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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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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 == *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한 적이 있다. 현재의 건축직 혹은 토목직 공무원들의 선배 격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일했다는 점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말단급 사무직, 기술직으로만 일했을 뿐인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며, 법률상의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상 사후인 1964년에 이뤄진 이상의 여동생 김옥희와의 [[신동아]] 인터뷰에 따르면, 이상은 [[일본 제국]]과 [[군국주의]]를 혐오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사람을 특별히 차별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았으며, 조선총독부에서 일할 당시에는 한 일본인 상사와 코드가 잘 맞아 그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또한 지옥변을 펴낸 것으로 유명한 동시대의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동경하기도 했다고. 일단 민족운동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일제의 근대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가던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친일파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 이상 전집을 발굴하여 최초 출판한 인물이 유명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연구자 임종국인데, 그 역시 이상을 두고 문제시한 적이 없었다. * ||<tablebordercolor=#000000><nopad> [[파일:출판사이상.jpg|width=100%]] || ||<bgcolor=#000000,#000000><color=#fff,#fff> 창문사의 사무실에서, 좌측부터 이상, [[박태원(소설가)|{{{#fff 박태원}}}]], [[김소운|{{{#fff 김소운}}}]] || 평소 계절에 상관없이 흰 구두를 신었으며, 위 사진을 포함한 여러 사진 속에서 나오듯이 영국식 레지멘탈 넥타이를 자주 둘러맸다. * 이상이 죽기 전에 서양화가 길진섭이 이상의 [[데스마스크]]를 떴다는 소문이 있지만 길진섭이 1948년 [[월북]]했기 때문에 그 진위는 불투명하다. [[김연수(작가)|김연수]]의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에서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 당시 화가이자 친구인 [[구본웅]]과 같이 다니는 모습을 그린 만평에서는 이상을 옷 잘입는 멋쟁이로 평가했다. 지금 기준으로도 옷 맵시나 헤어스타일이 꽤 멋있는 편이다. 다만 몇몇 사람들은 '''창백한 피부의 퀭한 남자가 [[구본웅|꼽추]]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고 '''서커스단'''이 들어왔나 하고 착각했다고 한다. * ||<tablewidth=550><tablebordercolor=#000000><nopad> [[파일:external/sunjooschool.com/M-1.jpg|width=100%]] || ||<bgcolor=#000000,#000000><color=#fff,#fff> 친구의 초상(1935년, 캔버스에 유채 65 x 53cm) || 친구 [[구본웅]]은 '친구의 초상'이란 제목으로 이상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림 속 이상의 입술은 창백한 피부에 비해 유달리 붉은데, 이는 뺨과 입술이 미열로 인해 항상 붉게 달아오르는 폐결핵 증상을 표현해 이상이 폐결핵 환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림의 실물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며 이따금 근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에서 볼 수 있다. *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재능 또한 있었다. [[1931년]] [[6월]]에 개회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그가 그린 서양화 자상이 입선하기도 했으며, 친구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나 자신의 소설 [[날개(소설)|날개]]의 표지 등을 그리기도 했다. 이상이 디자인한 표지 중 세 가지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되어있다. * 딱히 종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 BOITEUX BOITEUSE 이나,[* '[[십자가|CROSS]]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연작시 [[조감도]]의 2인····1····과 2인····2····라는 시에서 [[예수|기독]]을 악인의 조롱을 이겨내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낸 인물로 묘사한 부분 등[* 해당 시에서 기독과 반대되는 인물로 [[알 카포네]]가 나왔다.] 