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자유주의
최근 수정 시각: ()
분류
1. 개요 [편집]
고전적 자유주의(古典的 自由主義, classical liberalism)는 17세기~19세기에 서유럽을 중심으로 나타난 정치 이데올로기로, 천부인권과 경제적 자유에 기반한 법치주의 국가를 추구하는 자유주의 사상이다.[5] 19세기 이전에는 자유주의라고 하면 보통 이 이념을 가리켰지만 19세기 이후 사회자유주의 등의 개량적 자유주의 이념이 등장하면서, 이전의 전통적인 자유주의를 구분하기 위해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이게 좀 급진화된 개념을 자유지상주의로 보기도 한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시민 혁명의 기반이 된 사상이며, 근현대 의회민주주의 국가 탄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영국의 존 로크(1632~1704)로부터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몽테스키외(1689~1755), 볼테르(1694~1778)와 같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로크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이후로는 고전파 경제학을 확립하는데 기여한 애덤 스미스(1723~1790)와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 그리고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1806~1873)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영국의 존 로크(1632~1704)로부터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몽테스키외(1689~1755), 볼테르(1694~1778)와 같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로크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이후로는 고전파 경제학을 확립하는데 기여한 애덤 스미스(1723~1790)와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 그리고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1806~1873)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2. 기원 [편집]
17세기의 영국에서는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던 시민 계급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시민 계급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던 국왕과 고위 귀족들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고 하였고, 결국 이러한 충돌의 결과로 명예혁명(1688)이 발생하여 의회 민주주의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크를 비롯한 시민 계급의 지식인들은 고귀한 혈통이 주는 권위를 부정하고 누구나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덕성을 갖춘 지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지성인들이 참여하는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정책이 결정되는 국가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사회적‧사상적 변화는 프랑스와 북아메리카의 시민 계급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결국 미국 독립 혁명(1775~1783)과 프랑스 혁명(1789~1799)을 거치면서, 특권을 가진 왕과 귀족이 군림하던 정치 제도가 폐지되고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전 버전의 문서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직접적 기원을 18세기 후반 급진적 정치개혁을 주장한 영국의 급진파라고 서술되어 있기도 했지만, 이것은 역사적 수정주의로써 가치가 있을지는 몰라도, 일반적으로는 유일한 정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다. 일단 고전적 자유주의가 17~19세기의 사상인데 그 근원을 18세기 후반에야 등장한 사상으로 잡는 것 자체가 선후 관계가 맞지 않는 무리수이다.[6]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오직 사회자유주의만을 자유주의의 정통으로 보며, 사회자유주의와 맞지 않는 사건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편협함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전 문서에서 근거로 들었던 신라대학교의 김명환이 2010년에 쓴 논문도 그런 예이다. 이 논문의 저자는 영국의 자유주의 전통이 17세기 중반 영국 내전 시기의 포퓰리즘 운동인 수평파(Levellers)에서 시작되었다가 19세기 중반의 차티스트 운동과 1900년을 전후로 한 자유당[7]으로 건너 뛰었다고 보는데, 이는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의 거의 전부를 넘겨버리는 발상이다.
명예혁명의 정치적 배경으로 가톨릭 색채를 띈 제임스 2세에 대한 개신교 상류층의 반발이 주목되곤 하지만, 종교적 충돌과 상류층간의 이전투구가 명예혁명의 전부는 아니었다.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제임스 2세가 각종 칙령을 마음대로 남발하는 통에 젠트리, 상인, 사업가들이 재산 피해를 보자 이들 중산층[8] 사이에서 왕의 인기가 급락했고, 결국 왕을 몰아내기 위해 중산층이 귀족들과 연합했던 사실에 있다. 당연하겠지만 명예혁명의 가장 큰 의의는 개신교 세력의 승리나 휘그당의 집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 직후에 중산층의 요구에 따라 권리장전이 통과되고 이를 통해 의회 민주주의에 기반한 법치주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진 데에 있다. 명예혁명 이후의 자유주의는 계속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 법치주의, 표현의 자유, 즉 고전적 자유주의의 기본 요소들이 확립되지 않았다면 이런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명예혁명이 성공한 뒤에 정권을 잡은 휘그당의 거물들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려 했을 때 이것을 저지한 세력도 명예혁명에 동조했던 중산층들이었다.[9]
물론 명예혁명을 통해 확보된 참정권은 오직 중산층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자유주의가 보통선거와 동일한 것은 아니며, 명예혁명은 유럽에서 절대왕정이 확립되던 시기에 과장을 조금 보태서 갑툭튀한 사건이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한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며,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서유럽의 자유주의가 처음에는 중산층 남성에서 시작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다른 계층으로 확대되었으니, 주류 의견에서 명예혁명을 고전적 자유주의의 정치적 시작점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명예 혁명 이후 윌리엄 3세가 가톨릭교도의 참정권을 제한하면서 종교적 자유가 침해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16세기 메리 1세 시절부터 가톨릭이 집권할 때마다 영국이 피바다가 된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은 데다가,[10] 당시에 영국이 가톨릭 국가들과 전쟁 중이었다는 현실적 한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명예혁명은 혁명을 통해 중산층이 주장한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가 성립되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세세한 사안 하나하나가 모두 현대적 자유주의와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고전은 현대인의 관점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만약 고작 10%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찾았다고 해서 나머지 90%까지 버린다면, 루소나 마르크스의 저작들도 현대 사회에서는 불쏘시개 이상의 가치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이전 버전의 문서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직접적 기원을 18세기 후반 급진적 정치개혁을 주장한 영국의 급진파라고 서술되어 있기도 했지만, 이것은 역사적 수정주의로써 가치가 있을지는 몰라도, 일반적으로는 유일한 정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다. 