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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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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독소전쟁/전투]][[분류:1941년 전투]] [include(틀:2차 세계대전의 전투 목록(유럽 및 아프리카))] [include(틀:제2차 세계 대전/연표)] ||<-3><tablealign=right><bgcolor=#536349><tablebgcolor=#fff,#222><tablewidth=500><color=#FFF><tablebordercolor=#536349> {{{+1 '''바르바로사 작전'''}}}[br]'''[[독일어|{{{#fff Unternehmen Barbarossa}}}]]'''[br]'''[[러시아어|{{{#fff Операция «Барбаросса}}}]]»'''[br]'''Operation Barbarossa''' || ||<-3>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3> [[파일:external/ww2db.com/battle_barbarossa5.jpg|width=100%]] [br] ▲ 바르바로사 작전 전개도 || ||<-3><bgcolor=#536349><color=#FFF> '''날짜''' || ||<-3> [[1941년]] [[6월 22일]] ~ [[12월 5일]] || ||<-3><bgcolor=#536349><color=#FFF> '''원인''' || ||<-3> [[아돌프 히틀러]]의 [[소련]] 정복 야욕, [[레벤스라움]] || ||<-3><bgcolor=#536349><color=#FFF> '''장소''' || ||<-3> [[소련]]의 유럽 국경 전역 || ||<bgcolor=#536349><color=#FFF> '''교전국''' ||<^|1><width=40%>[include(틀:깃발, 문서=소련,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 ||<^|1><width=40%>[include(틀:국기, 국명=나치 독일)][br][[헝가리 왕국(1920~1946)|{{{#!wiki style="display: inline-flex; width: @크기=27@px; padding: 1px; background: rgba(25, 25, 25, .2); vertical-align: middle"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width=100%]]}}}]]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왕국]] (6.27~)[br][include(틀:국기, 국명=이탈리아 왕국)][br][include(틀:깃발, 문서=루마니아 왕국, 파일명=루마니아 국기)][br][include(틀:깃발, 문서=핀란드 공화국, 파일명=핀란드 국기)][br][include(틀:국기, 국명=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출력=슬로바키아 공화국)] || ||<bgcolor=#536349><color=#FFF> '''지휘관''' ||<^|1>'''[include(틀:깃발, 문서=이오시프 스탈린,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 [br][include(틀:깃발, 문서=클리멘트 보로실로프,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br] [include(틀:깃발, 문서=세묜 티모셴코,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 [br][include(틀:깃발, 문서=게오르기 주코프,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 [br] [include(틀:깃발, 문서=마르키안 포포프,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br] [include(틀:깃발, 문서=표도르 쿠즈네초프,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br] [include(틀:깃발, 문서=드미트리 파블로프,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 †[br] [include(틀:깃발, 문서=미하일 키르포노스,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 †[br] [include(틀:깃발, 문서=,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 미하일 툴레예프[br] [include(틀:깃발, 문서=로디온 말리놉스키,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br][include(틀:깃발, 문서=아마자습 바바자냔,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br][include(틀:깃발, 문서=안드레이 예료멘코, 파일명=소련 국기(1936-1955))] ||<^|1>'''[include(틀:깃발, 문서=아돌프 히틀러, 파일명=나치 독일 국기)]''' [br][include(틀:깃발, 문서=발터 폰 브라우히치, 파일명=나치 독일 국기)] [br][include(틀:깃발, 문서=프란츠 할더, 파일명=나치 독일 국기)] [br] [include(틀:깃발, 문서=빌헬름 리터 폰 레프, 파일명=나치 독일 국기)] [br] [include(틀:깃발, 문서=페도어 폰 보크, 파일명=나치 독일 국기)] [br] [include(틀:깃발, 문서=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파일명=나치 독일 국기)][br][include(틀:깃발, 문서=이온 안토네스쿠, 파일명=루마니아 국기)][br][include(틀:깃발, 문서=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파일명=핀란드 국기)] || ||<-3><bgcolor=#536349><color=#FFF> '''결과''' || ||<-3> [[추축국]]의 '''압도적인 전술적 승리''', 전략적 '''목표 달성 실패'''[* 군인이나 항공기, 전차 등 인적/물적 피해는 소련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추축군은 작전 초기에 계획했던 [[A-A선]] 도달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중요 거점이었던 [[모스크바]]도 점령하지 못하였다. 물론 모스크바에서 30km 지점까지 도달했긴 했지만.][br]추축군이 [[소련]] 영토 약 1,600,000km^^2^^ 점령 || ||<-3><bgcolor=#536349><color=#FFF> '''영향''' || ||<-3> '''[[독소전쟁]] 발발, [[동부전선#제2차 세계 대전]] 개전''' || ||<bgcolor=#536349><color=#FFF> '''전력''' ||'''330만 이상''' [br] - 북부전선군 [br] - 북서전선군 [br] - 서부전선군 [br] - 남서전선군 [br] - 남부전선군 [br] - 예비전선군 [br] - 전차 11,000대 [br] - 항공기 9,100기 ||<^|1>'''410만 이상''' [br] - 북부집단군 [br] - 중부집단군 [br] - 남부집단군 [br] - 동맹국군 [br]- 전차 3,350대 [br] - 항공기 4,389기[* 이 중 전투기는 2,770기였다.] || ||<bgcolor=#536349><color=#FFF> '''피해규모''' ||'''497만 3,820명 손실'''[br] - 전사 802,191명[* 비전투 요인으로 인한 전사자 235,339명 포함.] [br] - 부상 1,336,147명 [br] - 실종 및 포로 [br] 2,335,482명 [br] - 예비군 동원 도중 [br] 포로 500,000명 [br] - 전차 20,500대 [br] - 항공기 21,200기 ||<^|1>'''88만 1,788명 손실'''[br] - 전사 186,452명 [br] - 부상 655,179명 [br] - 실종 40,157명 [br] - 전차 2,735대 [br] - 항공기 2,827기 || [목차] [clearfix] == 개요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536349><bgcolor=#536349> ||<width=100%><bgcolor=#fff,#1c1d1f>{{{#!wiki style="margin: 10px" '''Wir müssen nur die Tür auftreten, und das ganze verrottete Gebäude wird krachend zusammenbrechen.'''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소련|저 엉터리 건물]]은 스스로 무너진다.'''}}} ---- {{{#!wiki style="margin: 4px" {{{-1 [[아돌프 히틀러]]}}}}}}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서 4년에 걸친 [[독소전쟁]]의 서막을 연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작전이다. 또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단일 군사 작전'''이기도 하다.[* 이 작전 당시 독일군은 3개 집단군 소속 약 150개 사단 38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게 얼마나 많은 숫자냐면, 현재 [[대한민국 국군]] 총병력의 '''7배'''에 달하고, [[부산광역시]]의 전체 인구수보다 많은 머릿수를 동원한 것이다.][* 단,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군사병기를 동원한 단일 군사 작전은 아니다. 가장 많은 군사 병기가 동원된 작전은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이 작전에서 소련군은 5,000여 대의 전차와 7천 기의 항공기, 3만 문의 포를 투입했다.]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red beard)'''라는 뜻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는데, 프리드리히 1세가 동방으로 [[십자군]] 원정을 갔듯이 소련을 침공하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을 가던 도중 익사하여 사망했다. [[독소전쟁]]이 [[나치 독일]]의 패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또 하나는 붉은 수염이라는 뜻이 [[공산주의]]의 주도국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을 연상하게 한다는 데서 착안했거나,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작전 암호명 중 색상이 사용된 사례 - [[녹색 상황]][*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작전], [[폴란드 침공|백색 상황]], [[청색 작전|청색 상황]], [[프랑스 침공|황색 상황/적색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사용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 배경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독소 불가침조약)]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536349><nopad> [[파일:1941년 유럽지도.png|width=100%]] || ||<bgcolor=#536349> {{{-1 {{{#FFF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유럽 지도. 추축국이 대부분의 유럽을 석권한 것을 알 수 있다.'''}}}}}} || === 독일의 의도 ===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마치면서 칼 끝을 소련으로 돌렸다. 비록 [[영국 본토 항공전|항공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바다사자 작전]]을 진행할 수 없으므로 영국을 점령하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서유럽에서 독일의 패권은 확고했고,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하기로 한다.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도 굳이 전선을 늘릴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기는 했으나 소련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별 차이가 없었다. 예외적으로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리벤트로프]]는 이전에 소련의 인력과 미국의 물자가 합해지면 어떤 시너지를 낼지 모른다며 경고했다. 애초부터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이유가 소련을 적당하게 동유럽의 일부분에 묶어둔 상태로 나치 독일이 유럽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영향력을 증대하는 것이 나치 독일에게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소련에 [[렌드리스]]를 통해 보급한 식량, 연료, 피복, 수송, 기술력등의 지원물자가 도착하기 시작하자 비전투 물자의 직접 생산을 축소시키고 군수 공장에 인력을 집중시켜 만들어낸 [[모신나강]], [[PPSh-41]], [[T-34-76|T-34]]로 무장하고 렌드리스 물자로 보급을 받으면서 끝이 없이 밀려오는 소련군으로 실현되었다.] 히틀러가 영국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소련 침공을 개시해 독일의 전쟁 수행 양상을 양면전쟁 구도로 만든 것은 전략적으로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히틀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대로 이유는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 이념적 이유 외에도 군사적인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다. ==== [[예방 전쟁]] ==== 주변의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한 이유는 분명히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그 자신이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맺어진 소련과의 평화를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쪽은 한술 더 떠서, 독일과 서유럽이 서로 소모전을 벌여 지쳐있을 때 독일을 침략하여 유럽을 석권할 계획을 세웠다. 물론 히틀러가 먼저 선방치면서 계획 상에만 그쳤다. 여기에 더해서 애초부터 나치 독일과 나치당은 반공이 신념이었기에 독소 불가침조약은 임시방편으로 장래의 적과 맺은 휴지조각 정도로 판단하는 견해가 히틀러만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히틀러는 언젠가는 분명히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고, 풍부한 천연자원과 드넓은 곡창지대 그리고 막대한 인적자원을 보유한 소련이 힘을 키운 뒤에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하면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히틀러는 수많은 혼란으로 인해 비교적 약화된 상태였던 소련을, 그들이 국력을 회복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훗날 있을지도 모르는 위협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겨울 전쟁]]에서의 붉은 군대의 허약한 모습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을 거치면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 유능한 장교들이 숙청되어 소련에 유능한 지휘관이 부재해 보였던 것 또한 그의 이러한 결정을 도왔다. ==== 반유대주의: 유대-볼셰비즘의 총본산 소련 ====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의 파시스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원인을 [[배후중상설]]로 믿고 있었다. 