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독소전쟁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독일 ==== * 독일 측 피해 ||<-2>독일 국방군 인명 손실(1939년~1945년)|| ||<-2> 영구 손실(사망, 실종, 영구 장애) || ||1939년 9월 ~ 1942년 9월 1일||922,000(총 인원 중 14%)|| ||1942년 9월 1일 ~ 1943년 11월 20일||2,077,000(총 인원 중 30%)|| ||1943년 11월 20일 ~ 1944년 6월||1,500,000(추정 인원)|| ||1944년 6월 ~ 11월||1,457,000|| ||1944년 12월 ~ 1945년 11월||2,000,000|| ||<-2> 총 손실 || ||1945년 4월 30일까지 총 손실||11,135,800[br](부상자 포함,[br]동원된 총 병력의 75%,[br]1939년 당시 남성 인구의 46%)[* 이 수치는 이 문서 맨 위에 있는 수치와 맞지 않는다. 정확한 검토 요망.]|| '''[[나치 독일]]에게 이 전쟁은 말 그대로 자멸로의 행진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퓌러붕커|벙커]]에서 자살하고 [[베를린 공방전]]이 끝날 때까지 전체적으로 보면 약 450만 명으로 추산되는 독일군 전사자 및 기타 사망자 중에 370만여 명이 독소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포로 수용소에서 죽었다. 후술되는 [[전쟁범죄]] 항목의 소련군의 만행도 독일이 까발린 게 아니라 나중에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것들이며, 소련의 만행은 정작 독일도 굳이 꺼내려고 하지 못했던 만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묻혔기에 조사하면 더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은 독일이 먼저 소련을 침공하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데에서 시작했으므로, 당시 연합군 측에서도 소련군의 전쟁범죄에 동조적이었다. 나치가 패망하기 얼마 전에 휴전 특사로 간 [[하인리히 힘러]]가 소련군의 만행을 연합군에게 알리며 소련군의 통제를 부탁했지만, 영국군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독일이 소련 및 동유럽에서 저지른 만행을 언급하며 힘러의 제안을 비웃으면서 거절했을 정도. 서독 정부 통계청에선 1958년 조사 결과 '''222만의 독일 민간인이 소련군의 군사작전, 전쟁범죄, [[강제노동]]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다른 공식 통계 자료에서도 최소 200만 이상의 독일 민간인이 소련군에 의해 살상당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는 연합군이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살상한 독일 민간인 63만 명보다 훨씬 많은 수치이다. 이외에도 전후 [[NKVD]]가 운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4만 3000명의 독일인이 사망했다. 거기다가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인해 이미 초토화되었던 [[베를린]]을 비롯한 동부의 주요 독일 대도시들은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준비 포격 세례와 공습, 그리고 소탕 작전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도시의 90%가 파괴되었고 소련군에 의해 독일 주민들이 쫒겨나야 했다. 베를린은 도시의 80%가 파괴되고 인구도 반토막나야 했다. 이외에도 [[슈테틴]]은 도시의 65%, 산업 시설의 95%가 파괴되고 다른 동부 독일 도시들도 연합군의 폭격과 소련군의 군홧발 아래에 전체 도시의 50~80%가 초토화되었다. 군사적 손실도 막대했다. 소련 측 통계 자료에 의하면 독일군은 전차 4만 2000대와 자주포/대전차포/박격포 37만 9400문, 항공기는 7만 5000대를 상실해야 했다. 독일 측의 공식 자료에서도 1941년부터 1944년까지 3만 3000대의 기갑 차량이 손실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장비 손실량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러다 보니 안 그래도 비효율적이고 소련에 비해 다품종 소량 생산 일색이었던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에 일격을 가했으며, 거기다가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군수공업 단지가 초토화되면서 수많은 장비를 잃어도 또 그만큼 생산해 회복하는 소련과 달리 독일의 장비 손실은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부전선]]이 형성되자 독일은 양면 전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후 소련은 폐허가 된 본토의 전후 복구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 포로로 잡은 수백만 독일군 포로들을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끌고 가서 공사 현장이나 광산에 보내어 강제 노동을 시켰다. 이들 대부분은 10년 넘게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서독의 노력으로 귀국하게 된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