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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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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36년 설립]][[분류:1940년 해체]][[분류:당군]][[분류:중국공산당의 역사]][[분류:한국의 독립운동 단체]] ||<-7><tablebordercolor=#CC0000><tablewidth=450><tablebgcolor=#fff,#222><tablealign=right><colbgcolor=#CC0000><colcolor=#fff> '''{{{+1 동북항일연군}}}[br]東北抗日聯軍[br]Northeast Counter-Japanese United Army''' || ||<-7><height=40><bgcolor=#fff><nopad> [[파일:동북항일연군기.png|width=100%]] || ||<width=30%> '''창설일''' ||<-6>[[1936년]] || || '''해체일''' ||<-6>[[1940년]] ,,(사실상),, || || '''소속''' ||<-6>[include(틀:중국공산당)] || || '''규모''' ||<-6>1,850명 (1938년)[*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0_0040_0020_0030_0020|출처]]] || || '''사령''' ||<-6>불명 || || '''참전''' ||<-6>[[보천보 전투]]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동북항일연군 사진.jpg|width=100%]] || [[중국공산당]]이 [[만주|동북 방면]]에서 운영하던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항일 게릴라 부대. [[화북]] 방면에서 운용되던 [[팔로군]]과는 친척관계이다. == 역사 == [[1933년]]에 결성된 동북인민혁명군을 모태로 한다. 1935년 8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8.1 선언을 통해 모든 민족, 모든 계층의 항일연합군 창설을 결의하였다. 그 결의에 따라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과 다른 항일조직들이 모여서 3로군 11군에 달하는 ‘동북인민항일연군’을 조직하였다. 시작은 공산당계열, 국민당계열, [[토비]](土匪) 등의 연합이었지만,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선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있게 된다. 1936년 3월부터 11군 체제로 편재되었고, 제1·2군은 남만주, 제4·5·7·8·10군은 동만주, 제3·6·9·11군은 북만주를 활동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1군과 2군은 1936년 7월 통합되어 [[양징위]]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제1로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때 2군 1·2·3사는 각각 4·5·6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대부분의 항일무장투쟁 전사들은 만주 벌판에서 싸우다 일제토벌대의 전투기 기총소사에 희생된데 반하여 김일성은 백두산 밀림에 배치되어 숨어서 지냈다. 그러다 1937년에는 [[보천보 전투]]로 유명세를 떨쳤다.] === 소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제88독립보병여단)] [[팔로군]]과는 다르게 [[1940년]]을 전후로 [[관동군]]의 치안숙정공작으로 사실상 소멸되고 만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동북지방이 매우 추운 지역이라 생존환경이 열악했고, [[일본]]의 통치기간이 길어서 통제가 엄격했고, [[일본군]]이 집요하게 항일연군과 농민들의 사이를 분리시켰고, 1930년대 후반 [[일본]]과 [[소련]]과의 분쟁([[1938년]]의 [[장고봉 사건]], [[1939년]]의 [[노몬한 사건]])으로 관동군의 치안이 강화되고 병력이 증강된 것 등의 여러 원인들에 의해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윤휘탁, 「항전시기의 화북과 동북, 항일전술과 투쟁환경의 비교고찰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의 상이한 운명과 관련하여-」(2003)] 항일연군 1~3로군의 지도부와 잔여 병력들의 상당수는 1940년까지 [[소련]] 영내로 피신하여 소련 공산당 NKVD 휘하의 제 88국제여단으로 편입되었는데, 여단내 조선인 대대의 대대장을 맡던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여단장은 [[저우바오중]]으로, 대체로 동북항일연군 때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 편제 == [[파일:중국 공산당 문장.svg|width=22]] 동북항일연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387|#]] * '''제1로군''' {{{-2 (활동지역: 남만주 / 총사령관: --[[양징위]]--†)}}} * 제1군 * 제2군[* 군장: --[[왕더타이]]--†] * '''제2로군''' {{{-2 (활동지역: 동만주 / 총사령관: [[저우바오중]])}}} * 제4군 * 제5군 * 제7군 * 제8군 * 제10군 * '''제3로군''' {{{-2 (활동지역: 북만주 / 총사령관: [[리자오린]])}}} * 제3군 * 제6군 * 제9군 * 제11군 대부분은 중국인들이었다. 다만 제1로군에는 [[김일성]](金日成) · [[서철]](徐哲) · [[최현(북한)|최현]](崔賢) · [[오백룡]](吳白龍) · [[림춘추|임춘추]](林春秋) · [[안길]](安吉) 등이 있었고, 제2로군에는 [[최용건]](崔庸健)이 속하였으며, 제3로군에는 [[허형식]](許亨植)이 활동하였다. [[김책]](金策)은 중국공산당 북만성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남한의 경우, 한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부분이라 김일성을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수많은 하위급 장교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활약상도 그다지 비중있게 다룰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다. 