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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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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품 및 능력 == >“그 역천(逆天)이라는 것. 천명에 거스름을 그리 부른다 들었소. 그런데 지금 천하의 대세가 [[전쟁|서로 물고 뜯는 데]] 있다면, 참으로 천명을 거스르는 길은 그에 맞서 [[평화|다 함께 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데]] 있지 않겠소? 물론 세상은 넓고 우리는 작으니, 단번에 그런 꿈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우선 우리 주변부터라도 하나씩 무언가를 해나간다면, 어쩌면 그런 날이 올 지도 모르는 법이외다.” >---- >[[고종(고종, 군밤의 왕)|고종]], 대원군이 올린 국가들의 무력 분쟁에 조선이 개입함에 대한 의향에 답하여. >그렇다면 왕은 어떤 분이셨는가? 『맹자』에 이르기를, 성(聖)이면서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경지를 이르러 [[그는 신이야|신(神)이라 하였다.]] 아아, [[괴력난신|자불어(子不語)]]렷다! 공맹 두 성현조차 말로 드러내시지 못하셨구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s-3|이에 고균은 여기서 붓을 꺾는다.]] >---- >[[김옥균(고종, 군밤의 왕)|김옥균]], 고종대왕 행장(行狀)의 초고 말미에서. 귀남의 성격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선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좀 [[꼰대]]인 할아버지'다. 완전무결한 선인이나 교활한 악인은 아니며, 착하기는 하지만 똑똑한 신하들이 생각하지 못한 독특한 발상을 제시하는 것에서 소소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는 보통 노인이다. 다만 온화하고 소시민적인 성격인 것은 확실한데, 귀남 본인이 느끼기엔 서럽고 아등바등 살아갔던 전생에 비하면 본인에게 있어 모든 게 풍족한 이번 생에서는 애초에 화가 날 일이 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생에는 유복자로 태어나 부모형제부터 처자식까지 가족을 모두 잃고 길거리 장사를 전전하는 가난한 노인이었지만, 이번 생은 귀남의 자평에 따르면 사소하게는 매일 수랏상을 받아 좋은 밥을 먹고 궁궐의 비단 이불을 덮고 자는 호사부터 부모님이 장수하고 아내와 백년해로하며 잘 키운 아들 셋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룬 것까지, 불평할 거리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생은 전생에 그저 덤으로 받은 것이기에 감지덕지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다만 꼰대 기가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을 읽는 독자들, 즉 2020년대의 20대~40대 청장년층의 기준으로 그렇다는 이야기고, 작중 인물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이는 귀남이 현대 기준으로 좀 보수적인 인물이라 해도 결국 '''본질적으로는 현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 한국에서는 아무리 심각한 꼰대라 하더라도 여자가 사회에 진출해서 일하고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1894년 뉴질랜드가 최초였고,[* 이 때는 투표권만 있었고, 모든 여성에게 피선거권까지 완전한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1905년 핀란드가 최초다.] 여성이 본격적으로 사회에서 일하기 시작한 시점은 1910~20년대다. 또한 현대에는 당사자 간 [[연애결혼]]이 당연하지만, 19세기 조선에선 [[정략결혼]]이 거의 대부분이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기 일쑤인 자유 연애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등 연애소설에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2020년대의 군밤장수 노인 김귀남'은 현대의 기준으로 봤을 때 '아무래도 연세가 좀 있으신 만큼 보수적인 성향이 좀 있는' 사람이지만, 작품의 배경인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조선 국왕 이형'은 당대의 기준으로 봤을 때 진보적인 수준을 넘어서 '''급진적인''' 인물이 될 수 밖에 없고, 실제로 작중의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대체 머리가 어디까지 깨었는지 짐작도 못할 극렬 혁신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110화 무렵 대조선국 국제를 제정할 때 신하들과 귀남의 관점을 보여주며 잘 드러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당연한 상식으로 기억하는 귀남은 대조선국 국제를 딱히 문제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신하들은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대조선국 국제를 보고 노심초사했다. 