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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 처형과 빨치산 토벌 == [[파일:EMr61.jpg|width=500]] ▲ 1942년 [[우크라이나]] [[빈니차]]의 유대인 구역인 예루살림카에서 찍힌 사진. [[아인자츠그루펜]] D 대원이 유대인 남성의 후두부에 권총을 사격해 살해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앞에는 먼저 살해된 사람들이 묻혀 있는 구덩이가 있다. 뒤에 모인 사람들은 친위대나 국방군 병사,[* 검은색 히틀러 유켄트 혹은 전차병 군복을 입은 사람 좌측을 보면 오른쪽 가슴에 국가수리가 박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독일 노동대 등 구경꾼들이다. 이 사진이 들어 있던 앨범은 1944년 3월 20일 소련군에 노획되었다. 뒷면에는 '''빈니차의 마지막 유대인'''이라 적혀 있다. > "러시아에서 봤습니다. 친위대가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어느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겨우 빨치산이 독일군 한 명을 죽였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 책임이 없었지요. 친위대는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여자와 아이들을 쏴 죽였지요." > ---- > - 독일 육군 마이어[* 이름은 미상.] 보병소위의 증언.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229p에서 발췌. 가장 일반적이며, 또한 가장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방식.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절반 가까이가 이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2차 대전 최초의 전역이었던 [[폴란드 침공]]부터 시작되었다. 주로 동부전선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 그리고 [[발트 3국]] 지역에서 벌어졌지만, 사실상 독일군이 있는 모든 지역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해당 지역이 [[소련]] 지역이나 [[유고슬라비아]], 북부 [[이탈리아]][* 1943년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붕괴하자 북이탈리아에는 독일군이 진주했다. 그러자 반 무솔리니파 이탈리아인들 다수가 [[파르티지아노]]가 되어 독일군 및 독일의 괴뢰국인 살로 공화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에 대한 독일의 진압 방식은 매우 잔혹했다. 당장 폴란드에서 라인하르트 작전으로 절멸수용소를 운영했던 친위대 부대가 파르티잔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을 정도였다.]같이 민간과 파르티잔의 저항이 강력한 곳일수록 더욱 심각해지는 양상을 띄었다. 한편 최초 시작지였던 폴란드 지역의 유대인들 또한 이 방식으로 많이들 살해당했지만, 이 지역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절멸수용소 가스실의 희생자들이 절대다수이다. 가해 주체는 이동 학살 특임대라 할 수 있는 친위대 특무대([[아인자츠그루펜]] Einsatzgruppen)가 가장 유명하며, 또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하지만 동부전선의 특임대는 도합 3000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200만 가까이 되는 희생자들을 전부 총살할 수는 없다. 실제로는 그 외에도 국방군과 친위대, 무장친위대, 경찰, 반유대주의적 지역민들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특히 '반덴베캠풍(Bandenbekämpfung)', 즉 '도적 토벌'로도 불리는 나치의 치안전쟁은 집단군 후방 지역에 소속된 국방군 보안사단들과 아인자츠그루펜, 무장친위대 및 질서경찰 부대, 그리고 현지인 보조부대들에 의해 주로 수행되었다. 그들은 빨치산 토벌이란 명목으로 마을에 쳐들어가 보이는 대로 다 불사르고 쳐죽이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또는 1명의 독일군이 죽을 때마다 수십의 주민들을 보복으로 살해하기도 했으며,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 경우 [[바비야르 학살]]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마을 주민들을 이주 행렬이라 속인 뒤 일렬로 끌고 가 기계적으로 총살한 뒤 구덩이에 그냥 파묻어버렸다. 