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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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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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공식명칭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Československá republika, 1918–1939, 1945–1960)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Československá socialistická republika, ČSSR, 1960–1990)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Česká a Slovenská Federativní Republika, ČSFR, 1990–1992)[4]
약칭
체코어: Československo
슬로바키아어: Česko-Slovensko[5]
영어: Czechoslovakia

1918년 10월 28일부터 1992년 12월 31일까지 동유럽에 존재하던 공화국.[6] 체코슬로바키아가 결합된 명칭이다. 1992년 이후 '벨벳 이혼'이라 불리는 분리결정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각각 분리되어 사라졌다.
[ 체코슬로바키아 인정 언어의 표기 ]
Československo
Česko‑Slovensko
Tschechoslowakei
Czechosłowacja
Чеськословеньско (Česʹkoslovenʹsko)
טשעכאָסלאָװאַקײַ (tshekhoslovakay)
재미있는 건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민족도 같고, 언어도 비슷하고, 문화도 비슷한데 중세 시절의 대 모라비아 왕국(800?~907) 이후 1918년까지는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대부분 다른 나라로 지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 모라비아 왕국이 동쪽에서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온 마자르족에게 멸망한 뒤 체코에는 보헤미아 공국-보헤미아 왕관령이라는 독립국가가 들어섰지만 슬로바키아는 그러지 못하고 마자르족이 세운 헝가리 왕국이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합스부르크 제국시기에는 제국의 틀 안에서 한 나라에 속했다고 볼 수 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 치하에서도 체코는 명목상으로나마 합스부르크 가문동군연합인 보헤미아 왕국이었던 반면에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질 때 통합한 후 약 70년 간 한 나라로 지냈던 게 역사상에서 사실상 유일한 사례다.

2. 역사 [편집]

2.1.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1918–1938)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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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의해 왕국으로 승인된 보헤미아 왕국 - 체코와, 천년 동안 헝가리의 일부로서 지배되었던 슬로바키아를 합쳐서 만든 나라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Československá republika)으로 독립하였다. 문제는 민족자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국가인데 민족 구성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흡사했다. 수데티(Sudety) 지방, 이른바 주데텐란트독일인이, 남부 슬로바키아 지방에 헝가리인이, 테신[7] 지방에 폴란드인이, 카르파티아-루테니아 지방에 우크라이나인루신인이 살고 있었다.[8]

전간기 동안 독일인 문제로 위기를 맞았으나 연정의 형식을 통해 독일인들을 권력집단의 주요 축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민족적 불만을 누그러뜨리는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 성립 후 본국의 막대한 후원을 등에 업은 주데텐 독일당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9] 체코슬로바키아는 위기를 맞았다.

파일:external/ethnomusicologyreview.ucla.edu/praeger_im_2.jpg
1945년 이전 주데텐 독일인의 분포도.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된 이래 동방식민운동으로 독일인이 대거 이주했고, 특히 30년 전쟁합스부르크 가문체코인을 억압하고 독일화하는 과정에서 독일인의 이주가 가속화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성립 당시에는 독일인이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는데, 특히 독일과 국경을 이루는 주데텐란트에는 독일인이 거주했다[10]. 독일 민족의 통일을 외치던 나치 독일은 이 '동포'들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고 주데텐 독일당을 이용해 독일인들을 자극하여 말썽을 일으키게 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다는 선전을 하며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미 오스트리아독일에 흡수당한 전적이 있었으므로 위협의 메시지는 분명하였고 이 일로 또다시 전쟁을 발생시키고 싶지 않던 영국네빌 체임벌린 내각은 재빠르게 움직여 아돌프 히틀러와 대면하였으나 협상을 원치 않던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모두 내주도록 해주겠다는 협상조건을 묵살하고 무조건 무력을 동원해 점령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영국과 프랑스 모두를 경악에 빠뜨렸다. 결국 체임벌린과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이탈리아가 제안하고 중재자를 자처한 뮌헨 회담에 참석하여 나치 독일과 '협상', 주데텐란트를 독일 국방군이 직접 점령하는 데에 동의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압력을 넣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배제된 이 회담의 결과에 굴복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 독일에 주데텐란트를 할양했을 뿐만이 아니라, 인종 지도에 따라 헝가리에 슬로바키아 남부지역과 카르파티아-루테니아를, 폴란드에 테셴을 내주는 수모를 당했다.

2.2.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1938–1939) [편집]

뮌헨 협정 후 제2공화국이 선포되고, 사임한 에드바르트 베네시를 대신하여 에밀 하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주데텐란트를 빼앗긴 체코슬로바키아는 더 이상 독일에 대항할 능력이 전무했다. 주데텐란트에는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해 국경 요새가 건설, 확장되어 소(小)마지노라고 부를 만한 수준에 이르렀었는데, 이것들을 모조리 빼앗긴 것이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른바 통일당이라는 것을 유일 집권당으로 삼아 독재국가화하고, 중앙은행의 준비금을 베를린으로 옮기는 등, 정치로든 경제로든 나치에 완전히 종속되어 사실상 나치 독일의 괴뢰국이 되었다.