즉, [[독일 제국]]이 무너진 것은 독일군이 연합국에 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 내부에서 사보타지를 일삼던 [[유대인]]과 [[빨갱이|공산주의자]]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나치 독일은 [[공산주의]]를 이데올로기로써 내세우며 지도부에 유대인이 많은 소련에 대해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였다. 여기에 나치즘의 인종우월주의가 결합하여, 게르만족은 슬라브족을 유라시아에서 몰아내고 그곳을 [[레벤스라움]](생존권)으로 만들어야 독일이 번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애초에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독일 제국식 레벤스라움을 불완전한 수준이지만 일시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했으니 나치즘의 주장은 이미 실존사례가 존재했으므로 당연히 독일과 소련의 관계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 경제적 측면 ==== 경제적인 부분도 있었다.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국가로서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는데, 히틀러는 민족을 하나의 유기체로 봄으로써 한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생활 공간과 자원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게르만]] 민족(나치 독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당시 소련 영토)의 곡창지대(식량 필요), [[캅카스|코카서스]]의 유전(전차, 장갑차 연료 필요), [[우랄 산맥]]의 광물, [[시베리아]]의 목재 등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이것들을 결국 소련에게서 빼앗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는 당시 중립국에 머물러 있었던 미국도 영국에 대한 지원 정책을 지속하는 것을 보며 언젠가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가진 미국도 상대해야 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 전에 소련의 자원과 인력을 미리 확보하기 위함도 있었다. 또한 경제적인 또 다른 문제로서, 당시 독일은 [[메포어음]]이라는 방식으로 사실상 담보가 없는 어음을 발행하여 인플레이션 없이 통화량을 늘리는 편법을 사용해 경제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 방식이 민간용으로는 수익을 거두기가 매우 어려운 군수산업 위주라서 나치 독일 정부가 갚아야 할 돈을 계속 늘리고 있었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서는 [[금본위제도]]라는 국제 경제 질서 하에서 돈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금을 확보해야 했기에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같은 만만한 국가를 합병해서 해당 국가의 중앙은행등에서 금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결국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점점 장기화의 길을 걷자 추가적인 자금이 필요했고 이미 유럽에서 털어먹을 수 있는 국가는 모두 털어먹은 상태였기에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보유한 금이 많은데다가 [[스페인 내전]] 시기에 공화국이 무기 대금으로 전달한 금이 소련에 넘어가는 등 추가적으로 소련이 금을 쌓아놓았므로 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련을 굴복시켜 강탈해야 했다.[* 당시 스페인에서 소련으로 넘어간 금의 일부는 [[스페인 제국]] 당시에 [[잉카 제국]]이나 [[아즈텍 제국]]에서 강탈한 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스페인의 재정상황이 악화된 지 오래라서 금도 부족한 상황이므로 소련으로 넘어간 금의 절대적인 수량 자체는 많지 않았다.] ==== 군사적 측면 ====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나치 독일에게 유럽에서 큰 위협이 되는 [[소련군]](붉은 군대)을 조기에 제거하고 동부전선을 조기 종료한 다음 육군 예산을 절감하고 그 절감한 비용으로 영국 상륙에 더 중요한 해군과 공군을 증강하여 다시 한번 완전히 성공시키지 못한 대영 작전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즉, 경제, 사상, 군사적 여러 목적들로 소련을 침공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히틀러의 생각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 1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도 군수 시설에 큰 피해를 입었으니 한동안 유럽 본토에는 신경쓰지 못할 것이다. || || 2 ||피해를 복구하는 동안 영국은 미국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 || 3 ||일단 피해 복구로 바쁜 영국이 나치 독일 본토와 점령지를 위협하지 못하는 동안 나치 독일은 소련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 || 4 ||동맹국인 일본 제국이 나치 독일을 도와서 소련을 공격한다. || || 5 ||소련군 병력이 유럽전선과 극동전선으로 나누어지면서 한쪽으로 병력이 쏠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 || 6 ||적당한 시점에 조약을 맺고 미국의 귀를 막아 버리면 미국이라는 지원국을 잃어버린 영국을 휴전 협상장에 끌어내거나,[br]아니면 영국 본토 침공을 다시 계획해볼 수도 있다. || 그러나 히틀러의 생각은 심각한 수준의 오판이 있었기 때문에 바르바르사 작전은 시작부터 문제점과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 1 ||영국이 [[이탈리아 왕국]]과 [[북아프리카 전역]]과 [[지중해 전역]]에서 전투중이고 영국 본토의 군대 뿐 아니라 인도군이나 호주군같은 영연방 국가의 군대까지 동원하는 절박한 상황이긴 하다.[br]그러나 나치 독일군 없이는 이탈리아 왕국군이 영국군을 상대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영국은 유럽 본토에 다시 진출하려는 의지를 절대로 꺾지 않은 상태다. || || 2 ||영국을 도와줄만한 국가가 미국만 있는 것은 맞는데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의 군수산업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며 영국의 재정이 파탄상태가 난 것도 아니다.[br]그리고 이념의 차이가 크지만 [[윈스턴 처칠]]은 나치 독일과 악마가 전쟁을 벌이더라도 악마편을 들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이므로 소련과 나치 독일이 전투를 벌이면 소련편을 들면서 소련이 연합국에 가입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 3 ||상황 자체는 맞지만 이미 1번과 2번에서 오류가 난 이상 동부전선을 단기전으로 끝내지 못하고 발이 묶이면 나치 독일에게는 답이 없어진다. || || 4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게 하려면 미리 협의가 있어야 하지만 '''나치 독일은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br]'''일본은 1941년 4월에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는데, 이를 체결하기 전에 일본의 외무장관 마쓰오카 요스케가 베를린을 방문해 이를 알린 바 있지만 독일은 이에 대해 딱히 아무런 메시지를 주지 않았으며,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일본에게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br]그래서 일본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벌어지자 크게 당황했다. 기밀 유지를 명목으로 아무런 사전합의도 안 했고,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걸 막지도 않았는데 전쟁이 벌어지면 도와주겠지? 라는 식으로 상당히 엉성했던 외교관계였다. 그리고 일본은 그런 엉성한 동맹을 지킬만큼 신의있는 국가가 아니었다.[br]그래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일본 군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에도 '''소일 불가침조약을 깨지 않는다.''' || || 5 ||4번이 성립하지 못함에 따라서 소련군은 유럽전선에 집중된다. || || 6 ||미국을 머리가 없는 국가 수준으로 경시한 것도 큰 문제지만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주변인들이 상기시켜 줬지만 히틀러는 듣지 않았다.[br]결국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을 침공하자 [[독소전쟁]]에 일본이 참여하게 할 목적과 함께 [[추축국]]이 잘나간다는 근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나치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먼저 하면서 파국을 맞는다.[br]물론 일본은 소일 불가침조약을 소련이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에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깰 때까지 유지했다. || === 소련의 내부상황 === 히틀러와 독일군부가 아무리 비밀을 감추려고 해도 이런 대규모 작전이 소련에게 포착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독일이 독소전쟁 준비를 시작한 1940년에 들어와서는 소련측도 계속 전쟁이 터질 징후를 감지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 산재한 소련 간첩망은 1940년 가을부터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테니 대비해야 한다는 첩보를 계속 보냈다. 당시의 소련은 공산주의의 종주국 겸 사실상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였기에 공산주의자들은 이념과 신념으로 소련에게 자발적으로 스파이 행동을 하면서 소련에게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었고 소련도 [[코민테른]] 같은 조직이나 기구로 외국의 공산당 활동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물론 스탈린의 독재와 대숙청 및 소련 내부의 실상이 알려짐으로 인해 소련과 소련 공산당에 대한 외국 공산주의자의 인기는 추락하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소련이 멸망하고 공산주의 국가가 소멸하는 파국적인 상황은 원하지 않는 공산주의자가 많았다. 실제로 나치 독일 내에는 히틀러 집권 전부터 수십만 명의 공산당원과 수백만 명의 공산당 지지자들이 있었는데, 그 위성국들과 동맹국 내에도 상당수의 공산당 동조자들이 있었다. 독일 정부 내에도 신분을 위장한 [[간첩]]망이 엄연히 존재했다. 일례로 일제 스퇴베(Ilse Stöbe)라는 독일 외무부 직원은 소련 간첩으로 활동하면서 1940년 가을부터 독일이 1941년 5월에 침공할 것이라고 소련군 정보부인 [[GRU]]에 전달했다. 스퇴베는 1942년 독일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들은 1년 전부터 계속 소련에 독일의 전쟁 준비 징후를 알려왔다. 특히 [[일본 제국]]에서 신문 기자로 위장하고 있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무관으로부터 들은 침공 몇 개월 전에 6월 22일이 개전일이라는 정보까지 알려왔었다. 공산주의에 동조적이었던 독일 인쇄업자는 한참 인쇄되고 있던 독일 점령군용 러시아어 회화집 한 부를 빼돌려 소련 영사관에 전달했다. 여기에 1940년 가을부터 소련 주재 독일 외교관들이 가족들을 대거 독일로 귀국시킨다는 이상 정황도 포착되었다. 외국에서도 소련에 계속 경고를 했는데, 영국에서도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이 대거 동부로 계속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소련에게 제공했으며, 스웨덴에서도 [[노르웨이]]로 들어가는 스웨덴 관할 케이블에서 독일의 암호 통신을 감청하여 해독, 소련에 제공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전쟁이 터질 것 같다는 명백한 현상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 스웨덴 건은 출처 부족으로 무시당했고 소련은 영국이 제공한 정보를 가지고 독일에게 항의했으나 독일은 "영국 공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이동 배치하는 것이다"며 변명했고 그럴듯해보이는 변명에 스탈린은 이를 믿어버렸다. 왜냐하면 이때 나치 독일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벌려놓은 [[그리스 침공]]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리스랑 전쟁을 해야 했고, 여기에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친독정부가 붕괴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유고까지 진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들어 독일측이 그럴듯하게 변명하자, 스탈린도 히틀러한테 그 이상을 추궁할 순 없었다. 