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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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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모와 의의 == 서구권에서는 단순히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로 보아 '동부전선'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의 '전선'으로 치기에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대부분의 군인들이 독소전쟁에 동원되었으며 사상자의 비중도 독소전쟁이 대부분이다. [[전투 목록]]에 포함된 유사 이래 모든 전투들의 규모[* 주로 투입 인원 및 사상자 규모 기준으로, 육상 전투 중 순위를 매긴 것은 참고해야 한다. 비슷한 시기의 함대 결전은 물론 투입 인원 규모로 따지면 육전보다 훨씬 적겠지만, 투입 '''자본력'''의 규모로 따지면 지는 쪽에서 국가의 뿌리가 뒤흔들릴 정도로 육전 이상의 규모인 경우가 많다.] 순위를 매기면 '''상위 10개 중 7개, 특히 1위부터 5위가 전부 독소전쟁에서 일어난 전투들'''이다. 승자인 [[소련]]이 [[냉전]] 시기에 [[공산권]]의 수장 국가였다는 점과 서구권 위주의 전쟁관,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각종 매체들의 파급력으로 인해 서부전선 등이 조명받는 경우가 많으며 호칭도 단순히 '동부전선' 정도로 일컬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실질적으로 투입된 규모와 인력을 고려하면 결코 일개 '전선'으로 불리기 힘들 정도의 대규모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따로 '독소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다. 당장 서유럽, 북아프리카 방면은 물론 태평양 방면과 중국, 동남아 전선까지 포함한 전체 2차 대전의 총 인명피해 중 절반 가량이 여기에서 나왔다. 만약 독소전쟁이 없었더라면 독일이 대(對) 소련 전선에 퍼부었던 400만 대군이 오롯이 서부에 집중되었을 것이고 영국과 미국의 베를린까지의 진격은 더 많은 물자를 소모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적인 인명 피해를 냈을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독일이 주력군을 서유럽에 집중했을 때 서방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벌어졌던 지옥도가 [[제1차 세계 대전|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이다. 그래도 그 때는 프랑스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선 프랑스 본토가 독일에 점령 당하여 바다에서 해안으로 적전 상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2차 대전의 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독소전쟁 직전까지는 [[중일전쟁]]이 가장 넓은 판도에서 치러진 전쟁이었고 실제 인명 피해도 그나마 독소전에 준하는 수준이지만 당시 [[중화민국]]은 지방 군벌이 여전히 강력하던 시기로 중앙 집권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병력 동원력이 영 좋지 않아 거대한 인구에 비해 의외로 전체 병력이 얼마 안 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도 중국군과 싸우는 동시에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이 개전되면서 태평양은 물론 동남아시아 전선에까지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중국 본토로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못한 관계로 중일전쟁에서 일어난 양군 간 교전의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 [[제2차 상하이 사변]], 우한 방어전 등 가장 큰 전투들도 양군 합쳐서 100만 명도 동원되지 않았다. 그 전투들의 규모가 결코 작다는 건 아니지만. 게다가 중국군은 대규모 회전을 치를 능력이 부족했고 일본군도 중국 본토의 거점을 점령하는 데에만 집중했지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각의 전투에서 큰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가장 거대한 인명 피해가 나왔던 [[대륙타통작전]]이 양군 합쳐 60만 정도의 전사자가 나왔는데 일반적인 전쟁과 비교하면 매우 큰 수치지만 독소전쟁과 비교하면 그다지 많은 수치가 아니다. 이러다 보니 중국의 희생은 대부분이 중일전쟁의 여파로 [[기아(동음이의어)|기아]]나 [[한파]], [[전염병]], 일본군의 [[학살]]로 죽은 [[민간인]]이었고 군 병력의 손실은 그래도 군인인지라 일본군의 3배가 조금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소련은 당시 [[중화민국]]보다 훨씬 강력한 중앙 집권화된 열강이었고[* 당시 중화민국은 중국 공산당도 토벌하지 못해 영토도 통일하지 못한 상황인 데다 현재 중국 영토인 티베트, 홍콩을 점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포병 전력에서 한참 앞서 있었다. 일본도 독일보다 경제력, 군사력을 비롯한 국력에서 열세였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당시 독일의 경제력은 일본의 3배였으며 기술력 역시 상당히 차이가 났다. 