이 때를 틈탄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로 국가가 개편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데텐란트를 복속한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은 나치 독일은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을 사주, 이용하고 이들이 체포되자 즉시 군대를 움직여 슬로바키아 민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마저 병탄했다. 이후 슬로바키아를 분할하여 1939년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란 괴뢰국을 성립시키는 한편 나머지 영토는 형식적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계승하는[11]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을 설치했다. 후에 결성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가 영국의 도움을 받아 연합국에 가담하여 추축국에 대항하였다.

2.3.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1945–1948)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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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해방이 되었지만 같은 시기 소련군이 영내로 진주하였다. 그리하여 전쟁 전 헝가리 왕국에 빼앗긴 카르파티아-루테니아 지방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던 지역을 빌미로 다시 찾지 못하고 소련(우크라이나 SSR)에게 빼앗겼다.

종전 직후, 망명정부 인사들이 주축이 된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제2공화국과 망명정부에서 대통령을 했던 베네시가 다시 대통령으로 재추대되었고, 자유주의 정당 4곳과 사회주의 정당 4곳이 좌우합작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했고, 공산당은 원내 1당을 차지하며 연립정부의 추축을 맡았다.

베네시 정부는 제5열 노릇을 한 (전투를 피해 동유럽에서 피난 온 독일인 난민 포함) 450만명의 독일계 국민과 60여만 명의 헝가리계 국민들에 대하여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에서 영감을 얻은 시민권 박탈→부동산 및 예금을 비롯한 재산몰수강제퇴거로 이어지는 강력한 대통령령을 포고했다. 그 다음에 자연인 1명당 500코루나 이하까지 화폐수표어음예금주식국채를 등가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 때문에 외국인들이 큰 손해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상업·공업·광업국유화를 실행했다. 1945년에 노동자 1만 명 이상을 고용하는 주식회사를 국유화하고, 1946년에 1천 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기업을, 1947년에 100명 이상을 고용하는 유한회사를, 마지막으로 1948년에는 10명 이상을 고용하는 중소기업을 국유화했다.

그러나 1947년 체코가 마셜플랜을 거절하면서 공산당의 지지율이 추락하였고, 이대로라면 공산당이 정권을 빼앗기거나 아니면 정권에서 차지하는 몫이 작아질 것이 뻔했다. 결국 초조해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쿠데타를 지시하였다. 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행동을 개시했고, 소련 대사 발레리안 조린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 결과 2월 25일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이 공산당이 장악한 정부를 인정함으로써 제3공화국은 붕괴되었다.

2.4. 체코슬로바키아 제4공화국(1948–196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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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1960–199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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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1990–1992)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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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종결되고 1989년 11월 동유럽 혁명 결과 동년 12월 바츨라프 하벨이 새 대통령에 선출되어 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1990년 3월 헌법 개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해체되고 국호를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바꾸었으며 1991년 6월에는 체코 주둔 소련군도 철수를 완료했다.

하지만 곧 체코 정치세력과 슬로바키아 정치세력 간의 일련의 알력을 빚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국명분쟁이지만, 실제로 문제가 되었던 점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소속국의 지위와 국체였다. 동구권 붕괴와 경제적 혼란 속에서 급속한 개혁을 요했던 시점이었는데, 체코와 슬로바키아 양자의 인정을 모두 받아야 했던 당시 연방제에서는 수틀리면 어떤 개혁시도든 쉽게 봉쇄될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하여 유럽연합 가입을 이룩하려고 한 체코와, 상대적으로 EU나토 가입에 별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시장개혁과 정부 역할축소에 반발한 슬로바키아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특히 상대적으로 경제가 낙후된 슬로바키아 입장에서 체코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별 다른 민족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나라가 무너질 정도로 큰 충돌도 아니었으며, 슬로바키아의 독자적인 외교권을 인정하되 통화정책 등을 계속 연방정부에서 수행하는 등의 합의안도 더러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들은 평화적으로 연방을 해체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은 1992년 12월 31일 자정을 기하여 해체되었으며 1993년 1월 1일부로 체코슬로바키아는 완전히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양국은 협정에 따라 당시 인구비율이었던 2:1로 모든 걸 나눠 가졌다. 심지어 국채까지. 기존의 UN 회원국 지위도 어느 한쪽이 승계하지 않고 아예 말소처리하고 새로 가입할 정도로 철저하게 청산절차를 밟았다. 다만 체코슬로바키아를 주도하는 주체가 체코였기 때문에 체코가 단독으로 물려받은 것이 여럿 있는데, 대표적으로 6.25 전쟁정전협정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가 맡던 중립국감독위원회 업무가 있으며 이것은 체코가 물려받았다.[12] 주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이 수도 프라하에 있었기 때문에 해외 주재 대사관도 대체로 체코가 물려받았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의 기록도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이 승계했다.

