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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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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소련)] [include(틀:소련 관련 문서)] [목차] == 개요 == 이 문서는 [[소련]]의 [[정치]]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 사상·이념 == '''(1) 정치경제론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현실사회주의]])''' * 소련의 이념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흔히 알려져 있고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널리 전파된 [[공산주의]] 이론의 원형이며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 · 경제 이론과 [[블라디미르 레닌]]의 경험론(혁명론, 전술)을 융합함으로써 무장 투쟁을 통해 혁명을 달성하자는 것이 주된 논리다. 그러다 보니 [[부르주아|그들의 적]]에 대한 합법과 불법을 가리지 않는 투쟁 방식과 [[전쟁]] 등을 정당화했다. [[공업|공업화]]와 [[집단농장|집단농장화]] 등도 여기에서 출발하게 된다. * 이것이 변질된 것이 '''스탈린주의'''지만 사실 이는 이론적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대숙청]]과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 등에 대해 [[이오시프 스탈린]]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이기 때문이다. 시기상 스탈린의 집권기 전후로 한정되어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지며 그 성격은 [[전체주의]]적 성격이 짙다. * 스탈린 사후에는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브레즈네프]]가 스탈린주의를 개량해서 만든 '''[[현실사회주의]]'''가 중·후반기의 중요 이념이 되었다. * 기본 이념: [[사회주의]], [[공산주의]] '''(2) 혁명론 (초기: 세계혁명주의 → 중기: 일국사회주의)''' * '''세계혁명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확산을 위해서 소련이 주도가 되어 대대적으로 지원하자는 주의다. 소련 결성 초기에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와 같은 소련의 권력자들은 사회주의의 확산을 위해서 전 세계의 [[약소국]]과 [[식민지]] 대중들을 지원했다. 이 지원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중화민국]]의 [[쑨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 세계혁명주의는 스탈린의 집권,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숙청 이후, 스탈린이 주창한 일국사회주의로 전환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내전이 야기한 심각한 피해로 인해서 염전 사상이 극에 달한 소련 인민들에게 다시금 해외 각국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영구 혁명론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발상이었다. 게다가 소련은 서방 열강에 비해 낙후된 국가였기 때문에 소련의 국력을 먼저 키우고, 그 다음에 세계 사회주의 세력을 지원하고 세계 혁명을 준비하자는 스탈린의 주장은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론보다 더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외교적으로는 서방과의 갈등과 국공 결렬, 경제적으로는 대공황으로 인해 서방과의 무역과 과학 기술 도입에 차질을 빚은 소련 수뇌부는 스탈린을 중심으로 전면적인 농업 집단화와 강력한 산업화를 추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작 직전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농사나 짓던 [[후진국]]에서 탈피하여 이미 독일의 경제력을 앞서는 공업 국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3) 개혁·개방주의 ([[페레스트로이카]] - [[글라스노스트]])''' *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냉전이 일어났다. 냉전 기간 동안, 미소 양국은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고 받았다. 냉전 초기에는 소련의 동구권 장악, 중국의 공산화, 제3세계 사회주의 세력의 약진 등 소련에 유리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으며 [[우주 경쟁]] 초기에도 소련이 미국을 앞지르는 등 소련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소련은 전성기에도 국력이 미국의 50 ~ 60%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국력으로 우주 경쟁과 군비 경쟁에서 막대한 재원을 투자하는 소련은 점점 미국의 우세를 따라잡기가 어려워졌다. 