물론 스탈린에게도 독일 침공을 부정하는 데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독일의 입장에서 적국인 [[대영제국]]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영국과 영국이 보유한 식민지간의 주요 항로가 살아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럴 때 소련과 전쟁을 시작해서 양면전쟁을 벌이는 것은 [[아돌프 히틀러|천년에 한 번 나올 바보]]나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히틀러가 스탈린한테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고 한 이유가 1차대전 때 독일이 양면전쟁을 벌이다 파멸한 것을 교훈 삼아 소련과의 [[양면전쟁]]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걸 모를 리 없는 스탈린이 히틀러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양면전쟁을 또다시 벌일 거라고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스탈린이 추진한 공업화, 군 현대화 정책이 빠르면 1942년, 늦어도 1943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사소한 이유로 나치 독일과 전쟁이 벌어지면 아직 소련의 전쟁준비가 완료되지 못한 상황이라 매우 위험해지기 때문에 일부러 전쟁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 독일 침공을 부정하는 논리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여기에 전문가의 의견이 더해졌다. 소련군 정보국인 [[GRU]] 국장인 [[필리프 골리코프]] 중장은 여러 경로로 독일군의 침공 징후가 뚜렷했는데도, "영국이 있는데 설마 소련까지 침공하겠나"고 생각하던 스탈린에 동조하여 독일이 영국을 정복하기 전까지 독소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의 확증편향을 부채질한 골리코프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GRU 국장에서 해임된다. 하지만 골리코프는 보신의 달인으로, [[정치장교]] 출신이었음에도 고급 정치장교는 거의 100% 숙청되어 처형되던 [[대숙청]] 기간도 무사히 넘기고 승진했을 정도로 정치적 처신을 잘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남았다. 독소전쟁 기간 동안 별 전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포로 심사 업무를 맡아서 부역자를 처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 측에 붙어서 1956년 주코프 국방장관 실각에도 관여하는 등 여러 가지로 정치군인의 행보를 보였고, 그 이후에도 영달을 누리다가 독소전쟁 당시 별다른 전공이 없음에도 1961년 소련 원수까지 올랐다. 다만 원수 진급 1년 후인 1962년 은퇴하게 된다.] 특무부대 총수인 골리코프의 이런 결론은 스탈린을 안심시켰고, 스탈린은 히틀러가 측근들의 만류에도 대단히 무모한 도박을 행하는 벼랑 끝 전술에 이골이 난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대영작전을 준비하기 위한 기만책일 뿐"이라는 독일의 해명을 믿게 된다. 다만 스탈린의 이런 확증편향에도 불구하고 [[세묜 티모셴코]] 국방장관이나 붉은 군대 총참모부[* 1940년 12월 이전에는 [[키릴 메레츠코프]] 대장, 이후에는 주코프 대장이 총참모장]는 전쟁 징후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40년 12월 독일의 침략을 상정한 자체 도상연습을 실시했다. 청군(독일군)을 맡은 사람이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당시 키에프 군관구 사령관), 적군(소련군)을 맡은 사람이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 (당시 서부 군관구 사령관)이었는데, 청군은 적군을 몇 주 만에 포위 섬멸하는 결과가 나왔다. 즉 소련군의 자체평가에서도 소련은 독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소련군 수뇌부는 이런 소련군의 취약성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동부에 산재한 부대를 서부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고 스탈린에게 상신했으나, 스탈린은 "우리가 부대를 서진시켜 국경 부근에 집결시키면 독일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그럼 진짜 전쟁이야! 전쟁!"이라며 군부의 의견 상신을 묵살했다. 붉은 군대 지휘부는 1941년 봄부터 계속 스탈린에게 경계령을 내려줄 것을 상신했으나 스탈린은 이것이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위와 같은 이유로 번번이 막았다. 결과적으로 침공 당일인 1941년 6월 22일 0시 30분에서야 티모셴코와 주코프 명의의 경계령이 내려질 수 있었으나, 이때는 후대의 [[6.25 전쟁]] 개전시기의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일요일 새벽이었고, 농촌 출신이 대부분인 붉은 군대의 장병은 농번기 휴가철을 맞아 상당수가 외출-휴가를 떠난 와중에서 이미 부대는 텅텅 비어 있었는데, 경계령 발령 3시간 후 독일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이는 초반 소련이 파죽지세로 독일군에게 점령당하는 요인이 된다. 그리고 스탈린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미 전간기 시절에 [[스탈린 선]]이라는 요새 방어선을 예전의 소련 국경선 지역에 설치해놓았으며 새로 획득한 영토를 방어하는 [[몰로토프 선]]도 마련해놓았으니 2개의 요새 방어선을 활용한다면 나치 독일의 침공에서 초반전을 버티면서 반격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스탈린 선은 구식 방어선인데다가 몰로토프 선을 건설하기 위해 무기와 장비를 빼앗긴 채 반쯤 폐허로 변한 상태고 몰로토프 선은 건설을 서둘렀지만 미완성의 방어선인데다가 딱 나치 독일과의 국경선만 막은 상태고 부실공사로 인해 완성된 곳도 방어력이 극단적으로 떨어진다는 중요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붉은 군대 지휘부는 최소한 이런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경계령이라도 내려서 몰로토프 선에 병력을 배치함으로서 임시로 방어선을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고 결국 개전 당시 국경선에는 소수의 [[내무인민위원부|NKVD]] 소속의 국경수비대만 있어서 초기 방어전부터 소련군이 대규모로 패배하게 된다. === 진정한 세계대전의 시작 === 독일이 소련을 침략하기 전까지는 아직 [[세계 대전]]이라고 불리기 힘들었다. 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각각의 전역이 유기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는 단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럽 본토에서의 전투는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이 항복하면서 끝났었고, 영국 본국과의 전투는 바다사자 작전이 발동되지 않은 시점에서 공중전만 진행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영국, 영연방과 식민지들 대 이탈리아, 독일 지원군들의 전투였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중화민국과 중일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남방작전과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지 않은 시점이라 당시 중국은 연합국의 일원이 아니었다. 독소전쟁 전까지는 연합국은 영국과 영연방국밖에 남지 않았고[* [[중화민국 국민정부|중국]]은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도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과 같은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이 상주해 있었고 [[트라우트만 공작]]이 결렬된 뒤에 독일은 이를 불러들였다. 당장은 중국이 어디의 일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과의 독립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낫다.][* 미국은 렌드리스를 발동한 상태이지만 아직까지의 국내 여론이 전쟁 참가를 지지하는 데까지 이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지원국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추축국[* 이 시기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강철 조약과 독일과 일본의 방공협정으로 맺어진 관계에 불과하지만.]에 가입한 국가들 중 대표적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중 독일과 이탈리아는 공동 전선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을 치르고 있었고, 일본은 독자적인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동안 소련은 이 세계 정세에 중국, 미국과 함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로 남아 있게 되었고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나름대로 [[독소 폴란드 점령]], [[겨울전쟁]], [[발트 3국 점령]]과 같은 영토 확장도 꾀했었다. 하지만 1941년에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고,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에게 전쟁을 걸면서, 세계 각지의 전역은 하나의 복합적인 전쟁, 즉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으로 합쳐지게 된다. == 작전 준비 == ||<-4><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동부전선 || || 구분 || 독일 || 소련 || 비율 || || 사단수 || 166 || 190 || 1:1.1 || || 총병력 || 3,487,900 || 2,743,000 || 1.3:1 || || 화포 || 45,091 || 59,787 || 1:1.4 || || 전차 및 자주포 || 4,171 || 15,687 || 1:3.8 || || 전투기 || 4,389 || 11,537 || 1:2.6 ||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것과는 달리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병력 수는 독일군이 많고 장비는 소련군이 많다. 사단의 수는 소련이 더 많은데, 독일 측의 병력수가 더 많은 이유는 편제의 차이 때문이다. 개전 당시 독일 보병사단의 정원은 17,000명으로 1941년에는 보병대대 9개, 포병대대 4개의 편제로 13개 대대를 보유했다. 심지어 독일 기갑사단의 정원은 12,000명 정도였지만, 소련 소총사단의 정원은 11,000명이었다. 그래서 소련군의 병력이 의외로 모자랐다. 물론 소련군의 편제가 모두 작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소련군이 독일군보다 작은 편제는 개전 이후 새로 생기는 전차군단과 기계화군단의 경우 타국 기갑사단 규모이기 때문에 명백히 한 단계 낮은 제대가 맞다. 그러나 보병의 경우 그 정도라고 보기 힘들다. 청색 작전 이후로는 독일 보병사단이 보병대대 6개, 포병대대 3개로 줄어들어서 원래의 2/3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며 1943년의 쿠르스크 전투 시기쯤 되면 소련군 소총 사단은 9,000명이 정원이지만 독일 보병사단 역시 12,000명으로 줄었기 때문에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는 병력 정원에서 6,000명이나 차이가 나므로 병력만 따져봐도 소련군 보병사단 1개가 독일군 보병사단 1개를 막기가 곤란해진다. 장비는 소련군이 많았지만 실질적인 화력면에서는 독일군이 앞섰다. 그래서 독일 사단이 소련 군단급의 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전차와 대포가 훨씬 많은데 왜 화력의 차이가 발생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교리의 차이, 적절한 장비 부족, 정비 부족, 숙련도 부족, 정찰의 한계 등등으로 화력의 효율이 독일군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나치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베저위붕 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 등 숱한 실전을 겪었고 빠르게 승리했기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엄청난 강군이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당시에는 아직까지는 정예병력의 상실량이 적은 상태에서 2년간의 치열한 실전 경험까지 얻었기에 장비 숫자의 부족을 베테랑급 운용법으로 해결했다. 소련군의 장비는 독일군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지지는 않았고 일부 분야에서는 오히려 우세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KV-1]]과 [[T-34-76]]는 초기에 독일군의 [[3호 전차]]를 대학살하면서 독일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기습을 당한 데다가 실전 경험이 없었고 경험 많은 장교들이 숙청을 당한 것 때문에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특히 소련 공군 같은 경우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되는 날에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소련군 비행장을 향해 기습을 하러 왔는데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 멀뚱멀뚱 보고만 있다가 기습당해서 이륙도 못해본 채로 상당수의 전투기가 파괴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소련 공군은 독일군의 동진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1943년에 재건될 때까지 [[해군 항공대]]가 이를 채워야 했다. === 독일 국방군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536349><tablebordercolor=#536349><width=51.8%><nopad> [[파일:4422412121.jpg|width=100%]] ||<nopad> [[파일:zxczxc.jpg|width=100%]] || || [[소련]]을 침공하는 [[독일 육군(나치 독일)|나치 독일 육군]] ||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초토화된 [[소련]]의 마을 || 독일군 주요 지휘관들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등은 후일 회고록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양면전쟁]]의 참혹한 기억 때문에 이 침공에 회의적이었다는 식으로 증언한다. 그런데 이건 전후에 그들이 패전의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덮어 씌우기 위해 한 증언들 중 하나에 불과한 얘기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하여 실의에 빠졌던 독일 군부는 히틀러의 이 결정에 열광했고, 심지어 독일군 정보부는 "12주의 전역으로 소련을 완패시킬 수 있다"라고 보고하며 이 결정을 확신시켰다. 