일단 고전적 자유주의가 17~19세기의 사상인데 그 근원을 18세기 후반에야 등장한 사상으로 잡는 것 자체가 선후 관계가 맞지 않는 무리수이다.[6]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오직 사회자유주의만을 자유주의의 정통으로 보며, 사회자유주의와 맞지 않는 사건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편협함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전 문서에서 근거로 들었던 신라대학교의 김명환이 2010년에 쓴 논문도 그런 예이다. 이 논문의 저자는 영국의 자유주의 전통이 17세기 중반 영국 내전 시기의 포퓰리즘 운동인 수평파(Levellers)에서 시작되었다가 19세기 중반의 차티스트 운동과 1900년을 전후로 한 자유당[7]으로 건너 뛰었다고 보는데, 이는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의 거의 전부를 넘겨버리는 발상이다.
명예혁명의 정치적 배경으로 가톨릭 색채를 띈 제임스 2세에 대한 개신교 상류층의 반발이 주목되곤 하지만, 종교적 충돌과 상류층간의 이전투구가 명예혁명의 전부는 아니었다.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제임스 2세가 각종 칙령을 마음대로 남발하는 통에 젠트리, 상인, 사업가들이 재산 피해를 보자 이들 중산층[8] 사이에서 왕의 인기가 급락했고, 결국 왕을 몰아내기 위해 중산층이 귀족들과 연합했던 사실에 있다. 당연하겠지만 명예혁명의 가장 큰 의의는 개신교 세력의 승리나 휘그당의 집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 직후에 중산층의 요구에 따라 권리장전이 통과되고 이를 통해 의회 민주주의에 기반한 법치주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진 데에 있다. 명예혁명 이후의 자유주의는 계속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 법치주의, 표현의 자유, 즉 고전적 자유주의의 기본 요소들이 확립되지 않았다면 이런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명예혁명이 성공한 뒤에 정권을 잡은 휘그당의 거물들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려 했을 때 이것을 저지한 세력도 명예혁명에 동조했던 중산층들이었다.[9]
물론 명예혁명을 통해 확보된 참정권은 오직 중산층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자유주의가 보통선거와 동일한 것은 아니며, 명예혁명은 유럽에서 절대왕정이 확립되던 시기에 과장을 조금 보태서 갑툭튀한 사건이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한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며,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서유럽의 자유주의가 처음에는 중산층 남성에서 시작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다른 계층으로 확대되었으니, 주류 의견에서 명예혁명을 고전적 자유주의의 정치적 시작점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명예 혁명 이후 윌리엄 3세가 가톨릭교도의 참정권을 제한하면서 종교적 자유가 침해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16세기 메리 1세 시절부터 가톨릭이 집권할 때마다 영국이 피바다가 된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은 데다가,[10] 당시에 영국이 가톨릭 국가들과 전쟁 중이었다는 현실적 한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명예혁명은 혁명을 통해 중산층이 주장한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가 성립되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세세한 사안 하나하나가 모두 현대적 자유주의와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고전은 현대인의 관점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만약 고작 10%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찾았다고 해서 나머지 90%까지 버린다면, 루소나 마르크스의 저작들도 현대 사회에서는 불쏘시개 이상의 가치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3. 상세 [편집]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사유 재산과 경제적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로크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들의 사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성립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만약 국가가 함부로 개인의 재산을 빼앗는다면 국민은 국가에 저항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을 촉발한 사건은 세금 문제였다. 또한 고전 경제학자들은 '국민이 국가의 간섭이나 규제없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국가 경제의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이들은 자유무역을 중시했으며, 전쟁은 무역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바보같은 행동으로 여겼다.[11] 하지만 의외로 토지에 대해서는 공권력에 의한 공평한 분배를 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19세기까지만 해도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시민 계급이 세습되는 대토지에 기반한 귀족 세력과 여전히 정치적으로 대립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12]
고전적 자유주의는 지성인들간의 자유로운 토론에 의해 국가의 정책이 정해지는 정치 체제를 선호했으며, 표현의 자유를 다른 모든 자유를 보장하는 근간으로 보았다. 시민 혁명으로 전근대적 왕정을 전복시키기 전에는 발언이나 저서의 내용이 높으신 분들의 비위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시민 계급 지식인들이 자주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중요시한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영국의 로크, 데이비드 흄으로 대표되는 경험주의 철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도 원인이 되었다. 경험주의는 '인간의 본성에는 이미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와 같은 식의 주장에 반대하여, 모든 지성의 원천은 후천적 경험이라고 생각했으며, 개인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 누구도 완벽한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믿었다. 