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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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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 ==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간단히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과대망상]]에 가까운 혐오와 편견 탓'으로 치부하고, 또한 그렇게 치부하기를 원하나, 이는 히틀러 집권 이전부터 [[포그롬]] 등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걸핏하면 일어났던 기독교 사회의 책임을 히틀러에게만 전가하여 단순화하는 것이며,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원인과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거리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통해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학살이 가능했던 역사와 실체를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1996년에 있었던 골드하겐 논쟁처럼 독일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치의 계획에 찬동하고, 개입했다는 의견도 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이었던 골드하겐이 쓴 논문에서 경찰조직에 포함되어 있던 나치당원과 일반 독일인의 비율을 근거로 홀로코스트에서 절대로 독일 일반인이 괴리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다만 이 논쟁의 경우 골드하겐의 논문의 논리적 약점이 상당히 많기도 해서 문제가 되었으며 '파멸적인 독일인들의 반 유대주의'라는 매우 공격적인 단어를 사용했다. 덕분에 당시 독일의 좌우 언론지에서 대동단결하여 골드하겐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판과 비난을 했다. 다행(?)인 점은 당시 독일에서 신 보수주의자들이 나치와 독일을 괴리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시기였는데 이 논문으로 나치와 독일인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환기 되었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의 원인에 대한 주장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의도주의적 해석은 홀로코스트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상층부의 의도에 따라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보고, 기능주의적 해석은 기존의 반유대주의가 나치의 부추김을 받아 독일국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라고 본다. 쉽게 말해 [[계획대로]] vs. 어쩌다보니. 물론 아래에 나오듯이 현실은 저 두 가지 요인의 합작이었고 학자들 역시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쪽이 더 크냐의 논쟁일뿐이다. 우선,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나치군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솎아내는 과정에서 나치군 점령지의 사람들은 대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직접통치지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 같은 데에서는 그야말로 철저히 이루어졌지만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던 국가에서 유대인 색출에 대한 협력은 각국마다 달랐다. [[덴마크]]나 [[불가리아]]처럼 노골적으로 거부의사를 드러낸 곳도 있었으며(심지어 이들 두 나라는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적극 보호했다. 다만 불가리아의 경우에는 초기 반유대주의가 성행하여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절멸수용소로 보내기도 했다.) [[벨기에]]나 [[이탈리아]]처럼 사보타주를 벌인 곳이나 아예 유대인 단체까지 색출에 협력한 [[네덜란드]], 나치와는 별개로 현지 정부가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학살, 탄압한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곳도 있었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혐오와 불신은 뿌리깊은 것이었고 비단 [[나치 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적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독재하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표출된 것뿐으로, 유대인을 향한 혐오 자체는 유럽 내의 어느 국가든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잘 알려진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탐욕스러운 상인 [[샤일록]]을 생각해보라. 당시 히틀러를 비판하며 나오는 말이 '그가 잘한 일은 유대인 정책 밖에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히틀러의 반대자들도 그의 유대인 정책만은 찬동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거주구역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에 아주 찬성하였으며, 유대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도 그저 방관했다. 대학살은 절대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랑스럽게 광고해대지만 않았을 뿐이지 시골에서 소식도 안 듣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유대인이 싫어서, 또는 포상금이나 유대인들이 가진 재산이 탐나서 유대인들을 고발했던 것이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중세까지는 [[그리스도교]]의 영향[* [[그리스도교]]에서 신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가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논점. 여기서 유대인이란, 혈통보다는 신앙 측면에서 "예수를 못박은 세력의 가르침을 아직도 따르는" 유대교 신자를 의미했다. 즉 중세때는 유대인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냥 기독교인으로 간주했다. 이렇게 타고난 인종이나 민족보다 유대교를 믿느냐 아니냐로 판별하는 기준은 현대에도 유효하다.]