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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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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공업 ==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경제 기반이 붕괴하고, 생필품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혁명과 내전 시기에 발생한 혼란이 진정된 건국 직후의 소련은 즉시 경제 복구와 생필품 공급을 위해 경공업 육성에 돌입했다. 신경제 정책 시기부터 연방 정부가 일정 규모의 개인 사업체를 허용하고 협동 조합 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성장에 탄력이 붙고 경제 재건이 이뤄졌다. 이 시기의 경공업은 사회적으로 생필품 문제가 심했기 때문에 식품 · 의류 · 가재 도구 · 신발 같은 기초 소비재를 생산하는데 집중했다. [* 협동조합은 도시와 농촌 지역을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주로 의류와 가재도구, 주방용품, 신발, 농축산품 등을 생산했다.] 라팔로 조약을 계기로 서방과의 외교 관계 정상화를 이룬 뒤부터 소련은 서방의 기술과 인력, 기계 설비를 도입했고, 이는 경공업 부문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네프 시기의 소련 경공업은 세계 대전과 내전으로 망가진 경제를 재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생필품 부족 문제를 완화하고 국민들의 소비재 수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인민의 기초적인 생활 수준을 개선하고 사회적 불만을 줄이는데 기여했다. 또한, 연방 정부는 수공업을 기계 공업으로 대체하고 체계적인 육성 정책을 시행해 대규모 산업화를 시행할 수 있는 기초를 이뤘다. 다만, 세계 대전과 내전으로 인해 공업 기반이 많이 파괴된데다 혁명 정권의 잘못된 경제 정책과 전시 공산주의 정책, 원료난과 설비 노후화 등 다양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네프 초기의 소련 경공업은 수공업과 소규모 공장이 지배적인 편이었고, 농촌에서는 '쿠스타르'라고 부르는 가내 수공업, 소규모 공방이 소비재 생산을 맡았다. 농촌 수공업을 상징하는 쿠스타르는 대전 말기 - 혁명 초기에 식량난으로 인해 도시 노동자들이 농촌으로 이주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을 이뤘고, 그 규모가 커서 연방 정부에서 쿠스타르를 어떻게 활용하고 흡수할지를 논의할 정도였다. 경제 재건이 착실히 이뤄지는 상황에서도 소비재와 공산품 공급량은 수요를 채워주질 못했다. 그래서 생필품 부족 문제가 계속 잔존했고, 도시에서는 밀수에, 농촌에서는 자급자족을 하거나 쿠스타르 공업에 의존하곤 했다. 연방 정부는 도농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경공업 공장을 지방에 분산시키고 생산량과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공산품 공급량 부족 문제와 품질 문제가 계속 발생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농민들은 농산물을 판매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식량과 교환할 공산품이 없으니 시장에 농축산물을 내놓을 유인이 없었고, 정부의 농축산물 수매 가격도 낮았기 때문에 식량을 저장하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추수 이후에도 곡물이 돌질 않았고, 도시에서 식량 공급난 문제가 대두했다. 트로츠키가 언급한 '가위 위기'가 터진 것이다. 이 문제로 소련 수뇌부들은 노농 동맹과 신경제 정책을 유지할지, 노농 동맹을 포기하고 강력한 산업화를 추진할지를 놓고 심각한 논쟁을 벌였고, 사회적으로도 농촌과 도시, 농민과 노동자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28년, 스탈린은 신경제 정책을 공식적으로 중지하고 1차 5개년 계획을 선포했다. 거의 모든 민간 자본을 국가에 흡수하고, 경공업 전체를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두었다. 5개년 계획을 시작하던 시점에도 소비재 부족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 정권은 생필품과 식료품 · 기초적인 가전 제품 · 가재 도구 · 의류 · 신발 같은 소비재의 생산을 핵심적인 목표로 설정했다. 