우주 경쟁에서도 미국의 달 착륙으로 우세를 잃었고 70년대 이후부터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고 군비 지출은 과도할 정도로 많아져 국가 경제를 좀먹었다. 70년대 석유 파동으로 막대한 외화를 확보하던 상황에는 버틸만 했지만, 1985 ~ 1986년 간 이어진 석유 전쟁으로 인해 1985년 상반기만 해도 30달러 대였던 유가가 1986년 1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소련의 마지막 집권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내세워 [[계획경제|순수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부분적으로 도입했으며 정치, 언론,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추진했다. '''(4) 기타''' * [[독소전쟁]](대조국전쟁)으로 [[나치 독일]]한테 심하게 데였던 스탈린과 그의 무리는 [[파시스트]](우파 전체주의자)를 굉장히 싫어했는데 정작 본인은 이념적으로 과도하게 경도된 극좌파적 '''[[전체주의]]''' 정권을 인류 역사에 남겨놓았다. '''[[패권주의]]'''적인 성격도 띄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양극체제 중 한 축을 담당하는 [[초강대국]]이었는데 미국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주변 국가에 툭하면 간섭하고 마음에 안 들면 쳐들어가 버렸다.([[동구권|동구권 공산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 헌법 == [[소련 헌법]]은 총 4번에 걸쳐 수정되었다. 이 중 제헌 헌법(1918년 헌법)은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하기 전인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시절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철의 장막]]'''을 규정한 헌법은 2차 개정 헌법(스탈린 헌법)부터다. ||<:><#CC0000> {{{+2 {{{#FFE400 '''☭'''}}} }}} ||<:><#CC0000> {{{#FFE400 '''제·개헌연도'''}}} ||<:><#CC0000> {{{#FFE400 '''적용기간'''}}} ||<:><#CC0000> {{{#FFE400 '''당시 국가수반'''}}} ||<:><bgcolor=#CC0000> {{{#FFE400 '''별칭'''}}} || ||<:> 제헌 || [[1918년]] || [[1918년]] ~ [[1924년]] (6년) ||<:> [[블라디미르 레닌]] ||<:> || ||<:> 1차 || [[1924년]] || [[1924년]] ~ [[1936년]] (12년) ||<:> [[이오시프 스탈린]] ||<:> || ||<:> 2차 || [[1936년]] || [[1936년]] ~ [[1977년]] (41년) ||<:> [[이오시프 스탈린]] [br] [[니키타 흐루쇼프]] [br]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스탈린 헌법''' || ||<:> 3차 || [[1977년]] || [[1977년]] ~ [[1991년]] (14년)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br] [[유리 안드로포프]] [br] [[콘스탄틴 체르넨코]] [br] [[미하일 고르바초프]] ||<:> '''브레즈네프 헌법''' || 소련 헌법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은 헌법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적으로 표방한 경우가 많다. 가령 오늘날 [[중국 헌법]]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명시했는데 조금 추가된 게 있다면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사상'이라는 것이다. 한편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대신 '주체사상'을 명시했다.] 각 개정 헌법 간 차이가 있다면 초기 헌법들은 '세계혁명주의'에 규정했으나 2차 개정 헌법부터는 '일국사회주의'를 규정하고 있다. 헌법 개정은 [[소련 최고회의]]에서 의결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 행정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 장관회의)] == 입법부 == [include(틀:관련 문서, 문서명1=소련 공산당, 문서명2=소련 최고회의)] 소련은 '''[[소련 공산당]]'''이 이끄는 일당제 국가였기 때문에 국가 권력 기구와 별도로 당내 권력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련 공산당의 최고의결기관은 '''소련 공산당 대회'''(Съезд КПСС/Congress of the CPSU)이며, 여기서는 당의 기본 노선을 설정하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 КПСС/Central Committee of the CPSU) 위원과 후보 위원을 선출한다. 당 대회는 1년에 4회 정도 개회하며, 폐회 중에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업무를 전담한다. 중앙위 위원의 임기는 5년이다. 당 중앙위원회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Секретариат ЦК КПСС)을 운영해 10여 명의 서기와 사무관들로 하여금 실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앙위 위원 중에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1952년부터 1966년까지는 '지도국' 정도의 뜻인 'Президиум(Presidium)'를 썼으나 1966년에 정치국이라는 명칭으로 환원했다.]