로 충성을 다짐하는 자리를 만들게 했다.[25] 또 자신의 장례식에 프라이토리아니를 각 대대별로 도열하게 하고, 아우구스투스 가문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단체로 외치게 하면서 로마 시가지를 행진하도록 했다. 여기에 덧붙여 티베리우스 이후에도 자신의 혈육과 가문이 그 다음 순위의 임페라토르라는 것도 얻어냈다.
3.4. 후계 계승의 불안정성 [편집]
아우구스투스가 심혈을 기울여서 로마 황제라는 제도 자체는 확립해놓았으나 로마 황제의 계승에 대해서는 불안정성 및 혼란이 지속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친아들이 없기 때문이다. 군주제에서는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서 군주의 친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며, 친아들이 2명 이상이라면 그 중에서 적장자가 계승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서 왕위 계승에 문제가 없도록 했고 아우구스투스도 당연하게도 자신의 가문과 핏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도입하게 된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에게 친아들이 없었다. 그리고 로마는 일부일처제로 공식적인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낳은 자식만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사생아에게도 재산의 일부를 준다던지 하는 배려는 있으나 공식적으로 아버지나 어머니의 직위나 직책을 상속받지는 못한다. 이런 점은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나 얼자와는 다른 것으로 서자나 얼자는 적자보다 등급이 내려가지만 혼인관계에 의한 자식으로 인정받으며 적자가 없다거나 하면 가문을 계승받을 권리가 주어진다.
물론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면 다산을 장려해도 자식이 없거나 딸만 낳거나 해서 가문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고대 로마에서는 양자제도를 활용하고 딸에게도 상속권을 부여해주는 등의 보완장치를 마련했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귀족가문을 보면 종종 딸과 결혼한 사위가 장인의 양자로 입적되어 가문을 계승하거나 딸이 낳은 자식 중 한명을 외가에 양자로 보내서 가문을 계승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아우구스투스도 이런 점에 착안해서 자신의 딸로 핏줄을 이어주는 방식으로 황제의 세습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태종의 역할을 담당해서 로마 제국을 안정화시키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확립시켜야 할 임무가 주어진 티베리우스를 징검다리 황제로 만든 것이 큰 실책이었다. 티베리우스도 형식상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들어가긴 했으나 혈연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와 전혀 연관이 없으므로 아우구스투스의 딸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 입장에서는 가급적 빠르게 로마 황제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라도 이들과 한 판 붙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아우구스투스가 핏줄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딸이 낳은 자식에게도 계승권을 주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군주국에서 국왕의 측근이 되는 외척이 사라지고 모두가 황위 계승 경쟁자가 되는 막장사태가 발생한다. 원래 외척이 국왕의 측근이 되는 이유는 외척은 스스로는 국왕이 될 수 없기 때문인데 이러한 제한을 모조리 풀어놓았으니 모조리 제위를 향해 달려나가는 계승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부터 네로에 이르는 계승과정이 매우 혼란스럽게 전개되었으며 집권한 황제는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친척들을 제거했다. 물론 친척들도 서로간에 제위 계승을 두고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황제의 자식을 독살하거나 하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 애초에 황제건 친척이건 간에 제위계승서열은 거기서 거기였으며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이은 것도 황제나 친척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이어질수록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이은 사람은 극도로 줄어들기 시작하여 네로의 통치시기 중반에 도달하면 도저히 황위 계승이 불가능할 수준으로 멀어진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하면 황가가 사실상 씨가 말랐으며 수틀리면 돌아설 가능성이 높은 동맹 귀족 가문들만 남게 된다.
결국 후계 계승의 불안정성을 가져온 것은 아우구스투스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황위 계승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핏줄로 이어지는 혈연관계가 중요하지만 본인에게 친아들이 없다면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고 티베리우스로 시작되는 적장자 계승 체제를 만들며 아우구스투스의 딸이 낳은 자식들은 티베리우스의 자식과 혼인을 이어나가는 별도의 황비 가문을 만드는 것이 적절했다. 애초에 아우구스투스가 핏줄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서 신이 이미 아우구스투스에게 로마를 준 만큼 직계 후손이 로마 황제가 되는 것은 안되는 것으로 등가교환을 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하니 신의 분노를 사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말이 당대에도 있을 정도로 아우구스투스의 변칙적인 황위계승방식은 당대에도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징검다리 황제가 되는 바람에 원래는 우군이어야 할 황족들의 공격을 받는 등 고생이 심했으나 어찌되었든 로마 황제라는 자리를 확고하게 확립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제정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면서 황제 계승 후보자가 최전선에 나가야만 하는 관행도 클라우디우스 이후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처럼 휘하 장군들이 수행한 전쟁도 황제의 공으로 인정되어 자연스럽게 개선식을 치르게 되며 정리된다. 그래도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 앉아서 서류만 만지지 않고 직접 출정했음을 보이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잠깐이나마 브리타니아를 방문해야 했다. 그러면서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만이 불릴 수 있는 칭호에서, 자연스럽게 황제 가문이 세습하는 칭호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황족들이 서로 무한경쟁을 하며 서로 죽여대는 상황인지라 제위 계승이 말 그대로 혼란의 도가니탕에 빠졌고 황족들의 숫자가 줄어들며 제위 계승이 불투명하게 변했다. 따라서 칭호와 권한의 세습을 통해 자신의 혈통이 제위를 이어나가기를 바란 아우구스투스의 바람과 달리, 네로가 68년 원로원과 군대에게 불신임을 받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일가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이후 로마는 네 황제의 해라는 내전을 거쳐 69년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 아래에서 안정을 찾는다. 네 황제의 해 이후로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마지막 남계 후손 네로가 사망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가문은 멸문당했다. 이때, 혼란을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제위를 승계하며 자신의 제호에 카이사르를 덧붙였으며 입법을 통해 자신의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에게도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즉, 이전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들이 휘두르던 황제권과 권위를 자신 집안이 온전히 물려받았다는 제스쳐였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프린켑스, 호민관 특권, 폰티펙스 막시무스 등의 지위가 한 사람에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가 마치 관습적으로 자연스러운 상태였던 것마냥 재해석했다.
