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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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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프로이센]][[분류:독일군]][[분류:독일 제국군]][[분류:중부유럽의 군대]][[분류:해체된 군부대]] [include(틀:역대 독일의 군사조직)]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000,#e5e5e5><tablebgcolor=#fff,#1c1d1f> '''{{{+1 프로이센 왕국군}}}[br]Preußische Armee''' || ||<-2><nopad> [[파일:프로이센군기(1816).svg|width=100%]]|| ||<width=30%> '''존속일''' ||1701–1919|| || '''국가''' ||[include(틀:국기, 국명=프로이센 왕국)]|| || '''참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br][[대북방전쟁]][br][[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br][[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br][[7년 전쟁]][br][[바이에른 계승 전쟁]][br][[프랑스 혁명 전쟁]][br][[나폴레옹 전쟁]] *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러시아 원정]] *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br][[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br][[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br][[프로이센-프랑스 전쟁]][br][[제1차 세계 대전]]||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로이센 왕국]]의 [[군대]]. [[왕국]]을 선포한 해인 [[1701년]] 창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뒤 [[1918년]] 해체되었다. 2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전장]]에서 활약하였으며, 변방국가였던 프로이센을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올려놓은 원동력 중 하나이며, [[독일 제국군]]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술적인 발전은 분명 대단한 수준이었고, [[군사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군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전략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미숙함을 보이고 [[문민통제]]를 무시한 프로이센군 [[장교단]]은 결국 독일의 능력 밖으로 전쟁을 확전시켜 나갔으며, 결국 [[독일 제국]]과 그 후신인 [[나치 독일]]의 패망에 일조한다. == 역사 ==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시절에는 [[상비군]] 개념이 없었으며 [[용병]]에 의존한 방어 전략이 사용되었다.[* [[호엔촐레른 가문]]이 [[군국주의]] 성향이 강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몇몇 밀덕 군주들로 인해 생긴 오해로, 실제 호엔촐레른 가문 군주들은 군대에 젬병이었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초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브란덴부르크)|프리드리히 1세]]나 실질적인 프로이센 왕국 출범의 기틀을 닦은 [[요아힘 2세 헥토어]]는 각각 [[후스 전쟁]]과 대 [[오스만 제국|오스만]] 전쟁에서 수준 미달의 지휘력만 보여주고 추하게 물러난 이력만 있다.] 그러나 [[베를린]]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진두지휘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 시기에 들어 상비군이 창설되었으며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가 [[동군연합]]이었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서 프로이센 국왕으로 칭왕하면서 우리가 아는 프로이센군이 창설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부터 시작된 부국강병 정책에 힘입어 급격히 발전하였으며, [[프리드리히 2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 시절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주변국 군대를 연파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나폴레옹 전쟁]]기에는 희대의 군사적 [[천재]]인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대패하고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을 맺기도 했으나,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대육군|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데 큰 축을 담당하였다. [[1855년]] [[알브레히트 폰 론]]이 군사개혁을 한 후 신프로이센군[* 구별을 위한 표현은 훗날에 붙여졌으며 [[독일어]]로는 Altpreußischen Armee(구프로이센군), Neupreußischen Armee(신프로이센군)으로 부른다. 관사로는 der(데어)를 붙인다.] 체제로 대거 재편되었다. 이후로는 [[전쟁론]]으로 대표되는 선진적인 군사 연구와 [[산업 혁명]]으로 대표되는 국가적 역량 강화 및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뛰어난 외교술에 힘입어 [[덴마크]],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제2제국]]을 차례로 격파하여 [[독일 제국|통일 독일]]을 선언했다. 프로이센군은 다른 제후국 군대들과 함께 신생 [[독일 제국군]]에 흡수되었지만[* 이는 [[바이에른 왕국군]]도 마찬가지이다.] 