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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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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방과 집단 수용 == ||<table align=center><width=660> [youtube(Il7LB4O8O4U)] || || {{{#!wiki style="text-align: center" 바르샤바 게토에 도착한 독일 유대인들. 이들은 1942년 7월경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가스실에서 대부분 살해당했다.}}} || > 아트: "[[소스노비에츠]]에서 다들 증명서에 도장을 받아야 하던 때 얘길 하던 중이었어요." > > 말라: "스타디움 말이지? 그래... 그때 우리 어머니도 끌려갔지. 어머닌 추방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네 채의 아파트로 끌려 가셨는데 일종의 감옥이었어... 거기에다 수천 명을 집어넣었지. 너무 답답해서 일부는 질식했어. 먹을 것도 화장실도 없고... 끔찍했지. 사람들은 비참한 처지를 끝내고 싶어 창밖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했어." > ---- > - 홀로코스트 생존자 [[말라 슈피겔만]](폴란드 유대계 미국인)의 증언.[*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 한국어 역본 98p] 점령 지역에서 총살과 함께 벌어진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나치의 집권 초기인 1934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통과된 후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유대인들의 모든 권리와 재산을 몰수하고 거주지에서 강제적으로 추방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독일 [[국적 박탈|국적이 박탈]]되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나치의 유대인 처리 방침이 전멸로 명확히 확정나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은 주로 국외추방되었다. 또는 유대인들이 박해를 견디다 못해 인근 국가들로 이주해버린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이때 영국이나 미국으로 피난간 독일 유대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음악감독 [[한스 짐머]]의 어머니로 2차 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영국으로 도피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이런 이유로 인해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한 경우였는데, 이쪽은 반대로 네덜란드가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참화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진 후 해외 이주가 막히고 독일의 유대인 처리 방침이 점차 극단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독일 본토와 점령지의 유대인들은 주로 다른 민족 거주지와 유리된 별도의 구역인 [[게토]]에 강제 수용되었다. 게토는 서유럽과 독일 영내에는 없었지만 동유럽과 남동유럽, 특히 독일령 폴란드 지역에 여러 곳이 세워졌으며, 동유럽 유대인들이 주로 수용되었다. 게토에 모인 유대인들은 끔찍하게 높은 인구 밀도와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살아야 했으며, 이를 버티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많았다. 많은 수의 독일 사업가들이 게토의 유대인 노동력을 헐값으로 착취하곤 했는데, 그나마 이것이 게토 유대인들의 거의 유일한 소득원이었다. 허가받지 않고 나갈 수는 없었고, 이를 시도할 시 경계병에게 총살당했다. 또한 갑작스런 검속 등을 통해 강제 노동 수용소로 잡아가는 등의 행위도 이루어졌다. 1942년까지는 나치의 유대인 처리 방침이 명확하지 못했기에 일단은 게토에 마구잡이로 수용해두었다. 그러나 게토는 결코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절멸이라는 결론이 나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이미 유대인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게토 내에서 때때로 집단 총살이 무작위적으로 벌어졌으며, 우치 게토의 주민들은 1941년 말 가동을 시작한 최초의 절멸수용소인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 시험적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던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처리 방침이 절멸로 확정된 이후, [[폴란드 총독부]] 지역에서 친위대 주도 하에 온전히 학살만을 목적으로 하는 '''절멸수용소'''들이 추가로 가동되면서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 게토들은 하나 둘 해산되었다. 말이 해산이지 독일군과 친위대가 이주를 명목으로 주민들을 조금씩 기차편으로 실어와 그대로 절멸수용소의 가스실에 남김없이 처박는 끔찍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노동가능한 극히 일부의 인력들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으며, 강제적인 노동과 게토보다도 열악한 수용소 환경에 시달리며 죽어갔다. 전쟁 후기인 1944년에 들어서면 폴란드를 비롯한 독일 점령지들의 유대인 대다수가 이미 가스실에서 살해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탈리아와 헝가리에도 독일군이 강제적으로 진주하면서, 그전까지는 안전했던 두 국가의 유대인들도 학살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들은 잡히는 즉시 일종의 허브라 할 수 있는 집결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일부는 독일 각지의 노동수용소들로, 대다수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 및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집결수용소들은 가스실과 같은 시설은 없었지만 허브의 특성 상 수용 인원의 밀도가 심각할 정도로 높았던데다 환경도 그에 비례해 더욱 열악해서, 많은 수의 인원들이 수인성 질병으로 죽어갔다. 대표적인 집결수용소가 바로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와 베르겐 벨젠 수용소이다. 베르겐 벨젠은 그 불결한 환경으로 악명높았으며 독일계 네덜란드 유대인이었던 [[안네 프랑크]]도 이곳에서 티푸스로 사망했다. 한편 테레지엔슈타트는 중부 유럽에 위치했기에, 서남유럽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거쳐간 곳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결국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블라덱의 경험을 주제로 만든 만화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1부와 [[로만 폴란스키]]가 자신의 경험과 생존자 슈필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영화)|피아니스트]]》에서 대략적인 게토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오스카 쉰들러의 이야기를 다룬 《[[쉰들러 리스트]]》 또한 게토 생활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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