나중에 경양대군 등 자손들이 미래 자신들의 후손들이 벌일 지 모를 왕위 싸움을 걱정할 때 '''그렇게 된다면 왕실을 해체하고 [[공화제]]를 도입하라'''는 초대형 폭탄발언을 하고 그 국호인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사액해 남기는 것으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그 외에는 성격상 특별한 문제가 아예 없다. 어차피 '이렇게 한다고 해도 나라가 망한다면 어쩔 수 없는 운명이겠지, 그렇다면 그 전까지 백성들이나 잘 돌봐서 원망은 듣지 말자'라는 마인드로 왕의 일에 임하므로 일이 잘 안 되어 봤자 '''[[경술국치|나라 망하는 것밖에 더 있겠냐]]'''라는 생각을 가진 덕에 권력자들이 흔히 가질 법한 권력에 대한 집착도, 큰 욕망도 없어 신료들과 백성들에게 '권력'을 상당수 나눠주었기에 국가원수로서의 힘은 열성조 시절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이 작으나, [[조지 워싱턴|오히려 이 때문에 '''모든 신료와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존경하고 있어 임금으로서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대표적으로 근대적 의회인 참의원을 신설할 때에도 전생의 국회의원들이 법 만들고 일했던 것을 기억해 딱히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생각이라며 추진했고, 수백 년 이상 내려온 노비제와 신분제를 혁파할 때도 서양 기물인 [[자전거]]를 보여주며 이것만 있으면 노비가 필요하지 않다며 만약 노비가 꼭 필요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한 이의 경우엔 '왕실 내탕을 털어서라도 사주겠다'고 말하자 사회구조를 뜯어고치는 대개혁에 준함에도 비판 여론이 쏙 들어가 신분제 혁파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런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라온 세자와 대군들이 아버지의 치적에 감히 누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 장성한 적자만 셋이 있음에도 [[무인정사|태조대왕 양위 이후]]나 [[계유정난|문종대왕 사후]]와 달리 상왕으로 물러나 왕위를 넘겨줄 때에도 피비린내 나는 왕실의 권력 다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과도 같이 덕 높은 아바마마를 모르고 자랄 본인의 자손들, 귀남에겐 손자뻘 될 [[왕위 계승 전쟁|왕손들이 장성하면 일어날지 모를 왕위 싸움]]을 걱정할 정도다.[* 실제로 경양대군은 이를 우려해서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귀남의 해답은 '''그렇게까지 가면 [[공화제|왕실을 해체하고 대한민국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한반도 반만년 동안 여러 국가를 거쳐 내려온 군주제조차 혁파한다는 발상은 경양대군과 다른 대군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사관조차 들지 못하는 곳에서 대군 셋과 개인적으로 나눈 이야기였기에 이 정도였지, 경연과 같이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이 말을 했다면 양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왕조 해체'''라는 경악할 소식에 틀림없이 아비규환이 돼서 머리가 깨져라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며 바닥에 머리를 내려찍었을 것이다.] 다만 집안을 풍비박산낸 [[6.25 전쟁]]으로 전쟁의 잔혹함과 무서움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는 듯하다. 극렬 북벌파 [[이필제]]와 그 수하들이 주조선 청나라 공사관을 습격해 건물을 망가뜨리고, 기물을 부수고, 공사관 직원을 폭행해 주조선 대청공사와 휘하 직원들이 [[모화관]]으로 대피할 정도의 피해를 입혀 조청간 외교분쟁을 일으키는 사고를 거하게 치자 격노해 즉각 이필제와 그 무리를 추포해 [[의금부]]에 끌고 와 국문하고 "역시 군대를 가야 철이 든다."라며 [[징병제]]로 전환해서 만백성에게 군대가 얼마나 힘든지, 뜬구름 같이 먼 이야기였던 전쟁이 얼마나 가깝고 또 함부로 전쟁을 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똑똑히 알게 해 주었다. 이 때 귀남은 보기 드물게 이필제에게 격노하는데,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도 귀남이 이렇게 화를 낸 일은 거의 없다.[* 《18. [[군미필자|갔다 오지 않은 자]] 말을 말라(2)》에 수록된 에피소드. 