이밖에도 전체 국가 예산의 10% 이상을 집어 삼키던 교육 부문을 지원해 주기 위해 학용품의 생산도 중시했으며 의료용품의 생산도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숙련공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 연수를 제공했고 생산 공정의 표준화와 최신 기술의 도입, 기계화 촉진, 각종 공학 기술 연구 기관의 설립 등 다양한 조치가 이뤄졌다. 5개년 계획의 성공이 정권 및 스탈린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던 상황인데다 농민들은 농업 집단화로 인해 이미 정권에 대한 반감이 폭발했고, 노동권의 약화와 노조의 무력화,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노동 규율을 강요하는 노동 환경 때문에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들까지 폭발 직전이었기 때문에 소비재의 생산 확대는 인민의 생활 수준 향상과 경제 성장 뿐만 아니라 민심 이반을 완화하는데도 필요했다. 따라서, 스탈린 정권이 소비재 생산과 경공업을 완전히 도외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스탈린이 경공업을 버릴 계획이었다면, 굳이 미코얀 같은 최측근들을 서방 세계에 보내 서방과 기술 협정을 맺어 최신 기술과 설비를 들여오지도, 여성 노동자들의 심기 관리를 위해 화장품 제조용 에탄올을 대량으로 수입하지도, 우즈베키스탄을 목화 공화국으로 만들고 이에 반발하는 우즈벡 당 지도부와 행정부 관료,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당 간부들을 죄다 쏴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5개년 계획 시기 동안, 스탈린 정권은 농촌과 국경 지역, 배후지에도 경공업 공장을 세웠다. 농촌 지역에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볼셰비키들은 물론, 사회혁명당도 계획한 농촌 육성책이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은 소농 중심의 농업을 집단화나 협동조합화를 통해 대형화하려 했다. 이들은 집단화(또는 협동조합화) 및 농촌 공업 건설을 통해 농촌에 만연한 빈부격차 문제의 해소 · 부농과 지주의 출현 예방 · 규모의 경제 실현 · 농업 효율성 제고 · 노동력 과잉 문제 완화 · 농한기의 유휴 노동력 흡수 · 농촌 지역의 인구 유출 완화 등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기서 농촌 공업의 육성은 노동력 과잉 문제 · 농한기 유휴 노동력 흡수 · 농촌 인구 유출 완화를 실현할 수 있는 요소였다. 또한 농촌 공업은 집단 농장에서 생산한 농축산물을 곧바로 원료로 활용할 수 있어 운송비를 절감할 수 있고, 지역 균형 발전을 도모하고 농민들에게 부족한 소비재를 공급해 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 정권은 집단 농장이나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경공업 공장들을 건설했다. 이 때 농촌에 건설한 공장들은 농장이나 삼림에서 공급해 주는 원료를 가공할 수 있는 식품 가공업 · 목가공업 · 섬유 · 제분 · 제혁 · 제지 · 유지 공업이 주를 이루었다. 지역의 균형 발전을 위해 우랄,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카프카즈 등지에 새로운 경공업 공장들을 건설하고, 2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대부분의 섬유 공장들을 이 지역들에 세웠다. 이외에도 각종 경공업 부문의 공장들을 지방과 연방 공화국, 소수 민족 지역에 세웠다. 협동조합의 경우, 대부분의 협동조합들이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게 된데다 신용 협동조합은 붕괴, 소비자 협동조합도 약화된 형국이었지만, 공예 및 생산자 협동조합의 경우 러시아의 전통에 큰 관심을 보이는 스탈린과 수뇌부의 지원을 받아 어느 정도 성장을 이뤘고, 부족한 소비재를 일부를 채워주었다. 소련인들 사이에서 공예 조합에서 만든 공예품과 소비재들은 품질이 높고 예술적 가치가 있어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1 ~ 2차 5개년 계획은 중공업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경공업 부문은 그 비중이 적고, 우선 순위가 낮았다. 가장 좋은 원료들과 기술 · 인력 · 재원은 모두 중공업에 우선적으로 조달했고, 경공업은 점점 관심에서 멀어졌다. 스탈린은 경공업을 완전히 도외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중공업 우선주의 정책은 연방이 해체되는 그날까지 유지되어 소련 경제 정책의 핵심적인 문제점으로 지목받고 있다. 