까놓고 전차 설계도를 독일이 대놓고 줬는데도 못 만들 정도였다. 독일은 미국 아래 영국, 소련과 자웅을 다투던 국력이었던 반면 일본은 열강 말석인 이탈리아와도 국력 차이가 크지 않았다.] 이렇듯 국가의 기본 체력부터 독일과 소련이 일본과 중국보다 훨씬 튼튼했는데 당시 독일, 소련 이 둘이 미국 아래 GDP 2, 3위를 다투는 국가들이었다. [[서부전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침공]] 당시만 하더라도 양 측은 총 30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이 모든 병력들이 동원된 전투는 없었으며 주요 전투마다 사단-군단급 위주의 규모로 교전이 벌어졌다. 독일군의 전광석화 같은 [[전격전]]에 의해 연합군의 다른 전투 병력들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파리가 함락되었고 노르웨이 침공에서도 1개 군단급 병력이 맞붙었으며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도 양 측은 군단급에서 야전군급 병력 정도만 동원했다. 그 이상 대규모로 병력이 동원되는 전투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에도 [[아르덴 대공세]] 정도 외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독소전쟁은 양 국가, 나아가 고대 이후로 동부 유럽에서 세력 다툼을 해오던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이라는 두 악명 높은 독재자, 나치 독일을 대표로 하는 [[파시즘]]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라는 거대 이데올로기의 흥망을 건 [[총력전]]이었으며 양 측 모두 '''[[집단군]] 단위의 수천만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어'''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매우 잔인하고 극도로 치열한 전쟁이었던 만큼 [[스탈린그라드 전투|어지간한 강대국의 총 병력 숫자에 맞먹을 정도인 100만 명 정도의 군인들이 전투 하나의 사상자인 경우]]도 있었다.[* 참고로 2022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병력 숫자는 약 60만 명이다.] 그리고 총력전이라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 전쟁의 패전으로 인해 독일은 민족 중흥의 발흥지라고 볼 수 있는 [[동프로이센]] 지역을 통째로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권이나 범게르만 계열로 표현되는 언어·민족적 그룹 자체가 '''[[동유럽]]에서 소멸하게 되었으며''' 히틀러와 파시즘, 그리고 동게르만 민족과 프로이센주의 전통들이 완전히 도태되고 스탈린과 공산주의가 지구의 절반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 소련은 물론이고 당시 두 나라 사이에 낀 2차대전 동부, 중부 유럽 전체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으며 쑥대밭이 됐다. 사실 나치 독일은 서부전선에서는 나름 이미지 관리를 했는데 서/북유럽과 미국이 나치 사상 상 서열 높은 인종에 해당되는 나라들이었기에 그들 기준에서 나름 전쟁포로들을 대우해준 데에 비해 [[운터멘쉬]](하등인간)로 규정한 동부전선의 슬라브족들에게는 아주 잔인하게 굴었다. 소련도 독일보다는 덜했지만 [[카틴 학살]] 등만 봐도 결코 자비로운 통치를 하던 나라는 아니었으며 절멸전을 치르며 더욱 포악해졌으니 그 사이에 낀 국가들은 제대로 고통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카틴 학살, [[바르샤바 봉기]] 등 양쪽으로 고통받았던 폴란드. 그리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운명도 순탄치 않아 독일군에게 대량 학살을 당하거나 소련군에 의해 굴라그에 끌려갔다. 게다가 전쟁 이후까지 소련이 연합국의 아주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으면서 사실상 소련의 전리품으로 취급되어 독일에게 고통받은 것은 완벽히 밟혀지기라도 했으나, 소련에게는 대항 세력도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연합국으로 싸우고도 버림받으며 동부 유럽 방면의 정세를 실시간으로 본 핀란드는 아예 추축군에 붙었었다가 배신하는 등 개판 5분 전이 되었다. 학살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괜히 전선 하나의 민간인 인명피해가 몇 천만에 달하는 것이 아닌 셈. 이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냉전]]이 시작되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필두로 한 [[제2세계]]라는 동맹 블럭이 성립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후의 현재의 세계 판도를 결정한 현대 세계사의 결정적인 전쟁 중 하나이다. * '''유례 없는 대규모 병력 동원''' - 서부전선의 경우 가장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만 하더라도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에서 야전군 병력들을 동원했고 [[아르덴 대공세]] 때가 되어서야 1개 집단군 규모의 병력들이 서로 맞붙었다. 그 유명한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도 몇 개 사단 규모의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한 수준이었다. 