을 구성해 중요한 현안을 처리할 권한을 부여했다. 즉, 서기국과 정치국은 당의 핵심 권력 기관이었다. 다만 이 체제는 [[스탈린]] 집권 이후부터 확립된 체제로, 소련의 통치 체제는 시기 별로 차이가 있다. [[레닌]] 생전에는 소브나르콤의 주석이 최고 지도자였지만, 총서기였던 스탈린이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총서기 직책이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게 되었다. 스탈린 시기에 확립한 소련의 통치 체제는 대다수 사회주의 국가들이 모방했다. 소련 말기에는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일당제]]를 폐지하고 [[다당제]]를 도입하면서 통치권자의 직함이 대통령으로 변화하지만, 1년도 지나지 못해 소련이 붕괴하면서 사라졌다. 당 정치국 위원을 비롯한 실세들은 국가 기구인 소련 최고 회의나 장관 회의의 직책들을 겸임해 당권과 행정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브레즈네프 시절에는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니콜라이 포드고르니가 은퇴한 후, 총서기인 브레즈네프가 소련 최고회의 의장을 겸직하기도 했다. 스탈린과 흐루쇼프도 상당 기간 동안 장관회의 의장 직책을 겸임했다. 명목상으로는 입법부에 해당하는 최고 소비에트 의장이 통수권자이고, 행정부에 속하는 장관 회의의 의장이 정부 수반이었으나 정치 거물들이 당권을 기초로 해서 행정 권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권력 구조는 대단히 복잡했다. 게다가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가 강력한 권위와 지도력을 행사하긴 했어도 스탈린 사후의 크렘린은 집단 지도 체제를 지향했기 때문에 완전한 1인 독재 체제는 아니었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냉전 이후에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이식되어 냉전 시기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진 당내 권력 투쟁의 배경이 되었다. == 사법부 == [[https://en.wikipedia.org/wiki/Supreme_Court_of_the_Soviet_Union|소련 대법원]] == 정치적 테러 == >국제적인 학술단체 «메모리얼» 관리국장 А.Б.로긴스코에 따르면, 1921년 이래 소련에서는 정치적 이유가 있는 형사법적 사건이 5백만건이 된다. 이들 중 약 10%가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정치적 테러의 희생자수는 450만명이 된다. 여기에 보충하면 강제추방된 700만명이 있다. 그러므로 소련이 정치적 이유로 광범위하게 탄압한 희생자의 수는 약 1150-1250만명이다.(내전[* 레닌 시기 [[러시아 내전]]] 희생자의 상당수가 빠진 숫자이다.) 또한 이 숫자에는 «라스쿨라치바니예[* 내쫒음, 강탈]» 및 홀로도모르 피해자가 빠져 있다, 1921—1922, 1932−1933, 1946−1947년. [정치적 탄압의 숫자에]이것을 떨어트리는 것을 불가능하다, 기근의 사망률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 해결법과 경제적 계산 착오이다: 최소 500만명의 목숨을 빼앗은 1920년대 초반 기근,1932-1933 — 최대 6,7백만명 희생자, 1946-1947 — 최대 150만명.[중략] > >«소비에트 마을의 비극» 계획 관계자들이 숫자를 보다 정확하게 한 «커다란 테러»[* 한국에선 ‘[[대숙청]]’이라고 부른다.]의 희생자 수:1937-1938년에 체포자 중 총살사형으로 판결받는 현상이 현저히 더 크게 일어났다— 이전에 생각되던 68만 2천명이 아닌 72만 5천−74만명. 일부 특히 잔인하고 난폭한 징벌 정책 사항 몇개의 연구가 있다, 예를 들면, 1933년 나림스콤 지방 유형자들의 광범위한 전멸의 역사. 이 출판물은 다음 부분들을 인상적으로 생기가 넘치게 묘사한다,«청소»당한 숫자를 포함하여, 형사상으로 제일 작은 부분에 속하는 자들, 또한 강제 집단화에 반대한 사람들, 방랑자, 집시들이 시베리아 습지에서 먹을 것도 거처도 없이, 그들과 함께 추방된 상습범죄자들에 의해 테러를 당할 운명들. 망명자와 더불어, 정권 가장자리에 있는 대량의 버림받은 피압박자 집단에 대한 혁신적 성격의 전문적인 논문이다.[중략] > >공산주의 테러가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음을 연구원들은 현재 인정한다.(겁을 주는 실재하거나 상상된 적대자를 제거, 볼셰비키 독재의 강화, 새로운 사회체제 편성, 적대적 사회집단의 대표자 인물들과 민족집단에 대한 청소) 보편적인 단 한 가지로 설명하는 것을 거부한다. > >신중한 서구의 역사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설명에 동의한다, 테러 및 독재 형벌 기관이 레닌주의-스탈린주의 시기 에 사회적-경제적 및 군사적-외교적 해결과제를 유효하게 해결하려는 욕구를 위해 강요됐다는 것, 탄압이 사회주의적 근대화의 피할 수 없는 대가라는 것을 이해한다.[* '근대화'는 '현대화'로도 번역 가능하다.][* 소괄호는 논문 저자가 논문에서 쓴 글. 위 논문에서 말한 희생자는 사망자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사망자 포함하는 의미다.] >{{{#!folding [ 러시아어 원문 ] По мнению председателя правления Международного общества «Мемориал» А.