여러 작품에서 [[기독교]] 모티브를 엿볼 수 있다. 수필 산촌여정에서 [[누가복음]]을 좋아했다는 언급이 있다. * [[구인회]]의 일원으로 소설가 [[박태원(소설가)|박태원]], [[김유정(소설가)|김유정]] 등과 절친했다. 이 중 [[김유정(소설가)|김유정]]과는 형제처럼 친밀했으며, 이상은 도쿄로 떠나기 전 같은 폐결핵 환자였던 그에게 동반자살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김유정(소설가)|김유정]]은 이를 거부했다. 사후 이상과 김유정은 합동 영결식으로 화장되었다. * 상당히 괴짜스러운 인물이었으나 주변인들을 챙기는 따뜻한 마음씨 또한 가지고 있었다. 특히 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는데, 이것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여동생 김옥희에게 보낸 편지인 [[https://ko.wikisource.org/wiki/%EB%8F%99%EC%83%9D_%EC%98%A5%ED%9D%AC_%EB%B3%B4%EC%95%84%EB%9D%BC|동생 옥희 보아라]]로, 자신에게 제대로 된 말도 없이 연인과 함께 이국으로 떠난 여동생의 선택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내용이다. 편지 마지막 즈음의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라는 구절은 이상이 생전 여동생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김옥희 또한 이상에 대해 많이 사랑했으며, 소실된 이상의 묘를 찾지 못 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거나, 노년기에 치매에 걸렸을 때는 자신의 차남을 이상으로 착각해 '''"오빠, 오빠"'''라고 말을 거는 등 큰오빠 이상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 반면 남동생 김운경과는 약간의 불화 또한 있었던 모양이다. 만주로 떠난 김옥희에게 근황을 전할 때 '''"네 작은오빠는 또 어딜 나갔는지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편지에 적은 것과, 김운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울화가 치밀때는 너에게 불쾌한 내용의 편지도 썼다"'''라며 사과한 것 등을 보면 당시 방황하는 남동생과는 어느 정도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김운경이 통신사 기자로 취직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편지를 보내 축하하고 기뻐했으며 하고싶은 말 역시 많았는지 '''"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2~3일 이내로 다시 쓰겠다."''' 라고 말하거나, 자신이 도쿄에 있는 동안 아들 된 도리를 못 지키는 자신을 대신해 부모님을 모셔달라 부탁하는 등 김운경에 대해서도 비록 화를 낼 지언정 많이 아끼고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 생전 2,00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퍼져있는데 이는 이상 본인이 [[오감도]] 연재가 중단된 후에 남긴 [[오감도#작가의 말|후기]] 중 "이천점에서 삼십점을 고르는 데 땀을 흘렸다"라는 대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사후 발견된 글들을 모두 합해도 그 숫자에는 크게 못 미치며, 단순히 글을 많이 썼다는 것을 이천점이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 성적인 표현을 스스럼없이 자주 사용하는 편이었다. [[날개(소설)|날개]]에서 언급되는 '33번지 18가구'[* 33은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을 은유한 것이며 18은 [[씨발|그 18]]이 맞다고 한다.]나 다방 [[69자세|69]] 등이 대표적인 예. 이걸 두고 [[고은(시인)|고은]]의 이상 평전에서는 그의 문학에는 거의 섹드립 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매우 단편적이고 왜곡된 시각이다. * [[1977년]]에 이상의 업적을 기리고자 문학상 [[이상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이상문학상은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나, [[2020년]]에 대두된 저작권 논란으로 인해 현재는 그 위상이 크게 줄어들었다. * 그의 생가는 [[종로구]] [[청운효자동|통인동]]에 있었다.[* 정확히는 집터의 일부 위에 지어진 집이다. 실제 생가는 300평 정도의 넓은 집이었으나 이상 사후 10개의 필지로 분할, 판매되어 그 위에 다른 여러 집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후에 연구를 통해 생가가 아닌 이상의 백부인 김연필의 집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하였고 이에 대한 논란이 확대되어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기도 했다. 따라서 생가라는 표현은 엄밀히 따지자면 틀린 말이다.] 이 곳엔 [[2014년]] [[2월]] 이상의 생애와 작품들을 알리는 문학관 이상의 집이 준공되어 운영되었으며, [[2018년]] [[12월]]에 [[라이엇 게임즈]]의 후원으로 새롭게 재개관하였다. [[https://game.donga.com/92825/|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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