반면, 독소전쟁은 '''[[집단군]] 단위의 군 병력들이 총동원되었으며''' 특히 소련군은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끊임없이 사단을 편성해 '''10개 전선군(집단군)을 투입했을 정도였다.''' 조공이나 기만 작전만 하더라도 '''몇 개 [[야전군]] 단위에서 1개 집단군 병력들이''' 동원되어 전투를 치렀을 정도로 독소전쟁의 규모는 차원이 달랐다. * '''대규모 기동전''' - 독일군은 대부분의 전차와 항공기들을 동부전선 방면에 투입했으며 소련은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 그리고 [[렌드리스]]로 마련한 수많은 전차와 항공기들을 전부 독일 전선 방면으로 투입했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중일전쟁]]이나 [[서부전선]]에선 꿈도 못 꿀 '''수천 대 단위의 전차들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차전이 여러 번 벌어졌으며''' 기동 전력들이 총동원되다보니 병력의 기동 범위도 크게 넓어졌다. 그 덕에 독일군이 독소전쟁 이전에 보여주었던 [[전격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동전이 벌여졌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은 '''400만 명의 소련군을 섬멸하며 1,500km의 거리를 진격해 모스크바 코앞까지 도달했으며'''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소련군은 단 2개월 만에 '''집단군 단위의 독일군 병력들을 갈아버리며 700km를 주파했다.''' 이러다 보니 지휘관들의 작전 역량도 크게 발달했다. 독일군은 [[임무형지휘]]를 통해 하위 지휘관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전술을 구사하게 하여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했으며[* 예외적으로 [[발터 모델]]은 명령형 지휘체계를 선호했다.], 소련군은 [[대숙청]]과 체계 개편의 성과가 보이는 대로 곧장 [[작전술]] 전투 체계를 통해 독일군을 패퇴시키며 독일로 진입했다. * '''대규모 화력''' - 소련의 경우 포병을 중시한 덕에 수많은 [[카츄샤 다연장로켓]]과 곡사포들이 공세 이전에 독일군 방어선에 준비 포격을 가했고 '''포병사단까지 편제되어 각 제대에 연대급 단위 하위부대가 배속되는 형태로''' 운용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독일군은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포격에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독일의 경우도 소련의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 시 가용 항공기들을 총동원해 [[초토화]]시켰고, 그래서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를 비롯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또한 [[구스타프 열차포]]와 [[칼 자주박격포]]를 비롯한 수천 개의 화포를 동원해 세바스토폴 요새를 공략하기도 했다. 또한 부족한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독일군은 '''여러 포대에서 동시에 목표를 타격 할 수 있도록 하는 [[TOT]]를 발전시켰다.''' 서부전선과 차원이 다른 고화력 전투가 벌어지다보니 주요 전장이었던 독일 동부 도시와 폴란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은 완전히 쑥대밭으로 전락했다. * '''역사상 유례 없는 [[총력전]]''' - 독소 양측의 지도자들은 전체주의적인 독재자였고 국가를 위해서든, 자신의 정권을 위해서든 간에 승리 이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그 상황에서 그야말로 국가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소련은 '어머니 러시아'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모든 인민들이 나서야 한다고 선전했고 자기 가족과 자기 땅을 침범한 적은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던 데다 독일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마주한 소련인들은 너도 나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대도시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마다 소련 인민들이 나서서 방어진지 공사를 도와주었으며 시골의 경우 [[청야전술]]을 실시해 그동안 정신적 지주로서 수백 년을 버텨왔었던 고향 마을들을 스스로 불태워 없애버려 독일군이 물자를 현지 조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소련군 패잔병과 일부 민간인들은 총기를 들고 [[빨치산]]이 되어 독일군을 괴롭히고 다녔다. 우랄로 이전된 군수공업단지에선 모든 노동자들이 총동원되어 군수무기들을 생산했고 [[여군]]들도 100만 이상이 동원되어 단순히 지원 부대뿐만 아니라 저격수, 전차병, 조종사 등 일선 전투병과에 배치되어 맹활약했다. 심지어 범죄자들도 [[형벌부대]]에 배치되어 독일군의 총알받이가 되었다. 독일의 공습을 피하고자 서부의 공업지대를 통째로 뜯어가 [[우랄 산맥]] 동쪽으로 이전시킨 것은 물론이고 수백만 노동자들이 전부 군수 공장에 소집되어 전쟁물자 생산에 모든 것을 걸었고, 주요 교통망과 철도도 전부 소련군의 보급로 및 렌드리스 공급망으로 전환되었으며 다른 인민들도 방어선 구축과 소련군에 대한 비군사적 지원에 그야말로 총동원되었다. 