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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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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시대]] == 1924년 레닌 사망 직후부터 시작된 공산당 내의 혼란기에 세계혁명을 주장한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를 위시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1928년 최고 지도자가 된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였으며 공업 생산 목표를 제시하며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농업국가인 소련을 공업국가로 바꾸기를 원하였다. 1931년 스탈린은 '''"우리는 서방에 비해 50년 뒤쳐져 있습니다. 이제 그 격차를 10년 내로 따라잡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으며 [[계획경제|소련의 모든 산업과 경제 활동을 국가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단기간에 서구권을 위협할 만큼 급격하게 성장했다. [[대공황]]으로 서방이 무너져 갈 때 독자 경제권이었던 소련은 대공황의 영향을 덜 받고 성장할 수 있었으며 30년대의 초고도 성장으로 1938년에는 유럽 제1의 공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물론 유럽 내 압도적인 1위였던 것은 아니고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에는 소련과 독일의 국력이 엎치락 뒤치락했다. 일례로 2차 대전 개전 시점인 1939년에는 소련이 앞섰으나 독소전쟁 발발 시점인 1941년에는 독일이 역전했고 2차 대전 말미에는 다시 소련이 재역전했다.] 그 이면에는 혹독한 인권 탄압과 눈물어린 희생이 감추어져 있었다. 나라 자체는 부강해졌지만 스탈린 시대 소련 국민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스탈린은 초고속 공업화를 위하여 [[농업]]을 모조리 집단농장화하고 농민들을 쥐어짰으며 구성국을 쥐어짠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홀로도모르]]가 벌어지기도 했고 중공업과 달리 경공업은 발달이 미미하여 생필품도 모자란 편이었다. 스탈린은 공업화와 함께 정치적으로는 [[대숙청]]을 감행하여 반대세력과 죄없는 인민들을 모조리 [[시베리아]]나 서부 러시아의 [[굴라크]]로 보내는 등 숙청하고 그야말로 철권독재를 했다. 스탈린의 강력한 정적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는 [[멕시코]]로 도망을 갔으나 1940년 스탈린이 보낸 라몬 메르카데르라는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물론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죽었고 후임자인 흐루쇼프가 트로츠키 암살자인 라몬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을 수여했다.[*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오시프 스탈린]] 격하운동을 했지만 그 역시 트로츠키는 극혐했다.] 어쨌든 서구권의 열강들이 [[대공황]]으로 휘청거리는 사이 스탈린의 소련과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나란히 약진했고 스탈린은 초기에는 [[반공]]을 외치는 독일에 맞서 [[서유럽]] 국가들과의 안보동맹을 추구했으나 일이 잘 안 풀리자[* 동맹 대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을 못 믿는 데다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의 눈치도 봐야 해서 협상에 미적지근했다.]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에는 나치 독일과 [[폴란드 침공|폴란드를 양분하고]] [[겨울전쟁|핀란드를 침공하여]]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는 등 잘 나가다가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에 의하여 크게 뒤통수를 맞았다.]] [[소련군]]은 대숙청 이전부터 고질적인 문제였던 [[잉여]]가 된 군 지휘 체계와 그 누구도 예고할 수 없었던 기습의 대효과로 인해 [[독소전쟁]] 초반에 크게 밀렸으나 북부의 [[레닌그라드]], 중부의 [[모스크바]], 남부의 [[스탈린그라드]] 등 주요 도시들을 사수하고 1943년 8월 지상 최대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에서까지 승리하면서 전황이 반전되었으며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대반격하여]] 결국 1945년 5월 [[베를린]]을 [[베를린 공방전|함락시키기에 이른다.]] 1945년 8월에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리자]] 소련 역시 [[일본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서부터 진격해 내려왔고]] [[8.15 광복|8월 15일에는 일본이 항복]]했다.[* 이때의 진격으로 소련은 1905년 [[러일전쟁]] 패배로 [[일본령 가라후토|일본에게 빼앗겼던]] 남사할린 및 전략적 요충지인 [[쿠릴 열도]]를 되찾는다.] 다만 독소전쟁을 치르면서 3,000만에 육박하는 국민들이 희생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감수했다. 이 전쟁을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이라고 하는데 약 4년간 전쟁하느라 공업과 농업의 기반이 전부 날아가 버려서 재건하는 데 또 인민이 갈려나가야 했다. 여전했던 농업 집산화 여파와 2대전 전쟁 피해로 90만명 가량이 추가로 아사한 1946년-1947년 소련 기근까지 일어났다.[[https://en.m.wikipedia.org/wiki/Soviet_famine_of_1946%E2%80%931947|#]] 하지만 [[결과는 좋았다|승리의 열매는 달았다.]] 사실 소련의 영토는 [[러시아 제국]]의 방대한 강역에서 엄청나게 축소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공산국가는 전세계에 소련과 [[몽골 인민공화국]], 그리고 1921년부터 1944년까지 존속하다가 끝내 소련에 편입된 [[투바 인민공화국]]이 끝이었지만 소련은 2차 대전의 승리로 그 잃었던 영토를 거의 다 되찾음은 물론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을 전부 영향권으로 집어삼켰으며 [[아시아]]에서도 북한과 중국, 베트남 등을 공산 국가로 만드는 큰 수확을 얻었다. 한편으로 미국의 턱 밑인 [[쿠바]]에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공산권]]으로 갈아타고 [[쿠바 미사일 위기|두고두고 미국의 골치를 아프게 하며]] [[먼로 독트린]] 이후 계속 [[미국]]의 앞마당 취급받았던 [[중남미]]에서 대규모 좌익 운동, 좌파 정치 세력을 지원하는 등 '''자본진영의 총본산 턱 밑에 [[공산주의]]의 칼을 들이대는''' 성과를 거뒀다. 그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과 군사력에 힘입어 소련은 마침내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초강대국]]'''이 되었고 공산진영의 대표국가로서 약 50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 모든 곳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력과 보이지 않는 대결을 반복하였다. 통칭 [[냉전]]이라고 불리는 시기 동안 [[한반도]]와 [[베트남]], [[앙골라]],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온갖 지역 국가들이 이념 대립의 대리전장이 되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NATO]]와 소련을 위시한 [[바르샤바 조약기구|WTO]]는 [[상호확증파괴|서로 확실하게 개박살을 내버리려고]] 양 진영의 주요 도시에 항상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을 겨누고 있었다. [[자본주의]] 진영에 속했던 국가들에게 강대한 군사력과 매혹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소련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생산력 자체가 부족한 가운데 사적 소유가 철폐된 결과 등장한 '비민주주의적인 계획경제'에 내재된 효율성 부진으로 인해 전면적 대립보다는 [[데탕트]], 공존 경쟁이 추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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