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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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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산업 발전의 정체 ===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디지털 컴퓨터 개발에 착수했다. 1950년에 키예프 전자기술대학에서 'MESM'이라는 소형 전자 계산장비를 개발했다. 이 컴퓨터는 범용 프로그밍이 가능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컴퓨터 개발 과정에서 콘라트 추제의 Z4 등이 참고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여하튼 MESM의 제작에 사용된 진공관은 당시 소련에서 라디오를 제작할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시절 소련은 컴퓨터를 '자본주의의 산물'로 규정하고 국가적인 투자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컴퓨터 기술을 확보하는 것은 소련 입장에서도 매우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사망하자 본격적인 투자와 연구가 바로 이뤄진다. 1955년에는 BESM-1이라는 대규모 컴퓨터가 제작되었다. 연산장비에는 5천개의 진공관이 사용되었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로 기록되었다. 저장 장비는 반도체 다이오드(정류기) 기반의 ROM과 보조 저장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컴퓨터는 단 한 대만 제작되었다. 1956년 12월에는 스텔라 컴퓨터가 완성되었으며, 이 컴퓨터는 유리 가가린을 배출한 보스토크 계획에 적극활용되었다. 이 컴퓨터 개발의 공로로, 사업의 책임 연구원인 Y. 바질레예프는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1960년대 들어선 소련 정부에서 컴퓨터 연구와 생산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1961년에 대규모 컴퓨터 제조 클러스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1960년대 소련은 미르-1, 2, 3을 대량 생산해 소련 전국과 사회주의 국가에 보급했다. 오가스 계획이 나온 것도 이 시기였다. 당시 소련 정부에서 컴퓨터 관련 예산을 계속 늘려나가자 이에 주목한 글루시코프가 전폭적인 지원을 요청하며 오가스 계획을 제안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당시 기술 수준에선 소련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당연히 반려되었다. 한편, 1962년 소련에선 진공관을 완전히 배제한 완전 반도체 기반의 민스크-2라는 중규모 컴퓨터를 완성한다. 진공관을 완전히 배제한 컴퓨터는 미국에서도 1964년이 돼서야 나왔기 때문에 민스크-2는 당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1965년에는 BESM-6이 생산되었으며, 미국의 CDC-3600과 비슷한 성능으로 평가되었다. 1960년대 소련의 컴퓨터는 Analitik이라는 독자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는 국제 고립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소련 내에서도 많은 비판과 도전을 받았다. 결국 1960년대 중후반 소련은 당시 유럽에서 제안된 [[알골]] 언어로 주 언어를 바꾸게 된다. 1970년대부터는 소련 내에서 제작되는 모든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알골을 따르게 된다. 이처럼 소련은 컴퓨터 연구의 국제 협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는데, 1965년부터 프랑스와 컴퓨터 연구 협정을 맺고 학술 자료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또한, 1966년에는 프랑스를 통해 미국의 CDC-6600을 구매하려 했으나, 미국의 정보 당국이 이를 저지했다. 이에 따라 제1세계에 속한 여타의 국가들도 소련과의 컴퓨터 협력을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빡이 돈 소련은 1967년 예정에 없던 예산을 퍼부어서 [[코메콘]] 국가를 중심으로 ES EVM 공동체를 구축하고, ES 시리즈라는 컴퓨터를 찍어내기 시작한다. ES의 키릴문자 표기가 EC였기 때문에, 국내에선 소련 EC 컴퓨터라고도 알려졌다. 이때 등장한 ES 시리즈 컴퓨터들은 이후에 북한에도 도입돼 [[광명망]]의 초기 형태를 이루기도 했다. 이처럼 196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의 컴퓨터 개발은 서방 세계와 비슷한 지위를 유지했으나 1970년대 들어서는 개발 의지와 동력이 크게 떨어지면서 기술 격차가 발생하게 된다. 특히, 소련 정부에선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기보단 서방 제품을 들여와 기술을 복제한 후, 양적 우위를 점하자는 정책을 취하면서 소련 고유의 컴퓨터 기술 발전이 멈추게 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소련에서 컴퓨터는 대단히 특수한 기기로 이를 취급하는 인력도 특수 인력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컴퓨터 교육은 고도의 전문 과정으로 일관되었고 그 영향으로 소련은 1970년대 중반까지 기계어 중심의 개발, 사용 환경이 주를 이뤘다. 또한, 산업 분야의 파편화로 인해 컴퓨터 생산과 보급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이 들쭉날쭉했다. 