농촌 공업의 육성은 농민들에게 소비재를 공급해 주고 농촌의 발전을 도모하긴 했지만, 낮은 기술력과 노동자의 부족한 기술 수준 · 영세한 규모 · 재원 부족 · 설비 노후화 등의 문제로 인해서 생산량이 적고 품질도 낮다는 문제를 겪었다. 차후에 연방 정부가 투자를 늘리면서 개선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농촌의 인구 유출이 심화되면서 결과적으로 과잉 투자가 되었으며 특정 지역에서는 투자 부족 문제로 인해 노후화가 지속되어 농촌 공업이 유명무실화되기도 했다. [* 이는 북한도 겪은 문제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농촌 공업이 붕괴해 버렸지만, 소련은 나름대로의 관리를 통해 일부 성과를 거두고 붕괴를 늦추었다. 토법고로로 대표되는 대약진 운동 시기의 중국 농촌 공업도 소련의 농촌 공업을 모방한 것이었다. 다만, 중국의 마오는 농촌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토법고로를 지었고 소련의 스탈린은 그나마 현실 감각을 잊지 않아 농촌에서도 충분히 운용 가능한 경공업 공장을 세웠다.] 대조국 전쟁이 일어나자, 경공업은 군수 산업을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다수의 경공업 공장들이 소비재 대신에 군수품을 생산했다. 섬유 공업은 군복과 텐트를, 제화업은 군화를, 식품 가공업은 전투 식량을 생산해 전선으로 보냈다. 경공업 부문에 할당한 예산을 군수 산업으로 전용하고 배급제를 실시한 탓에 소비재 부족 문제가 심해져서 인민의 생활 수준이 크게 약화되고 암시장이 성행했다. 레닌그라드처럼 장기간 포위된 도시에서는 식량난이 극심해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다. 전쟁으로 인해 소련의 산업 기반은 박살났고, 생산량은 급감했다. 3천만이 넘는 사람이 죽고, 또 다른 3천만이 부상을 입은 상황이라 노동력이 부족했고 식량난과 생필품 부족으로 인해 암시장이 성행했다. 다행히 4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전후 재건이 상당 부분 이뤄져 경제 상황이 호전되고 식량난이나 생필품 부족도 많이 개선되었다. 경공업 부문도 상당한 지원을 받아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완전한 재앙이 되진 않았다.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독일군을 피해 수백만의 인구과 엄청난 양의 기계 · 설비 · 동산을 후방으로 소개했기 때문에 유럽 러시아에 비해 투자량이 적던 지방과 소수민족 지역 · 중앙아시아 · 시베리아의 경제가 성장했다. 전쟁 이후에도 상당수의 인력이 그대로 남고, 설비도 유지되었기 때문에 지역 균형 발전이 촉진되고 지역 간 교류도 늘어났다. 또한, 연방 정부는 랜드리스를 통해 들어온 미국의 공산품과 기술 · 설비들을 연구하고 역설계해서 새로운 제품 개발에 써먹었으며 동유럽과 독일 점령지에서 징발해 온 인력과 기술 · 기계 · 설비들도 소련의 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냉전 시기부터 소련의 경공업은 자체 기술 개발과 서방 기술의 도입을 통해 생산 공정을 현대화하고 효율성을 높였다. 기계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CNC와 로봇팔로 대표되는 자동화 기술을 도입해 생산 속도와 제품의 품질을 개선했다. 경공업 부문에서는 특히 합성 섬유와 염료, 플라스틱 분야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중공업 우선 정책에 대한 반성이 이뤄져 경공업 투자가 늘어나고 경공업의 중요도가 높아졌다. 생필품과 기초 소비재 생산에 역점을 둔 정책은 소비재에 대한 인민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를 통해 사회적인 안정도 이뤄지고 생필품을 사기 위해 상점에 줄을 서는 일도 보기 드문 일이 되었다.[* 란코프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 사후에는 생필품 부족 문제와 상점의 긴 대기줄도 없어졌고 생필품을 사기 위해 상점에서 줄을 서는 일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부터 재개되었다고 한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경제 분야를 책임진 코시긴과 티호노프 모두 소비재에 대한 인민의 갈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과 공급에 힘쓰고 서방의 최신 기술을 도입했으며 자체 기술과 제품 개발을 위해 대학과 연구소, 공장들이 함께 연계하는 다양한 제품 · 기술 개발 계획들을 시행했다. 