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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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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 독일 === 러시아의 영토는 독일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광활했다. 당시 나치 독일이 구상한 [[레벤스라움]]에서 절반 이상이 소련의 유럽쪽 영토일 정도였다. 따라서 나치 독일군은 현재 점령한 곳보다 더 많은 땅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독일은 최초의 공세 때 소련군 주력이 소련 서부의 공업지대 방어에 매달려 후퇴하지 못하니 그것을 물리적으로 섬멸하면 소련은 무너져 내리리라고 예상했다. 이제까지 나치 독일이 수행한 전쟁은 [[프랑스 침공]]처럼 적국의 국토와 병력을 완전히 소모시키지 않아도 적국이 항복하는 결과가 나왔기에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예상이었으나 해당 예상은 전제조건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소련군은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고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다.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소련군 장병들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으며 이는 지속적으로 독일군에 인명피해를 강요했고 1941년 12월 5일 기준으로 8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으며 여기에는 22,000명에 달하는 장교들이 포함된다. 게다가 이는 지원부대를 제외한 전투부대에서 난 피해인지라 더욱 뼈아픈 손실이었다. 1940년 시점에서 120개 사단 수준이었던 독일군이 소련침공을 위해 180개 사단으로 팽창하면서 이전에도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심각한 손실이었다. 이 시점에서도 소련은 소모, 섬멸은커녕 계속해서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기에 독일군은 한 번의 결정적인 공격으로 소련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태풍 작전]]을 실시해 모스크바로 진격했지만 소련의 계절에서 그나마 상황이 좋은 여름이 끝나자 소련 특유의 혹독한 자연 환경이 시작되었다. 당장 러시아에 가을이 오자마자 [[라스푸티차]] 시즌이 시작되어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이 온통 뻘밭으로 변해 전차든 말이든 병사든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데 귀중한 2주를 낭비했고, 겨울이 되자 진흙탕이 얼어붙어 다시 기동이 가능해졌지만 얼마 못 가 이번에는 독일군이 예상했던 수치를 훨씬 뛰어넘는 역대급 겨울 폭풍으로 인해 동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전차와 무기는 얼어붙어 작동 불량이 속출했으며, 여기에 더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련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막대한 수량의 기갑 장비들을 버리고 긴급히 수십km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과 독일 장병들의 필사적인 분투, 소련군의 미숙한 군사운용에 의해 1941년 12월 17일에 소련의 공세가 사그라들면서 겨우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그 순간부터 독일군의 보급 체계, 진격의 통제, 포위섬멸과 돌파의 밸런스는 총체적으로 무너져 있었다. 단지 독일군의 기습 효과와 수적 우세[* 일반적인 착각과 달리 바르바로사 개전 직후부터는 '''소련군보다 독일군이 더 많았다.'''], 소련군의 대숙청 및 군구제 긴급도입으로 인한 지휘체계 무질서에 따라 소련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며, 소련군이 퇴각하면서 질서를 잡기 시작하자 독일군의 내적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체급이 기존의 열강들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국가였던 소련을 다른 열강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은 그 자체가 결함이었다. 독일군은 기존의 전략이었던 "기동하여 돌파하고 포위해서 섬멸하기"의 교리를 일체 바꾸지 않고 있었고, 이것은 동급의 국가가 아닌 압도적인 국토와 물자를 가진 적에게 시도하기에 부적절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당시 나치 독일의 체급은 소련과 유사하였다고 평가받으나, [[지도자원리]] 및 나치즘 특유의 인종차별주의로 인해 실질적인 생산 관리나 점령지 관리에서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의 행보로 인하여 그 역량에 비하여 한참 낮은 수준의 효율을 보였다. 덤으로 1차대전 당시에 고생을 한 독일 국민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각종 기호품과 생필품을 보급하면서 총력전 전환도 늦어져서 비효율성이 더 증가한 결과 독소전쟁 당시 독일이 소련의 주요 시설들을 재빠르게 점령하였음에도 도리어 소련에 비해 역량이 감소한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다. 