실질적으로는 제국군 그 자체가 프로이센군이라 봐도 되었다. [[빌헬름 2세]] 시절에는 [[독일 제국 해군|해군]]을 급격히 팽창시키며, 식민지 건설에 나서게 되면서 [[대영제국|영국]]과의 군비경쟁이 시작된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결국 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해산되었다. == 군종 == [[군종]]은 육군과 해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후에는 [[항공대]] 또한 두 군 산하에 창설되었다. === 육군 === [[육군]]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시절의 군대를 모태로 형성되었고, 전통적으로 프로이센 왕국군의 핵심이었다. [[기병]]이 아닌 [[전열보병]] 중심으로 구성된 프로이센의 육군은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그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한 [[1740년]] 시점에 80000명 가량이었으며, 국가 예산의 7분의 5가 육군 중심의 군에 배당되었을 정도로 처음부터 매우 중시되었다. 따라서 군 혁신 또한 육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세계 최초로 후장식 볼트액션 소총인 [[드라이제]]를 전력화하고, [[일반참모]] 제도를 통해 근대적인 군 [[편제]]를 만들어낸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프로이센 왕국의 [[산업 혁명]]과 [[철도]]의 보급은 신속한 병력 기동을 가능케 했다. [[헬무트 폰 몰트케|대(大) 몰트케]]에 따르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28만 5천 명을 단 25일 만에 전부 전장으로 보낼 능력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그보다 적은 20만 명을 45일씩이나 걸려서야 이송할 수 있었다. 다만 프로이센 왕국의 기병 전력도 결코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프로이센 왕국군의 기병 부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럽 최고로 평가받았다. 그들의 말은 최상품에 속했고, 기마병 역시 용맹스러운 데다가 훌륭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출처: 나폴레옹 전쟁/ 그레고리 프리몬-반즈, 토드 피셔 지음/ 박근형 번역/ 플래닛미디어/ 61쪽]. [[일본 제국 육군]]에 큰 영향을 끼친 병과이기도 하다. 일본이 19세기 중엽 [[메이지 유신]]으로 막 서구에 문물을 개항한 직후, 서구 열강들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갖기 위해 유럽에 사절단을 보내 각 나라들의 군대를 참관했는데 엄격한 군율과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프로이센 육군이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하여 프로이센 육군을 모방해 일본 제국 육군을 만들었던 것이다[* 반면 일본 제국 해군은 19세기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국이던 [[영국 해군]]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 병사들이 즐겨 먹었던 [[카레]]를 도입하였고, 이것이 조선에도 들어오게 된다.]. 실제로 [[러일전쟁]]까지 일본 제국 육군은 부족한 수적 열세를 화력의 우위로 극복하여 다수의 적을 제압한다는 프로이센 육군의 교리를 충실하게 이행했다. === 해군 === [include(틀:독일 해군의 변천사)] 반면 프로이센 해군의 경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 시절 창설되어 그의 지원 아래 잠깐 확장한 이후로는 거의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널찍한 [[포메른]]의 [[해안]]을 방어하기에는 항상 턱없이 부족했다. [[7년 전쟁]] 당시 고작 8척의 [[갤리선]]과 5척의 포함을 보유했을 뿐이다. [[1815년]] [[독일 연방]]이 결성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로, [[독일 연방]] 내 가장 강력한 [[해군]] 세력은 전부 독일이 아닌 외국의 해군들이었다. [[하노버 왕국]] 군주이기도 한 [[영국 국왕]]의 [[영국 해군]], [[룩셈부르크 공국]] 군주 자격의 [[네덜란드 국왕]]이 이끄는 [[네덜란드 해군]], 홀슈타인 공국 군주 자격의 [[덴마크 국왕]]이 이끄는 [[덴마크 해군]]이 바로 그들로, 이 중 영국과 네덜란드는 일찍이 [[독일 연방]]에서 탈퇴하였지만 덴마크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홀슈타인 공국 문제]]로 독일계 국가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반면 프로이센 해군은 고작 [[상선]]에 [[군기]]만 단 수준이었다. 이는 [[1848년]]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 해군]]이 [[독일 연방]]의 무역로를 마비시켰지만 이에 대해 [[독일어권]] 국가들이 변변찮은 대항 하나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1848년 혁명]]으로 성립된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는 [[1848년]] [[6월 14일]] '국가 함대'(Reichesflotte)를 결성하는데, 불과 4년 후인 [[1852년]] 해체될 때까지 [[하노버 왕국]]과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간의 알력 다툼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후 프로이센 해군은 [[북독일 연방]] 해군의 중핵이 되었으며, 이는 고스란히 [[독일 제국 해군]]으로 이어진다. 제국 해군 시절에는 [[빌헬름]] 2세의 함대법 제정으로 [[대양함대|독일 역사에서 전례없이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게 되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현존함대전략을 취하며 수세적으로 나오며 별 활약을 하지 못한 채 종전을 맞고, [[유틀란트 해전]] 에서 전략적으로 대차게 깨지고,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스캐퍼플로에서 자침]]하여 잠깐 뿐이었던 [[영광]]을 영원히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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