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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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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레닌|레닌 시대]] ==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러시아 혁명|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후 [[10월 혁명]]을 계기로 [[블라디미르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았지만 [[사회주의]]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할 것과 [[1차대전]] 참전 중단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인한 전쟁 이탈을 우려한 열강들이 잔존한 황제파와 공화파, 즉 백군을 지원하면서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심지어 볼셰비키당에서조차 반대 의견이 있었던 가혹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가 군대 보유를 금지당하며 발생한 힘의 공백으로 내전은 전면적으로 확대된다. 소비에트 내부 사정도 처참했던 것이 [[적백내전]] 당시 소비에트 치하 대도시들은 [[1차대전]] 때부터 심화된 식량 위기로 [[체카]]와 붉은 군대가 감시하고 탄압하는데도 만연한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고 소비에트 정부는 이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볼가 강 유역 등에서 강제 징발을 벌였는데 이 수탈 때문에 소련 정부가 인정한 수치만 500만명에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천만명을 초과할지도 모르는 대규모 농민 아사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https://en.m.wikipedia.org/wiki/Russian_famine_of_1921%E2%80%931922|#]] 소비에트 정권은 초반에는 일부 중심 도시를 제외한 영토 전역을 상실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국 [[볼셰비키]]가 승리를 거두면서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벨로루시(현 벨라루스)]],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자캅카스(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4개국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했다. [[자본주의]]가 사회 체제이지 이념은 아닌 것과 달리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는 이념일 뿐 사회 체제로 구체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세계 최초로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등장과 그 운영을 두고 말이 많았다. [[독일]]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카를 카우츠키]]는 '이건 발칸식 독재이지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 선생이 생각한 [[혁명]]이 아니다.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한 혁명([[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빠진 반쪽짜리 혁명)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전체주의]]적 [[독재]]정권)을 낳을 것이다'라며 강하게 [[디스]]했고 이에 소련의 통치자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의 부하이자 이론가였던 [[레프 트로츠키]]는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며 카우츠키의 지적을 강하게 쏘아붙였다. 마르크스는 [[사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은 유물사관이라고 불리며 사회의 발전단계가 '원시 공동 사회 → 고대 노예 사회 → 중세 봉건 사회 → 근대 자본주의 사회 → 공산주의 사회' 순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 중간 단계를 어떻게 거치느냐?'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한 논의점이 되었다. 카우츠키와 같은 온건파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나아가자"는 입장인 반면 레닌과 트로츠키 같은 급진파는 "절차 따위는 적당히 무시하고 다음 단계로 가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극심히 견해 대립이 발생했다.]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혁명은 단계적인 절차(민주적 절차)를 통해 점차 나아가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것은 자본주의가 부후화되어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듦에 따라 불가능해졌으므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가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전화시켜, 폭력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수립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낮은 생산성과 이로 인한 일반화된 궁핍이라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렇듯 처음부터 소련이 강력한 공업 국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1928년까지만 해도 소련의 공업 생산량은 [[미국]]의 8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 물론 이건 소련이 공업화가 안 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이 너무 넘사벽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2차대전 당시 미국 1개 주에서 생산하는 철강 생산량이 세계구급 공업 강국이었다는 독일 전체의 철강 생산량과 맞먹었다고 하니...]이었고 [[러시아 제국]]의 산업 혁명도 19세기 말~20세기에 들어서야 시작될 정도로 늦었으며 소련도 서구에서 봤을 땐 가난한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 처음으로 소련의 최고 권력자(최고 인민회의 의장)가 되었던 레닌은 소련을 공업국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소련은 철강 생산량이 내전 이전에 비해 5분의 1로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레닌은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펼쳐 소규모의 사기업, 상업을 인정하는 등 시장 경제 일부를 도입하였다. [[블라디미르 레닌]] 시기 소련에서는 [[상인]], 경제인, [[부농]], [[장교]], [[귀족]], [[성직자]] 등 구체제 [[부르주아]] 계층과 그 가족에 대한 투표권 박탈 등 참정권 거부와 [[소련군]] 입대 금지 등 보복성 계급차별 조치가 이뤄졌다. 소련군과 소련 군사학교에 대한 구체제 인사 가족들의 입대 원천 금지령은 [[1935년]] 소련군의 대대적인 개혁 이후에야 해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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