아울러 새로 개편한 원로원을 통해 자신의 가문을 플라비우스 왕조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습가문으로 공인받고, 임페라토르를 사용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적법한 마지막 통치자를 클라우디우스 1세와 그 외아들 브리타니쿠스로 정의내린다. 그리고 이때 클라우디우스 신전 등을 복구시키면서 임페라토르 직위의 정통후계자가 본인과 그의 두 아들들임을 천명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이 안정적으로 제위를 세습했던 것은 현직 임페라토르가 아닌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에게도 카이사르라는 칭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현직 임페라토르가 개인 성씨와 상관없이 카이사르를 제호로 취한 것은 클라우디우스 1세가 최초였다. 하지만 원로원조차 41년 당시 대놓고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율리우스 =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 네로인건 다 아는 사실이다", "클라우디우스는 태생부터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며, 본래부터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다. 즉, 카이사르를 제호를 취했다고 해도 플라비우스 가문과 달리 쌩뚱맞은 타인이 택한 이름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클라우디우스가 카이사르를 택한 이유는 완벽한 정통성을 위해 취한 이름이었던 셈이다. 반대로 플라비우스 가문이 카이사르를 참칭(?)한 것은 이들 가문을 승계하여 자신의 가문에게 그 권위를 덧씌우기 위해서였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정치적 변화와 마찬가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이후부터 임페라토르 직위와 칭호사용도 변하게 된다. 먼저 제위에 오른(더 정확히 말하면 원로원 승인으로 인정된)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제호로 취하면서, 프라이노멘에 임페라토르를 붙였다. 이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이후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했는데, 사실 임페라토르를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한 사람이 아우구스투스라서 오토가 생뚱맞게 만든 전통이 아니었다.[26] 이때 이후로 황제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표기하기 시작한다.
또 로마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지중해 동쪽 세계에서 아우토크라토르(αὐτοκράτωρ/Autokrator)로 차용해 사용했다. 이는 그리스인이기도 한 플루타르코스 등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라틴어 어감을 살려 사용한 탓에 독재자 이미지보다는 제국의 황제라는 뜻이 더 강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와 기원전 4세기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3세 등이 사용한 아우토크라토르와는 어휘상 의미에서 약간의 차이가 묘하게 있었다고 한다.
반면 제정 시대 이후,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제국의 동쪽 절반에서는 황제를 그리스어로 "왕"을 뜻하는 바실레우스로 불렀다.[27] 그러나 나중에는 바실레우스라는 말은 오직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만 사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어의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와 라틴어의 임페라토르(Imperator)는 동의어가 되었다. 다만 11세기에 들어서부터는 아프토크라토르(전제정치를 뜻하는 영어 단어 autocracy의 어원) 칭호를 부활시켜 바실레프스 케 아프토크라토르라고 불렀다.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아래에서 임페라토르 직위는 보다 제도화됐다. 이때가 되면 부자세습이 당연시되고, 제왕교육으로 부를 수 있는 후계자 양성이 관례, 제도로 굳어진다. 따라서 예전 아우구스투스 시절처럼 후계자가 굳이 최전선에 나가서 군공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다.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를 이탈리아 안에서 머물게 하면서 제왕교육을 실시해도 어떤 잡음이 없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콤모두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에게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를 비롯한 여러 새로운 형태로 여러 명예, 지위를 내렸다. 이를 통해 아예 원로원의 추인 없이도 임페라토르 직위가 부자 세습이 되도록 기반을 닦았다. 나중에 다섯 황제의 해를 종결하고 내전의 승리자로서 제위를 취한 세베루스 왕조는 무력으로 원로원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부자세습에 어떠한 잡음도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후로 임페라토르 직위는 그리스어를 사용한 동쪽 일대의 인식과 같이 전제군주에 가까운 것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제도를 마련하고 부자세습이 당연시되며 제왕교육을 실시해도 플라비우스 왕조부터 세베루스 왕조까지 부자세습으로는 2대를 넘기지 못하는 등 단명했으며 오히려 오현제로 불리는 네르바 -안토니우스 왕조가 오래 버텼고 양자 세습이 끝나고 친아들에게 물려주자마자 콤모두스가 말아먹으면서 왕조가 끝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 황제라는 자리는 로마인들에게 인정받았고 부자세습도 가능은 하지만 아예 왕조를 이루면서 장기간 세습하는 것은 확립되지 않았기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유능하고 통치 기간도 매우 길었던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각각의 왕조 창립자는 유능했으나 고령이나 질병등으로 인해 통치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으며 후계자가 젋은 나이에 즉위하여 황권을 확립하지 못했거나 무리한 황권강화책을 쓰거나 집안싸움이 벌어지거나 폭정을 하거나 무능하거나 하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황제가 추대된 후 내전이 발생하고 현임 황제가 암살되거나 폐위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증상이 로마 제국의 외부와 내부의 위기와 함께 심화된 것이 군인 황제 시대다.