상술된 [[오가스]]가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컴퓨터 장비 자체의 수준 문제도 있었으나 가장 큰 것은 장거리 통신망의 용량 증가가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의 체신 당국에선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서만 통신망을 구축하고 있었을 뿐 컴퓨터 관련 기관의 요구는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1970년대 후반 오가스의 후신 사업으로 시작된 EGSVT는 당초 계획으론 3년 내에 구축을 완료하는 것이었으나 통신망 확대 속도가 느려서 1980년대 후반에야 컴퓨터 통신망 구축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정작 구축이 완료되자 통신망의 컴퓨터는 노후화되어 제대로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다만 이 때 깔아 놓은 장거리 컴퓨터 통신망은 계속 개량되어 현대 러시아의 기간 통신망을 이루고 있다. 기존의 인프라가 아무리 노후화돼 있다 하더라도 개량하는 것이 완전히 새로 설치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폐기되지 않은 것이다.]. 1980년대에도 이러한 컴퓨터 기술의 정체는 계속되었고, 소련에선 서방 제품을 들여와 복제하기 바빴다. 그런데 의외로 그 카피 속도나 수준이 준수해서, 소련의 ES 시리즈와 카피의 대상이 된 IBM System 시리즈 사이의 2~3년의 기술 격차는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됐다[* 21세기 들어 기술 혁신이 강조되고 기술 복제가 중요 국가 범죄로 인식되면서, 이걸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어떤 제품을 그대로 복제하고 양산하기 위해선 리버스 엔지니어링이 이뤄질 정도의 학문적 발전이 이뤄져야 하고, 생산 기술 역시 상당한 수준이어야 가능하다. 쉽게 이야기해서, 아이폰을 몇 대를 구입해와서 그걸 그대로 생산한다고 생각해 보라. 당시 소련은 컴퓨터 분야뿐 아니라 화학, 제약, 기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방의 기술을 모방하고 양적 생산에서 우위를 취하는 정책을 기본으로 삼았다. 이 방면에선 특히 제약은 정말 서방 국가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카피 실력이 뛰어나서 FDA 승인 문서에 부속된 임상시험 논문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유효성분 조제법을 리버스 엔지니어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게 단기적으론 효율적이고 성과가 있을진 몰라도, 장기적으론 경제 활력 저하와 국제 경쟁력 상실로 이어진 가장 큰 배경이다.]. 이와 함께 ES 시리즈는 소련은 물론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주력 전산기기로 자리잡았다. 소련은 1970년대와 80년대 당시 서방에서 훗날 '''컴퓨터'''와 '''로봇'''으로 이어질 자동기계와 정보산업에 투자하는 동안 산업 자동화나 정보산업같은 전자 산업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결과 산업화 시절 지어진 인력 시스템을 그대로 활용하는 비효율이 이어져 1980년대 초에는 잉여직이 약 3,200만 명 정도 남게 되었다. 소련에서 PC컴퓨터가 처음 출시된 것은 엘렉트로니카 BK가 나온 1984년이었지만 가정용 컴퓨터가 활성화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IBM, HP와 기술교류가 활발해진 1989년 이후였다. 사실 저축률이 높아서 은행에 도는 자금은 많았기 때문에 제대로 활용했다면 재빠른 인프라의 구축도 가능했지만 이렇게 구축이 늦었던데에는 관료들의 첨단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던데다가 비용문제를 제기했던 당대의 전문가들이나 산하기관들의 미적지근한 대응으로 재빨리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그 만큼 소련의 침체를 깊게 했다는 점이었다. 소련에서도 인터넷과 비슷한 네트워크망을 연결하려는 기획은 있었다. 이른바 "[[오가스]]"로 그대로 컴퓨터 네트워크망을 통해서 소련의 중앙경제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발상으로, 연구시설은 물론이고 각 지방의 공장, 농장들까지 컴퓨터로 연결해서 물자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인데, 당시 소련 내 부실한 유통체계로 인하여 물자공급이 원활하지 않던 소련경제의 비효율성을 고려했을 때 획기적으로 보였다. 실제로 1970년대에 미국의 [[알파넷]] 계획이 입수되면서 오가스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지만 재정부처와 경제학자들이 반대하고, '''기반시설을 구축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추진동력을 잃어버렸다. 당시 소련의 국토와 경제운용 방식을 고려했을 때, 네트워크망은 운영에 필요한 사회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제대로 활성화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재정부와 경제학자들의 지적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과제였다. 무엇보다, 2025년 현재 기준으로도 완전한 100% 전자정부 시스템을 구축한 나라는 없다. 또한 정부가 주도하는 국책 사업으로 진행하려다 보니, 민간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재량이 적었다. 실제로 인터넷의 아버지 격으로 불리는 [[알파넷]] 또한 처음에는 국방부와 대학 사이 [[인트라넷|내부통신망]] 정도로 활용되다가, 여러 대학들이 같이 참여하면서 점차 주도권이 국가에서 민간으로 넘어가 오늘날 민간 중심의 [[인터넷]]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가스 계획은 이후로 여러번 재추진이 이루어졌지만 개발자가 1982년에 사망하면서 결국 기초망 정도만 깔리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후 1980년대말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소련에도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오늘날 옛소련 국가들의 정보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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