독일의 경우 강탈한 프랑스의 열차 3분의 2를 동부전선 방면에 투입했고 [[비시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전쟁자금을 뜯어냈다. 다른 점령지에서도 해당 점령지의 자원과 국부를 몽땅 동부전선에 투입했고 그 과정에서 점령지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독일 역시, 전쟁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선전했는데 볼셰비키와 스탈린의 철권통치로부터 광활한 영토를 수복하고 러시아인들을 해방하러 간다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웠으며 일단 겉으로는 단순히 불법 침략을 자행한 점령군 행세를 선전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소련이 반격하여 독일이 방어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는 초기 독소전 당시 소련 인민들이 그러했듯이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도 기꺼이 협력했다. 결국 전쟁 막바지가 되자 장애인과 노인, 심지어 어린이까지 몽땅 동원해 [[히틀러유겐트]], [[국민돌격대]]에 집어넣어 소련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 '''[[제노사이드|절멸전쟁]]과 피의 보복''' - 독소전쟁은 [[게르만족]]이 [[슬라브족]]이 사는 [[동유럽]] 지역을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는 정복전쟁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상대 민족을 말살하여 영영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려는 절멸전쟁이었기에 온갖 잔혹한 일들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포로로 잡은 수백만 명의 소련군 병사들을 그대로 굶겨 죽이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 가스실에서 죽이거나 작은 건물에 포로를 무더기로 집어넣고 입구를 막은 뒤 산 채로 불태워죽이거나 쪄 죽였고 이에 그치지 않고 야전 중 붙잡은 소련군이나 빨치산 포로에게 분풀이로 산 채로 내장을 뽑거나 [[톱]]으로 사지를 자르고 신체를 훼손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친위대와 국방군 모두 이러한 행위를 저질렀다.[* 일례로 끈질기게 독일군에게 저항하다가 붙잡힌 [[여군]] 포로 타티야나 바람지나(Tatyana Baramzina)는 독일군에게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산 채로 눈이 파내졌으며 개머리판으로 가격당해 온몸에 골절상을 입었고 총검으로 난도질당한 뒤 대전차소총으로 처형당했다. 이외에도 증언에 따르면 성기와 눈에 총검이 박힌 채 살해당한 여군 포로의 시신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는 등 독일군은 모든 소련군 포로에게 잔인했으나 특히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여군에게 더더욱 잔혹했으며 애초부터 여군 포로를 잡으려 하지 않고 남김없이 학살했다.]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현지 민간인들이 [[파르티잔]] 운동을 벌이자 민간인을 상대로도 광범위한 보복학살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벨라루스에서 독일의 파르티잔 토벌전으로 발생한 사망자의 90%가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소련 영화 [[컴 앤 씨]]를 보면 독일군이 수행한 무자비한 학살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독일군의 만행에 분노한 [[소련군]]과 [[빨치산]]들은 독일군 포로를 잡으면, 똑같이 성기와 같은 신체 중요부위를 잘라내거나 십자가에 팔다리를 못박거나 안구를 녹여버리고 [[망치]]로 이빨이나 턱을 박살낸 뒤에 죽이는 등 보복성의 여러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또 독일군 포로들은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혹독한 환경 속에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야 했고 그렇기에 소련군에 붙잡힌 독일군 포로의 생존율은 서부전선의 독일군 포로보다 훨씬 적었다. 그리고 상부 차원의 지시는 아니었지만 일부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 본토에 진주한 뒤로 독일 민간인에 대한 [[약탈]], [[학살]], [[강간]]을 저지르기도 했다.[* 소련군은 이러한 보복행위를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자행하여 독일인뿐만 아니라 동유럽인들도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며 심지어 원수를 진 적도 없는 같은 연합군 소속의 프랑스군 포로와 벨기에인 인부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상호보복의 특성을 띤 전쟁이었기에 여러 문화 매체들에서 독소전쟁은 잔혹함과 비극의 극치를 달리는 전쟁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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