이러한 혼란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완전한 전제군주제를 도입하면서 해결이 이루어졌으나 함께 도입한 사두정치는 본질적인 승계 모순으로 인해 붕괴되었고 콘스탄티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왕조에서 공치제를 도입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대신 기독교의 힘을 얻어서 황제에게 왕권신수설을 부여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으나 실패힌다.
그러다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분할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최후의 순간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혼란 끝에 국가가 멸망했으며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황위 계승 구조를 유지한 채 중세의 로마 황제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친아들이 없기 때문이다. 군주제에서는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서 군주의 친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며, 친아들이 2명 이상이라면 그 중에서 적장자가 계승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서 왕위 계승에 문제가 없도록 했고 아우구스투스도 당연하게도 자신의 가문과 핏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도입하게 된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에게 친아들이 없었다. 그리고 로마는 일부일처제로 공식적인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낳은 자식만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사생아에게도 재산의 일부를 준다던지 하는 배려는 있으나 공식적으로 아버지나 어머니의 직위나 직책을 상속받지는 못한다. 이런 점은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나 얼자와는 다른 것으로 서자나 얼자는 적자보다 등급이 내려가지만 혼인관계에 의한 자식으로 인정받으며 적자가 없다거나 하면 가문을 계승받을 권리가 주어진다.
물론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면 다산을 장려해도 자식이 없거나 딸만 낳거나 해서 가문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고대 로마에서는 양자제도를 활용하고 딸에게도 상속권을 부여해주는 등의 보완장치를 마련했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귀족가문을 보면 종종 딸과 결혼한 사위가 장인의 양자로 입적되어 가문을 계승하거나 딸이 낳은 자식 중 한명을 외가에 양자로 보내서 가문을 계승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아우구스투스도 이런 점에 착안해서 자신의 딸로 핏줄을 이어주는 방식으로 황제의 세습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태종의 역할을 담당해서 로마 제국을 안정화시키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확립시켜야 할 임무가 주어진 티베리우스를 징검다리 황제로 만든 것이 큰 실책이었다. 티베리우스도 형식상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들어가긴 했으나 혈연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와 전혀 연관이 없으므로 아우구스투스의 딸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 입장에서는 가급적 빠르게 로마 황제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라도 이들과 한 판 붙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아우구스투스가 핏줄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딸이 낳은 자식에게도 계승권을 주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군주국에서 국왕의 측근이 되는 외척이 사라지고 모두가 황위 계승 경쟁자가 되는 막장사태가 발생한다. 원래 외척이 국왕의 측근이 되는 이유는 외척은 스스로는 국왕이 될 수 없기 때문인데 이러한 제한을 모조리 풀어놓았으니 모조리 제위를 향해 달려나가는 계승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부터 네로에 이르는 계승과정이 매우 혼란스럽게 전개되었으며 집권한 황제는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친척들을 제거했다. 물론 친척들도 서로간에 제위 계승을 두고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황제의 자식을 독살하거나 하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 애초에 황제건 친척이건 간에 제위계승서열은 거기서 거기였으며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이은 것도 황제나 친척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이어질수록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이은 사람은 극도로 줄어들기 시작하여 네로의 통치시기 중반에 도달하면 도저히 황위 계승이 불가능할 수준으로 멀어진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하면 황가가 사실상 씨가 말랐으며 수틀리면 돌아설 가능성이 높은 동맹 귀족 가문들만 남게 된다.
결국 후계 계승의 불안정성을 가져온 것은 아우구스투스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황위 계승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핏줄로 이어지는 혈연관계가 중요하지만 본인에게 친아들이 없다면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고 티베리우스로 시작되는 적장자 계승 체제를 만들며 아우구스투스의 딸이 낳은 자식들은 티베리우스의 자식과 혼인을 이어나가는 별도의 황비 가문을 만드는 것이 적절했다. 애초에 아우구스투스가 핏줄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서 신이 이미 아우구스투스에게 로마를 준 만큼 직계 후손이 로마 황제가 되는 것은 안되는 것으로 등가교환을 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하니 신의 분노를 사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말이 당대에도 있을 정도로 아우구스투스의 변칙적인 황위계승방식은 당대에도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징검다리 황제가 되는 바람에 원래는 우군이어야 할 황족들의 공격을 받는 등 고생이 심했으나 어찌되었든 로마 황제라는 자리를 확고하게 확립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제정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면서 황제 계승 후보자가 최전선에 나가야만 하는 관행도 클라우디우스 이후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처럼 휘하 장군들이 수행한 전쟁도 황제의 공으로 인정되어 자연스럽게 개선식을 치르게 되며 정리된다. 그래도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 앉아서 서류만 만지지 않고 직접 출정했음을 보이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잠깐이나마 브리타니아를 방문해야 했다. 그러면서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만이 불릴 수 있는 칭호에서, 자연스럽게 황제 가문이 세습하는 칭호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황족들이 서로 무한경쟁을 하며 서로 죽여대는 상황인지라 제위 계승이 말 그대로 혼란의 도가니탕에 빠졌고 황족들의 숫자가 줄어들며 제위 계승이 불투명하게 변했다. 따라서 칭호와 권한의 세습을 통해 자신의 혈통이 제위를 이어나가기를 바란 아우구스투스의 바람과 달리, 네로가 68년 원로원과 군대에게 불신임을 받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일가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이후 로마는 네 황제의 해라는 내전을 거쳐 69년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 아래에서 안정을 찾는다. 네 황제의 해 이후로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마지막 남계 후손 네로가 사망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가문은 멸문당했다. 이때, 혼란을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제위를 승계하며 자신의 제호에 카이사르를 덧붙였으며 입법을 통해 자신의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에게도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즉, 이전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가주들이 휘두르던 황제권과 권위를 자신 집안이 온전히 물려받았다는 제스쳐였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프린켑스, 호민관 특권, 폰티펙스 막시무스 등의 지위가 한 사람에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가 마치 관습적으로 자연스러운 상태였던 것마냥 재해석했다.