또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념에 근거하여 주장을 만들어 내지만, 그런 이념의 대부분을 논리적으로 검증하지 않은채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이 모여 좋은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다양한 의견이 차별받지 않고 표출될 수 있는 환경을 중요시했으며, 특히 어떤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도 경청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고전적 자유주의 정치 철학의 기반은 천부인권 사상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이 동등한 인권을 부여받은 채로 태어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인권은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에 의해 정당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다만 초기 민주주의에서 투표권이 모든 국민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완전한 보통 선거가 되는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투표권을 인권보다는 특권으로 보는 견해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또한 로크와 같은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평등한 인권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기회의 평등과 교육은 중시했지만, 결과의 평등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사상가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어서, 장 자크 루소의 경우에는 자유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1세기 후의 마르크스주의에 비견될 정도로 사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13]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전적 자유주의의 중심은 제러미 벤담이나 밀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로 이동하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최고의 선으로 보았으며, 행복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체제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였다. 또한 밀과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당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던 영국의 공장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다. 비록 이들이 혁명적인 체제 변화까지는 원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급진주의자들의 사상은 이후 영국식 사회주의, 또는 사회자유주의로 발전하였다.
이론적인 면에서는 경제적 자유에 목매달 거 같지만 의외로 현실 정치에선 고전적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정당들은 일부 사회자유주의적 요소들을 수용해 중도우파적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내세우는 정당들이 훨씬 더 우파적인 성향을 띤다. 사실 중도좌파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쳐서[14] 지공주의 등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파생된 진보적 이념도 꽤 있다. 현대에 와서 고전적 자유주의는 일반적으로 우파 자유주의로 분류된다. 20세기 초반까지의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 중 진보적인 부분은 사회자유주의[15]로 독립했다.
현대 정치에서 일반적인 고전적 자유주의가 보수주의나 사회자유주의를 비롯한 다른 사상과 구별되는 주요 지점 중 하나는 집산주의에 대한 거부가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관은 집산주의를 옹호할 수도 있는 사회자유주의, 좌파 자유지상주의[16], 일부 보수자유주의[17]의 자유관과는 철학적 차이점이 크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지성인들간의 자유로운 토론에 의해 국가의 정책이 정해지는 정치 체제를 선호했으며, 표현의 자유를 다른 모든 자유를 보장하는 근간으로 보았다. 시민 혁명으로 전근대적 왕정을 전복시키기 전에는 발언이나 저서의 내용이 높으신 분들의 비위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시민 계급 지식인들이 자주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중요시한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영국의 로크, 데이비드 흄으로 대표되는 경험주의 철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도 원인이 되었다. 경험주의는 '인간의 본성에는 이미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와 같은 식의 주장에 반대하여, 모든 지성의 원천은 후천적 경험이라고 생각했으며, 개인의 경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 누구도 완벽한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믿었다. 또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념에 근거하여 주장을 만들어 내지만, 그런 이념의 대부분을 논리적으로 검증하지 않은채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이 모여 좋은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다양한 의견이 차별받지 않고 표출될 수 있는 환경을 중요시했으며, 특히 어떤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도 경청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고전적 자유주의 정치 철학의 기반은 천부인권 사상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이 동등한 인권을 부여받은 채로 태어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인권은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에 의해 정당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다만 초기 민주주의에서 투표권이 모든 국민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완전한 보통 선거가 되는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투표권을 인권보다는 특권으로 보는 견해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또한 로크와 같은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평등한 인권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기회의 평등과 교육은 중시했지만, 결과의 평등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사상가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어서, 장 자크 루소의 경우에는 자유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1세기 후의 마르크스주의에 비견될 정도로 사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13]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전적 자유주의의 중심은 제러미 벤담이나 밀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로 이동하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최고의 선으로 보았으며, 행복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체제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였다. 또한 밀과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당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던 영국의 공장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다. 비록 이들이 혁명적인 체제 변화까지는 원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급진주의자들의 사상은 이후 영국식 사회주의, 또는 사회자유주의로 발전하였다.
