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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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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 === 1941년 소련 지상군은 304개 사단[* 179개 보병사단,19개 산악보병사단, 61개 기갑사단, 31개 기계화사단, 9개 기병사단, 4개 산악기병사단, 1개 NKVD 기계화사단 등 총원 548만명.]과 22개 독립여단으로 구성됬다. 소련 해군은 1941년 기준 전함 3척,순양함 7척,구축함 59척,잠수함 218척,어뢰정 269척을 보유했다. 1941년 6월 [[독소전쟁]](대조국전쟁) 발발 이후, 12월 [[모스크바 전투]] 직전까지 약 5개월간 소련군이 날려먹은 병력은 사상자와 포로를 합해 약 600만으로서, 전쟁 직전의 총전력을 거의 탕진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여기에 장비의 손실도 엄청나서 전투기와 전차의 손실량은 각각 2-3만대에 육박했다. 이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첫번째로 [[적백내전]] 당시부터 장교단의 질이 열악했고 대숙청으로 조직력과 지휘력이 매우 약화된 점, 두번째로 부적절한 병력 배치, 세번째로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대량의 무기를 노획하고 2년간 실전경험을 쌓아 최강의 군대로 성장한 독일군의 가공할 전력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당시 독일군 명장들인 [[하인츠 구데리안]],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발터 모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이 역시 참전했다. [[소련 육군]]은 대조국전쟁 동안 포병과 전차의 보유량에서 독일을 앞섰지만 충분한 숫자의 숙련된 포병 간부와 성능 좋은 무전기의 부재로 야포의 포격은 직사를 선호했고 공군도 [[스페인 내전]]과 [[할힌골 전투]]라는 실전 경험이 풍부했음에도 조종사와 공군 간부들의 능력의 상대적 열세로 전쟁 말기까지 전투기와 폭격기 숫자에서 우세한 상황에서도 고생을 많이 했다. [[소련 해군]] 역시 다수의 최신 잠수함을 보유하게 됬고 상대하던 크릭스마리네가 1차대전 당시 독일 해군에 비해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임에도 킬 군항에 기뢰를 선제적으로 매설하는 등 적극적이고 민첩한 전과를 올렸던 1차대전 당시 해군에 비해 섬세한 면이 부족했다고 평가된다. 소련은 완벽한 기습이었던 [[바르바로사 작전]] 후 엄청난 병력을 날려먹었기 때문에 야전의 허리가 되는 경험 많은 [[초급장교]]와 부사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며,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혀 훈련을 받지 않은 초급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일선 지휘를 맡으면서 1943년 말까지 독일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사상자를 냈다. [[키예프 전투(1941년)]]만 해도 최소한 40만명 이상의 포로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대참패였고 스몰렌스크와 민스크에서도 준하는 수준의 대패를 겪었다. 붉은 군대의 초기 참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적백내전]] 당시처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소비에트의 강력한 국가주의 사상으로 단결해 독일군과 추축군의 침공에 저항했으며 이는 [[탄넨베르크 전투]]와 1915년 대후퇴로 대표되는 초반 참패에 사기가 추락해 끝내 몇년도 버티지 못하고 체제가 붕괴된 [[러시아 제국]] 말기의 [[제1차 세계 대전|1차 세계대전]]의 사례보다 더 강력한 전투 의지의 증명이었다. 전쟁터란 현세의 지옥에서 살아남으며 사관학교가 아닌 실전에서 교리를 학습하게 된 초급장교나 부사관들의 레벨업이 계속되고, 사병들도 경험을 쌓으면서 초급장교나 부사관으로 계속 승진함에 따라 소련군의 전력은 향상되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 이후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대숙청 이후 쾌속 승진한 40대 고급지휘관들의[* 1945년 종전 당시 원수까지 오른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가 전쟁 발발 당시 만 44세(1897년생), 그리고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가 45세,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46세였고 대장까지 오른 [[바실리 추이코프]], [[알렉산드르 노비코프]]는 41세, [[이반 체르냐홉스키]]는 겨우 34세밖에 되지 않았다.] 지휘가 세련되어 가면서 소련군은 점점 소프트웨어 면에서 독일군에 맞설만한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소련은 이미 1941년 전쟁 발발 직후부터 독일이 1943년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총력전 전 산업 총동원 체제를 실시하였다. 독일군의 진격이 예상되는 곳에서는 아예 [[공장]] 전체의 설비가 며칠 만에 해체되어 [[우랄 산맥]] 동쪽에서 조립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무기의 대량 생산을 달성함으로서 초기에 손실했던 장비와 무장을 만회하고도 넘칠만큼 보급을 확보하게 되었다. 분명히 개별 무기의 성능은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한 독일군이 우수했지만, 소련은 개별 성능은 독일에 미치지 못해도 [[물량전|생산 비용, 소비 자원, 생산 물량 등을 고려한 총합은 독일보다 우수한 것]]으로 하드웨어 면에서도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 지휘부는 소련을 군사적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특히 미군이 개입한 이후로는 소련의 정복이 아니라 전선 안정화를 목표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3년 여름 소련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한 [[쿠르스크 전투|치타델 작전]]을 실시했다가 위와 같이 기량이 향상된 소련군에게 결정적으로 패하면서 동부전선의 균형추는 소련측으로 기운다. 이후 소련군은 투하쳅스키가 생전에 꿈꾸었던 종심작전 교리를 십분 발휘하여 독일군을 몰아붙여 결국 승리했다.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만주 작전]]에서 인상적인 기갑 웨이브 공세를 발휘함으로써 서방측에게 깊은 인상과 함께 공포감을 줬다. 이후 소련 영토와 위성국들에서 고위 소련군 장성이었던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과 소련군 출신에 소련의 위성국 국방부 차관이지만 엄연한 일국의 국방부 차관까지 오른 [[카롤 시비에르체프스키]]를 전사시킬 정도로 격렬한 대반란전을 수행하면서 2차대전 참전은 마무리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규모와 강도에 존 암스트롱 같은 학자들에 의해 비견될만큼 쌍방 사상자가 수만명 이상은 우습게 돌파할 정도로 격렬한 싸움이었고 2차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까지 계속됬다. 소련군이 싸운 반군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한 곳에만 최대 20만명에 달하고 일부 지역에선 [[여단]]과 [[대대]]급 작전이 가능한 규모였다.] 소련군의 탈환 이후에도 소련 통치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던 [[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우크라이나]]에서는 민족주의 반군 숲의 형제단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의 항전을 진압하는 과정은 2차대전 후인 195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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