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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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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루쇼프 시대 소련 농업의 문제점 ==== 상술한 처녀지 개간 사업이 일으킨 참사 이외에도 흐루쇼프는 소련 농업에 많은 악영향을 미쳤다. 흐루쇼프는 그간 소련 농업의 고질병으로 거론되던 MTC 문제에 손을 댔다. 농기계 임대 기관이면서 당과 국가의 농촌 통제 수단인 MTC는 개별 농장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MTC의 연간 계획은 작업량을 기준으로 입안하고, 콜호즈는 농기계를 사용할 때마다 MTC에게 현물을 지급해야 했기 때문에 양자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농기계 사용량을 최소화하거나 최대화하려 했다. 말렌코프 – 흐루쇼프의 농업 개혁 조치가 이뤄진 뒤에도 콜호즈들이 국가에 납부한 농산물의 절반이 MTC에 무상으로 넘어갔다. [* 국영 농장인 소브호즈는 원래 자체 보유한 기계를 사용했기 때문에 MTC와는 별 관련이 없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MTC를 폐지해 그 장비를 콜호스에 매각해야 한다는 제안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원래 이 제안은 1952년에 당 정치국에 올라왔고, 스탈린은 이를 거부했던 것인데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우려한 MTC 해체의 후폭풍과 부작용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1958년 2월, 당 중앙위 총회의 결의에 따라 연방 정부는 농축산품의 가격 조정과 MTC 폐지를 공포했다. 앞으로 콜호즈들은 자체 예산으로 MTC가 소유하던 기계를 구매한 다음, 농기계의 보수 · 관리 · 부품 및 연료 확보 · 농기계 관리원 및 운전수에 대한 급료 지급 업무를 맡게 되었다. 갑작스런 조직 해산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서 앞으로 콜호즈 소속이 되는 전직 MTC의 직원들에게 각종 혜택을 지급하고 콜호즈의 농기계 관리를 보조해 주기 위해서 수리 기술부(PTC : ремонтно-технические станции)를 설립했다. 농기계 전반을 관리하던 MTC와 달리 PTC는 농기계 수리와 상태 점검 업무만을 맡았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성급한 조치는 그의 전임자가 예견한 문제를 일으켰다. 첫번째, 조직이 해산될 예정이던 MTC는 기계의 도매 가격이 인상된 점을 적용해 기존보다 더 높은 가격에 농기계를 콜호즈에 넘겼다. 예전부터 저성장과 예산 부족 문제를 겪던 콜호즈에는 대량의 농기계를 구매할 재원이 없었고 결국 막대한 채무를 감수하고 농기계를 떠안았다. 1961년 기준, 농기계 구입을 명목으로 콜호즈들이 은행에서 빌린 채무가 20억 루블을 넘을 지경이었다. 농기계들을 보관할 장소와 이를 정비하고 수리할 작업장, 농기계들을 관리할 기술자들까지 모든 게 부족했다. MTC의 많은 기술자들과 트랙터 운전사들은 인프라가 낙후되고 생활이 불편한 농촌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서 자신들을 받아줄 수 있는 도시로 떠났다. 소련 농업은 단시간에 다수의 숙련공들을 상실했고, 농기계 사용량이 감소했으며 고장율은 증가했다. 콜호즈는 막대한 구매 비용을 신속히 납부할 것을 강요받았고 이 때문에 재투자가 감소하고 농민의 급료도 인하되었다. 이는 농업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쳤다. 연방 정부는 이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PTC를 설치해 두었지만, 제 기능을 다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PTC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추가적으로 차량 · 농기구 · 농기계 · 부품 · 연료 가격을 인하하여 콜호즈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지만, 뭔 짓을 하던 콜호즈 자체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MTC가 사라진 뒤에 콜호즈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제대로 구매를 해주지 못하니 이전까지 MTC에 부품과 농기계 등의 제품을 제공하던 공장들은 수요의 급격한 감소와 재고 급증으로 곤욕을 치르기 시작했다. 두번째, 흐루쇼프는 1950년대 말부터 콜호즈의 통합을 추진하여 총 125,000건의 통합을 이뤘다. 그래서 1955년에 87,500개소이던 콜호즈가 흐루쇼프가 숙청당하던 64년에 37,600개소로 감소했다. 또한 콜호즈들을 소브호즈로 전환시켜 농민들을 농업 노동자로 전직시키는 정책을 집행해 1953년에 4,857개소이던 소브호즈가 1954년에 100,78개소로 증가했다. 이는 농업은 규모가 커질수록 효율이 올라간다는 점과 농업 기계화의 향상, 농업 인구의 감소를 고려한 조치였지만, 통폐합을 추진해 농장의 규모를 늘려도 큰 효과는 없었다. 도리어 산촌 지역에서는 대규모 농장의 경영이 불가능해 농업 경영이 더욱 어려워지기도 했다. 세번째, 콜호즈들의 자율성을 높이겠다고 시행한 조치들은 명목상의 자율성 강화에 그친 게 많았다. 생산 단위들은 여전히 제대로 된 권한이 없었으며 연방 정부의 연간 - 장기 농업 계획은 불완전했다. 하부 계획과 과제들이 자주 바뀌었으며 지방 관료들은 생산 할당량을 자주 자의적으로 변경했다. 이것은 성과에 목마른 크렘린이 지속적으로 하급 기관을 쪼아댄 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산업화를 성공시키고 나치를 척살한 다음, 동유럽 전역을 차지하여 신의 자리에 오른 스탈린과 달리 그 후계자들은 그만한 권위가 없었고, 그런 권위를 얻을 방법도 없었다. 그들은 산업화 시기의 스탈린처럼 성과를 증명해 집권의 정당성과 인민의 인기를 얻어야 했다. 소련의 최고 통치자인 흐루쇼프는 전국 각지를 돌며 자신의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는지 확인하고 성과가 낮은 지역이나 생산 단위의 책임자들을 마구잡이로 색출해 책임을 묻거나 잘랐다. 