아울러 새로 개편한 원로원을 통해 자신의 가문을 플라비우스 왕조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습가문으로 공인받고, 임페라토르를 사용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적법한 마지막 통치자를 클라우디우스 1세와 그 외아들 브리타니쿠스로 정의내린다. 그리고 이때 클라우디우스 신전 등을 복구시키면서 임페라토르 직위의 정통후계자가 본인과 그의 두 아들들임을 천명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이 안정적으로 제위를 세습했던 것은 현직 임페라토르가 아닌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에게도 카이사르라는 칭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현직 임페라토르가 개인 성씨와 상관없이 카이사르를 제호로 취한 것은 클라우디우스 1세가 최초였다. 하지만 원로원조차 41년 당시 대놓고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율리우스 =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 네로인건 다 아는 사실이다", "클라우디우스는 태생부터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며, 본래부터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다. 즉, 카이사르를 제호를 취했다고 해도 플라비우스 가문과 달리 쌩뚱맞은 타인이 택한 이름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클라우디우스가 카이사르를 택한 이유는 완벽한 정통성을 위해 취한 이름이었던 셈이다. 반대로 플라비우스 가문이 카이사르를 참칭(?)한 것은 이들 가문을 승계하여 자신의 가문에게 그 권위를 덧씌우기 위해서였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정치적 변화와 마찬가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이후부터 임페라토르 직위와 칭호사용도 변하게 된다. 먼저 제위에 오른(더 정확히 말하면 원로원 승인으로 인정된)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제호로 취하면서, 프라이노멘에 임페라토르를 붙였다. 이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이후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했는데, 사실 임페라토르를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한 사람이 아우구스투스라서 오토가 생뚱맞게 만든 전통이 아니었다.[26] 이때 이후로 황제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표기하기 시작한다.
또 로마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지중해 동쪽 세계에서 아우토크라토르(αὐτοκράτωρ/Autokrator)로 차용해 사용했다. 이는 그리스인이기도 한 플루타르코스 등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라틴어 어감을 살려 사용한 탓에 독재자 이미지보다는 제국의 황제라는 뜻이 더 강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와 기원전 4세기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3세 등이 사용한 아우토크라토르와는 어휘상 의미에서 약간의 차이가 묘하게 있었다고 한다.
반면 제정 시대 이후,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제국의 동쪽 절반에서는 황제를 그리스어로 "왕"을 뜻하는 바실레우스로 불렀다.[27] 그러나 나중에는 바실레우스라는 말은 오직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만 사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어의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와 라틴어의 임페라토르(Imperator)는 동의어가 되었다. 다만 11세기에 들어서부터는 아프토크라토르(전제정치를 뜻하는 영어 단어 autocracy의 어원) 칭호를 부활시켜 바실레프스 케 아프토크라토르라고 불렀다.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아래에서 임페라토르 직위는 보다 제도화됐다. 이때가 되면 부자세습이 당연시되고, 제왕교육으로 부를 수 있는 후계자 양성이 관례, 제도로 굳어진다. 따라서 예전 아우구스투스 시절처럼 후계자가 굳이 최전선에 나가서 군공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다.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를 이탈리아 안에서 머물게 하면서 제왕교육을 실시해도 어떤 잡음이 없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콤모두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에게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를 비롯한 여러 새로운 형태로 여러 명예, 지위를 내렸다. 이를 통해 아예 원로원의 추인 없이도 임페라토르 직위가 부자 세습이 되도록 기반을 닦았다. 나중에 다섯 황제의 해를 종결하고 내전의 승리자로서 제위를 취한 세베루스 왕조는 무력으로 원로원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부자세습에 어떠한 잡음도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후로 임페라토르 직위는 그리스어를 사용한 동쪽 일대의 인식과 같이 전제군주에 가까운 것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제도를 마련하고 부자세습이 당연시되며 제왕교육을 실시해도 플라비우스 왕조부터 세베루스 왕조까지 부자세습으로는 2대를 넘기지 못하는 등 단명했으며 오히려 오현제로 불리는 네르바 -안토니우스 왕조가 오래 버텼고 양자 세습이 끝나고 친아들에게 물려주자마자 콤모두스가 말아먹으면서 왕조가 끝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 황제라는 자리는 로마인들에게 인정받았고 부자세습도 가능은 하지만 아예 왕조를 이루면서 장기간 세습하는 것은 확립되지 않았기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유능하고 통치 기간도 매우 길었던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각각의 왕조 창립자는 유능했으나 고령이나 질병등으로 인해 통치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으며 후계자가 젋은 나이에 즉위하여 황권을 확립하지 못했거나 무리한 황권강화책을 쓰거나 집안싸움이 벌어지거나 폭정을 하거나 무능하거나 하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황제가 추대된 후 내전이 발생하고 현임 황제가 암살되거나 폐위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증상이 로마 제국의 외부와 내부의 위기와 함께 심화된 것이 군인 황제 시대다.