Б. Рогинского, с 1921 г. в СССР на преследуемых по политическим мотивам было заведено 5 млн уголовных дел. Если учесть, что примерно 10% из них были осуждены несколько раз, число жертв политического террора составит 4,5 млн чел. К ним следует прибавить примерно 7 млн депортированных. Таким образом, количество пострадавших от массовых политических репрессий в СССР составляло около 11,5−12,5 млн чел. (без учёта значительной части жертв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Также в это число не входят «раскулаченные» и жертвы голодоморов 1921—1922, 1932−1933, 1946−1947 гг. [37] От этого нельзя абстрагироваться, поскольку голодная смертность была вызвана в первую очередь политическими решениями и хозяйственными просчётами: голодов начала 1920-х гг. унёс не менее 5 млн жизней, 1932−1933 гг. — до 6−7 млн жертв, в 1946—1947 гг. — до 1,5 млн [38].[중략] Участники проекта «Трагедия советской деревни» уточнили количество жертв «Большого террора»: к расстрелу в 1937—1938 гг. было приговорено заметно большее число арестованных — не 682 тыс., как ранее считалось, а примерно 725−740 тыс. [42] Часть особенно жестоких эксцессов карательной политики стала предметом отдельных исследований, например, история массовой гибели ссыльных в 1933 г. в Нарымском крае, на о. Назино [43]. Эти издания дают впечатляющую картину того, как в число «вычищаемых» в ходе паспортизации были включены, наряду с меньшей частью криминального элемента, также противники насильственной коллективизации, бродяги, цыгане, оказавшиеся затем в сибирских болотах, без еды и жилья, обречённые на террор со стороны высланных вместе с ними уголовников-рецидивистов и мучительную смерть. Новаторский характер носит недавняя коллективная монография о многочисленных маргинальных париях режима, в том числе ссыльных [44].[중략] В настоящее время исследователи признают, что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террор выполнял целый ряд функций (устрашение ликвидацией реальных и мнимых противников, укрепление большевистской диктатуры, формирование нового общества, очищенного от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враждебных социальных, а также национальных групп), отказываясь от какого-то одного универсального объяснения. Среди серьёзных западных историков многие согласны объяснять террор и всевластие карательных органов ленинско-сталинского периода вынужденным стремлением эффективно решить социально-экономические и военно-дипломатические проблемы, видеть в репрессиях неизбежную плату за социалистическую модернизацию.}}} >---- >Тепляков, А. Г. "[[https://www.elibrary.ru/item.asp?id=24932330|Эпоха репрессий: субъекты и объекты.]]" Между канунами. Истор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в России за последние 25 лет. 2013 [[https://rusk.ru/st.php?idar=68533|#]] == [[소련 최고지도자|최고지도자]] == 명목상 통치자를 제외한 실질적 통치자들의 명단이다. [include(틀:역대 소련 최고지도자)] [[분류:소련]][[분류:러시아의 역사]][[분류:러시아의 정치]]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소련,version=1179, uuid=895c2954-2bac-4a01-9c65-ff927ed10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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