이 있었고, 근대에는 만민평등사상이 널리 선포되어서 각종 제도적 차별이 철폐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짐과 동시에 국민국가의 등장, 산업화에 의한 사회변화가 맞물려서 반유대주의가 인종주의적이고 강경한 형태로 부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종교와 맞물린 형태라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근대적인 형태, [[폴란드]], [[러시아]]의 포그롬은 양자가 복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반유대 감정의 유구한 전통에 대한 어록이 있다. > 처음에 중세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 '너희들이 유대교 신자인 이상,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 > 그 다음에, 세속 세계 지도자들은 선언했다. >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 >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 >---- >라울 힐베르크 또, 나치가 행한 잔혹행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는 많다. 위의 '경과'에 언급된 치안유지군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치안유지군은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지만 치안유지군의 구성원들은 열성적인 나치 추총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는 평범한 소시민 출신이었다.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나치라서, 혹은 대상이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학살수용소로 다시 시점을 돌려서 생각해보자.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 목표달성에 필요한 전체적인 계획도 무질서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만약 유럽 내외의 국제 유대인 자본이 또 다시 민족들을 세계대전으로 몰아 넣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의 유대민족의 섬멸이 될 것이다!" > (Wenn es dem internationalen Finanzjudentum in und außerhalb Europas gelingen sollte, die Volker noch einmal in einen Weltkrieg zu sturzen, dann wird das Ergebnis nicht der Sieg des Judentums sein, sondern die Vernichtung der judischen Rasse in Europa!) > ---- > - 히틀러 1939년 1월 30일 독일의회 연설 > "유대인들은 우리가 섬멸(vernichtet)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1918년 11월 9일([[1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날) 자신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모면할 수 없다. 이 날의 대가는 치러져야 할 것이다." > ---- > - (DGFP pp. 190-95) 히틀러가 1939년 1월 체코 외무장관 프란티셰크 흐발코프스키(František Chvalkovský)에게 보낸 편지 > "유대인의 특권을 없애는 합리적인 반유대주의가 필요하며 이것의 최종적 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한 제거(Entfernung)이어야 한다." > ---- > - 히틀러의 1919년 9월 16일 편지 Werner Maser, Hitler’s Letters and Notes(New York, 1974), p.214. 이상의 발언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절멸시키고자 했다는 근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빙은 "이 2개의 유명한 어구에서 사용된 vernichtet라는 단어가 실지로는 '절멸'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단어는 영어에서 annihilate로 번역되며 '절멸시키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1:1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고 보다 엄격하게 정의하면 폭력을 행사해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destroy로도 번역될 수 있고 전간기에 사용된 용례를 보면 이 단어는 주로 군사교리의 용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섬멸하다'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섬멸하거나 몰살하거나 그렇게 심각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독일 민족운동의 최종 목표와 임무, 또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서 보자면, 이는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철제 빗자루로 모두 쓸어내는 것이다. 이 일은 완벽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 ---- > - 나치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Völkischer Beobachter]] 1922. 3.10 > 법과 질서의 대명사인 우리 정부하에서 살육을 통해 다른 모든 범죄자들을 기어코 소탕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는 유대인 천민 집단을 말살시켜야 하는 중대한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독일에서 유대인이 실제로 그리고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 곧 절대적 절멸이어야 한다." > ---- > - Das Schwarz Korps > 1938.11.24 나는 치안군 제3연대가 [[리투아니아]] 유대인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을 위해 살려둔 근로 유대인은 샤블리에 약 4,500명, 코브노에 약 15,000명, 빌나에 약 15,000명 정도 존재한다. 나는 이들 역시 몰살시킬 것을 원했다. 잔존해 있는 근로 유대인들은 부득이하게 필요한 사람들이고 내 추측으로 이 인력은 이번 겨울이 지나가도 계속해서 절실하게 쓰일 것이다. 유대인의 번식을 막기 위해 근로 유대인 남성들을 즉각 거세시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여성이 [[임신]]하게 된다면 그녀는 제거되어야 한다." > ---- > - K. Jager 1941, 12.1 이 외에도 다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당시 [[나치 독일]]에서는 '최종 해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절멸이라고 명시된 경우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절멸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설이 자주 제시된다.[*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 최호근 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 로버트 위스트리치 에서 재인용.] 그러나 아래에서 읽어낼 수 있다시피 '최종 해결책' 혹은 '물리적 해결', '정치적 해결' 등의 단어[* 당시 나치 군체계의 언어로 '최종 해결책'과 '물리적 해결'이라는 단어는 유대인 학살을, '정치적 해결'이라는 단어는 국외 추방을 의미.]