이러한 혼란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완전한 전제군주제를 도입하면서 해결이 이루어졌으나 함께 도입한 사두정치는 본질적인 승계 모순으로 인해 붕괴되었고 콘스탄티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왕조에서 공치제를 도입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대신 기독교의 힘을 얻어서 황제에게 왕권신수설을 부여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으나 실패힌다.
그러다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분할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최후의 순간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혼란 끝에 국가가 멸망했으며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황위 계승 구조를 유지한 채 중세의 로마 황제로 이어지게 된다.
3.5. 중세의 로마 황제 [편집]
3.5.1. 동로마 제국의 바실레프스 [편집]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라틴어 칭호를 계속 사용하긴 했지만, 로마 제국의 영토가 그리스, 아나톨리아로 한정되면서 그리스어로 군주를 뜻하는 단어인 바실레프스가 로마 황제의 대표 칭호로 자리잡았다.
이후 로마의 카이사르라는 명칭은 황제라는 직위로 굳어져 러시아에서 차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왕의 명칭을 카이세리 룸이라고 하는 것에 영향을 준다. 이렇듯, 독일권까지 포함한 동유럽 전반에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퍼진다.
바실레프스도 로마 황제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후계 계승이 불안정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가면서 이슬람의 발흥등으로 인해 7세기의 위기가 닥치자 공화정이나 고대 로마의 풍습이 사라지기 시작하며 이라클리오스 왕조를 시작으로 해서 조금씩 황위세습기간과 대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길이긴 하지만 공치제를 활용해서 찬탈자를 정제로 놓고 원래 황제를 부제로 놓는 식으로 타협안을 제시하여 왕조의 맥을 이어나가는 비상수단도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후계 계승의 불안정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바실레프스도 왕조가 자주 교체되었으며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의 앙겔로스 왕조의 분열과 내전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에게 함락당하고 로마 제국의 중앙정부가 붕괴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만든다.
이러한 혼란은 니케아 제국이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면서 마무리되지만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나 트라페준타 제국처럼 분할된 지방정권이 잔존하였다. 특히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팔레올로고스 내전을 벌어면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싸우는 식으로 직계 가족들끼리 혈투가 벌어진 끝에 오스만 제국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이후 로마의 카이사르라는 명칭은 황제라는 직위로 굳어져 러시아에서 차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왕의 명칭을 카이세리 룸이라고 하는 것에 영향을 준다. 이렇듯, 독일권까지 포함한 동유럽 전반에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퍼진다.
바실레프스도 로마 황제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후계 계승이 불안정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가면서 이슬람의 발흥등으로 인해 7세기의 위기가 닥치자 공화정이나 고대 로마의 풍습이 사라지기 시작하며 이라클리오스 왕조를 시작으로 해서 조금씩 황위세습기간과 대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길이긴 하지만 공치제를 활용해서 찬탈자를 정제로 놓고 원래 황제를 부제로 놓는 식으로 타협안을 제시하여 왕조의 맥을 이어나가는 비상수단도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후계 계승의 불안정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바실레프스도 왕조가 자주 교체되었으며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의 앙겔로스 왕조의 분열과 내전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에게 함락당하고 로마 제국의 중앙정부가 붕괴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만든다.
이러한 혼란은 니케아 제국이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면서 마무리되지만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나 트라페준타 제국처럼 분할된 지방정권이 잔존하였다. 특히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팔레올로고스 내전을 벌어면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싸우는 식으로 직계 가족들끼리 혈투가 벌어진 끝에 오스만 제국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3.5.2. 서유럽의 로마 황제 [편집]
한편, 서유럽에서는 동유럽과는 다르게 임페라토르가 황제의 명칭으로 굳어져 황제를 뜻하는 단어들로 퍼진다. 영단어의 Emperor나 제국을 의미하는 Imperial도 다 여기서 온 단어들이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고 권력의 공백이 생긴다. 당시 로마 총대주교, 즉, 교황은 생존을 위해 협력자를 찾게 된다.
당시 지중해권과 서유럽 전반은 로마가 구축한 지배 체제 하에 있었고 그런 로마의 영향을 받은 호족 집단들이 각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게르만족들은 로마의 지배 체제를 굳이 건드리지 않고 이용하고자 했는데,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같은 자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는 한편, 메로베우스가 라인강 유역 이북 지방, 즉 플랑드르 일대에서 남하하여 파리 일대에 정착하는데 이후 클로비스 1세가 세운 국가가 프랑크 왕국이다. 이후 카롤루스 마르텔의 활약, 그리고 그의 아들 피피누스 3세가 메로빙거 왕조를 찬탈 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교황은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본디 게르만족의 대부분은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 때 이단으로 규정 됐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 때 숙청까지 진행하면서 로마에서 쫓겨났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했는데 삼위일체를 지지하던 세력이 아타나시우스파이다.