학살 전담 병사들은 [[총살]]하기에 앞서 희생자들의 귀중품들을 따로 모아 [[약탈]]하거나, 집단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 "그러니까 구덩이마다 기관총 사수가 여섯 명씩 배치되었습니다. 구덩이는 대략 길이 24미터, 너비 3미터였지요. 구덩이 안의 사람들은 통조림의 고등어처럼 누웠어요. 머리를 가운데로 두고 말이죠. 그 위에는 기관총 사수 여섯 명이 있었고, 그 사람들 목덜미에다 총격을 가했죠. 제가 도착했을 때는 구덩이가 벌써 가득 찼어요. 그래서 아직 살아 있던 사람들을 시신 위에 눕히고 다시 총격을 가했죠. 구덩이 안의 공간을 잘 활용하려고 그 사람들을 켜켜이 잘 눕혀야 했어요. 그러나 그 전에 그들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았죠. 여기 숲 변두리에 구덩이 세 개가 있었어요. 일요일이었죠. 사람들은 1.5킬로미터로 줄을 섰어요. 줄은 조금씩 움직였죠. 처형 대기자들이었습니다. 구덩이로 다가가면서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되었죠. 대충 이 정도 아래 지점에서 장신구와 짐 가방을 내놓아야 했지요. 그러면 사수들은 쓸모없는 물건은 그냥 무더기로 쌓아 놓고 괜찮은 물건은 짐 가방 안에 챙겼어요. 그걸로 헐벗은 우리 민중들에게 옷을 사 주겠다는 거였죠. 그 다음에 조금 더 걸어와서 이제 옷을 벗었죠. 숲 앞 500미터에 이르면 발가벗어야 했어요. 속옷이나 팬티는 입도록 했고요. 여자와 아이들뿐이었죠. 두 살 짜리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대고 그런 야비한 말을 하다니! 기관총 사수들은 그 일이 무리가 되어서 매시간 교대를 했죠. 차라리 그자들이 억지로 그런 짓을 하는 것이었다면! 아니었습니다. 그자들은 추잡한 말을 내뱉었죠. "자, 또 예쁜 유대인 계집이 온다."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네요. 새빨간 내의를 입은 예쁜 소녀 말이에요. 인종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요? 리가에서는 그녀들과 너도 나도 동침한 뒤에 총살해 버렸다니까요. 그래야 여자들이 어디 가서 그 얘기를 못 할 테니까요." > ---- > - 발터 브룬스 독일 육군 소장의 증언. 브룬스 소장은 1941년 5월 1일부터 이듬해 5월 1일까지 독일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181~182p에서 발췌. '토벌'의 대표적인 사례는 특히 [[https://en.wikipedia.org/wiki/Max_von_Schenckendorff|막스 폰 솅켄도르프]] 대장의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의 관할 구역이었던 [[벨라루스]]에서 벌어졌다. 당시 벨라루스는 울창한 숲과 늪지대로 구성되어, 파르티잔들에게 있어 아주 이상적인 활동 지역으로 기능했다. 소련군 사령부는 이 지역의 [[파르티잔]]들에게 지원을 보내면서 독일의 후방을 교란했고, 이는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의 신경을 제대로 긁어댔다. 또한 [[폴란드 국내군]] 또한 지하에서 암약하며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을 지속했다. 때문에 [[히틀러]]는 벨라루스 파르티잔의 위협을 그가 주장하던 유대인의 위협과 결부시키면서 독일 군대에 '가혹한 대응'을 주문했다. 또한 파르티잔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장병들을 격려했다. 그 결과가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벨라루스 점령]] 기간 동안 자행된 수없이 많은 토벌전들과 [[바르샤바 봉기]] 진압작전이다. 히틀러의 명령을 들은 독일군은 더욱 열성적으로 빨치산 의심 지역을 파괴하고자 했는데, 솅켄도르프 대장은 이를 위해 1941년 9월 24일에 모길레프 회의를 열었다. 솅켄도르프 본인과 휘하 부대장들, 그리고 중부집단군 관할 구역의 고위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친위중장, 아인자츠그루펜 B의 [[아르투어 네베]] 친위중장, 그리고 무장친위대 기병여단[* 무장친위대 제8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의 전신이다.] 사령관 [[헤르만 페겔라인]] 친위중령 등이 참여한 해당 회의는 약 이틀간 진행되었으며, 대 파르티잔 작전의 기본 원칙으로 "적들의 완전한 절멸"을 채택하였다. 여기서 적이라 함은 파르티잔 뿐만 아니라 의심 가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며, 심지어는 여성과 아이, 그리고 노인까지 전부 포함한다. 솅켄도르프는 이 원칙을 휘하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 병력들 전체에 배포했고, 독일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원수는 이에 대해 "대 파르티잔 작전의 교본"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2년 8월 18일, 히틀러는 그 해 말까지 벨라루스 빨치산들을 전부 소탕할 것을 명령했다. 