허나 당시 독일의 정보능력은 소련에 완전히 밀리고 있었는데 주소 대사 역시 "소련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어찌할 수가 없다"할 정도였다. 독일이 자신이 가진 정보에서 50%를 뻥튀기했는데도 "220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완전히 무너진다"라고 보고했으나, 소련군은 1941년에만 400개가 넘는 사단을 동원했다. 예상을 과대하게 했더라도 평소의 독일군의 이미지라면 작전계획이라도 현실성있게 짜놓아야 하지만 작전계획조차 비현실성이 넘쳤는데, 최초에는 "12주의 전역으로 소련을 패배시킨다"였던 것이 보급 문제가 불거지자 그것을 해결하니 "10주에 끝낼 수 있다"라고 줄였다. 또한 [[핀스크]] 습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있는 대습지로, [[프리피야트]] 시 북서쪽 벨라루스 영토지역과 남서쪽 우크라이나 영토지역에 걸쳐 영국 전체나 한반도 전체 크기보다 큰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엄청난 규모인 269,400㎢의 습지이다.]가 당시의 추축국과 소련 국경 사이에 거대하게 펼쳐진 관계로 인해 침공군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돌파가 힘들다는 문제에 대해 "8주에 가능하다"고 수정하는 등 작전 계획에 어떠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지엽적으로 해결하면서 근거도 없는 자신감만 넘쳤다. 이 문제는 7월 중순 프란츠 할더의 "14일에 이길 수 있다는 예상이 현실이 되어 간다." 라고 쓴 것을 '''겨우 한 달 후'''에 "우린 현재 350개 사단을 확인했다. 그들의 무장은 빈약하나 그들은 존재한다. 우리가 4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그 자리에 4개 사단을 투입한다."라는 일기에서 화룡점정을 이룬다. 작전 목표를 둘러싸고 독일군 수뇌부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할더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정치적 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인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히틀러는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와 [[석유]]가 풍부한 [[캅카스]] 지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위에서도 적혀 있지만 히틀러에겐 소련 침공은 식량과 자원확보가 가장 큰 이유였고 정치적 문제는 그 다음 순위였다. 결국 군부와 히틀러는 타협하여 침공군을 북부, 중부, 남부 [[집단군]] 세 갈래로 구성하기로 했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키이우|키예프]]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구성되었다. 작전의 목표는 A-A선이라고 불리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을 잇는 선, 이른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Arkhangelsk-Astrakhan line)"이었다. 독일군과 함께 [[루마니아군]], [[헝가리군]], [[이탈리아군]], [[핀란드군]]이 참전하기로 하면서 총 병력은 390만 명, 4,600여대의 전차, 4,389여대의 항공기, 46,000여문의 각종 화포가 동원되었다. 독일군의 주요 전법은 'Keil und Kessel'(카일 운트 케셀)[* 독일어로 카일은 쐐기, 케셀은 솥이라는 의미. 즉 쐐기와 솥]이라고 불리는 양익 포위였다. 소련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일단 소련군의 주력을 패퇴시키더라도 후방으로 소련군이 도주하면 섬멸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동원 가능한 병력이 많은 소련군이 시간이 갈수록 유리해지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보병]]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가해 정면의 적을 붙잡아둔 후, 기갑 부대가 양익을 돌파하여 적의 주력을 포위하는 전법이었다. 해당 전법은 바르바로사 작전 중반까지 제대로 먹혀들어가면서 소련군은 대규모의 병력 손실과 장비 손실을 동시에 겪는다. 아무리 기습적인 개전이었다고 해도 소련군의 전력 손실이 매우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을 포위했다고 해서 소련군이 바둑돌처럼 바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포위망 내부의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서 상당한 화력과 병력을 투입해야 했으며 희생도 나오게 된다. 그리고 포위당한 소련군이 빠르게 소멸하지 않으면서 포위망을 구성하는 병력이 빠져나간 독일군이 후속하는 소련군을 다시 포위할 병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히틀러는 [[정치장교]]는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체포하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알려지자 병사들의 독전 임무를 맡은 소련군 정치장교를 자극하여 오히려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포위당한 소련군이 전황을 뒤집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서도 최후까지 싸우는 경우가 자주 발생해서 안그래도 바쁜 독일군의 발목을 자주 잡았다. === 소련군 === 소련군은 1938년에 벌어진 [[대숙청]]에서 사단급 이상의 단위 부대에서 절반이 넘는 군 지휘관들이 처형되거나 [[굴라크]]로 끌려가는 큰 혼란을 겪었다. 대숙청이 적어도 [[겨울전쟁]]과 동부전선 초반까지 큰 혼란을 야기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최근 들어 대숙청에서 날아간 인물들 중에 상당수가 정치적으로 출세한 무능한 사람들 또는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사라진 후 전문적이고 현대적인 교육을 받았던 유능한 40대 지휘관들이 전면에 나설 기회를 제공해서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반론을 감안해도 그렇다. 초반의 대패 때문에 소련군이 전혀 준비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소련은 1920년대부터 강력한 국방 정책을 밀어붙였다. 특히 1930년대 성공한 공업화 때문에 '''[[전투기]] 수량, [[잠수함]] 수량, [[전차]] 수량은 1940년 당시 세계 1위'''였다. 이렇게 많은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운용 교리 또한 발전시키고 있었으나, 군부 대숙청의 결과 이런 교리를 발달시킨 장성들도 쓸려나가면서 교리들이 부정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군사 이론가들이 자주 숙청되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운용 사상이 바뀌는 바람에 부대들은 해체와 재편을 반복하고 있었다. 보유한 전차와 항공기들은 스펙상 독일군 장비들을 상대로 우위를 가질 수 있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전간기 시대에 맞춰 발전된 장비들을 갖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적시에 활용되지 못하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독일군에 의해 대량으로 격파되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침략적인 의도를 내비치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군은 병력을 2배로 늘렸으나, 갑자기 몸집이 커지자 대숙청에서 기인한 부작용과 함께 장교 부족이라는 큰 문제가 벌어졌다. 상급 장교도 부족했지만, 초급 장교는 절망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대학생]]들에게 속성으로 몇 주 교육을 시킨 다음에 바로 [[소위]] 계급을 달아주는 식으로 장교를 양성하였다. 당연하게도 속성훈련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초급 장교는 현장에서 제대로 지휘능력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군이 매우 둔중하게 움직이거나 주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태를 만들었다. 고위급 지휘관도 상황이 안좋았다. 대표적으로 1938년에 끝난 [[스페인 내전]]에서의 전훈을 잘못 해석한 것을 들 수 있다. 원래 스페인의 산악 지형에서 경전차를 보병의 호위 없이 단독으로 투입하는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버렸는데 이런 것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단순하게 전차가 산악지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이 보고한 오류를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는 기갑을 중요시했던 [[미하일 투하쳅스키]] 숙청처럼 전문가를 정치적 이유로 대숙청해서 고위급 지휘관에도 전문가가 부족해서 심각한 병크가 발생한다. 덕분에 전차 부대들을 모두 여단급 이하로 축소재편했다가 1940년 독일군의 [[전격전]]의 대성공을 보고 다시 군단급으로 재편하기로 했다. 이 와중에서 독일군의 침략을 받았으니 결과는 뻔한 일이다. 그나마 육군은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았다. 공군에도 숙청의 올가미가 덮쳐서 유능한 지휘관 상당수가 "항공사고가 너무 잦은데 이거 사보타지 아냐?" 라는 [[NKVD]]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공군도 몇 년간 발전이 지체되었다. 사실 항공산업의 초창기에는 소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고가 났고, 이는 소련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항공기 문외한인 NKVD는 이를 반동들의 사보타지라고 생각, 저명한 항공공학자들을 수용소로 보내서 삽질을 하게 만들었다. 당장 저명한 항공공학자였던 폴리카프포프, 투폴레프, 먀시쇼프, 코롤료프 등은 수용소나 감방에서 몇년 복역을 했다. 그나마 수감된 상황에서도 항공기 개발이나 개량 업무를 담당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신체의 자유가 없고 생활이 불편하며 감시당하는 상황이라서 발명같은 창조적인 생각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막대한 비효율이 발생했다. 이런 사정에서 항공공학의 선도국중 하나였던 소련은 미국, 독일, 영국에 비해 몇 년 뒤쳐지게 되었다.[* 당시 학문적 영역에서의 항공공학은 독일이 가장 앞서나가고 있었지만, 생산공학은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미국이 앞서나갔으며 나중에 미국이 연합국에 참전하면서 최정상급의 항공공학을 갖춘 영국과 협조체제가 만들어졌다.] 예외적으로 소련군이 [[핀란드군]]을 상대로 고전하다가 겨우 승리한 1939년에서 1940년까지 벌어진 [[겨울전쟁]] 때의 교훈은 헛되지 않아서, 소련군의 이후 월동 장비나 동계 작전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후에 겨울에 발생한 [[모스크바 전투]] 때 겨울전쟁에서 붉은 군대 병사의 피값으로 체득한 전훈들은 유용하게 사용되어 소련군은 겨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던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승진한 [[키릴 메레츠코프]]나 [[알렉산드르 노비코프]]는 후에 소련군의 중추가 되었고 [[국방장관]]이 된 [[세묜 티모셴코]]는 군 개혁을 조용히 이끌었다. 그리고 냉전 당시 독소전 초반 소련군 참패의 원흉으로 간주되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도 러시아의 자료가 풀리면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그는 '''야전지휘관으로서는 무능했고,''' 이는 [[겨울전쟁]]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여실히 드러냈지만,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군과 정치권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면서, 나름 붉은 군대의 기계화를 소련의 경제가 감당하는 내에서 착실히 이끌었다. 보로실로프는 기계화를 주창한 투하쳅스키와 앙숙이었고, 투하쳅스키를 숙청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의 기계화가 필요하다는 전제는 공감하고 있었고, 소련의 경제가 감당하는 내에서 착실히 기계화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BT 전차 시리즈나 T-34, KV 전차 시리즈 모두 그가 국방장관 재임시에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러시아 내전]] 이후 [[겨울전쟁]] 때까지 대규모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실전경험의 부재는 1차 대전 이후 다른 나라도 유사했지만, 소련군이 독일군에 비해 이런 점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했던 점은 1차 대전에 대대장 이상급으로 참전한 고급 지휘관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러시아 고급장교 대부분은 귀족이나 반혁명세력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붉은 군대에 가담한 고급장교 수는 극히 적었고, 기본적으로 붉은 군대 장성급 고급장교들은 부사관이나 사병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전에서의 지휘 경험이 적다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던 장교나 장성들은 있었으나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 성격을 띠었던 데다가 산악 지형에서 치러진 보병간의 교전이었던 만큼 여기서 쌓은 군사 지식, 병법이 대평원처럼 넓고 지형의 기복이 적은 소련에 바로 적용될 수 없었다. 독일군의 원수-상급대장들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대위급 이상이었기 때문에 작전참모나 현장 지휘관으로 활동하며 풍부한 지휘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 작정하고 대규모로 전면전을 벌이는 데는 교리, 즉 종심 작전 이론이라는 선진적인 교리가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의 선구적인 이론가들에 의해 확립되어 있었으나 이 이론을 개발한 이는 물론이고 스페인에서 그나마 실전 경험을 쌓았던 인물들도 대숙청으로 상당수가 황천길을 밟은 상태였다. 특히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본 공군 참전자들이 숙청된 결과 소련 공군은 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같이 기동전의 개념을 제안한 유능한 장성들까지 처형되었던 데다가 이론까지 폐기되어서 나머지 사람들은 숙청될까 봐 투하쳅스키의 '투'자도 못 꺼냈다. 