이 때의 귀남의 심리묘사가 아주 소름이 돋는데, 6·25로 인해 부모님과 형제들을 잃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추위, 굶주림, 빨치산의 위협에 구르고 고생한 경험과 자신의 바로 앞에서 [[지뢰]]가 폭발해 앞에 있던 우마차가 오체분시되는 것을 보면서 전쟁의 무서움과 잔혹함을 직접 체험한 귀남이 [[치킨 호크|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전쟁을 외치는 것]]에 머리에 피가 제대로 오르는 묘사가 압권이다. 작중 묘사에 따르면 (그렇게 쌓이고 쌓인 서러움이) '''옛날 눈 앞에서 우마차 한 대와 함께 터졌던 대전차지뢰처럼 터져 나왔다'''라고 할 정도.] 이필제와 그 무리가 강제입대 당한 것은 징병이라기보다는 형벌의 일종인 충군형에 가깝지만 이후 지엄한 법률, 그것도 어명에 의해 종군 생활을 하게 된 당대의 만백성에게 미친 듯이 욕을 먹었고 심지어 '신미년 필제 같다'는 속담까지 생겼다.[*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개고생|단 한 번의 실수로 평생을 비난받으며 사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결국 이필제는 길림성에서 끝없이 욕 먹으며 뺑이친 후에도 수많은 군필자들의 눈이 두려워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름까지 바꾸고 천도교에 입교해 길림성에 눌러앉았다. 게다가 이필제에게 격노한 일도 이후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점점 부풀려져서 시간이 좀 흐른 뒤에는 귀남이 필제에게 '''[[소현세자|벼루를 던졌다]]'''는 야사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자식인 경양대군도 철이 덜 들었던 시절에 이 벼루를 던졌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었을 정도. 팬덤에서는 한술 더 떠 '필제의 머리를 화로에 처박았다'를 넘어 필제를 통째로 질화로에 던져버렸다는 과장이 돈다.[* 그렇지만 전쟁이라면 극구 싫어하는 귀남옹의 성향을 감안하면 이게 단순한 과장으로는 안 들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전쟁을 무서워 하면서도 본인이 전생에 '''몸으로 직접''' 겪어본 전쟁은 [[태평양 전쟁]]과 [[6.25 전쟁]]처럼 나라의 명운을 걸고 하는 [[캐삭빵]]밖에 없어서, '''"[[총력전|사지 멀쩡한 사내는 모두 총 잡고 아낙들은 모두 논밭과 공장 나가야 전쟁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발언에 대해 서양에서는 '동양의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이라 비유할 정도로 이 무슨 [[군국주의]] 국가나며 경악했지만, 정작 조선 내에서는 한반도 4천년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고조선-한 전쟁]],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삼국통일전쟁]], [[나당전쟁]]''', 고려 시절 '''[[후삼국시대|후삼국통일전쟁]], [[여요전쟁]], [[여몽전쟁]], [[카다안의 침입]], [[홍건적의 침공]], [[고려 말 왜구의 침입]]'''부터 조선의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이[* 고수전쟁에서는 100만에 달하는 군대가 침공해서 30만에 달하는 대군이 평양까지 몰려왔고, 나당전쟁에서는 현 휴전선 인근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대몽 항쟁 당시엔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간 사이 본토는 몽골군에게 유린당했으며(몽골군이 '''경주'''까지 내려와서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웠다.), 홍건적이 쓸고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찾아온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의 규모와 피해는 임진왜란에 준할 정도였으며, 임진왜란은 '''조선 몰락의 시발점이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많은 전쟁이 '''본토가 전장이 되어 수도를 포함한 상당수의 국토가 엉망이 되고 백성들은 그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은, 한 번 한 번이 국운을 건 [[전면전]]'''이였기에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편이다. 현실의 한국이 포방부, [[화력덕후]]가 되고 도시 곳곳을 전쟁에 대비해 만든 이유도[* [[일산그라드]] 이전에 70년대 건설한 서울 아파트들에는 헬기 착륙 장소와 총구가 있고 도로에는 유사시 붕괴시켜 대전차방호벽을 만들 수 있는 장소들이 있다. 도로 배치도 이를 어느 정도 고려해서 만든 곳이 존재한다.] 