지방 공화국은 물론 연방의 농업부 장관들도 자주 교체당했다. 최고 책임자인 장관까지 수시로 잘리는 판국에 상부에서 압박을 해오는데 여기에 굴하지 않을 관료나 당 간부는 없었다. 그래서 지역의 생산 할당량 달성이 어려워지면 지방 관료들은 콜호즈에 압력을 행사하고 당 간부들이 농장을 돌며 농산물 매각을 강요했다. 소련의 경제학자들과 농업 전문가, 실무 관료와 당 간부들은 수요 - 공급 예측, 장기 계획 수립, 거시 경제 목표 결정 분야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여러 가지 알고리즘을 개발 · 시험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소련 경제를 개선할 수 있는 이러한 개혁들은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얻길 원하는 흐루쇼프의 관심을 잘 받지 못했고 크렘린은 계획과 과제를 수시로 바꿔댔다. 농학 관련 연구 기관들을 농촌 지역으로 이전하는 조치도 성과는 있었지만, 그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협동조합의 활동도 농민들의 불신과 규제 때문에 성장이 느렸다. 콜호즈 자유 시장의 판매량도 연방 정부의 이용 시간 제한 조치 때문에 감소했다. 네번째, 흐루쇼프는 1956년 8월에 콜호즈 농민을 제외한 모든 도시민이 소유한 가축에 세금을 부과했다. 이는 도시민과 도시 근교의 주민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농민들이 국영 상점에서 가축에게 급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빵과 감자, 각종 식료품을 구입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농민이 빵을 가축 사료로 주는 일은 정부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으나, 증산 압박을 받는 농민들은 사료가 부족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또한 콜호즈와 소브호즈의 부업 경영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사료의 판매와 조달 과정에 제한을 가하고 도시민의 가축 소유를 다시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아르텔과 코뮌 사이에 끼여 있는 소련 농업의 상태가 불만족스러웠을 수도, 도시와 도시 근교를 중심으로 농업의 사적 경영이 확산되는 현상을 위협으로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부업 경영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가 변덕을 부려 갑자기 강화한 것은 부적절했다. 1957년, 흐루쇼프는 앞으로 몇 년 이내에 축산품 생산 분야에서 미국을 따라잡자는 허황된 운동을 제안했다. 1956년 기준으로 미국은 1,600만 톤, 소련은 750만 톤의 육류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걸 몇 년 안에 따라잡자는 건 루스의 대지모신 모코쉬가 가축을 복사하는 축복을 내려주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1958년, 흐루쇼프는 자신의 고향인 칼리노프카에서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가축들을 '자발적'으로 농장에 기부한 사실을 언급했다. 이후, 수만이 넘는 관료와 당 간부들이 농민들에게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가축을 농장에 넘길 것을 강요했다. 막대한 가축들이 강제로 농장으로 넘어갔지만, 1958년의 육류 생산량은 전년 대비 30만 톤, 1960년에는 100만 톤 증가한 수준이었다. 사료가 부족한데 가축의 수는 늘어났고, 위에서는 압박을 가하는데 우유와 육류 가격이 낮아서 키우면 키울수록 손해였다. 농민들의 근로 의욕은 낮았고 생산을 증가시키는데 필요한 기계와 물자, 사료가 부족했다. 상급 기관들은 육류 생산과 가축 사육을 동시에 늘리라는, 서로 일정 부분 상반되는 목표를 하달했다. 그래서 육류 생산을 높이기 위해 아무 의미 없이 가축들을 도살했고, 그러다가 가축 사육량의 증감을 보고할 때가 되면 도살을 중단했다. 흐루쇼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스탈린 시대에 자주 나타났던 일들이 재현되었다. 곳곳에서 농업 영웅들이 출현하고 생산량 조작이 이뤄졌으며 선전용으로 쓸 사례들이 튀어나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랴잔이다. 1959년, 랴잔의 당 위원회 1서기인 라리오노프가 할당량의 2배에 달하는 10만 톤의 육류를 판매하고 1960년에는 20만톤을 판매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고무된 크렘린은 라리오노프에게 사회주의 노력 영웅의 칭호를 더해주고 랴잔의 사례를 전국 각지에 성공 사례로 전파했다. 그러나, 랴잔의 성공은 신기루나 마찬가지였다. 라리오노프는 랴잔의 주민들로부터 육류를 강탈하고 그 대가로 영수증만 던져 주었다. 학생들은 강제로 토끼를 사육해야 했고 농촌에서는 라리오노프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젖소까지 도살했으며 공무원들은 인근 주들을 돌아다니며 고기를 사왔다. 이 사실이 폭로되자, 라리오노프는 사무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농업 전문가를 자처한 흐루쇼프의 농업 정책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내었고, 흐루쇼프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반대를 무릅쓰고 급진적인 농업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목표와 현장의 상황을 살피지 않은 지시, 지나치게 성급한 조치와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스러움은 1963년의 대참사로 이어졌고 이러한 흐루쇼프의 행보는 그가 그토록 비난을 퍼부었던 그 자신의 전임자와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1964년부터 작황이 평년작 이상을 넘어 농업이 회복되지만, 흐루쇼프를 구해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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