투하쳅스키가 제시한 [[기동전]]은 독소전쟁 도중 소련에서 다시 부활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대숙청이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도 납득이 안 된다면 독소전쟁의 영웅인 '''[[게오르기 주코프]]조차도 대숙청 와중에 저승 갈 뻔했다.''' 다행히 [[할힌골 전투|전공을 세워서]] 칼날을 피했지만 만일 일본군이 그런 식으로 국경지대에서 도발을 한다는 운이 작용하지 않았으면 주코프도 끝장났다. 이런 식으로 지시 없이 훈련했다고 장교나 장성이 저승 가는 이런 미친 피바람 속에서 안 그래도 훈련 부족인 소련군은 더욱 더 경직되어 갔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군사 교리 또한 답보 상태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소련군은 2,900만 명[* 4,000만 명 이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상의 사망자를 감수하게 되었다. 이 수치에는 민간인 사망자의 비율이 상당했는데, 나치의 인종 청소 정책 때문이었다. 군인 총 사망자는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360만 명 정도의 포로 사망자도 포함된다. 바르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소련군의 손실은 전사자와 부상자 및 실종자, 포로를 합쳐서 490만 명이 넘어가며 [[전차]]와 [[전투기]]의 손실은 각각 20,500대와 21,200대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 방어전 당시에는 쓸 전차조차 없어서 [[NI 전차]]라는 이름을 붙이고 민간용 [[트랙터]]를 되는 대로 엉망진창으로 개조한 [[테크니컬]] 경전차를 주력 기갑으로 내세워 쓸 지경이었다. 첨언하자면 이때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수는 독소전쟁 전체 기간 동안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40% 정도 된다고 한다. 포병의 피해도 극심해서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중포병이 거의 삭제당했다.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이겨내는 데 활약한 40대 연령의 지휘관들도 전쟁 초기엔 감각이 없기는 마찬가지라서 주코프마저도 독소전쟁 초기엔 수십만 명의 병력을 날려먹기도 했다. 결국 소련군은 계속 얻어터지면서 독일군 교리를 학습하여 이를 극복해 나간 것이다. 훗날 소련군의 명장에 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이반 코네프]], [[안드레이 예료멘코]] 등도 개전 초기에는 실전 경험 부족 때문에 계속 참패했고, 후퇴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연대장]]이나 [[여단장]]급 인물들이 [[군단장]]이나 [[사단장]]을 맡고 있었으니... 다만 이 당시의 독일군은 2년간 계속 [[폴란드 침공|폴란드]], [[노르웨이 침공|노르웨이]], [[프랑스 침공|프랑스]], [[영국 본토 항공전|영국]], [[유고슬라비아 침공|유고]], [[그리스 침공|그리스군]] 등을 상대로 실전을 치러 봐서 수준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군이 졸전을 벌였다기보다는 독일군이 잘 싸웠다고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당시 독일군은 스스로가 자신했던 것처럼 규모, 전술에 있어서 최강이었던 것이다.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을 꼽자면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갑작스럽게 파기하고 기습을 감행한 공격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주만 공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전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갑작스럽게 기습 공격을 당하면 엄청난 피해를 일방적으로 얻어 맞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독일은 독소전 초기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진주만에서는 산업 시설 등은 건드리지 못했는데 소련은 산업 시설과 곡창지대및 인구까지 날려버렸다. 갑작스런 기습이 아니었다면 독소전쟁 초기 [[교환비]]가 20대 1에 달하는 참패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소련에서 스탈린을 대신할 지도자는 없었다. 스탈린은 서구 국가들과 협상을 잘 이끌어 냈으며, 소련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지휘와 통제를 받도록 했다. 스탈린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거의 있을 필요가 없었던 인물로 표현되는데, 대숙청과 초반 무리수를 포함하더라도 독소전쟁에 대한 공로를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 전선에서의 싸움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소련 인민을 통제하며 무기를 생산하고 병력을 동원하며 자원을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다. 소련 인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중앙의 효율적 통제 아래 수행되지 않았다면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1942년부터 스탈린의 [[스타프카]]는 소련 전체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행사했다. 물론 전선에 관여하면서 스탈린이 벌인 실책은 커다란 것이지만, 그래도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이긴 것'''이라고 말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스탈린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점점 붉은 군대를 신뢰하며 군대의 고위 지휘관에게 자율권을 맡기면서 개선되어갔기 때문에 헨리 키신저는 저서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 중대한 판단 실수를 저질렀으나 스탈린은 그것을 만회할 능력이 있었고 히틀러는 아니었다.'" 라고 평했다.[* 흐루쇼프는 우상과 신격화에 반대하며 스탈린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스탈린을 비난한 것이다. 이건 사학적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고 정치적 공격이다.] 스탈린은 분명 크게 보면 첫째는 유능한 인력들을 숙청하여 군대의 질을 저하시킨 것, 둘째는 독일의 침공과 관련된 정보를 받음에도 이를 무시했으며 셋째는 전문가가 아니면서 전선에 관여해서 소련군의 추가적인 대손실을 이룩한 대실책이 있었지만 그의 잘못을 깨닫고 후방에서의 지원에 힘썼고 소련의 지휘관들은 그 지원을 받으며 독일군을 격퇴했다. 물론 스탈린이 모든 것을 총괄했고, 스탈린이 2차 대전을 혼자서 이끌었다 하는 수준까진 아니지만 말이다.[* 그걸 하려던 히틀러는 결국 독일을 파국으로 이끌게 된다.] [[독소 불가침조약]] 때문에 방어선 구축에서도 문제가 생겼는데, 원래 국경에서 10년 동안 준비해 놓은 방어선인 [[스탈린 선]]을 버리고 새로운 국경선에 맞춰서 [[몰로토프 선]]이라는 방어선 구축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독일이 영국을 완전히 정리할 때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으로 보았으므로 침략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독일군이 국경을 넘나들며 정찰하는 것마저 무시하도록 명령했는데, 가뜩이나 어설프고 미완성인 방어선이 독일군에게 완전히 분석당하면서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 전개 == ||<tablealign=center><tablewidth=75%><tablebordercolor=#536349><nopad> [[파일:독일 대소 선전포고문(슐렌부르크 선언문).jpg|width=100%]] || ||<bgcolor=#536349> {{{-1 {{{#FFF '''1941년 6월 22일 오전 5시 30분(현지 시각)에 작성된[br]독일의 대소 선전포고문인 슐렌부르크 선언문.[br]서두는 다음과 같다.'''}}}}}} || ||<bgcolor=#536349> {{{-1 {{{#FFF "독일 동부 국경에서 적군의 전 군대가 대규모로 증강되며 준비한 그 결과로 직면한 피할 수 없는 위협을 고려하여,[br]독일 정부는 즉각적으로 군사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한다.[br]해당 사항은 동시에 베를린의 데카조노프[* 당시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에게도 전달될 예정이다."[*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이 문서를 데카조노프에게 건네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모스크바에 전해주시오. 그래도 나는 대소 전쟁을 반대했다고."] }}}}}} ||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nopad> [youtube(YsupHQtfr7k)] || || 독소전쟁 개전 당시의 러시아 라디오 방송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536349><bgcolor=#536349> ||<width=100%><bgcolor=#fff,#1c1d1f>{{{#!wiki style="margin: 10px" 22 июня 1941 года 1941년 6월 22일. Внимание.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Говорит Москва. [[모스크바]]에서 전해드립니다. Передаём важн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енное сообщение. 정부의 중대 발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Граждане и гражданки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сегодня в четыре часа утра без всякого объявления войны германские 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атаковали границ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인민 여러분, 오늘 새벽 4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그 어떠한 예고나 선전포고도 없이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의 군대가 국경에서의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Началась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советских народов против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х захватчиков!'''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맞선 소비에트 인민들의 [[독소전쟁|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Наше дело правое, Враг будет разбит!''' '''우리의 명분은 정당하며, 적들은 패배할 것입니다.''' '''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 {{{-1 '''[[유리 레비탄]], [[1941년]] [[6월 22일]] 오전 12시 15분, [[독소전쟁|대조국전쟁]] [[https://www.youtube.com/watch?v=YsupHQtfr7k|안내 방송 전문]].'''[* [[독소전쟁]] 개전 직후 스탈린이 11일간 잠수를 타면서, 개전 직후 급박한 사태를 알리는 연설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대신하였다.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1년]] [[7월 3일]] 라디오 방송에서 국난에 맞선 인민의 단결을 촉구하는 연설과 함께 공무로 다시 복귀한다.] [[https://www.tracesofwar.com/articles/4627/Radio-speech-by-Molotov-22-06-1941.htm|몰로토프 연설 전문(영어 번역본)]]}}}}}} || 1941년 6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독일군은 동맹군까지 합쳐 3개 집단군, 총 305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소련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만일을 대비해 국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지만 방어선에 적절하게 주둔시키고 방어전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냥 국경 지역에 병력을 모아둔 것이라서 해당 조치는 오히려 개전 초반에 소련군이 독일군에 기습에 큰 타격을 입고 반격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전장 환경이 바뀌었으나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전부 쓸려나간 게 특히 한 몫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이었다면 국경 지역에 배치된 대규모 병력이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기갑군을 최초로 창설한 독일이었다. 소련군의 전차는 우수한 성능과 기동성에도 불구하고 보병 지원 이상의 역할을 배정받지 못했다. 단일한 전차 군단은 당연히 없었고, 전차들은 드넓은 소련 국경에 흩어져 있었다. 이래서야 기동성과 충격 효과가 발휘될 리가 없었다. 물론 [[브로디 전투]]처럼 개전 직전에 만들어놓은 소련 기계화군단처럼 전차를 대규모로 편제한 후 기동전을 수행하려는 조직은 있었으나 창설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부대로서의 행동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보급 및 정비 부족으로 인해 전투는 커녕 이동도 힘든 상황이 많아서 병력 규모에 비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독일 기갑군단들에게 격파당한다. 거기에다가 경직된 지휘 체계로 인해 각 부대들의 자체적인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황의 불리함을 알고 상급 부대로 집결한다던지 하는 임기응변적 대책은 물론 없었고, 소련군은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다가 포위되어 죽어나갔다. 독일 기갑군이 뚫은 구멍으로 대량의 독일군이 유입되면서 전방의 소련군은 그대로 갇히고 만다. 