독일군은 초창기에는 이와 같은 자신의 결함을 알지 못했고 모든 전선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와 자기 전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들의 임무와 (자기가 생각하는) 전략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최고 사령부에게 다른 부대와 지휘관을 유기하는 상황을 요구했으며 이것은 장성 간의 반목으로도 번졌다. 독일군 장성들이 입을 모아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던 북아프리카 전역은 그 붕괴와 동시에 유럽 추축국의 2인자였던 이탈리아를 패망으로 몰아넣었고, 중부집단군 장성들은 키예프에 대한 진군과 지원에 대해서 '''그 자신'''들의 포위섬멸을 막기 위한 히틀러의 선택이었음에도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랜다|이것 때문에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했다고 발광했다.]] 이후로도 독일군의 상황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독일군은 인종주의를 철석같이 믿어 점령지 주민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펼쳤고 동부전선에서 계속 게릴라에 시달리게 된다. 애초에 점령지중 많은 지역들은 소련 치하에서 고통받기도 했던 지역들이었다. 그러니 적절한 대민작전으로 현지 주민들의 환영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날려버린 셈. 그나마 나았던 곳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였는데, 이 나라들은 인종이 완전히 슬라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증상은 점점 심화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더욱 치열해지면서 전투 부대에서도 인종청소부대들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광기를 드러냈다. 나중에 패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는 소련군의 가혹한 부역자 색출과 보복까지 더해져 동부전선 기간 동안 동유럽은 생지옥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점령지에서도 게릴라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은 가용한 보급품 및 장비 상당량을 소모해버렸고 이로 인해 전쟁의 결말은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독일군이 남은 것들을 긁어모아 공세를 펼쳐도 바르바로사 작전에 비해 축소된 규모일 것만은 확실했다. 이러한 상황반전 속에서 독일군의 일부는 이미 독일이 패전할 것을 예감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수는 이 전쟁이 뼈를 깎는 장기전으로 변할 것임을 예상했다. 더군나나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의 산업역량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소련은 독소전쟁 개전 이틀 뒤 전시시설 대피 계획을 짜고 1941년 6월 30일 국가전쟁위원회를 만들어 스탈린이 위원장을 맡아 군수공장 이전 명령을 내렸다.[[https://en.m.wikipedia.org/wiki/Evacuation_in_the_Soviet_Union|#]] 독일군 폭격 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랄산맥]] 동쪽으로의 군수공장 이전은 광범위하고 빠르게 이뤄졌다. 11월까지 이전된 대형 군수공장만 1,503개. 연 923,000량의 화차와 수많은 우마차가 나치 공군의 주간공습을 피해 밤새워 모스크바 동쪽으로 설비를 실어날랐으며, 1941년 하반기 우랄 전시산업의 전차 생산량은 4,177량이었지만, 1942년 상반기에는 11,021량으로 배 이상 늘었다. 1942년 중반 이후 소련은 모스크바 근교의 산업생산력 회복과 더불어 주요 병기의 수량에서 독일을 추월하였으며, 이후 성능 면에서도 독일과 거의 대등하게 성장하였다. 1944년 소련은 전차 및 자주포, 각종 야포, 개인화기 생산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여 연합군의 최종적인 승리에 기여를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미국이 소련에 천문학적인 규모로 지원한 [[무기대여법|원조 물자]]가 소련의 보급을 책임졌으며 개전 초기 삭제당한 소련의 공군을 사실상 제로 상황에서 처음부터 건설해주다시피 했기 때문에 소련이 전차 및 자주포, 각종 야포, 개인화기 생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크지만 말이다. 소련의 가혹한 추위와 [[라스푸티차]]로 인해 수많은 독일군과 장비들이 손실되었으며 독일군 야전부대들도 더 이상 전투를 치를 수 없게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40만 명의 인명 피해라는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래서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미처 병력 재편도 끝내지 않고 무리하게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했다. 