이론적인 면에서는 경제적 자유에 목매달 거 같지만 의외로 현실 정치에선 고전적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정당들은 일부 사회자유주의적 요소들을 수용해 중도우파적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내세우는 정당들이 훨씬 더 우파적인 성향을 띤다. 사실 중도좌파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쳐서[14] 지공주의 등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파생된 진보적 이념도 꽤 있다. 현대에 와서 고전적 자유주의는 일반적으로 우파 자유주의로 분류된다. 20세기 초반까지의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 중 진보적인 부분은 사회자유주의[15]로 독립했다.
현대 정치에서 일반적인 고전적 자유주의가 보수주의나 사회자유주의를 비롯한 다른 사상과 구별되는 주요 지점 중 하나는 집산주의에 대한 거부가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관은 집산주의를 옹호할 수도 있는 사회자유주의, 좌파 자유지상주의[16], 일부 보수자유주의[17]의 자유관과는 철학적 차이점이 크다.
4. 정치적 스펙트럼 [편집]
고전적 자유주의는 19세기까지는 보수주의에 맞서는 진보적 이념으로 간주되었고 실제 지금도 진보적인 부분이 많은 사상이나, 20세기 이후 개량적 자유주의인 사회자유주의가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 중도좌파 포지션을 차지하면서 이후부턴 경제적 관점 등에서 중도우파적 스탠스를 지닌 세력이 자주 표방하게 되었다. 다만 이것도 추세가 그렇다는거지 실제로는 우파부터 좌파까지 예외가 많아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는 편이다. 예를 들어 보수자유주의가 중도우파 포지션에서 영향력이 큰 경우 중도 스탠스의 세력이 표방하기도 한다.
일반론적으로는 자유민주당(독일), 민주당(태국), 자유민주당(스위스) 같은 온건한 중도~중도우파의 사례가 흔한 편이나 진보당(노르웨이), 네덜란드의 민주정치전환점 같은 우파, 심지어 캐나다 인민당, 독일의 자유당 등 강경 우파 정당의 사례도 일부 존재한다.[18] 또한 미국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는 보수주의 전반을 관통하는 철학으로 표현되며, 일각에서는 미국의 보수주의 자체가 보수주의가 아닌 '위장된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9]
자유지상주의와 고전적 급진주의 또한 학계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의 일부로 간주하는데 이는 좌우파 자유지상주의 모두 포함된다. 그렇기에 미국에서 신고전적 자유주의, 지공주의 같은 좌파적 자유지상주의도 이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 심지어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인 놈 촘스키도 스스로 고전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며 특히 애덤 스미스를 종종 인용하는데, 18세기 말~ 19세기 초중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빅텐트적 성격을 고려하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일반론적으로는 자유민주당(독일), 민주당(태국), 자유민주당(스위스) 같은 온건한 중도~중도우파의 사례가 흔한 편이나 진보당(노르웨이), 네덜란드의 민주정치전환점 같은 우파, 심지어 캐나다 인민당, 독일의 자유당 등 강경 우파 정당의 사례도 일부 존재한다.[18] 또한 미국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는 보수주의 전반을 관통하는 철학으로 표현되며, 일각에서는 미국의 보수주의 자체가 보수주의가 아닌 '위장된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9]
자유지상주의와 고전적 급진주의 또한 학계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의 일부로 간주하는데 이는 좌우파 자유지상주의 모두 포함된다. 그렇기에 미국에서 신고전적 자유주의, 지공주의 같은 좌파적 자유지상주의도 이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 심지어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인 놈 촘스키도 스스로 고전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며 특히 애덤 스미스를 종종 인용하는데, 18세기 말~ 19세기 초중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빅텐트적 성격을 고려하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5. 인물 [편집]
5.1. 정치인 [편집]
- 에마뉘엘 마크롱※☆ - 현대 프랑스에서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범우파 정치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서, 중도주의자인 마크롱은 "사회자유주의"로 일컬어지지만, 영미권 언론에선 마크롱을 "자유지상주의"나 "고전적 자유주의"로 칭하기도 한다.