또한 독일군의 주공인 중부집단군 쪽에 소련군 사단은 얼마 없었고, 우크라이나에만 100개 사단이 투입되어, 거대한 소련군이 양분되는 일도 발생하게 되었다. 소련의 전투기들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육군이 공중 엄호, 무기, 첩보, 통신체계도 없이 단 몇 시간 만에 궤멸되는 일도 잦았다. 그나마 이상 징후를 감지해 숙청될 것을 각오하고 경계 태세를 유지토록 한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의 지시 덕에 [[소련 해군]]은 급습에도 피해가 가장 적었고, 살아남은 해군 항공대들이 궤멸한 공군의 역할을 상당량 대신해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여름에 히틀러의 공격이 없을 거라고 예상한 나머지 별다른 경계태세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스탈린만의 생각은 아니라서 전쟁 전에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인 [[https://en.wikipedia.org/wiki/Friedrich-Werner_Graf_von_der_Schulenburg|프리드리히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은 독일의 소련 침공을 의심해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인 [[https://ru.wikipedia.org/wiki/%D0%94%D0%B5%D0%BA%D0%B0%D0%BD%D0%BE%D0%B7%D0%BE%D0%B2,_%D0%92%D0%BB%D0%B0%D0%B4%D0%B8%D0%BC%D0%B8%D1%80_%D0%93%D0%B5%D0%BE%D1%80%D0%B3%D0%B8%D0%B5%D0%B2%D0%B8%D1%87|블라디미르 데카조노프]]에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의심을 귀띔해줬는데 데카조노프 대사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려 한다는 주장은 영국의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라며 일축한 일도 있었을 정도로 소련 정계는 독일의 침공을 예상조차 안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소련은 정보를 수집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기습에 휘말렸다. 6월 27일에 스탈린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유린되었으며, 국경에 있던 기존 병력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으로 소련이 얻은 영토를 모두 돌파해서 예전의 소련 국경 관문도시인 [[민스크]]에 도착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립을 지키던 [[헝가리 왕국]]마저 독소전쟁에 참전하면서 전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헝가리의 독소전쟁 참전은 좀 복잡한 내면이 있는데. 헝가리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 1차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처럼 참전파와 중립파가 싸우고 있는 상태였다. 참전파는 독일 편에 참전해 승리의 과실을 얻고 향후 생길 트란실바니아 문제에서 독일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립파는 소련을 침공할 명분이 없다고(독일과 헝가리간 추축조약은 조약국이 타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할 경우에만 도울 의무가 있었다) 주장하며 싸우고 있는 상태였던지라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1941년 6월 26일 신원 미상의 폭격기 3대가 헝가리의 도시인 [[https://www.origo.hu/tudomany/20170626-a-kassai-incidens-miatt-lepett-be-a-szovjetunio-elleni-haboruba-magyarorszag.html|커셔(Kassa, 현 슬로바키아 코시체)를 폭격했고]], 이 폭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군 수사관들이 사용된 폭탄이 소련제라고 주장했다(그 외에 폭격기 3대에 소련 공군 마크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마크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따라 커셔 폭격의 주범이 소련이라고 생각한 헝가리는 그 다음날인 6월 27일, 라즐로 바르도시 총리가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에서 대소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독소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다만 아직까지 커셔 폭격의 주범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주범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소련의 의도적인 폭격이라는 주장부터, 또는 소련 공군이 슬로바키아를 폭격하려다 실수로 헝가리를 폭격했다는 주장, 독일이 헝가리를 독소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는 주장, 또는 독소전쟁 참전을 위한 헝가리의 자작극이라는 주장, 아님 [[루마니아 왕국]]이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공격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이때 스탈린은 통치를 그만두고 자기의 다차(러시아식 별장)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이때 스탈린이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추측밖에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스탈린은 정치적 천재였고, 권력에 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실패를 덮고,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책략이었을 수 있다. 이런 행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는 절대권력자가 등장하여 모든 것을 일원화된 체계 하에 통제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스탈린의 부재가 더 심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당시 소련에는 스탈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비등비등한 약자끼리 하는 주도권 싸움이 소련을 붕괴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소련 정부의 수뇌부는 스탈린을 찾아가 그의 복귀를 호소하였고, 그를 공산당의 최고 직위와 정부 최고 직위에 오를 것을 호소했다. 놀랍게도 스탈린은 당 총간사 직위 외에는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소련의 복잡한 정치체계로 인해 평시에는 그렇게 해도 스탈린이 소련을 충분히 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몇 번 거절하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7월 3일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고, 소련 인민들은 스탈린의 재등장에 안심했다.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nopad> [youtube(Z4X-uBtJPaw)] || || [[영국 본토 항공전]]부터 바르바로사 작전 개요 및 남부전선 상황 ||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nopad> [youtube(uoJzjWJb1dY)] || || 중부전선과 북부전선 및 [[계속전쟁]] 상황 || 독일군은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북부집단군은 [[시가전]]을 피하기 위해 [[레닌그라드 공방전|레닌그라드를 포위했고]]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도 계속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키에프에 소련군이 집중되면서 소련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독일은 중부집단군이 남부집단군을 지원하게 했고 [[키예프 전투(1941년)|제1차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군이 대규모 섬멸을 당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으나 귀중한 시간을 소모하게 되었다. 이렇게 소모한 시간은 [[모스크바 공방전]] 중반 이후에 결정타를 먹이게 되는데 중부집단군이 모스크바로 전진하는 중간에 [[비]]가 내리면서 러시아 전역이 악명높은 [[라스푸티차|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군마들은 진흙탕에 빠져 죽었고 턱없이 부족한 보급 차량들도 진흙밭에 빠져 망실당하기 일쑤였다. 원래 독일군은 단기 결전을 계획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군한 상태였고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징집을 시작해 독일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을 시작하면서 안 그래도 느린 진격은 점점 더 느려졌다. 그리고 소련군의 병력 증원은 놀라워서 전쟁 초에 독일은 소련군이 180여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추정했고, 작전 초에 이 병력들이 모두 궤멸당하면서 독일군은 소련군이 완전히 소멸됐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독일군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소련군 '''360여개 사단'''과 마주쳐야 했다. 독일은 이렇게 되서야 일본에게 소련을 공격해 줄 것을 제대로 요청했지만, 일본은 '''당연히''' 가만히 있었다. 당시 소련과 일본은 [[할힌골 전투|소련이 일본을 실컷 두들겨팬 뒤]] 서로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애초에 독일 측은 일본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알리지조차 않았다. 단지 독일 군부 혼자서"우리가 공격하면 일본군도 같이 가세하겠지?"라고 안일하게 [[망상]]했을 뿐이다. 결국 독일군은 마지막으로 모스크바 점령을 시도해서 모스크바 코 앞까지 도착했으나 때마침 소련 측에서 '''일본이 참전하지 않을 거란''' 첩보를 받았고 바로 일본쪽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 중 25개 보병사단과 9개의 기갑여단들을 모스크바로 재배치한다. 예전부터 소련은 일본의 야욕을 경계해왔고 [[하산 호 전투]]와 [[할힌골 전투]]로 실제 경험도 해봤기에 소련은 모스크바가 넘어갈까 말까하는 이때도 일본을 염려하여 30여 개 사단은 극동에 남겨놨으나 일본이 소련에 침공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병력을 모스크바로 동원한 것이다. 이후 독일은 소련군의 반격을 받았고 [[겨울]]이 되어 러시아의 강추위가 몰아치자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약 30km 앞에 두고 공격을 포기했다. 독일군의 진군이 세 갈래였던 만큼 전역도 크게 3곳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독일의 북부집단군이 소련의 북부방면군[* 북부전선군과 북서전선군 지휘]을 상대한 북부 전구에서는 리투아니아-라트비아-나르바/페이푸스호/프스코프-레닌그라드/일멘호를 따라 전투가 이어졌다. 북부 전구에서의 주요 전투로는 [[라세이냐이 전투]], [[레닌그라드 공방전]] 등이 있다. 독일의 중부집단군이 소련의 서부방면군[* 서부전선군과 예비전선군, 브랸스크 전선군 지휘]을 상대한 중부 전구에서는 민스크-스몰렌스크-르제프/뱌지마/오룔-칼리닌/모자이스크/툴라-모스크바를 따라 전투가 이어졌다. 주요 전투로는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1941)|제1차 스몰렌스크 전투]],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등이 있다. 독일의 남부집단군과 루마니아군이 소련의 남서방면군[* 남서전선군과 남부전선군 지휘]을 상대한 남부 전구에서는 리보프/브로디/코벨-우만/오데사-키예프-쿠르스크/하리코프-로스토프를 따라 전투가 이어졌다. 주요 전투로는 [[브로디 전투|제1차 브로디 전투]], [[우만 전투]], [[키예프 전투(1941년)|제1차 키예프 전투]], [[로스토프 전투|제1차 로스토프 전투]] 등이 있다. 한편 소련은 독일이 침공하면서 서쪽에 있던 공업 지대를 동쪽으로 이동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필요한 무기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공장]]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빠른 속도로 진군해 오고 있음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한 끝에 공장의 설비들을 동부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공장 지대는 이후 대전 내내 소련군이 싸우는 무기를 공급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과정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이 흘러간다. 당연히 중앙은 전선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공장의 소개와 대피가 중앙의 조율 아래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어떤 기차는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야 했으며, 소개하여 피난을 갔다가, 피난처로 독일군이 진격하는 바람에 또다시 피난 가야 했던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다행히 서쪽에 있던 대부분의 공장들은 [[우랄 산맥]] 부근으로 안전하게 이송되었고, 1,500개의 주요 공장 중에 1942년 말까지 단 55개 만이 이전된 곳에서 재가동에 들어가지 못했다. 1941년 후반기까지 2,600개의 기업체가 옮겨졌으며, 2,500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공장을 따라 이동하였다. 옮기지 못하는 생산 시설은 독일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청야전술|철저히 파괴했다.]] 이러한 결정은 독일군에게 있어서 두 가지 문제로 다가오게 되었다. 먼저 독일군은 소련의 군수 공장들을 점거해 소련의 생산력을 완전히 말소시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예상을 깨고 소련은 서부의 공업시설들을 그야말로 대이동시키는데 성공했고 온전히 물자와 장비가 생산되어 소련군의 전투력은 유지되었다. 