다만 북중관계에 있어서는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 대표적인 출신 인물 == * [[강건(북한)|강건]] (제5군) * [[김일성]] (제2군)[* 직책: 제1로군 제2군 6사 사장][* 6사의 병력규모는 약 150 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병력의 대다수가 한인들이었으며, 정치장교와 참모들은 중국인이었다.] * [[김광협]] (제2군) * [[김책]] (제3군) * [[리자오린]](이조린) - 제3로군 총사령관 * [[이학복]] * [[이홍광]] * [[안길]] * [[양징위]](양정우) - 제1로군 총사령관 * [[왕옥환]] (제5군 부녀단 단장) * [[장웨이화]] * [[저우바오중]](주보중) - 제2로군 총사령관 * [[최용건]] (제7군) * [[최현(북한)|최현]] (제2군) === [[허형식]] ===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관. 1942년까지의 행적만 보면 네임드급 무장[[독립운동가]]로,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바로 허형식이다. [[김일성]], [[김책]], [[최용건]], [[최현]] 같은 동북항일연군 전우들이 [[북한]]정권을 수립한 것과 달리, 허형식은 이들이 소련으로 피신한 이후에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2년 8월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휘하에 있던 동북항일연군을 이끌며 전사했기에, 북한정권 수립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훈장수여는커녕 1980년까지 [[대한민국]]에 정착한 후손들이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허형식이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고, 무장항일투쟁 당시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그가 속한 동북항일연군 다수가 북한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 [[참여정부]]가 들어서며 기류가 바뀌는데, 참여정부는 2005년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도 북한정권 수립과 [[6.25 전쟁|한국 전쟁]] 참전과 관련이 없다면 건국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훈장서훈 법안을 개정하면서 허형식 역시 훈장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실제로 [[여운형]]ㆍ[[주세죽]]ㆍ[[김산]]ㆍ[[손용우]] 같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심지어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권]]과 외삼촌인 [[강진석]] 등이 건국훈장을 받았고, 허형식의 아버지인 허필 역시 2010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허형식 본인은 2019년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대구보훈지청에 서훈 대상자로 신청하여, 2021년 현재 서훈신청 대상자로 접수되어 [[국가보훈처]]의 심사를 받고있다. === 팔녀투강([[八]][[女]][[投]][[江]]) === [[1938년]] [[10월 20일]]에 [[일본군]]과 전투 끝에 [[목단강]]에 투신하여 자결한 여성 열사 8명이다. 일본군에게 잡혀서 치욕적인 포로가 되느니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항일 게릴라들이다. 지금도 [[중국]] 현지에서 항일투쟁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현지 학자들 중에는, 팔녀투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동북항일연군 제5군 1사단 소속으로 8명 전원이 [[헤이룽장성]] 출신이다. 이름은 다음과 같다. * [[안순복]]([[安]][[順]][[福]], 안쑨푸): 1915년생(향년 23세). 피복공장장. 조선인. [[무단장시]](목단강시) 목릉진(穆棱镇) 신안둔(新安屯) 출신. [[중국공산당]]원. 항일투쟁 초기에는 장복순(张福顺, 장푸순)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안씨 집안은 가난한 농민이었지만 가족 모두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그 영향으로 안순복도 어려서부터 항일 소년단원으로 활동했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일본군에 희생된 후 안순복은 남편 박덕산([[朴]][[德]][[山]], 퍄오더샨)을 따라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으나, 남편도 1935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유복녀]]를 낳은 후 안순복은 다시 동북항일연군으로 활동하다가, 1938년 10월 20일 아래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전사한다. 당시 여성 대원들 중에는 안순복 외에도 아이 엄마들이 있었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 어려워 [[흑룡강성]] [[미산시|밀산현]]의 어느 농가에 모두 맡겼는데, 이 아이들도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한편 사촌언니 안순화(安順花)[* [[리봉수]]의 아내]도 항일운동을 하다가 희생되었다. * [[랭운]]([[冷]][[雲]], 렁윈): 1915년생(향년 23세). 대대지도원 겸 분대장. 가목사시([[자무쓰시]]) [[화촨현]] 열래진(悦来镇) 출신. 본명은 정지민([[鄭]][[志]][[民]], 정즈밍)이고, 입대 직전에는 정향지(鄭香芝, 정샹즈)라는 가명을 썼다. 