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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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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징 == ||<-2><table align=center> [[파일:WannseeList.jpg|width=100%]] || || 지역 || 수 || ||<-2>A. || ||알트라이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Weimar_Republic_1930.svg.png]] 1938년 이전의 나치 독일 영토.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토와 같다.] [br]오스트마르크[* [[오스트리아 병합|합병된 오스트리아]] + [[류블랴나 주|운터슈타이어마르크와 고렌스카]]] [br]오스트게비테[* [[독일 제국]] 시절의 구 동방영토 중 1차 대전 패전으로 상실한 지역으로 [[서프로이센]], 포젠 등.] [br]폴란드 총독부 [br]비아위스토크 [br]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br]에스토니아 [br]라트비아 [br]리투아니아 [br]벨기에 [br]덴마크 [br]프랑스 독일군 점령 지역 [br]프랑스 비점령 지역[* 비시 프랑스.] [br]그리스 [br]네덜란드 [br]노르웨이 || 131,800[br]43,700[br]420,000[br]2,284,000[br]400,000[br]74,200[br]-유대인 비포함-[* 원문에는 Judenfrei(유덴프라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유대인을 뜻하는 Juden과 영단어 free에 해당하는 Frei가 합쳐진 단어다. 여기서 사용된 free의 의미와 완벽히 대응하는 마땅한 한국어 표현이 없어 '유대인 비포함'이라 번역했지만, 사실 이보다는 유대인들이 '청소된' 또는 '제거된', 'XX 성분이 없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무지방'을 뜻하는 영어 표현 'fat free'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 단어는 유대인이라는 한 인종집단의 혈통을 '''무슨 제거해야 할 성분처럼 취급하는 끔찍한 의미가 내포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해석은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br]3,500[br]34,000[br]43,000[br]5,600[br]165,000[br]700,000[br]69,600[br]160,800[br]1,300|| ||<-2>B. || ||불가리아 [br]영국 [br]핀란드 [br]아일랜드 [br]이탈리아 [br]이탈리아 점령 하의 알바니아 [br]크로아티아 [br]포르투갈 [br]루마니아[* [[베사라비아]] 포함] [br]스웨덴 [br]스위스 [br]세르비아 [br]슬로바키아 [br]스페인 [br]튀르키예(유럽 지역) [br]헝가리 [br]소련 [br]소비에트 우크라이나 [br]소비에트 벨라루스(비아위스토크 제외[* [[비아위스토크]]는 당시 [[오스트프로이센]]에 병합되었다.]) || 48,000[br]330,000[br]2,300[br]4,000[br]58,000[br]200[br]40,000[br]3,000[br]342,000[br]8,000[br]18,000[br]10,000[br]88,000[br]6,000[br]55,500[br]742,800[br]5,000,000[br]2,994,684[br]446,484|| || 도합: || '''1,100만 이상''' || ↑1942년 1월 20일 열린 [[반제 회의]]의 회의록 문서 중 6페이지. 이는 회의 참가자이자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 친위대 중령의 이름을 따 '아이히만 리스트'라 불리는 문서로, 유럽 전역의 유대인 수('''학살 대상자''')를 정리해 놓았다. 유형 A는 회의가 열렸던 42년 초 시점에 독일이 점령하여 직할하던 지역의 유대인들이며, 유형 B는 그 외의 지역들[* 적국, 동맹국, 동맹국의 점령지, 중립국 등이 있다.]의 유대인들이다. 홀로코스트는 여타 학살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은, 전쟁터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포로 학살이 아닌, 자국(점령지) 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매우 체계적인 정책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건 [[아돌프 히틀러]]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나치 독일이 추진한 인종 정책이 갖던 의미는 땅을 점령해서 독일인에게 배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레벤스라움|그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독일인이어야 한다]]'''"는 논리적 문제가 생기는 거다. 나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슬라브인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거나 잡아 죽이고 그 땅을 독일인에게 준다는 개념을 도출하였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자기 민족 (또는 [[명예 아리아인|그러한 편인 사람들]])에게는 후하고, 아닌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무자비한 배타주의적 민족주의의 소치다. 하지만 위에서 나치가 추구한 '문제 해결' 논리의 연장선 상에서 살펴보면 유대인 학살 또한 그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경제권과 상권, 자본을 빼앗아 독일인들에게 '돌려준다'는 개념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은 실제로 유대인들이 살던 집을 빼앗아 독일인들에게 나눠주는 등의 약탈 정책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런데 이런 자산 몰수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면 유대인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자산을 챙겨 [[미국]]이나 [[스위스]] 등 제3국가로 도피하여 나치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파지므로, 나치는 아예 국가 단위로 거대한 강도질을, 아주 체계적으로 저지르게 된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또 다른 특징은 [[중간 관리자]]들에게 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가 체계적인 말살 정책으로 자리매김하는데는 [[하인리히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중간 관리자들의 과당 경쟁이 있었다. 