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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라인 요약 정리 === * 1939년~1940년: [[총독부(독일)|폴란드 총독부]] 내에서 [[게토]]들이 본격적으로 설립되었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본권을 전부 박탈당한 채 게토로 강제이주 당해야 했다. 게토는 다른 구역과 철저히 격리되어 있었으며 열악한 생활 환경 속에서 나치의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게토에선 [[질서경찰]]과 [[유대인 경찰]] 그리고 소수의 SS 대원들이 유대인들을 통제했는데 유대인 경찰들은 자기 보신을 위해 같은 동족을 더 악랄하게 탄압했다. 게토에서의 반항은 SS에 의한 총살로 이어졌다. 게토 외 장소들에선 [[아인자츠그루펜]]과 독일군 지상부대에 의한 집단 총살이 본격적으로 발생한다. 때로는 가스 트럭들을 동원해 유대인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한 편, 1940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는데 이 때 당시만 해도 아우슈비츠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 불과했다. *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 영토 내에서의 유대인 집단학살도 진행된다. 이 학살에는 아인자츠그루펜, 독일 지상부대 뿐만 아니라 현지 부역자로 구성된 병력들도 동원된다. 한 편, 1941년 12월 부터 최초의 절멸수용소 [[헤움노 절멸수용소]]의 가동이 시작되었고 유대인들에 대한 산업화된 말살이 시작된다.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 역시 가동되어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시작했다. * 1942년: 나치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도로 [[반제 회의]]가 열렸고 유대인에 대한 '최종해결책'이 절멸로 확정된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체계적인 말살 계획과 행위는 이미 이전부터 있었고 반제 회의는 이를 다른 나치 당 간부들과 SS에 공식적으로 재확인해서 협조를 요청하는 것에 불과했다. 1942년 3월 부터 루블린 SS 사령관인 [[오딜로 글로보츠닉]]이 사령관인 '라인하르트 작전'이 시작되었고 이 작전의 목표는 폴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 200만 명을 전부 '절멸' 시키는 계획이었다.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세 곳의 절멸수용소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 1942년 12월 까지 단 몇 개월만에 12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한 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선 "시험 차원"에서 임시 가스실 두 개를 지어 라인하르트 작전과는 다른 별도의 대량 학살을 시작했다. * 1943년: 대다수의 폴란드계 유대인들은 '라인하르트 작전'에 의해 전부 몰살당했고 위 세 곳의 절멸수용소들은 증거인멸 차원에서 폐쇄되었다. 매장되었던 시신들은 다시 꺼내서 전부 불태워 없애버렸다. 나치는 오딜로 글로보츠닉을 비롯한 '라인하르트 작전'의 간부들을 이탈리아로 파견해 파르티잔 소탕과 이탈리아 내 유대인 색출을 지시했다. 또한,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하자 나치는 이를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해 수 만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고 여러 게토에서 집단 총살을 자행해 곳곳에서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또한, “수확제 작전”이 개시되어서 루블린 내 4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을 [[무장친위대]]와 [[질서경찰]]이 단 이틀만에 총살했다. 한 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르케나우 구역(아우슈비츠II)에서 본격적인 대용량 가스실의 가동이 시작되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역할은 본격적인 절멸수용소로 기능을 전환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남은 폴란드계 유대인과 서유럽에서 이송되어온 유대인, 이탈리아계 유대인과 그리스계 유대인 그리고 소련 전쟁포로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 1944년: 헝가리에 나치 괴뢰정권인 [[화살십자당]]이 집권하자 나치는 본격적으로 헝가리계 유대인 50만 명에 대한 말살 작전을 시작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이름을 딴 "회스 작전(Aktion Höss)"이 그것이었다. 매일 1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당했으며 결과적으로 43만 명이 넘는 헝가리계 유대인이 몇 개월만에 희생당했다. 그 과정에서 가스실이 포화 상태가 되어서 불이 붙은 구덩이 앞에 수감자들을 서게 한 뒤 집단 총살 후 시체를 분살하는 엽기적인 처형도 자행되었다. 1943년 이후 잠시 가동이 중단되었던 [[헤움노 절멸수용소]]는 재가동되어서 수 만명의 유대인 노동자들을 추가적으로 학살한 뒤 완전히 폐쇄되었고 헤움노에 동원된 가스 트럭들은 폭파로 증거인멸되었다. 한 편,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의 동부전선이 붕괴되면서 소련군은 폴란드 영내로 진격했고 그 과정에서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 그리고 [[베우제츠]]에서의 학살 터가 발견되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 1945년: 패전을 눈 앞에 둔 나치는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르케나우 가스실들을 폭파로 없애버렸으나 대부분의 시설을 은폐하지 못한 채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고 만다. 한 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수 만 명의 유대인들은 '죽음의 행진'을 통해 탈수와 기아가 강요된 환경에서 직접 걸어서 다른 강제 노동 수용소로 가야 했고 그 과정에서 또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되었다. 나치는 광기 넘치게도 패배가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연합군에게 해방되기 직전까지 강제 노동 수용소들에선 유대인에 대한 집단 총살과 가스실 처형이 자행되었다.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으로 서방연합군이 독일 본토를 해방하면서 나치 강제 수용소들의 끔찍한 참상들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연합군과 소련군은 나치를 단순한 침략국의 범주를 넘어선 "반인륜 범죄"의 범주로 다뤄야 한다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나치 전범들을 단죄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개시되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홀로코스트, version=1905, uuid=f58a83a5-bce0-4315-8f60-b0c83662aaea, paragrap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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