분리되었을 적에도 벨벳 혁명처럼 아무런 군사적 마찰없이 해체됐기 때문에 이를 벨벳 이혼(sametový rozvod; zamatový rozvod)이라고도 부른다. 다만 체코가 약속을 전부 다 지킨 것은 아니었는데, 처음 약속을 깨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기[13]를 그대로 사용한 것. 사실 체코도 새로 국기를 제정하려 했으나 난항을 겪었고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국기에서 의미만 바꾸어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의외로 슬로바키아에서는 별 반발이 없었는데, 딱히 자국 민족과 관련없는 국기인데다가 이미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시절부터 쓰던 국장과 국기를 수정하여 독립 당시 확정했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국기에 큰 애착이 없었다고 한다.

3. 국가 [편집]


전반부는 체코의 국가 1절, 후반부는 슬로바키아의 국가 1절을 이어서 연주하였다.


뮌헨 협정 전에는 소수민족이던 독일계 주민들을 위한 독일어 가사도 있었다.

4. 국장 [편집]


1920년부터 1938년까지는 세 종류의 국장을 사용했다. 이 중 대형 국장은 제1공화국 시기에 주로 사용했고, 뮌헨 협정 뒤에 수립된 제2공화국 시기에는 중형 국장을 사용했다. 소형 국장은 시기에 상관없이 즐겨 사용했으며 나치 독일에게서 해방된 1945년에 수립된 제3공화국부터 공산정권이 수립된 뒤인 1960년까지 사용했다.[14]

5. 여담 [편집]

  •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형성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를 잇는 회랑이 제안된 적이 있었다. 체코 회랑 문서 참조.
  • 2021년 기준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의 인구는 16,185,279명이다.
  • 핀란드의 게임 Fear & Hunger 2: Termina의 무대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를 모티브로 한 '보헤미아'의 수도 '프레헤빌'이다. 실제 역사 속 체코슬로바키아와는 정 반대로 후줄근하고 발전에 뒤쳐진 곳으로 나오며, 근친교배인신공양에 미쳐 있는 종교 중심 국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6. 관련 문서 [편집]


[1] 위와 아래의 사진에서 영토의 차이가 나는 까닭은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나치 독일압력에 의해 헝가리에 빼앗기고 전후에는 소련에 할양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방은 카르파티아-루테니아라고 불리는데, 폴란드 동부의 갈리치아 일대와 더불어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에게 빼앗겨 루테니아와 갈리치아는 소련 영토가 되었고 소련 해체 후에는 독립국 우크라이나자카르파탸주가 되었다.[2] 사회주의공화국 수립 이후[3] 독일인은 300만 명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 인구의 22 %를 차지해 16 %를 차지하던 슬로바키아인보다 수가 더 많았다. 헝가리인도 슬로바키아 일대에 수십만 명이 거주했다, 독일인과 헝가리인은 1945년 종전 후 베네시 선언에 따라 서독,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 헝가리로 추방당했다. 다만 독일인과 달리 헝가리인은 완전히 추방되지 않아 지금도 슬로바키아 남부에 소수가 잔존하고 있다.[4] 페데라티브니(Federativní)는 체코어 표기이며 슬로바키아어 표기는 페데라티우나(Federatívna)이다.[5] 체코인들이 하이픈 없는 형태를 선호하고 슬로바키아인들이 하이픈 있는 형태를 선호하는 차이가 있다.[6] 현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모두 중부유럽으로 분류되지만 냉전 당시 소련의 영향력이 미치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동유럽으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사실 지금도 동유럽으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많다. UN도 동유럽으로 분류한다.[7] 독일어로는 테셴, 폴란드어로 치에신, 원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였던 것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영토분할과정에서 도시가 둘로 분단되었고, 때문에 영유권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분할과정에서 도시의 사회 인프라가 폴란드령 치에신과 체코령 체스키테신 간에 편중되어서 이에 따른 불편이 있었으나, 현대에는 솅겐 협정으로 어느 정도 해소된 상태이다.[8] 때문에 오–헝제국을 해체해서 또 오–헝제국을 만들었다는 촌평을 받기도 한다. 남쪽의 유고슬라비아 왕국도 마찬가지 평을 들었다.[9] 1935년 총선에서는 (다당제라 체코인들의 표가 여러 정당으로 분산된 덕을 보긴 했지만) 독일인들의 몰표에 힘입어 주데텐 독일당이 득표율 제1당이 되었을 정도였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들의 68 %가 주데텐 독일당에 투표했다.[10] 만일 히틀러가 집권하지 않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없어서 체코 거주 독일계가 추방당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체코도 벨기에처럼 체코인-독일인 연방제 국가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11] 실제로는 독일에서 파견된 총독이 통치했다. 제2대 독일 총독이 그 유명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12] 그러나 북한이 분리해 나온 체코의 체코슬로바키아 승계를 거부하면서 활동개시 후 1년 남짓 지난 1994년 판문점 북측구역에서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고 중감위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체코 대표단이 북한의 퇴거통보에 항의하자 물과 전기를 끊는 등 상당히 볼썽사나운 장면이 연출되었다.[13]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기는 보헤미아의 깃발에 슬로바키아를 의미하는 파란색 삼각형을 추가하여 만든 것이다. 보헤미아 깃발 자체는 폴란드 국기랑 동일하기에 변형을 가한 것.[14] 사실 세 국장 모두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헌법에 그대로 남아있었으므로 대형 국장과 중형 국장이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2공화국부터는 대통령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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