이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보다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학살 방식과 말살 정책을 입안하였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반유대주의적 사상과 언변, 선동 능력을 원동력 삼아 이루어졌다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히틀러는 "뭉뚱그린 개념"을 구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아돌프 히틀러 또한 홀로코스트를 승인하거나 묵인했을 것이므로 히틀러의 죄악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상술한 바와 같이 홀로코스트란 우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여 정책과 체계를 가지고 특정 인류 집단을 말살한 것이므로 히틀러 한 사람만의 힘으로 완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대 독일(은 물론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부터 이미 유대인들에 대한 극단적 증오가 팽배했고 이미 학살(러시아의 [[포그롬]])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힘러를 비롯한 중간 관리자들은 히틀러의 '개념'에 찬동해 악독한 학살 정책을 입안하며 퓌러의 망상을 적극적으로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경쟁'은 [[제2차 세계 대전|전쟁이 시작되면서]] 더욱 과열되고, 그만큼 학살 정책도 폭압적이고 잔학하게 변모하였다. 홀로코스트는 위에서 밝힌, '''원래 독일인의 것이어야 하는 것들'을 [[약탈|빼앗아]] 독일인에게 되돌려주는''' 개념과 맞물려 약탈 체제로도 구상되었다. 가령 폴란드 등을 침공한 다음, 그곳에 사는 [[독일계 폴란드인|독일계 주민]]을 선동해서 폴란드인들을 공격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약탈한 물자로 독일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보충하는 식으로 조성된 일종의 체계화된 약탈체제를 구상한 것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대상에 유대인 뿐만 아니라 장애인, 집시, 동성애자도 들어가 있었다는 점은 위 개요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나치가 이들 또한 홀로코스트 대상으로 우겨넣은 논리는 이러하다. 먼저 장애인의 경우, [[나치당]]은 이들에 대한 복지정책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장애인에게 복지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재원을 낭비"하는 것으로 간주한 것은 물론이고, 우생학에 기반하여 장애인의 존재는 인종적 오염, 이들을 보호하고 복지를 실행하는 것은 사회적 병폐와 나약함을 키우는 행위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치는 장애인이 도태되어야 아리아인의 공동체가 건강해진다는 발상을 가지고 있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고대에는 사람을 노동력이나 자산의 개념으로 여겼다. 따라서 비장애인과 같은 노동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여겨진 선천적 장애인들, 그리고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게 된 구성원을 추방하거나 죽이는 경우가 파다하였다. 그러나 [[종교]]가 나타나는 시기부터 인권과 생명에 대한 가치가 조명되기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람을 일종의 노동력으로 여기던 고대라면 몰라도, 현대에 이르러서 장애인에게 자행된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집시의 경우, 홀로코스트 대상으로 분류된 것은 유대인의 경우처럼 오래 전부터 유럽 일대에 만연하였던 집시에 대한 혐오 의식에 기인한다. 하지만 유대인과는 사상적 관점에서 혐오의 결이 달랐다. 초기 나치당은 극좌 세력과 극우 세력이 혼합된 세력이었고, 나치당의 사상적 근간이 되는 [[나치즘]]도 마찬가지로 극좌 요소와 극우 요소가 혼재되어 있었다. 가령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극좌화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은 은행업과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부르주아]] 계층으로 치부되었고,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학살은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의 성격을 상당히 띄고 있었다. 반면 집시에 대한 혐오와 학살은 극우 인종주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동성애자의 경우, 당대 유럽의 "전통적 윤리" 개념에 기반하여 혐오와 학살이 이루어졌다. 나치당의 민족적 이데올로기는 우생학적으로 우월한 아리안 인종을 번식하는 개념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은 나치당이 원하는 '번식'을 하지 않으므로, 나치 입장에서 동성애자란 "'번식'을 피하는 부도덕한 존재"로 치부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유대인과 다른 홀로코스트 대상에 대한 나치의 학살은 개념적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학살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즉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매개로 하는 반면성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치당 지도부와 주요 지지층은 고학력 지식인과 전문직, 부유층이 많았다. 