그런데 카롤루스 마르텔은 아리우스파에서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면서 교황에 관계개선을 요청했고 피피누스 3세는 자신의 찬탈을 묵인해준 대가로 훗날 교황령이 되는 땅을 기증하는 '피핀의 기증'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카롤루스 마그누스가 왕이 되어 적극적으로 기독교 개종과 로마 보호, 그리고 라틴어 보급에 힘쓰자 교황은 그를 불러들여 로마 황제, 정확히는 서로마 황제의 관을 대관한다. 서유럽의 황제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후 카롤루스 사후 베르됭-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 되자, 동프랑크의 하인리히 1세가 강자로 떠올랐고 그의 아들인 오토 1세가 왕에 올라 마자르족을 격파하자 교황은 그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대관했다. 이것이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이다.
이렇게 신성 로마 황제는 서유럽의 황제이자 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며 이탈리아는 독일어권 국가에 지속적으로 간섭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황제와 교황의 서임권 다툼의 시작이 되었다.
특징을 조금만 기술하면, 신성 로마 황제는 독일 선제후들이 선거로 뽑던 직위였다. 이는 원래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는데, 동유럽 일대는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영향 덕분에 강력한 황권과 중앙집권화가 중심이었던데 반해, 서유럽은 권력 공백으로 호족 및 귀족들의 힘이 셌기 때문이다. 서프랑크도 카롤루스 왕조가 무너진 뒤 위그 카페가 선출되어 왕이 된 것이다. 다만 카페 왕조는 아무런 문제 없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정통성이 생겨버려 부르봉 왕조 때에 가선 절대왕권을 누릴 만큼 가문의 힘이 강해졌을 뿐이다.
여하튼 선거 군주제라는 특징 덕분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세워지기 전까지 황제의 권력이 그리 센 편은 아니었으며 교황과의 다툼 때문에 내부 사정에도 힘을 쏟기 힘들어 선제후나 제후국들이 그대로 자신들의 힘을 유지한 채로 남아 분열 상태가 계속 되었다. 넓게보면 이것이 독일어권의 범게르만주의가 탄생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28]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고 권력의 공백이 생긴다. 당시 로마 총대주교, 즉, 교황은 생존을 위해 협력자를 찾게 된다.
당시 지중해권과 서유럽 전반은 로마가 구축한 지배 체제 하에 있었고 그런 로마의 영향을 받은 호족 집단들이 각 지방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게르만족들은 로마의 지배 체제를 굳이 건드리지 않고 이용하고자 했는데,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같은 자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는 한편, 메로베우스가 라인강 유역 이북 지방, 즉 플랑드르 일대에서 남하하여 파리 일대에 정착하는데 이후 클로비스 1세가 세운 국가가 프랑크 왕국이다. 이후 카롤루스 마르텔의 활약, 그리고 그의 아들 피피누스 3세가 메로빙거 왕조를 찬탈 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교황은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본디 게르만족의 대부분은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 때 이단으로 규정 됐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 때 숙청까지 진행하면서 로마에서 쫓겨났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했는데 삼위일체를 지지하던 세력이 아타나시우스파이다.
그런데 카롤루스 마르텔은 아리우스파에서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면서 교황에 관계개선을 요청했고 피피누스 3세는 자신의 찬탈을 묵인해준 대가로 훗날 교황령이 되는 땅을 기증하는 '피핀의 기증'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카롤루스 마그누스가 왕이 되어 적극적으로 기독교 개종과 로마 보호, 그리고 라틴어 보급에 힘쓰자 교황은 그를 불러들여 로마 황제, 정확히는 서로마 황제의 관을 대관한다. 서유럽의 황제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후 카롤루스 사후 베르됭-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 되자, 동프랑크의 하인리히 1세가 강자로 떠올랐고 그의 아들인 오토 1세가 왕에 올라 마자르족을 격파하자 교황은 그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대관했다. 이것이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이다.
이렇게 신성 로마 황제는 서유럽의 황제이자 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며 이탈리아는 독일어권 국가에 지속적으로 간섭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황제와 교황의 서임권 다툼의 시작이 되었다.
특징을 조금만 기술하면, 신성 로마 황제는 독일 선제후들이 선거로 뽑던 직위였다. 이는 원래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는데, 동유럽 일대는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영향 덕분에 강력한 황권과 중앙집권화가 중심이었던데 반해, 서유럽은 권력 공백으로 호족 및 귀족들의 힘이 셌기 때문이다. 서프랑크도 카롤루스 왕조가 무너진 뒤 위그 카페가 선출되어 왕이 된 것이다. 다만 카페 왕조는 아무런 문제 없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정통성이 생겨버려 부르봉 왕조 때에 가선 절대왕권을 누릴 만큼 가문의 힘이 강해졌을 뿐이다.
여하튼 선거 군주제라는 특징 덕분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세워지기 전까지 황제의 권력이 그리 센 편은 아니었으며 교황과의 다툼 때문에 내부 사정에도 힘을 쏟기 힘들어 선제후나 제후국들이 그대로 자신들의 힘을 유지한 채로 남아 분열 상태가 계속 되었다. 넓게보면 이것이 독일어권의 범게르만주의가 탄생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28]
4. 역대 황제 [편집]
몇몇 고대 작가들은 역사를 통해 로마 황제의 수를 세려고 노력했지만 대수가 제각각이었다. 4세기 역사학자 페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부터 요비아누스까지 43명의 임페라토르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6세기 연대기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33대 로마 황제'라고 부른다. 이 작품에서 언급된 8명의 다른 황제들을 더하면 콘스탄티누스 1세까지 총 41명의 황제들이 나올 것이다. 또 당대 로마 연대기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초대 황제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불일치는 '정통 황제'와 '찬탈자'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어느 연대기에선 리키니우스가 '그 이전에 잠시 찬탈했던 사람들'처럼 살해당했다고 묘사한다. 이러니 각 연대기에서도 대수가 제각각이었던 것.