그래서 1942년 1월, 독일군의 돌출부 르제프에 [[게오르기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가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이것이 바로 [[르제프 전투]]다. 그러나 [[발터 모델]]이 소련군의 번개 같은 공세를 모조리 패퇴시켜버렸고 소련군 야전부대들은 수십만의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한 채 패퇴해야 했다. 르제프 전투는 지금도 소련군의 수치로 기억되고 있다. 독일이 해상작전을 등한시한 것 역시 패착의 원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선 해상 봉쇄가 제대로 되기는커녕 이미 폭격을 제대로 맞아서 대파된 후 침몰하다가 착저한 [[마라(전함)|전함 마라]]를 소련군이 간신히 물 위에 부유하도록 수리한 후 해안포대처럼 항구에 정박하여 계속 저항해도 막지 못해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흑해에서도 소련이 착실히 처발리고 있었지만 제해권을 소련으로부터 빼앗지 못해 기어코 캅카스 유전지대를 탈취하는 데 실패했고 덕분에 소련 내 석유 고갈 사태를 피하게 돼 소련군이 열심히 탱크를 굴릴 자원이 마련되었다. 추후 무시무시한 기갑 웨이브를 생각해 보면 명백한 실수. 심지어 북극해에는 제대로 된 함대를 보내지도 못해 무르만스크로 들어오는 [[렌드리스]] 물자를 수수방관하게 되었고 말이다. 물론 [[독일 해군(나치 독일)|나치 독일 해군]]은 [[U보트]]를 제외한 해군력이 워낙 답이 없을 정도로 약했던 것은 생각해줄 필요가있긴 하다.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전 당시 구식 드레드노트급 전함이긴 하지만 [[강구트급 전함]] 3척을 보유하고 수리불가능한 1척은 부유포대로 보유했는데, 독일은 침몰 전함을 제외하면 3척뿐으로 그나마 [[그나이제나우]]는 어뢰를 맞았고 [[샤른호르스트(전함)|샤른호르스트]]는 기관에 문제가 생겨 수리 중이라 가동 가능한 전함은 [[티르피츠]]뿐이었다. 이것만 가지고는 해안포와 요새의 보호를 받는 [[크론슈타트]]를 박살내고 [[발트함대]]를 격멸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티르피츠라도 좀 적극적으로 썼다면 모를까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하라는 해상포격은 안 하고 다른 해역에서 훈련에 투입해놓는 바람에 독일의 해상 장악력이 더 약화되었다. 흑해는 독일과 직접 닿는 바다조차 아니라서 다뉴브강 같은 하천을 통해 U보트와 어뢰정 몇 척 정도만 보내고 말았고 루마니아, 불가리아 역시 해군은 없는 것이랑 마찬가지라, 소련은 가장 위급했던 상황에서도 흑해의 제해권을 착실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독일 측의 바람으론 바르바로사 작전에 일본도 참전했어야 했다. 당장 소련군은 품질 좋은 보급품을 독일 쪽 전선으로 보내기 바빴기에 독일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딱히 소련군에게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 그저 숙청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유능한 지휘관의 발만 묶어두기만 해도 족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소련은 공격 안 하고 [[미국]]에 [[진주만 공습]]을 하여 태평양 전쟁을 개전했고 독일이 망하는 데에 지대한 원인을 제공했다. 소련은 일본이 대소련전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극동의 소련군 정예부대 다수를 모스크바에 재배치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독일만의 입장이고 일본 측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일본은 [[할힌골 전투]] 이후 소련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게 된 데다가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만으로도 이미 경악하여 내각이 총사퇴할 정도로 당혹감을 느꼈었고, 향후 소련과의 충돌이 벌어져도 독일이 전혀 돕지 않아 국제 왕따가 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 2달 전에 일본 역시 소련에 접근하여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런데 기껏 독일 따라 불가침조약을 맺었더니 그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총공격하니 일본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상황이었다. 전력 면에서도 중일전쟁에 일본 육군도 이미 수 년째 갈려들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돌발행동을 한 독일을 도와줄 여력도 부족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이 [[진주만 공습|돌발행동]]을 선사해 버렸다. 이런 요인들이 겹쳤기 때문에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전술적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략적 목표는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장기전과 소모전의 늪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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