독일 군대는 그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결과는 참혹했다. 중부집단군의 벨라루스 점령 기간 동안 독일이 벌인 파괴로 인해 수백만의 아슈케나짐 유대인들과 벨라루스인들, 그리고 그들이 쌓아올린 민족 문화는 송두리째 뽑혀나갔다. [[국방군]]과 [[질서경찰]] 부대는 말 그대로 고삐가 풀린 채 의심 가는 주민과 마을을 전부 학살하고 불태웠다. [[아인자츠그루펜]] B는 가스 트럭을 몰고 돌아다녔고, 친위대는 말리 트로스테네츠 수용소를 세워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산하의 백루테니아 일반인민위원회는 민스크 게토를 '해산'하며 남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바흐-첼레프스키는 1942년에 파르티잔 진압 작전의 총책으로 임명되었고, 1943년에는 학살 전담 부대인 [[디를레방어 여단]]이 무장친위대 산하에 신설되었다. 1944년 국방군과 친위대가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한 이후 바르샤바는 완벽히 잿더미가 되었다. 중부집단군 관할 지역만 해도 이 정도였으며, 그 외 지역을 포함하면 학살의 규모는 더욱 거대해진다. 북부집단군 후방 지역의 사령관 프란츠 폰 로케 육군대장과 해당 구역 친위대의 [[한스-아돌프 프뤼츠만]] 친위대 및 질서경찰 중장은 발트 지역과 러시아 북서부 지역에서의 대량 학살에 큰 책임을 진다. 북부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는 이들의 학살 행위를 보고받고도 방임했다. 한편 남부집단군 후방 지역의 사령관 카를 폰 로케 육군대장과 [[프리드리히 예켈른]] 친위대 및 질서경찰 대장은 우크라이나 및 남러시아 지역에서의 학살에 책임을 진다. 남부집단군의 학살 행위 또한 매우 거대한 규모였는데, 상술한 것처럼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부터가 유대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바비야르 학살]]이 벌어진 곳도 바로 남부집단군 구역이다. > 초틀뢰터러: 프랑스 놈 하나를 뒤에서 쏴 죽였어요. 자전거를 타고 있는 놈이었죠. > 베버: 아주 가까이에서요? > 초틀뢰터러: 그렇죠. > 호이저: 그놈이 당신을 잡아가려 하든가요? > 초틀뢰터러: 뭔 헛소리예요. 그 자전거가 탐났거든요. > ---- > - 영국 정보부에 도청된 독일 병사들의 대화 내용.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237p에서 발췌. > "우리가 여자를 흔들어 깨우자 조금씩 의식이 돌아왔고 여자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어...... 여자는 독일군이 자기와 자기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들려줬어. 놈들이 여자의 다섯 아이들을 총살시키겠다며 헛간으로 끌고 갔어. 하지만 헛간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면서 아이들을 먼저 쏘아 죽였지. 놈들은 아이들을 쏘면서 재미있다는 듯 낄낄댔어...... 젖먹이 막내아들만 남았는데, 파시스트가 '아이를 위로 던져라. 그러면 내가 총으로 쏘아 맞히겠다'고 몸짓을 해 보였지.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땅바닥에 냅다 던져버렸어. 아이가 죽어버릴 만큼 세차게...... 자기 자식을...... 독일군 손에 죽게 두느니 차라리 그렇게 한 거야...... 여자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런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얼굴을 들고 사느냐며 자기가 갈 곳은 저세상뿐이라고......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 ---- > - 벨라루스 [[호멜|고멜]] 지역의 소련군 제225빨치산연대 정치위원 알렉산드라 니키포로브나 자하로바의 증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447p에서 발췌. 또는 위와 같이 수용시설 경비부대나 소수 병사들이 개인적 유희나 약탈을 목적으로 지나가던 민간인들에게 트집을 잡고 죽인 경우도 많았다. 이 과정은 매우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기에 수많은 목격자들, 더 악질적으로는 '관람객들'이 이 범죄 현장을 목격하거나 시시덕거리며 참관했다. 