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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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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스탈린에서 흐루쇼프 정권까지 === 스탈린이 죽은 뒤, 크렘린은 대내 · 외적으로나 유화책을 실시했다. 소련의 수뇌부들은 소비재 · 주택 · 농업 · 서비스 · 인프라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 분야들에서 성과를 낸다면, 인기를 얻어 권력 투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장관 회의 의장이 되어 권력을 차지한 말렌코프는 소비재 산업 및 농업 육성 정책과 농민들에 대한 유화책을 실시했다. 54년부터 연방 정부는 농촌세 · 콜호즈 자유 시장 이용세 · 축산물 의무 공출량 인하, 미납 세금과 채무 말소, 국가의 생산물 운송 비용 부담, 가축 미보유 농가의 육류 공출 의무 면제, 가축 사육 장려 및 방목 시설 개선, 농산물 수매 가격 인상 등의 조치를 취했다. 스탈린 시대의 농민들은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생산물을 넘겼고, 정부는 그 대가로 일정 규모의 텃밭과 각종 보조금 및 지원금을 제공해 소득을 보조해 주고 있었다. 낮은 수매 가격과 그 반대급부로 보조금과 지원금을 지급하는 제도는 농민들의 생산 의욕 증대와 국가 재정에 좋지 않은 현상을 미쳤고, 집단 농장을 채무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말렌코프는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 생산 의욕을 높이려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필연적으로 막대한 지출과 세수 감소를 야기했기 때문에 54년의 세입은 52년의 40% 수준 밖에 안 되었고 이 시기부터 소련의 세입 구조에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53년부터 55년까지 이어진 권력 투쟁 과정에서 베리야와 말렌코프가 숙청당했다. 장관 회의에서 카가노비치가 부르주아 - 멘셰비키식 경제 발전 운운하며 말렌코프의 경제 정책을 파묻어 버리긴 했지만, 연방 정부의 농업 정책 기조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자신이 숙청해버린 말렌코프의 정책을 일부 계승해 1950년대 말까지 주요 농산품의 조달 가격과 수매 가격을 대폭 인상하고 농업 투자를 늘렸다. 말렌코프와 흐루쇼프의 정책 덕분에 1950년대 중반부터 소련 농업은 채산성을 확보해 이전보다 높은 성장을 보였으며 곡물 생산량은 1950년에 헥타르당 790kg였던 것이 1958년에 1,110kg까지 증가했다. [* 말렌코프 시기의 연평균 농업 생산성이 70%까지 급격히 성장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소련 특유의 기록 날조 '문화'가 있기에 완전히 신뢰하긴 어렵다. 그리고 스탈린 정권 시기에는 우대받던 면화를 비롯한 몇몇 농축산물들은 인상폭이 낮았다.] 연방 정부는 트랙터 · 콤바인 · 각종 차량 등 농기계의 공급량을 늘리고,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기 위해 다양한 농축산업 관련 기관과 학술 연구 기관에서 농업 전문가 · 농학자 · 행정가들을 모집해 콜호즈와 소브호즈로 파견했으며 이들의 근로 의욕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혜택과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농화학 · 농학 연구 기관들을 대도시에서 농촌 지방으로 이전하는 조치도 이뤄졌다. 농민들은 이전보다 자가 생산한 농축산품을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었다. 개인 부업 경영과 가축 사육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어 이전보다 더 많은 가축과 가금류를 사육할 권리를 받았고 텃밭의 허용 면적이 확대되었으며 개인 텃밭의 공출 의무도 면제받았다. 연방 정부는 가축의 소유나 특정 작물의 재배로 생길 미래 소득을 측정해 징수하는 짓도 중단하고 텃밭에 대한 세금은 지역별 특성을 고려해 토지 면적을 기준으로 부과했다. 일부 협동 조합에서는 콜호즈 자유 시장의 '시장 가격'보다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텃밭과 집단 농장의 일부 잉여 생산물을 위탁 판매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거대한 집단 농장에 비하면, 개인 부업 경영은 그 규모가 극히 작았으나, 생산력은 매우 높았다. 53년부터 58년까지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생산한 육류는 35%, 우유는 25% 이상 성장했다. 59 ~ 65년 동안, 개인 소유 암소 사육 두수는 국가 전체 암소 숫자의 42 ~ 55%, 돼지는 31 ~ 37%, 면양(緬羊)은 20 ~ 22%에 달했다. 흐루쇼프 정권은 농민의 권리를 개선시켜 농민의 국내 여권에 적용한 제한을 완화하고 작게나마 연금을 지급했으며 도시민과 소규모 정착지의 농민들에게도 텃밭을 조성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해 주었다. 덕분에 농민과 도시민, 도시 노동자들의 식생활이 개선되고 식량 공급량도 늘어났다. 도시로의 여행이 좀 더 자유로워진 농민들은 도시에서 콜호즈 자유 시장과 콜호즈 상점에서 구할 수 없는 공산품과 기호품을 구하고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농업 집단화로 농민의 자율성을 파괴한 스탈린은 지역의 특성과 기후, 토양 등의 자연 환경, 환경과 기상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재배 작물의 종류와 파종 시기, 작업 시기 등 농경 전반을 일일이 지시하고 있었다. 이는 스탈린 그 자신이 자기 다챠의 과수원과 농장을 관리하는 방식이었고, 이 미치광이는 조그마한 실험실이나 정원에서나 겨우 먹힐 방식을 명왕성보다 거대한 국가에 존재하는 멕시코보다 광대한 농경지에 적용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부작용은 심각한 것이었다. 공업과 달리 자연 환경과 기후의 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으며 농번기와 농한기가 존재해 시기별로 노동력의 필요량이 상이한 농업은 공장에서나 쓸 수 있는 지령성(指令性) 운영 방식이 제대로 먹히질 않았다. 그래서 포스트 스탈린 시대의 연방 정부는 스탈린식 경제 체제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크렘린은 자신들이 농경 작업을 일일이 지시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영농 작업 전반에 대한 결정권을 지방 공화국과 당 기관으로 이양했으며 지역의 사정과 특성을 고려해 정책과 계획을 시행하고 콜호즈 경영진에게 자문을 요청하라는 훈령을 관료들에게 하달했다. 또한 생산 목표에는 생산량이 아닌 공출량을 명시하고 콜호즈의 의사 결정권을 확대해 농경지의 파종 면적과 가축 증산 목표는 콜호즈에서 결정하게 해주었다. 지구 - 주 - 공화국 단위의 농업 행정 기관들을 통해 농업 정책과 계획의 입안을 책임지던 농업부는 병렬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차에 걸쳐 조직 재편성을 단행했다. 1962년에는 농업 관리 제도를 재편해 지구 - 주 - 공화국 단위로 콜호즈 · 소브호즈 위원회와 관리국을 설립했다. 농기계 - 트랙터 관리소인 MTC(Машинно-тракторная станция)의 인적 자원에도 신경을 써서 상임 직원들의 숫자를 늘리고 업무 능력도 향상시켰다. 또한 콜호즈로 파견을 떠나 특정한 농경 작업을 수행하는 시간제 노동자들도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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