화촨현립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37년 동북항일연군 제5군에서 근무하다가 1938년 부녀단 지도원으로 임명됐다. 그후 같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인 남편 주유인([[周]][[維]][[仁]], 저우웨이런)과 결혼하여 슬하에 1녀를 두었지만, 1938년에 남편은 전사했고 슬하의 외동딸도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여담으로 8명의 열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실제 [[사진]]이 존재하며, 나머지 7명은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스케치로 남아있다. * 이봉선([[李]][[鳳]][[善]], 리펑샨): 1918년생(향년 20세). 보급병. 조선인. [[무단장시]] 린커우현 용조진(龙爪镇) 출신. 17세 때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하여 선전ㆍ정찰 활동을 했고, 일본군 250명을 사살한 ‘흑할자요 저격전’에도 전투병으로 참전했다. * 호수지([[胡]][[秀]][[芝]], 후슈즈): 1918년생(향년 20세). 기관총 사수, 1분대 반장. 무단장시 린커우현 조령진(刁翎镇) 마제촌(马蹄村) 출신. [[중국공산당]]원. 동북항일연군 제5군 부녀단 반장으로 18세에 입대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었다. * 황계청([[黃]][[桂]][[淸]], 황구이칭): 1918년생(향년 20세). 의무사관. 무단장시 린커우현 조령진 남위자하(南围子河)[* 현재는 하심둔(河心屯)으로 개칭되었다.] 출신. 황씨 집안은 일제의 수탈에 맞서고 저항하는 항연보루호(抗联堡垒户)로 명망이 높았고, 그 영향으로 황계청도 어릴 적부터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 양귀진([[楊]][[貴]][[珍]], 양구이전): 1920년생(향년 18세). 부분대장, 2분대 반장. [[무단장시]] 린커우현 동류수(东柳树) 하자둔(河子屯)[* 현재는 연화향(莲花乡) 동흥촌(东兴村)으로 개칭되었다.] 출신. 중국공산당원. 어린 나이에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결혼했으나 17세에 과부가 되었고, 시가에서 자신을 인신매매하려고 하자, 양귀진은 그대로 집을 떠나 도망쳐서 1936년 1월 동북항일연군 제5군에 입대했다. 부녀단 전사, 항련밀영 피복공장에서 일하다가 1937년 가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38년에는 5군 1사단의 서정에 따라 반장을 맡았다. 부친인 양징춘(杨景春)은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딸의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1963년 10월에야 자신의 딸이 팔녀투강의 영웅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 곽계금([[郭]]桂[[琴]], 궈구이친): 1922년생(향년 16세). 소총병. 어릴 적 이름은 곽국화(郭菊花, 궈쥐화)였다가 입대 후에 개명했다. 칠태하시([[치타이허시]]) [[보리현]]에서 태어나 무단장시 린커우현 조령진 사함촌(四合村) 사합둔에서 성장했다. 1937년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하였고, 제5군 교도단 분대장 풍문래(冯文礼, 펑원리)와 약혼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순국했다. 풍문래는 이후 무려 60여년이 지난 1993년이 되어서야 곽계금의 사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왕혜민([[王]][[惠]]民, 왕후이민): 1925년생(향년 13세). 척후 안내원. 12세 때 동북항일연군 제5군의 군부부관인 아버지 왕희문(王[[希]][[文]], 왕시원)을 따라서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으나 얼마 후에 아버지는 전사했다. 투신 당시에 불과 13세라는 어린 나이로, 8명 중에서 최연소자. 동북항일연군 제5군 1사단에는 30명의 여성대원들이 있었다. 1938년 10월 20일 [[일본]] [[관동군]] 약 1,000명에 의해 수많은 동료들이 포위되자, 여성대원들 중에서 10명이 나서서 적들을 유인하며 교란하여 동료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성공적으로 포위를 뚫었다. 그러나 미처 자신들은 빠져나가지 못했고, 포위되어 생포될 위기에 처했다. 그녀들은 최후까지 저항하였고, 마침내 총알이 다 떨어지자 고립무원의 위기 속에서 차가운 오사혼하([[烏]][[斯]][[渾]][[河]])[* [[목단강]]의 지류. [[만주어]]로 ‘사나운 강’, ‘흉포한 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에 뛰어들어 순국함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8인의 영웅적인 일대기는 1985년에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같은 해인 9월 7일에는 그녀들의 영웅적인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사회과학원 인근 빈강([[濱]][[江]]) [[공원]] 광장에 대규모의 [[동상]]과 기념비를 세웠으며, 초대 [[중국 총리]] [[주은래]]의 부인인 등영초([[鄧]][[潁]][[超]]) 여사가 [[비석]]에 팔녀투강([[八]][[女]][[投]][[江]]) 휘호를 썼다. (안순복과 이봉선은 [[한복]] 차림으로 조각되었고, 조선인이라고 쓰여 있다.) [[박물관]]도 건립되었으며, 2013년에는 [[중국 드라마|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 기타 == === 민생단 사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민생단 사건)] == 관련 문서 == * [[김일성]] * [[민생단 사건]] * [[보천보 전투]] * [[조선인민혁명군]] * [[제88독립보병여단]] * [[조선의용군]] * [[만주파(북한)|만주파]] * [[북중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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