이러한 모호하고 모순적인 증오에 대해 '좌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유대인을 증오하고, 우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혁명가에 대한 증오로 유대인을 증오한다'는 표현이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하려면 근대의 유럽에서 도시 시민(부르주아) 계층은 자본가의 산실인 동시에 지식인 혁명가의 모태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급속한 공업화로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도시로 인구와 사회적 영향력이 집중되었고, 도시 시민들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농업 지주를 대신하여 도시의 공업, 금융자본가들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도시화한 시민사회 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영향력을 넓히게 된 것. 그런데, 유대인들의 경우 토지 소유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고 배타적인 농촌 공동체에 편입하기는 어려웠기에 이전 시대부터 도시에 자리 잡고 사는 이들이 많았고, 따라서 도시 시민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서 유대인들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 성장했다. 즉,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 자체는 중세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이러한 혐오가 부르주아(원문 그대로의 의미로써 부르주아, 즉 도시 거주 시민) 계급이 성장하여 사회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유대인들이 사회를 장악하고 사악한 음모를 꾸민다'는 망상의 형태로 다듬어진 것이다. 정리하자면, 같은 홀로코스트 대상일지라 하여도 유대인과 집시/장애인/동성애자들과의 개념적인 구분은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라울 힐베르그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라는 책을 증거로 "홀로코스트가 본격화 되기 이전인 30년대 말 [[괴벨스]]의 선동으로 벌어진 유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행위조차도 독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했으며. 즉 홀로코스트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덜 조직적이고 심지어는 온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조차도 독일 경제에는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한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학살과도 그 궤를 달리하며, 경제 활동의 기반이 되는 "토지"를 가장 적은 비용으로 차지하기 위해 그 토지의 기존 거주자들을 학살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학살이 하나의 수단임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확실히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였다"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선 헷갈리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다. 나치의 경제 계획은 국유화를 통하여 통제 경제적인 방향을 조장하여 전시 대비에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한 경제 정책인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반론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결과"지만 당시 나치정권 자체는 그 "결과"에 대해서 몰랐다. 즉, 유대인들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환상 때문에 그걸 다시 "독일인에게 빼앗아 주면"된다고 생각한 문제인 거다. 또한 후자의 경우 토지에 대한 명분을 가진 인종주의적 학살이라고 보면 된다. 즉, 홀로코스트가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보이는 이유는 그 수단을 종합적으로 써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 안에도 영토 획득을 하면서 벌어진 인종주의적 관점의 학살행위와, 인종 그 자체를 학살하던 행위라는 점으로 나눠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겠다. 게다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치는 애초에 "우월한 아리아인종"의 씨를 받겠다고 [[레벤스보른|일종의 짝짓기]]를 시켜먹은 전례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상 나치당의 정책 자체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사회불만의 성격을 지닌 SA출신 집단 등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만 뭔가 증오의 타겟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특별했던 거다. 물론 후대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독일이 유대인들을 탄압한 것 자체가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므로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 학살의 이유는 없었다"는 결과론적 관점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실패한 경제 정책의 경우 그것이 실패할 줄 알고 저지르는 예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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