그리고 독일군은 광활한 거리의 보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무타구치 렌야|소련 기관차들을 노획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유가 없던 것은 아니고 소련의 철도와 독일의 철도 규격이 전혀 달라서 소련은 [[광궤]]를 사용했고 독일은 [[표준궤]]를 썼기 때문에 소련 영토 내부의 철도를 사용하려면 소련 기관차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소련의 기관차들은 '''산업 시설들을 이전하면서 상당수가 짐을 싣고 우랄로 후퇴한 상태였고''' 일부 기관차를 노획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최전선의 약간 후방에서 소련군에게 보급을 해주다가 폭격맞고 박살나거나 소련 기관차에 근접한 독일군이 소련군이 열차를 이용해서 후퇴하는 것을 막으려고 기관차를 공격하거나 하는 사태로 인해 파괴가 극심했으며 심지어 기적적으로 멀쩡하게 노획한 소련 기관차를 독일 철도부대가 인수하기도 전에 현지 독일군의 부주의나 사고등으로 파손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므로 독일의 손에 넘어가서 정상적으로 사용중인 소련 기관차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독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점령지에 있는 소련의 철도를 공병들을 투입하여 철도를 억지로 개궤시키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과정을 거쳐서 광궤를 표준궤로 만든 후에 독일의 기관차들을 보냈지만, 문제는 독일의 기관차들은 기후가 온화한 서유럽이나 중부유럽 기준으로 제조되었기 때문에 '''소련의 추위를 버티지 못해서 결빙이 발생하고 출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덤으로 기관차의 숫자도 부족하고 개궤한 철도의 길이도 모자라서 표준궤와 광궤가 만나는 환승역에서 대규모 교통체증 및 혼란이 발생하여 독일군의 보급에도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독일군은 히틀러가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모스크바에 병력을 올인하지 않고 [[키이우|키예프]], 레닌그라드에 병력을 분산하여 투입하였다. 나름대로 이상적인 판단을 한 것이지만, 나폴레옹 시절의 모스크바 일대와는 달리 당시 모스크바는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가는 중심 도시라 점령당하는 순간 유라시아 일대는 철도망이 한순간에 마비돼버리는 효과가 있었기에 전략적인 판단 착오였다. 처음부터 모스크바에 집중했다면 프랑스 침공시기처럼 운이 크게 작용하지만 단기전으로 마무리될 가능성도 있던 것이다. 점령지 주민들은 소련의 탄압을 받던 비러시아계 민족들이 많아 처음에는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이하기도 하였다.[* 동유럽 나치들 어쩌고 저쩌고 하는 뉴스가 나오면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 편을 들어 싸웠던 사람들, 특히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주민들의 이야기가 꼭 나온다. [[볼셰비키]] 군대에 대항한 독립 투사들로 평가받기도 하고, 인종청소(유대인) 독일 [[파시스트]]들의 앞잡이로 평가받기도 한다.] 처음 점령지에 진주한 독일 전투 부대 중에는 점령지 주민들과 사이가 괜찮은 부대도 존재했으나, 기본적으로 나치의 인종차별 사상에 찌든 이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점령지 주민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 것에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전투 부대가 떠나고 [[아인자츠그루펜]] 등 인종 말살 부대가 진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독일이 점령한 벨라루스]]에서는 독일의 만행으로 '''시체로 이루어진 지층이 형성될 정도였으며''', 적어도 1천만이 넘는 소련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수많은 소련의 대도시들도 독일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었다. == 편제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바르바로사 작전/편제)] == 결과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AAline.pn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목표였던 [[A-A선|{{{#fff A-A선}}}]]과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획득하기로 계획된 영토.[br]붉은 선은 실제로 독일 국방군이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차지한 영토다. || > 우리가 소련을 과소 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파하면 순식간에 12개 사단을 만든다. >---- > [[프란츠 할더]], 독일 육군참모총장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소련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A-A선|전략적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 나치 독일 === 러시아의 영토는 독일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광활했다. 당시 나치 독일이 구상한 [[레벤스라움]]에서 절반 이상이 소련의 유럽쪽 영토일 정도였다. 따라서 나치 독일군은 현재 점령한 곳보다 더 많은 땅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독일은 최초의 공세 때 소련군 주력이 소련 서부의 공업지대 방어에 매달려 후퇴하지 못하니 그것을 물리적으로 섬멸하면 소련은 무너져 내리리라고 예상했다. 이제까지 나치 독일이 수행한 전쟁은 [[프랑스 침공]]처럼 적국의 국토와 병력을 완전히 소모시키지 않아도 적국이 항복하는 결과가 나왔기에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예상이었으나 해당 예상은 전제조건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소련군은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고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다.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소련군 장병들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으며 이는 지속적으로 독일군에 인명피해를 강요했고 1941년 12월 5일 기준으로 8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으며 여기에는 22,000명에 달하는 장교들이 포함된다. 게다가 이는 지원부대를 제외한 전투부대에서 난 피해인지라 더욱 뼈아픈 손실이었다. 1940년 시점에서 120개 사단 수준이었던 독일군이 소련침공을 위해 180개 사단으로 팽창하면서 이전에도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심각한 손실이었다. 이 시점에서도 소련은 소모, 섬멸은커녕 계속해서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기에 독일군은 한 번의 결정적인 공격으로 소련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태풍 작전]]을 실시해 모스크바로 진격했지만 소련의 계절에서 그나마 상황이 좋은 여름이 끝나자 소련 특유의 혹독한 자연 환경이 시작되었다. 당장 러시아에 가을이 오자마자 [[라스푸티차]] 시즌이 시작되어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이 온통 뻘밭으로 변해 전차든 말이든 병사든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데 귀중한 2주를 낭비했고, 겨울이 되자 진흙탕이 얼어붙어 다시 기동이 가능해졌지만 얼마 못 가 이번에는 독일군이 예상했던 수치를 훨씬 뛰어넘는 역대급 겨울 폭풍으로 인해 동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전차와 무기는 얼어붙어 작동 불량이 속출했으며, 여기에 더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련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막대한 수량의 기갑 장비들을 버리고 긴급히 수십km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과 독일 장병들의 필사적인 분투, 소련군의 미숙한 군사운용에 의해 1941년 12월 17일에 소련의 공세가 사그라들면서 겨우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그 순간부터 독일군의 보급 체계, 진격의 통제, 포위섬멸과 돌파의 밸런스는 총체적으로 무너져 있었다. 단지 독일군의 기습 효과와 수적 우세[* 일반적인 착각과 달리 바르바로사 개전 직후부터는 '''소련군보다 독일군이 더 많았다.'''], 소련군의 대숙청 및 군구제 긴급도입으로 인한 지휘체계 무질서에 따라 소련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며, 소련군이 퇴각하면서 질서를 잡기 시작하자 독일군의 내적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체급이 기존의 열강들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국가였던 소련을 다른 열강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은 그 자체가 결함이었다. 독일군은 기존의 전략이었던 "기동하여 돌파하고 포위해서 섬멸하기"의 교리를 일체 바꾸지 않고 있었고, 이것은 동급의 국가가 아닌 압도적인 국토와 물자를 가진 적에게 시도하기에 부적절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당시 나치 독일의 체급은 소련과 유사하였다고 평가받으나, [[지도자원리]] 및 나치즘 특유의 인종차별주의로 인해 실질적인 생산 관리나 점령지 관리에서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의 행보로 인하여 그 역량에 비하여 한참 낮은 수준의 효율을 보였다. 덤으로 1차대전 당시에 고생을 한 독일 국민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각종 기호품과 생필품을 보급하면서 총력전 전환도 늦어져서 비효율성이 더 증가한 결과 독소전쟁 당시 독일이 소련의 주요 시설들을 재빠르게 점령하였음에도 도리어 소련에 비해 역량이 감소한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다. 독일군은 초창기에는 이와 같은 자신의 결함을 알지 못했고 모든 전선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와 자기 전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들의 임무와 (자기가 생각하는) 전략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최고 사령부에게 다른 부대와 지휘관을 유기하는 상황을 요구했으며 이것은 장성 간의 반목으로도 번졌다. 독일군 장성들이 입을 모아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던 북아프리카 전역은 그 붕괴와 동시에 유럽 추축국의 2인자였던 이탈리아를 패망으로 몰아넣었고, 중부집단군 장성들은 키예프에 대한 진군과 지원에 대해서 '''그 자신'''들의 포위섬멸을 막기 위한 히틀러의 선택이었음에도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랜다|이것 때문에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했다고 발광했다.]] 이후로도 독일군의 상황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독일군은 인종주의를 철석같이 믿어 점령지 주민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펼쳤고 동부전선에서 계속 게릴라에 시달리게 된다. 애초에 점령지중 많은 지역들은 소련 치하에서 고통받기도 했던 지역들이었다. 그러니 적절한 대민작전으로 현지 주민들의 환영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날려버린 셈. 그나마 나았던 곳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였는데, 이 나라들은 인종이 완전히 슬라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증상은 점점 심화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더욱 치열해지면서 전투 부대에서도 인종청소부대들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광기를 드러냈다. 나중에 패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는 소련군의 가혹한 부역자 색출과 보복까지 더해져 동부전선 기간 동안 동유럽은 생지옥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점령지에서도 게릴라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은 가용한 보급품 및 장비 상당량을 소모해버렸고 이로 인해 전쟁의 결말은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독일군이 남은 것들을 긁어모아 공세를 펼쳐도 바르바로사 작전에 비해 축소된 규모일 것만은 확실했다. 이러한 상황반전 속에서 독일군의 일부는 이미 독일이 패전할 것을 예감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수는 이 전쟁이 뼈를 깎는 장기전으로 변할 것임을 예상했다. 더군나나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의 산업역량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소련은 독소전쟁 개전 이틀 뒤 전시시설 대피 계획을 짜고 1941년 6월 30일 국가전쟁위원회를 만들어 스탈린이 위원장을 맡아 군수공장 이전 명령을 내렸다.[[https://en.m.wikipedia.org/wiki/Evacuation_in_the_Soviet_Union|#]] 독일군 폭격 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랄산맥]] 동쪽으로의 군수공장 이전은 광범위하고 빠르게 이뤄졌다. 11월까지 이전된 대형 군수공장만 1,503개. 연 923,000량의 화차와 수많은 우마차가 나치 공군의 주간공습을 피해 밤새워 모스크바 동쪽으로 설비를 실어날랐으며, 1941년 하반기 우랄 전시산업의 전차 생산량은 4,177량이었지만, 1942년 상반기에는 11,021량으로 배 이상 늘었다. 1942년 중반 이후 소련은 모스크바 근교의 산업생산력 회복과 더불어 주요 병기의 수량에서 독일을 추월하였으며, 이후 성능 면에서도 독일과 거의 대등하게 성장하였다. 1944년 소련은 전차 및 자주포, 각종 야포, 개인화기 생산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여 연합군의 최종적인 승리에 기여를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미국이 소련에 천문학적인 규모로 지원한 [[무기대여법|원조 물자]]가 소련의 보급을 책임졌으며 개전 초기 삭제당한 소련의 공군을 사실상 제로 상황에서 처음부터 건설해주다시피 했기 때문에 소련이 전차 및 자주포, 각종 야포, 개인화기 생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크지만 말이다. 