상부에서는 정보가 유출되지않게 사진 촬영을 금지했지만, 학살이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빈번했기에 통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병사들이 개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소장하거나 집으로 보내서 자랑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인 경우였다. 또는 지역 주민들이 학살 현장에 구경오거나[* 또는 저항의지를 꺾기 위해 강제로 참관하게 시키기도했다.] 심지어는 독일 본토에서 관광 형식으로 '놀러' 오는 경우까지 있었다. 일부 예술가들은 오로지 학살에 참여해보고 싶어서 동부전선을 찾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시각자료나 증인들 역시 많은 편이다. 이 사례는 [[독일 국방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이며, 200만명 가량의 유대인이 총살당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 홀로코스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크다. 그 외 다른 민족 희생자들의 숫자까지 더하면 이는 더욱 늘어난다. 동맹국과 점령지의 현지 부역자들도 이를 거들었다. 대표적으로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우스타샤]]는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와 같은 자체 수용소를 여럿 운영하며 유고슬라비아 지역 내의 수십만 유대인과 세르비아인들, 롬인들을 학살했다. 야세노바츠 수용소 한 곳에서만 32,000여명의 수용자가 사망했다. [[비시 프랑스]]는 독일의 요구가 없었음에도 공권력을 동원해 독일에서 빠져나온 유대인들을 자발적으로 수용소에 가두고 나중에는 열차에 태워 [[아우슈비츠]]에 넘겼다.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점령지에서는 이른바 'V-Mann(Vertrouwensman)'으로 알려진 자발적 부역자들이 비밀 요원 행세를 하며 이웃의 유대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제보하고 현상금을 받아 갔다.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 [[화살십자당]], [[대천사 미카엘 군단]], [[이온 안토네스쿠]] 정권의 [[루마니아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 우크라이나 봉기군, [[아라이스 코만도]], 라 밀리스 프랑세, [[크비슬링 정권]], [[흘린카 근위대]], 그리고 [[살로 공화국]] 시절의 [[검은 셔츠단]]과 같은 유럽 곳곳의 현지인 중심 친나치 부역 세력들부터 하루 먹고 살기 위해 유대인을 제보하는 일반 시민들까지 부역자들은 독일의 학살 행각에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며 희생자들의 수를 더욱 늘렸다. 하지만 아무리 인종주의에 물들고 현지인 보조부대의 협력을 받더라도, 수천 명의 사람을 계속해서 총살하는 것은 학살을 수행하는 병사들로서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었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이는 전쟁 와중에 소중한 탄약과 무기를 낭비하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최대한 학살을 은폐하고자 했던 독일 수뇌부로서도, 통제되지 않은 학살 현장에 대한 목격자들과 기록들이 계속해서 생산되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심지어 친위대 특무대 C와 D는 해당 지역의 유대인들이 너무 많다며, 이들을 한번에 총살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보고를 올렸다. 그렇기에 나치는 죽이는 이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더 효율적이고 통제가 용이한 학살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바로 하술할 발터 라우프 대령이 개발한 [[가스실]] 방식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살 집행과 파르티잔 토벌작전은 나치 독일이 점령지에서 전부 물러나고 패퇴할 때까지 계속된다. 소련 영화 《[[컴 앤 씨]]》나 폴란드 영화 《[[증오(2016)|증오]]》, 독일 드라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등이 당시 벌어졌던 광적인 집단 학살 행위를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영상 매체이다. 학술 서적으로는 죙케 나이첼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이 이 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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