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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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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 대륙에서 반유대 감정은 흔한 것이었다. 먼 옛날 기독교가 유럽 대륙으로 퍼지며 예수와 사도들을 박해하고 죽인 유대인을 '사탄'으로 규정했다.[* 이는 성경 구절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마태복음 27:24-26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15-16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거기에다가 자신의 나라 없이 전 유럽 대륙에 퍼져 있으면서도 그 나라에 융화되지 않았고, '유대인은 특별한 민족이다'라는 선민사상과 함께 이질적인 유대인만의 문화를 죽어라 지켜가며 자신들의 영역(마을 혹은 공동체)을 만들며 살아갔기 때문에 만만하게 생각하거나 고깝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시대부터 당시까지 유대인은 박해와 학살을 당하거나 왕따 당하는 존재였다. 흑사병 시기의 유대인 학살이 대표적인 예이며, 홀로코스트에 앞서 러시아에서도 [[포그롬]]이 일어난 바 있으며 이보다는 약하지만 [[폴란드 제2공화국]]처럼 반유대주의 색채가 강한 국가들도 많이 있었다. 다만 이렇게 넓게 퍼져있다보니 별 감정없는 일반인들도 있었으며, 중세시대 이후 국가관이 종교에서 왕국 혹은 국가에 충성하는 분위기로 접어들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냉담(즉 이름만 유대인이지 사실상 무종교)이나 타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고, 국가적으로도 종교적 색체가 옅어지면서 자연스래 유대인들은 일반인들 사이로 스며들고[* 쉽게 말하면 중세에는 독일 국민이기 전에 유대인이였다면, 근현대에는 유대인이기 전에 독일인이다 라는 관념이 생긴 것이다.], 반유대주의 또한 옅어지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 본인 역시 반유대주의 사상을 접하고도 상당 기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히틀러 평전 참고. 1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와 군 생활을 같이했던 동료들의 증언을 빌리면 반유대감정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철십자 훈장을 추천했던 후고 구트만 대위도 유대인이었다.] 그러던 도중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궁지에 몰린 [[독일 제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1919년 선포된 [[베르사유 조약]]과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들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는 막대한 보상금으로 파멸에 이르렀다. 전후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초인플레이션]] 등 혼란과 혼란을 거듭했다. 이러는 도중 독일에 패전 책임이 있는 극우, 군국주의자들은 [[배후중상설]]을 떠들며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원인이 [[유대인]]이라는 주장을 피기 시작했다. [[배후중상설]] 참고.[* 사실 책임은 온전히 저 극우 군국주의자들에게 있었다. [[백일 공세]] 이후 사실상 독일군은 재기불가능 수준이였지만 철저한 언론통제로 인해 협상국이 독일 국경으로 몰아닥치게 생겼을 때야 자신들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걸 의회가 알 수준이였다.] 거기에 이렇게 힘든 독일에게 더 큰 시련이 오니,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세계 대공황]]은 더욱더 피폐해진 독일을 사실상 죽음으로 몰고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은 자본가•은행가 이미지가 있었기에 반유대주의는 더욱 폭발적으로, 그리고 계층을 따지지 않고 넓게 퍼지기 시작한다.[* 다만 유대인들 중 자본가가 많았던 이유는 토지소유 금지 등 유대인이 박해받았기 때문이다. 토지소유가 금지되니 당연히 농촌보다 도시 근방에 모여들어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이나 은행업, 상업등에 종사하면서 유대인 = 자본가, 상인, 고리대금업자의 이미지가 생긴것이다. 