영어 위키백과 로마 역대 황제 문서에서는 굳이 대수를 세지 않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부터 군인 황제 시대(27 BC - AD 284)의 300년 동안을 프린키파투스(원수정) 황제, 4두정치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왕조(284-610)까지 300여년을 도미나투스(전제정) 황제, 영토가 고대 그리스인들의 활동범위로 축소되고 본격적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함으로써 동로마만의 독특한 문화가 발아된 시점인 이라클리오스 왕조부터 팔레올로고스 왕조(610-1453)까지 800여년을 후기 동방 황제(Later eastern emperors)로 나누어 기술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정통 황제'와 '찬탈자'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어느 연대기에선 리키니우스가 '그 이전에 잠시 찬탈했던 사람들'처럼 살해당했다고 묘사한다. 이러니 각 연대기에서도 대수가 제각각이었던 것.
영어 위키백과 로마 역대 황제 문서에서는 굳이 대수를 세지 않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부터 군인 황제 시대(27 BC - AD 284)의 300년 동안을 프린키파투스(원수정) 황제, 4두정치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왕조(284-610)까지 300여년을 도미나투스(전제정) 황제, 영토가 고대 그리스인들의 활동범위로 축소되고 본격적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함으로써 동로마만의 독특한 문화가 발아된 시점인 이라클리오스 왕조부터 팔레올로고스 왕조(610-1453)까지 800여년을 후기 동방 황제(Later eastern emperors)로 나누어 기술한다.
[1] 주인님이란 뜻이며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이 칭호를 자신의 노예들이나 쓰는 칭호라며 이렇게 부르는 신하들을 비판할 정도로 좋아하지 않았다. [2] 올림포스 신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인 이후 야훼도 포함해서.[3]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된 뒤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로마 황제는 자신을 신인 야훼보단 아니지만 인간보다는 우월한 어떠한 존재로 규정했다. 신의 대리인이라고도 한다. 하여튼 이런식으로 신격화 작업을 거치고 그 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미나투스 체제도 갖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두를 통합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로마는 자신들의 '공화정 전통'을 자랑스러워 했다. 사실상 형식밖에 남지 않았음에도.[4] 물론 공화정기 말의 원로원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일 뿐더러, 전제군주정은 당시 기준으로 꽤나 세련된 정치체이기 때문에 군주의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소 현대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첨언하면, 역사에서 고대 민주정이 붕괴 된 이유는 중우 정치 때문이다. 이기적인 이가 우매한 이들을 선동하고 그 우매한 이들은 이기적인 이를 지지하며 국가와 정치가 문란해지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결국 아테네나 로마의 사례가 있었음에도 왕정으로 회귀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효율성을 생각해보면 위계적인 구조가 더욱 효율적이기도 하고. 국가가 작을 때는 여러 사람이서 의논하여 정치를 할 수 있지만 국가의 영역이 넓어질 수록 각지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결국 효율성을 위해 독재 체제가 갖춰진 것이다. 이는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뛰어났지만 보편 정서와 이익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근대 말에 가면 고대 민주정의 단점이었던 우매한 이들을 교육 시스템으로 줄여 정치 참여를 늘렸고 늘어난 정치 참여를 바탕으로 이기적인 이들을 감시하게 하여 현대 민주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다. 또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동원령과 징병의 실시, 그리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삶의 여유가 늘어나자 정치 참여에 대한 요구가 늘어난 것이기도 하다.[5] 그리고 로마 시민 남성은 대개 군인이고 군인은 백인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시민의 지지 = 군대의 지지나 다름 없다.[6] 고대 국가인 로마를 근세 국가인 조선과 비교하는 것이 넌센스이지만, 당대 가장 세련되고 합리적인 정치 시스템을 가진 조선은 아무리 왕의 힘이 약해도 왕의 권위까지 넘보는 일이 없었다. 이는 물론 동등한 입장의 사대부 가문들 중 하나가 왕위를 찬탈하면 "너가 뭔데?"로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전주 이씨 가문을 군주로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덕분에 군주의 계통이 끊겨도 어떻게든 방계를 찾아내어 안정화시켰다. 조선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권위는 인정하되, 사대부들과 협의해서 정치한다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유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중세 국가들이 마땅한 정치 철학 대신 종교를 통해 권위를 얻은 것과 다르게 조선은 엄연히 정치를 위한 철학인 유교를 국가의 사상으로 삼아서 국가를 운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7] 삼국지에서 군웅할거 시대에 군벌들 한가운데의 하남 일대에 있었던 조조를 생각하면 얼추 맞다.[8] 이런 칭호들은 처음엔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게 보장받은 권리를 상속받았다는 의미에서 쓰인것이다. 그래서 원로원이 어느 정도 제역할 하던 시기의 황제들은 원로원에게 이러한 권리상속을 승인받아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속이란 의미는 희미해지고 관직의 이름으로 바뀌었다.[9] 양자 입적 전 이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바꾼 이름이다.