여기에 더해 특정 제품의 품질과 디자인 개선을 꾀하는 연구소들까지 세웠으며 업계 종사자와 과학자, 공학자들이 서로 교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관을 세우고 소비재들을 홍보하는 광고, 잡지들도 만들었다. 특히 코시긴 - 리베르만 개혁 시기에는 적대국인 미국은 물론, 서방 세계의 여러 국가들과 스위스, 일본, 스웨덴 같은 국가의 기술과 설비를 도입해 경공업과 농업 발전에 써먹었다. 세간에는 COCOM의 통제를 강조하며 냉전을 미 · 소의 갈등과 충돌만 있던 시기로 묘사하는 일이 잦은데, 양대 열강의 관계는 데탕트 같은 평화와 한국 전쟁 같은 열전을 오가는 복잡한 관계였으며 코콤의 통제는 완전하게 아니어서 미국이 강력한 경제 제재를 먹이던 시기에조차 소련은 잘만 서방 국가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소련의 계획 경제 및 지령성 체제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어 시장의 변화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고 인민의 수요를 채워주지 못했다. 경공업의 우선 순위가 올라가긴 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중공업 투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는데도 유통과 분배 체제가 비효율적이어서 운송 시간이 지나치게 길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지역별로 소비재 공급량이 상이하고 도농 간의 격차가 커졌다. 소련인들이 되도록 양대 수도나 대도시에 살고 싶어 했던 것도, 연방 정부가 모든 재화를 수도와 대도시에 우선적으로 공급했던 게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신경을 쓰고, 명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제품들을 많이 생산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소련제 소비재의 품질과 디자인은 서방에 못미치는 편이었고 다양성이 부족했다. 서방 세계의 소비자들이 과잉 소비나 선택지 과잉 문제를 겪을 때, 소련의 소비자들은 과소 소비와 선택지 부족 문제를 겪었다. 생산자들은 공장을 떠난 제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제품에 대한 의견 전달이 잘 이뤄지지 않아 소비자들의 불만이 증가했다. 여기에 더해 소련 수뇌부들이 상류층과 외국인들을 위해서 사치품과 기호품, 각종 고급 소비재들을 취급하는 토르그신 상점과 베료즈카를 세운 것은 타오르는 대중들의 불만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어 사회적으로 위화감을 조성하고 인민들이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냉전 시기부터 서방 세계에서는 가전 제품과 각종 첨단 전자 제품, 고급 소비재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품질도 개선되었지만, 연방은 이런 소비재들을 충분하게 생산해서 인민들에게 공급해 주질 못했다. 경제와 사회가 고도화되어 인민들의 생활 수준과 안목이 높아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수 소비재만 풍족하게 공급해 주는 것만으로는 인민의 욕구를 채울 수가 없었다. 설령 좋은 제품이 나오더라도 가격이 너무 비쌌고, 품질이 우수하면서 가격도 저렴한 제품들은 양대 수도와 대도시에 우선적으로 공급되어 지방에서는 물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각종 제품 전시회와 박람회에는 언제나 '지방에도 이런 좋은 물건들이 공급되었으면 좋겠다.'는 방문객들의 푸념이 나올 정도였다. 브레즈네프 정권 후기부터 기술 개발과 경공업 부문의 성장은 침체되었고, 기계와 공장 설비의 노후화가 심해져 생산성이 낮아지고 제품의 품질도 악화되어 품질 관리를 위해 만든 ГОСТ 규격까지 점차 유명무실화되었다. 체질 개선을 위해 서방의 최신 기술과 설비를 도입한 공장을 여럿 세우기도 했지만, 노쇠해가는 소련의 공업에 활력을 불어넣기에는 부족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는 스탈린 시대의 생필품 부족 문제가 재현되었고 87 ~ 88년부터 시작한 소련 공업의 연쇄적인 붕괴 현상은 모든 희망을 앗아갔다. 연방이 해체된 뒤, 급격한 체제 변화를 겪은 러시아의 경공업은 경제 멸망과 시장 혼란, 민영화 과정 속에서 다수의 공장이 문을 닫거나 생산량이 급감하는 문제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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