5.2. 학자 [편집]
- 니콜라 드 콩도르세 - 애덤 스미스와 함께 경제적 자유주의의 아버지이다.
- 칼 포퍼※☆
6. 관련 문서 [편집]
7. 둘러보기 [편집]
[1] 제2대 부통령 (1797년 ~ 1801년) / 제3대 대통령 (1801년 ~ 1809년).[2] 제7대 대통령 (1829년 ~ 1837년).[3] 연방의회 의원 (2009년 ~ 2025년) / 자유민주당 대표 (2013년 ~ 2025년) / 제20대 연방재무장관 (2021년 ~ 2024년).[4] 제25대 대통령 (2017년 ~ ).[5] 다만 천부인권 개념과는 달리 경제적 자유 부분은 당시 빅텐트 성격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부터도 서로 의견이 좀 갈리긴 했다. 이 경제적 자유라는게 개인의 경제활동 자유를 보장하는데 치중할 것이냐 아님 빈부격차가 해결된 경제적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냐(급진주의)를 보는 시각 차이 때문. 그래서 사회자유주의가 생겼다고 볼 수도 있겠다.[6] 사실 급진주의의 본격적 시작은 19세기이다.[7] 특히 글래드스턴 시절의 자유당[8] 근대 시대의 역사를 설명할 때 나오는 중산층은 현대 경제를 설명할 때 나오는 중산층과는 의미가 다르다. 현대의 중산층은 소득 중위권을 말하지만, 이 시절의 중산층은 왕족, 귀족, 고위 사제가 형성하는 상류층의 바로 아래에 있는 계급을 말하는 것으로, 소득 중위권보다는 상당히 부자였다.[9] 출처: 대런 애스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2012.[10] 출처: 사이먼 샤마(Simon Schama), <<사이먼 샤마의 영국사(A History of Britain )>>, 2000~2002.[11] 정확히 말하자면 18세기까지는 전쟁을 통해 무역 상대를 넓힐 수 있었기 때문에 (또는 전쟁이 돈이 됐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도 전쟁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19세기부터는 전쟁이 무역에 방해가 되면서 전쟁을 피하려는 경향이 커지기 시작했다.[12] 또는 당시 영국의 상공업 종사자들은 토지를 빌려서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자신들이 열심히 일해서 사업을 번창하게 하면 지대가 올라서, 땅주인은 아무 기여도 안했지만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낼롬 먹어버리는 관계로, 이것이 배아파서 그랬다는 분석도 있다.[13] 마르크스주의는 아니지만 공상적 사회주의는 급진적 자유주의에서 파생됐긴 하다.[14] 사실 자유주의 자체가 현대 좌우파의 핵심을 아우르는 개념이긴 하다. 자유주의란 카테고리 안에 고전적 자유주의도 포함되는 것이긴 하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진화 혹은 분화해 현대적 자유주의가 나온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영국만 봐도 현 자유민주당의 전신인 자유당은 보수당과 대립하는 진보 컨셉 정당이었다.[15] 급진적인 경우는 좌파 자유지상주의.[16]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도 포함[17] 공동체를 중시하고, 시장개입주의적인 보수자유주의 사례로는 질서자유주의가 대표적이다.[18] 이렇게 고전적 자유주의가 우파 진영에서 정치적 스펙트럼이 넓은 이유는 일반적인 현대의 자유주의와 구별되는 고전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 중 하나가 바로 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이다.[19] John Micklethwait; Adrian Wooldridge (2004). The Right Nation: Conservative Power in America. Penguin. p. 343. ISBN 978-1-59420-020-5. "Whichever way you look at it, American conservatism has embraced a great chunk of classical liberalism-so much of it that many observers have argued that American conservatism was an oxymoron; that it is basically classical liberalism in disguise."[20] 진보오를레앙주의자
Contents are available under the CC BY-NC-SA 2.0 KR; There could be exceptions if specified or metioned.
개인정보 처리방침
임시조치 및 기타 문의: [email protected]
떡밥위키 후원하기
개인정보 처리방침
임시조치 및 기타 문의: [email protected]
떡밥위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