실제로 16세기에 쓰여진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자로 나오는 것에서 보듯이 유대인의 이러한 이미지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현대에도 유럽권 사람들은 유대인하면 은행가, 고리대금업자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러시아]]가 공산화 되자 그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유대-볼셰비즘설(Judeo-Bolshevism)이 널리 퍼졌으며[* 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로자 룩셈부르크 등등 수많은 관련 인사들이 유대인이었기에 이런 확증편향이 가능했다. [[https://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50605.html|관련 기사]] 오늘날에도 노엄 촘스키, 버니 샌더스 등이 유대인인지라 이런 반유대주의의 대상이 된다.], 유대인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민다는 [[시온 의정서]]가 신봉되었고, 극단적 반유대 언론을 소유한 미국인 [[헨리 포드]]의 반유대주의도 나치에게 영향을 미쳤다.[* 헨리 포드는 나치에게 막대한 돈을 주기도 했다.] 또한 온갖 과격한 반유대주의적 주장이 사회에 퍼졌는데, 유대인이 어린아이를 해한다는 blood libel([[피의 중상]])[* 이 때문에 당시 상황을 표현한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라는 만화에서는 아이들에게 [[망태기 할아버지|"유대인들은 너희들을 보따리에 싸다가 잡아먹는다!"]]라고 겁을 주는 장면도 나온다.], 매음굴 포주들이 유대인이라는 설, 유대인이 동성애 영화 등의 풍기문란의 주범이라는 설, 1차 대전에서 유대인이 징병을 거부했다는 설, 유대인이 담배를 도래시켰고 담배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설 등이 있었다.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문서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 빈틈을 파고든 이가 바로 히틀러다. 1차대전의 퇴역 군인이던 히틀러는 나치당 입당 후 연설 능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지 상승을 위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이용했다.[* 퇴역군인이던 히틀러에겐 안정적인 정치자금이 필요했기에 반유대주의자들의 자본지원 + 유대 자본 흡수를 위해서라도 반유대감정은 필요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헨리 포드]]와 같은 반유대주의자들은 히틀러에게 거액의 후원을 해주었다.] 네로 작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틀러는 광기에 충실한 정치가였다. 비인간적인 광기와 문명의 거대한 힘이 결합하면서, 유대인 학살의 토대는 마련되고 있었다. 물론 히틀러도 처음부터 유대인 대학살과 절멸을 기획한것은 아니고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나 우랄 산맥 너머로 추방시키려했다. 마디가스카르가 유럽과 위낙에 멀리 떨어져있었고, 유럽에 비하면 많이 무덥고 낙후되었기에 유대인들을 유럽에 오기 쉽지않게 떨궈내려고했던것으로, 주요 항구와 도시지역들은 SS를 보내서 감독하는 [[경찰국가]]로 만들어서 유대인들을 통제하고, 경제문제는 중앙정부의 도움없이 유대인들이 알아서 자급자족하라는 식으로 해결할 방침이었다.[* 물론 이 당시에 마다가스카르는 인구 300만명대 정도에 그친지라 땅이 널널하기는 했지만, 다수의 유대인들은 직접 학살만 없을뿐 상당기간 동안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거나 겨우내 자급자족하는 하는 식으로 빈곤하게 살았을 것은 명백했고, 설사 이들 유대인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자리잡더라도 교육수준이 훨씬 우월한 유대인들이 기득권을 차지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말라가시인들을 비롯한 현지인들의 반발이 일어났을 것인지라 실현되더라도 현대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처럼 갈등과 충돌이 심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독일 본토와 마다가스카르가 거리가 엄청나게 먼데다가 계속된 항공전에도 영국이 계속 해상 제해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다가스카르로 유대인 추방을 시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우랄 산맥 너머도 당시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협력관계였던 소련에게 같이 유대인들을 강제이주 시키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당시 독일이 유럽을 정복하고 점령지 내에 있던 유대인의 수는 약 200만명이었다. [[스탈린]] 입장에서 무리해서 모조리 강제이주 해봐야 돈과 자원만 낭비하고 별로 이득이 되지 않을 뿐더러 소련의 이미지만 나빠진다.] [[독소전쟁|소련을 침공해 정복시킨 뒤]] 직접 추방시키려했으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해 전쟁이 길어지자 아예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으로 정책을 바꿨고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전황이 역전되자 더욱 발악적으로 학살을 전쟁 수행보다 우선시할 정도로 대학살을 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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