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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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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국방군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536349><tablebordercolor=#536349><width=51.8%><nopad> [[파일:4422412121.jpg|width=100%]] ||<nopad> [[파일:zxczxc.jpg|width=100%]] || || [[소련]]을 침공하는 [[독일 육군(나치 독일)|나치 독일 육군]] ||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초토화된 [[소련]]의 마을 || 독일군 주요 지휘관들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등은 후일 회고록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양면전쟁]]의 참혹한 기억 때문에 이 침공에 회의적이었다는 식으로 증언한다. 그런데 이건 전후에 그들이 패전의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덮어 씌우기 위해 한 증언들 중 하나에 불과한 얘기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하여 실의에 빠졌던 독일 군부는 히틀러의 이 결정에 열광했고, 심지어 독일군 정보부는 "12주의 전역으로 소련을 완패시킬 수 있다"라고 보고하며 이 결정을 확신시켰다. 허나 당시 독일의 정보능력은 소련에 완전히 밀리고 있었는데 주소 대사 역시 "소련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어찌할 수가 없다"할 정도였다. 독일이 자신이 가진 정보에서 50%를 뻥튀기했는데도 "220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완전히 무너진다"라고 보고했으나, 소련군은 1941년에만 400개가 넘는 사단을 동원했다. 예상을 과대하게 했더라도 평소의 독일군의 이미지라면 작전계획이라도 현실성있게 짜놓아야 하지만 작전계획조차 비현실성이 넘쳤는데, 최초에는 "12주의 전역으로 소련을 패배시킨다"였던 것이 보급 문제가 불거지자 그것을 해결하니 "10주에 끝낼 수 있다"라고 줄였다. 또한 [[핀스크]] 습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있는 대습지로, [[프리피야트]] 시 북서쪽 벨라루스 영토지역과 남서쪽 우크라이나 영토지역에 걸쳐 영국 전체나 한반도 전체 크기보다 큰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엄청난 규모인 269,400㎢의 습지이다.]가 당시의 추축국과 소련 국경 사이에 거대하게 펼쳐진 관계로 인해 침공군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돌파가 힘들다는 문제에 대해 "8주에 가능하다"고 수정하는 등 작전 계획에 어떠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지엽적으로 해결하면서 근거도 없는 자신감만 넘쳤다. 이 문제는 7월 중순 프란츠 할더의 "14일에 이길 수 있다는 예상이 현실이 되어 간다." 라고 쓴 것을 '''겨우 한 달 후'''에 "우린 현재 350개 사단을 확인했다. 그들의 무장은 빈약하나 그들은 존재한다. 우리가 4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그 자리에 4개 사단을 투입한다."라는 일기에서 화룡점정을 이룬다. 작전 목표를 둘러싸고 독일군 수뇌부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할더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정치적 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인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히틀러는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와 [[석유]]가 풍부한 [[캅카스]] 지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위에서도 적혀 있지만 히틀러에겐 소련 침공은 식량과 자원확보가 가장 큰 이유였고 정치적 문제는 그 다음 순위였다. 결국 군부와 히틀러는 타협하여 침공군을 북부, 중부, 남부 [[집단군]] 세 갈래로 구성하기로 했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키이우|키예프]]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구성되었다. 작전의 목표는 A-A선이라고 불리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을 잇는 선, 이른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Arkhangelsk-Astrakhan line)"이었다. 독일군과 함께 [[루마니아군]], [[헝가리군]], [[이탈리아군]], [[핀란드군]]이 참전하기로 하면서 총 병력은 390만 명, 4,600여대의 전차, 4,389여대의 항공기, 46,000여문의 각종 화포가 동원되었다. 독일군의 주요 전법은 'Keil und Kessel'(카일 운트 케셀)[* 독일어로 카일은 쐐기, 케셀은 솥이라는 의미. 즉 쐐기와 솥]이라고 불리는 양익 포위였다. 소련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일단 소련군의 주력을 패퇴시키더라도 후방으로 소련군이 도주하면 섬멸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동원 가능한 병력이 많은 소련군이 시간이 갈수록 유리해지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보병]]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가해 정면의 적을 붙잡아둔 후, 기갑 부대가 양익을 돌파하여 적의 주력을 포위하는 전법이었다. 해당 전법은 바르바로사 작전 중반까지 제대로 먹혀들어가면서 소련군은 대규모의 병력 손실과 장비 손실을 동시에 겪는다. 아무리 기습적인 개전이었다고 해도 소련군의 전력 손실이 매우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을 포위했다고 해서 소련군이 바둑돌처럼 바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포위망 내부의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서 상당한 화력과 병력을 투입해야 했으며 희생도 나오게 된다. 그리고 포위당한 소련군이 빠르게 소멸하지 않으면서 포위망을 구성하는 병력이 빠져나간 독일군이 후속하는 소련군을 다시 포위할 병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히틀러는 [[정치장교]]는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체포하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알려지자 병사들의 독전 임무를 맡은 소련군 정치장교를 자극하여 오히려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포위당한 소련군이 전황을 뒤집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서도 최후까지 싸우는 경우가 자주 발생해서 안그래도 바쁜 독일군의 발목을 자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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