는 언어를 관용화해 이의 무게를 무화(無化)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되는 것이 학계 다수의 의견. [[신어]]를 떠올리면 알 수 있을 듯. 실제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 예루살렘 재판과 같은 전범 재판 당시 피고로 심문받던 나치 수뇌부들은 관용적인 표현(Redensarten), 선전문구(Schlagworte)를 주로 사용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일반적으로는 학살, 절멸이라는 단어보다는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라는 단어를 선호했으며, 그 해결에 필요한 방법도 독소전이 발발하기 까지는 추방과 절멸 사이를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독일 정권 내에서는 1941년까지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하여 비시 프랑스가 관리하는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방안이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논의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라는 타파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유야무야된다. [[독소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있다면 우랄산맥 너머로 추방한다는 계획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이나 호주 역사에서도 보듯이 원주민들을 환경이 척박한 지역으로 내몰아 버리는 것도 학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눈물의 길'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 이 학살 공장을 돌아가게 한 것은 반유대주의 신념에 찬 나치 수뇌부 관료들만이 아니었다. 내무부, 외무부, 법무부, 경제부, 재무부, 교통부, 체신부, 동유럽부, 선전부 등 거대한 독일 관료 기구 전체가 이 절멸 정책을 구상, 준비, 실행하는 데 참여했던 것이다. 법무부는 학살당할 유대인의 범위를 정의했고, 경제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해 파괴의 그물에 걸려들기 쉽게 했으며, 내무부는 절멸수용소로 이송될 유대인을 포획했다. 또한 교통부 산하의 제국철도는 전 유럽의 유대인을 절멸수용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독일의 공무원들은 정책을 입안하고, 법령을 통과시키고,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전화를 주고받고, 공문에 서명하고, 절멸수용소로 가는 철도 시간표를 짬으로써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엄청난 규모의 학살 과정에 가담한 셈이었다. 파괴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는 데에는 굳이 반유대주의 신념이 필요 없었다. > ---- > - 박윤덕 외 23인 공저, 《서양사 강좌》제 22장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이 부분의 저자는 이용우 동덕여대 국사학과 교수로,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 석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 전문 분야는 세계대전기 각국의 대독 협력과 저항의 역사이다.], 576 ~ 577p, 아카넷, 2016.2.20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게토와 강제수용소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은 중요한 원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이후 유대인의 처우에 대해서까지 그러한 생각을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게토로 몰아넣었지만 그 이후 뒷처분에 고심한 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대인을 관리해야 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절한 수단"으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추상적인 명령과 유럽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 그리고 잘 형성된 관료체제에서는 책임을 추궁할 대상이 애매해진다는 점 속에서[* 관료제를 통해 발생한 결과의 책임은 누구일까? 지시한 사장인가? 계획한 과장인가? 실행한 말단인가? 관료제 속에서 죄책감은 모든 관료들에게 배분되어 희미해진다. 역으로 관료제의 이런 속성이 한나 아렌트 등의 철학자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로 까발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피상적인 명령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은 점차 광기에 찬 학살행위로 바뀌어갔다.[* 비슷한 예시로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가짜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아라'라는 피상적인 명령을 받은 실험자들은 죄수 역의 실험자들에게 징계를 내렸고, 이는 차차 정도를 넘은 가혹행위로 발전하게 되었다(<[[루시퍼 이펙트]]> 참조).] 이 때문에 학살 자체의 시행과 그 지향점에 대해서도 모순된 점이 자주 발견되는데, 가령 독일에서 절대적인 노동력의 부족으로 러시아의 전쟁포로들마저 군수공장에 투입되는 상황에서조차 유대인들을 노동력으로 쓰려는 시도조차 없었으며, 그들을 향한 "효율적"(살육의 방법 면에서)이면서 "비효율적"인 살육(귀중한 노동자원의 살해)은 멈추지 않았다.[* 유대인을 전혀 노동력으로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어린이는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죽였고, 성인은 당장 죽지 않을 만큼 먹을 것을 주면서 일을 시키다가 쇠약해지면 죽였다. 샤워 한다고 속여 구두와 옷은 죽이기 전 벗겨서 재활용했다. 즉 나치가 보기엔 인간 이하 존재인 유대인들에겐 식량과 물자를 주기조차 아까워 한 것. 말기로 갈수록 물자가 부족해지며 잡아들이는 인원은 많아져 죽이는 시기가 빨라졌다.] 일례로 독소전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과정에서도 동부지역에서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열차들은 중요한 군수물자의 수송보다 우선 순위에 있었다. 이는 유대인 학살의 구조적인 문제 이외에도 나치 독일의 각부서간의 상호경쟁이 심화되어 서로가 우선 순위를 놓고 다투면서 생겨난 문제이기도 하다. 이후 이어진 모든 광기 학살 행위는 관료제의 결과물에 걸맞게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히틀러가 처음 굴리기 시작했던 작은 눈덩이는 반유대주의라는 눈밭에서 전시체제의 관료제라는 추진력을 통해 대학살이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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