[10] 이집트인들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일종의 파라오 취급을 받았다. 이는 이집트에서 발굴된 로마 시대 비문에서 온전히 확인된다.[11] 마이우스는 영어로 "주요한"이란 뜻을 가진 "Major"의 어원이다.[12] 이후 숱한 창작물들에서 공화정으로부터 독재로 변질하는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의 레퍼토리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쉬브 팰퍼틴이 은하제국을 창설하면서 한 연설이다.[13] 예를 들어 최고 제사장 카이사르는 신관들과 합의해 비불루스가 공무 거부를 통해 자신의 입법을 저지하는 행위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의 형식을 빌렸을 뿐, 헌법재판소가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헌법에 위배되어 효력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대입해도 크게 위화감이 없다. 주로 판사 출신이 재판관으로 임명되는 한국 헌법재판소와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전직 대통령들이 헌법위원회의 종신직 위원이 되는데, 이는 유력 정치인들이 겸임하던 고대 로마의 신관단 구성과 유사하다.[14] 즉 현대 형법에 따르면 호민관을 살해하는 것은 내란목적살인죄로 처단된다는 의미다. 정확히 따지면 호민관의 신변불가침권(Tribunicia Sacrosantitas)의 내용은 '임기중의 호민관을 살해하는 행위는 반역으로 처벌되고, 임기중인 호민관은 법적으로 기소되지 않는다' 는 것이다.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측면에서는 후술된 '원로원의 결의에 대한 거부권'+'민회 소집권'에 비해 의미가 적지만, 물리적인 공격행위와 법적 책임 모두 보호받는다는 점에서 역시 (전제군주 이상의 수준으로 강력해진) 로마 황제권의 구성요소로써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말하자면 '원로원 결의 거부권'과 '민회 소집권'이 황제로써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보장한다면 신변불가침권은 황제의 신분을 보장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15] 즉, 로마 황제는 황제 등장 이전까지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을 모두 겸비한 로마의 최고 권력기구였던 원로원이 내린 결정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거부'할 수 있고, 민회의 의결이란 형태로 자신이 원하는 법령이나 정책을 입안할 수 있었던 것. 즉, 사실상 군주나 다름없는 국가 운영의 전권을 보유한 셈이다.[16] 예를 들면 조영관은 수도의 공공사업을 임지로 받고 군대는 임지가 아니므로 조영관의 임페리움으로는 군대 지휘가 불가능하다.[17] 합법적으로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지휘할 권한이 있던 현직 집정관 술라는 호민관 술피키우스의 책동으로 인해 마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빼앗겼으며, 로마 입성 후 집정관에 취임해 가급적 법의 틀 내에서 내전을 수행하려던 카이사르는 군자금 확보 과정에서 호민관 메텔루스의 거부권 행사에 꽤나 애를 먹었다.[18] 다만 정규 집정관과 전임의 사임으로 임명된 보궐 집정관 사이에는 대우의 차이가 약간 있었다고 한다.[19] 즉 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비유하자면 내각책임제 성격이 강한 이원집정부제 체제에서 최고권력자가 대통령 자리에만 앉지 않고 의회 의장 + 각부 장관 + 지자체장 + 군 최고 통수권을 몰아쥐어 '명목상으로는 국가원수가 아닌' 최고권력을 가진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푸틴이 2008년 ~ 2012년 기간 메드베데프를 명목상의 대통령으로 세워놓고 본인은 총리가 되어 모든 실권을 행사한 사례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20] 개선식 이후에도 고참병들이 옛 사령관을 애정을 담아 임페라토르로 부를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는 모든 시민들이 사용하는 영구적인 호칭이 아니었다.[21] 로마 공화국과 여신 로마의 가호를 기념하는 행사가 매년 1월 1일 새해와 매년 4월 21일 도시 로마 건국 기념일에 열렸다.[22] 프린캡스 세나투스, 임페라토르, 폰티펙스 막시무스, 켄소르 등은 하나같이 공화정기 최고 명문가의 실력자들이 거쳐가거나 수여받은 관직과 명예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같은 지방유지도 군공만 있으면 가능했던 임페라토르를 빼면, 실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가문까지 따라줘야 이런 관직과 칭호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23] 해결책은 기준점을 바닥까지 낮춰서 천하의 멍청이 수준으로 잡은 후에 거기에 걸맞게 임무를 부여해본 후 성공하면 해당인에 한해서 기준점을 약간 올려주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간신히 일반인을 일반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24] 양자 입적 전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 이 사람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이며, 12살때 이미 옥타비아누스의 '아들'로 로마 대중들에게 악티움 해전 승리 후 개선식에서 소개됐다.[25] 이런 이유로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이중적이라고 가루가 되도록 씹어댔다.[26]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와 그들의 친혈육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굳이 자신들의 프라이노멘으로 임페라토르를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와 옛 공화정 전통대로 자신들이 임페라토르로 찬사받은 횟수를 IMP I(임페라토르로 1번 찬사받음), IMP II 등으로 표기했다.[27] 로마법 대전에 수록된 그리스어 사료 중에 그리스인이 로마 황제에게 청원하자 황제가 비답을 내린 것이 있는데, 거기서도 청원인이 황제를 '바실레우스'로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28] 프랑스도 내부적으로는 부르군트, 아키텐, 칼레, 노르망디, 앙주 등이 분열 되어 있었으나 백년전쟁 시기에 이르러서는 싹 다 통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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