소련의 가혹한 추위와 [[라스푸티차]]로 인해 수많은 독일군과 장비들이 손실되었으며 독일군 야전부대들도 더 이상 전투를 치를 수 없게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40만 명의 인명 피해라는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래서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미처 병력 재편도 끝내지 않고 무리하게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했다. 그래서 1942년 1월, 독일군의 돌출부 르제프에 [[게오르기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가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이것이 바로 [[르제프 전투]]다. 그러나 [[발터 모델]]이 소련군의 번개 같은 공세를 모조리 패퇴시켜버렸고 소련군 야전부대들은 수십만의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한 채 패퇴해야 했다. 르제프 전투는 지금도 소련군의 수치로 기억되고 있다. 독일이 해상작전을 등한시한 것 역시 패착의 원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선 해상 봉쇄가 제대로 되기는커녕 이미 폭격을 제대로 맞아서 대파된 후 침몰하다가 착저한 [[마라(전함)|전함 마라]]를 소련군이 간신히 물 위에 부유하도록 수리한 후 해안포대처럼 항구에 정박하여 계속 저항해도 막지 못해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흑해에서도 소련이 착실히 처발리고 있었지만 제해권을 소련으로부터 빼앗지 못해 기어코 캅카스 유전지대를 탈취하는 데 실패했고 덕분에 소련 내 석유 고갈 사태를 피하게 돼 소련군이 열심히 탱크를 굴릴 자원이 마련되었다. 추후 무시무시한 기갑 웨이브를 생각해 보면 명백한 실수. 심지어 북극해에는 제대로 된 함대를 보내지도 못해 무르만스크로 들어오는 [[렌드리스]] 물자를 수수방관하게 되었고 말이다. 물론 [[독일 해군(나치 독일)|나치 독일 해군]]은 [[U보트]]를 제외한 해군력이 워낙 답이 없을 정도로 약했던 것은 생각해줄 필요가있긴 하다.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전 당시 구식 드레드노트급 전함이긴 하지만 [[강구트급 전함]] 3척을 보유하고 수리불가능한 1척은 부유포대로 보유했는데, 독일은 침몰 전함을 제외하면 3척뿐으로 그나마 [[그나이제나우]]는 어뢰를 맞았고 [[샤른호르스트(전함)|샤른호르스트]]는 기관에 문제가 생겨 수리 중이라 가동 가능한 전함은 [[티르피츠]]뿐이었다. 이것만 가지고는 해안포와 요새의 보호를 받는 [[크론슈타트]]를 박살내고 [[발트함대]]를 격멸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티르피츠라도 좀 적극적으로 썼다면 모를까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하라는 해상포격은 안 하고 다른 해역에서 훈련에 투입해놓는 바람에 독일의 해상 장악력이 더 약화되었다. 흑해는 독일과 직접 닿는 바다조차 아니라서 다뉴브강 같은 하천을 통해 U보트와 어뢰정 몇 척 정도만 보내고 말았고 루마니아, 불가리아 역시 해군은 없는 것이랑 마찬가지라, 소련은 가장 위급했던 상황에서도 흑해의 제해권을 착실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독일 측의 바람으론 바르바로사 작전에 일본도 참전했어야 했다. 당장 소련군은 품질 좋은 보급품을 독일 쪽 전선으로 보내기 바빴기에 독일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딱히 소련군에게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 그저 숙청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유능한 지휘관의 발만 묶어두기만 해도 족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소련은 공격 안 하고 [[미국]]에 [[진주만 공습]]을 하여 태평양 전쟁을 개전했고 독일이 망하는 데에 지대한 원인을 제공했다. 소련은 일본이 대소련전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극동의 소련군 정예부대 다수를 모스크바에 재배치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독일만의 입장이고 일본 측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일본은 [[할힌골 전투]] 이후 소련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게 된 데다가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만으로도 이미 경악하여 내각이 총사퇴할 정도로 당혹감을 느꼈었고, 향후 소련과의 충돌이 벌어져도 독일이 전혀 돕지 않아 국제 왕따가 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 2달 전에 일본 역시 소련에 접근하여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런데 기껏 독일 따라 불가침조약을 맺었더니 그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총공격하니 일본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상황이었다. 전력 면에서도 중일전쟁에 일본 육군도 이미 수 년째 갈려들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돌발행동을 한 독일을 도와줄 여력도 부족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이 [[진주만 공습|돌발행동]]을 선사해 버렸다. 이런 요인들이 겹쳤기 때문에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전술적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략적 목표는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장기전과 소모전의 늪에 빠지게 된다. === 소련 === 독일이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소련이 받은 피해는 엄청났다.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결국 승리했기 때문에 크게 거론하지 않는 것 뿐이지 소련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입은 피해는 어지간한 국가 수준에서는 그야말로 단숨에 나라가 망하는 수준의 대타격이었고 거대한 국력을 가진 소련의 입장에서도 치명타였으며 이후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직접적인 피해만 따져봐도 매우 심각하다. 49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로 모스크바 서쪽에 배치되어 있던 사단의 거의 전부가 증발했다. 소련의 절반을 먹여살리던 우크라이나와 막대한 가치를 지닌 돈바스 공업 지대의 상실은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에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거대한 패배만으로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저지한 소련군은 가능한 모든 예비 병력을 끌어모으며 저항하여 도리어 독일군에 반격을 가해서 모스크바 함락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무리 소련이라고 해도 개전과 동시에 잃어버린 정예병력을 복구할 수는 없어서 말 그대로 훈련병보다도 못한 신병을 치열한 전투에 마구잡이로 투입해서 실전에서 전투경험을 쌓게 만드는 말 그대로 인력을 믹서기로 갈아버리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이미 독일군이 점령한 서부 영토에 있던 인구를 상실해서 개전 직전의 소련의 전체 인구중 25%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병력이 대규모로 갈려나가니 소련의 인적자원에 심각한 타격이 오게 된다. 위에서 당시 소련군의 심각한 상태를 열거하긴 했으나 개전 직전까지 소련이 서부 국경에 집중시켜놓은 병력들은 최소한 군인 복무가 가능한 최전성기의 신체를 보유하고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했으며 철모와 제식 소총을 비롯한 장비를 충실하게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전차 승무원이나 운전병이나 포병같은 병과는 [[주특기훈련]]까지 수료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런 고급병력들에게 제대로 된 지휘관을 붙이고 실전경험을 쌓게 하면 충분히 유용한 정예병력으로 활용가능한데 개전 초반에 모조리 상실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는 극동 방면에서 일본군을 경계하던 병력까지 끌어모아서 투입해야 했으며 이런 병력들도 1942년 초의 반격작전과 그 이후의 작전에서 소모되자 그 다음부터는 말 그대로 마구잡이로 징병한 병력을 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않은 채 치열한 전투에 바로 집어넣는 방식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다. 당연하게도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1944년의 [[바그라티온 작전]]시기쯤 가면 편제만 9,000명이지 실제 병력은 2,000명 정도면 사단이라고 부르는 지경에 처했으며 일선 병력의 증강을 위해서 영토를 탈환한 지역에서 무차별적인 징집을 감행하고 행정병, 보급병 같은 비전투병과의 인원까지 모조리 소총수로 투입해버리는 극약처방까지 썼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과의 교전시 교환비가 독일군 1명이 전사할 때 소련군이 4명이 전사하는 것처럼 매우 불리하게 나타나는 것이 나치 독일의 최후의 전투인 [[베를린 공방전]]까지 유지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에 군복무가 가능한 청장년 남성 인구가 너무 많이 죽는 바람에 소련의 인구 구조가 파탄상태가 되었으므로 전후에도 포로까지 강제노동시켜서 다시 산업력을 복구해야 했고 다산을 크게 장려하고 팔 1개가 없는 장애인도 결혼이 가능할 수준으로 여성이 넘쳤으나 소련이 인구구조를 복구하는 것은 1980년대에서 들어와서야 간신히 가능해졌다. 이런 문제로 인해 핵무기를 개발 및 대량보유한 소련이 냉전 시기에도 적극적인 충돌을 꺼렸던 것도 인구구조의 문제점과 함께 독소전쟁의 대타격을 소련의 국민들이 모두 절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기와 탄약 및 각종 장비의 상실량도 엄청났다.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후에 섬멸되는 식으로 패배하는 일이 연속되므로 전선에 배치된 보병장비와 전차는 기본으로 날려먹으며, 보통의 경우라면 후방으로 후퇴시킬 수 있던 중야포를 비롯한 지원화기까지 모조리 상실한 것이다. 소련이 이후에 무기 생산에 집중하고 신형 전차를 개발해서 대량생산했기에 가려졌지만 중야포같은 대형지원화기들은 상실량 보충에 급급해서 신형 화기 개발이 지연되었으며 전후에나 제대로 된 개발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독일군에게 노획된 무기, 탄약, 장비가 너무 많아서 일반적인 [[노획]]과는 달리 자국의 제식무기로 채용해서 상당기간 운용해도 지장이 없을 수준이었다. 일례로 [[120mm M1938 박격포]]는 노획품이 너무 유용해서 나치 독일에서도 12cm 그라나트베르퍼 42를 개발하게 만드는 바람에 [[120mm 박격포]] 계열 화포의 표준화를 이룩할 정도로 많이 노획되었다. 그리고 소련의 구식 무기들은 독일군의 2선급 부대나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추축국용 장비로 대량보급되었으며 소련군 무기용 탄약도 추축국에서 생산 및 보급될 정도로 큰 몫을 차지했다. 그리고 식량 생산지인 곡창지대와 주요 광산을 빼앗기고 우랄산맥 근처나 너머로 멀리 피난보낸 산업시설은 아직 정상적인 가동이 덜 이루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피난 보낸 산업시설의 대부분이 무기나 장비를 만드는 중공업이라는 소련의 상황은 식량 부족과 경공업의 미약함으로 인해 바르바로사 작전의 타격으로 잃어버린 무기와 장비를 보충하기에도 어렵고 장기전시에도 식량부족으로 고난을 겪을 처참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소련이 군수공장들을 빠르게 후방으로 이동시킨 성공사례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지만 피난이 불가능하거나 피난하지 못한 시설도 많아서 종합적으로 따지자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은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력의 75%, 식량 생산량의 50% 이상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나치 독일과 소련라는 두 국가간에만 교전이 이어졌다면 소련이 승리는 가능했을 것이나 나치 독일군을 원래 영토까지 밀어내는 것이 최상급의 결과이며 보통은 다 밀어내지도 못하고 소련 영토의 일부가 점유된 상태에서 협상으로 종전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은 미국을 선두로 한 서방연합국의 존재였다. 독소전쟁 개전으로 영국과 소련이 동맹국이 되면서 다급한 소련의 상황을 감안하여 영국이 자신이 쓰기에도 모자란 전차를 비롯한 물자를 긴급지원 형식으로 소련에게 전달하여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도움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하였다. 히틀러는 12월 11일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알아서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12월 5일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독일 육군은 이 결정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실수가 소련을 극한의 상황에서 소생시켰다. 애초에 소련은 중공업을 간신히 키워내어 어떻게든 군사 장비들을 생산하고 드넓은 국토에서 징집한 수많은 인구를 모아 독일군을 막아낼 군대를 만들었지만 군대를 유지시키고 사기를 올릴 수 있으며 전세를 역전시킬 목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과 탄탄한 경공업에서 나오는 기본적 보급품은 매우 부족했다. 미국의 참전은 [[렌드리스]]로 일컬어지는 물자 보급으로 소련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 주었고 특히 소련 공군을 무에서 유로 다시 건설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소련이 독일을 막아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반격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소련은 무기 생산에 공업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대규모의 소련군을 제대로 무장시킬 수 있게 됨으로서 나치 독일을 결정적으로 파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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