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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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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천도 이후 === [youtube(Ft0C_VWomGI)] 공식적으로 한성부로 개칭하는 동시에 한양도성 내를 5부 52방으로 나누었다. 이때에 이르면 한성부는 어느 정도 건설이 끝나고 [[경복궁]], [[사직단]], [[종묘]], [[종로]], [[남대문로]] 등이 완성되었다. [[파일:한양도성.gif]] 드라마 [[정도전]]에서 묘사된 당시 한양도성의 구조. 처음 천도될 당시의 구조이므로 [[창덕궁]]이나 [[덕수궁]]은 물론 [[경희궁]] 등 태종 이후에 지어진 대궐들은 없다. 그러나 [[정종(조선)|정종]]이 즉위한 직후 다시 [[개성시|개성]]으로 환도했다. 2년 후 [[태종(조선)|태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한양으로 환도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때 [[하륜]]은 무악(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 [[홍제동(서울)|홍제동]], [[봉원동]] 일대를 수도로 삼을 것을 주청했고, 기존의 [[한양도성]]과 무악이 후보지에 올랐다. 당시 개성 잔류나 무악 천도 의견이 대세였고 한양 환도는 태종이 주장했다. 한양을 원했던 태종은 개경 도읍을 유지하되 종묘와 사직은 한양에 두자는 절충안을 내놓기도 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태종은 종묘에 들어가 엽전을 던져서 길흉을 점쳐 볼 것을 제안했다. 총 9번 던져서 점을 쳐 보니 한양이 2길(吉) 1흉(凶)이었고, 개성과 무악은 각각 2흉(凶) 1길(吉)이었다. 그 결과 다시 한성으로 환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본 이가 없기 때문에 태종이 이미 의중을 다 정해 놓고 점괘를 짜맞췄다는 이야기도 있다. 5부 52방으로 나누었던 한성부의 행정구역은 [[세종(조선)|세종]] 대에 서부의 영견방(永堅坊), 인지방(仁智坊), 취현방(聚賢坊)을 폐지하며 5부 49방으로 줄었다. [[1424년]]([[세종(조선)|세종]] 6년)에 이르면 한성부의 인구가 증가하고, 공신들에게 나눠 줄 땅이 모자라게 됨에 따라 [[흥인지문]]과 [[남소문]][* 현재 남소문이라 부르는 [[광희문]]은 이때 없었고, 남소문은 지금의 반얀트리호텔 바로 옆에 있었다.] 바깥 지역을 한성부에 편입하고 동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 남부 정심방(貞心坊)과 예성방(禮成坊) 성신방(誠身坊)에 편제했다. 이것이 [[성저십리]]의 시초이다. 당시 편입된 지역은 둔지산 동쪽의 현 [[용산구]] [[이태원동]]부터 [[성동구]] [[성수동]]까지, 북쪽으로는 [[동대문구]] [[수유동]]에 이르렀고, [[신당동(서울)|신당동]], [[행당동]] 이남 지역은 남부에, [[왕십리]] 이북 지역은 동부에 들어갔다. [[1461년]] [[2월 27일]]에는 지금 [[용산구]], [[마포구]] 대부분(합정동 서부-양화진-, 망원동, 성산동, 상암동 제외), [[서대문구]] 대부분(가좌동 제외), [[은평구]] 응암동, 불광동, 녹번동까지가 모두 성저십리에 편입되었다. 그렇게 편입된 지역 중 서부 지역은 서교, 동부 지역은 동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1426년]](세종 8년)에 보고된 인구 통계에 의하면 도성 안의 인구는 103,328명이었으나 성저십리의 인구는 6,044명으로 전체의 5.5%에 불과하였다. 조선 건국과 동시에 개경에서 이주해 온 조선의 핵심 세력들은 도성 안에 자리를 잡았고, 원래 성 안에 살고 있던 중인 계급의 사람들은 이들에게 밀려 도성 밖 성저십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상경한 사람들이 성 밖에 정착하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성 밖의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났고 [[성저십리]]가 확장되었고, 대부분 경제활동에 종사하면서 수도 서울이 경제도시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1789년]]([[정조(조선)|정조]] 13년)에는 성저십리 인구가 무려 76,782명으로 전체 인구의 40.6%로 증가하였다. 1503년에 [[연산군]] 때 인접한 [[양주시/역사|양주목]], [[광주시/역사|광주목]], [[고양군|고양현]] 등을 소개하고 영서역과 덕수원의 위치를 조정하여 유행처(놀이터)로 만들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원상복구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선조는 [[개성]]으로 몽진했고, 한성은 그야말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선조는 1년 만에 한성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에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이 불타 조선 전기의 건축물들은 거의 사라졌고, 선조는 초가집에 머물다가 말년에 가서야 창덕궁을 임시로 복구해서 들어간다. 임진왜란 때의 피해가 워낙 커서 복구사업은 무려 [[인조]] 때까지 이어졌고, 그마저도 경복궁은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방치되다가 조선 말엽에 가서야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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