까딱하면 바로 대규모 전면전으로 번진 이런 전쟁경험 때문이다. [[허버트 조지 웰즈]]의 작품인 '공중에서의 전쟁'을 각색할 때도 웰즈의 원문은 시골에서 조용하지만 평화롭게 사는 것이었으나, 귀남이 직접 각색을 지시한 내용은 참혹한 가난과 손발이 얼어붙는 지독한 추위와 비참한 굶주림, 전쟁이 끝났는데도 발 잘못 디디면 터져나가는 지뢰에 팔다리가 잘려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는 등, 내전에 시달리는 중동 국가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당대 기준에선 지나칠 정도로 잔혹한 모습이었다.[* 웰즈는 어떻게 이런 생생한 묘사를 떠올렸는지 의아해 하여 전보로 물어보았고 귀남은 이에 '''[[참전용사|"나는 보았소."]]'''라는 단 한마디로 응답했다.] 이런 점들 때문에, 국내 국외 할 것 없이 전쟁을 싫어하는 왕으로 알려져 있다. 분쟁을 싫어하는 온건한 성향과 당대 사람들보다 진보적인 사상, 그리고 전생과 현생을 합쳐 연륜이 깊은 노인 특유의 말돌리기 능력 덕에, 어떤 사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때 강경책보다는 단순하면서도 어딘가 엉뚱한 유화책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게 [[나비 효과]]로 예상치 못하게 이리 튀고 저리 튀어 결국에는 양쪽 모두 원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되지만 어쨌거나 손해는 보지 않는 좋은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백인의 의무|유자의 짐]]' 따위를 주장하는 얼치기 제국주의자들이 등장하자 "학생은 공부가 본업이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와중에 다른 짓거리를 하는 거 보니 시험 난도가 낮은 모양인가 보군?"이라고 대꾸하며 과거시험 난이도를 대폭 올려버렸다. 그런데 근대화 과정에서 자신들의 수나 능력과 시간이 부족했던 기존 관료층들이 이에 적극 찬동해서 자기네들이 필요한 걸 마구잡이로 시험과목으로 넣었고, 그 뒤에도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고 허튼 소리를 할 때마다 말 없이 과거시험 난이도가 올라갔고 수많은 유생들이 낙방과 생고생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저렇게 만든 원흉이던 학생 단체 대표는 애초에도 실력은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고시에 합격할 실력이 없으면 조직 자체가 와해될 판이라 필사적으로 공부해서 별 영향을 안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마구 시험난이도를 올리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세상이 급변하자 초야에 묻힌 선비들이 평생 쌓아온 학업과 수행이 물거품이 되어가지만 그런 학식으로도 참의원에 오르기엔 부족하다는 것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에는 "배운 사람이 존중받는 직업은 판사랑 검사"라며 사법부 독립으로 어쩌다 국왕(정부)-의회-사법부라는 [[삼권 분립]]을 완성하며 대응하는데, 삼권분립이나 사법부 독립 같은 거창한 명분이 있었던 게 아니라 '선비=많이 배운 사람이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논다고? 내가 살던 시대에는 판검사들이 많이 배운 사람이었지? 그러면 그거 시키면 어때?'하고 단순하게 접근한 것이다. 또한 분쟁을 싫어하는 성향은 국내의 정치적 알력다툼에도 마찬가지라 [[종교의 자유]]를 주요 골자로 하는 을축변법을 논의할 당시 '''"사람 모가지를 쌓아야 유지될 나라라면, 그런 나라는 망해도 싸다"'''며 신료와 사관이 들으면 그자리에서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를 정도의(...) 수위가 높은 발언을 하며 개혁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당장 계혜환국 때에도 세도가가 정계에서 쫓겨나기만 했지 죄를 뒤집어씌워 유배를 보내거나 하는 숙청과 주요 인물들이 죽은 경우 모두 없었으며, 나중에 개화의 물결에 올라탄 옛 세도가들이 각자의 분야를 살려 다시 정계에 오르는 것을 막지 않았다. 또한 홍재학이 감히 현 국왕인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신료들 사이에서 어심을 어지럽히는 무례한 서생이라며 당장 잡아들여 참해야 한다고 파문이 일었을 때도 마음이 상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표현의 자유|국가지도자를 비판하는 것이 잡아죽일 죄라고 생각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던지라]] 의금부로 끌고 가서 국문하지 않고 '무슨 이유로 그렇게 과격한 문체로 상소를 올렸겠는가, 적어도 그 사정이나마 듣고 앞뒤를 따져보자'며 흔쾌히 대궐로 불러들여 대소신료들과 개혁안을 논하기도 했다. 귀남이야 '선의'로 부른 거지만 당사자인 홍재학은 감정에 북받쳐 감히 만인지상인 국왕을 함부로 욕해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불경죄]]를 지었으니 입궐하는 길에 어깨가 천산처럼 무거워 죽을 맛이었다고. 전생엔 소학교[* 지금의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터라 군밤 굽는 기술을 제외한 "미래 기술"은 없다시피하다. 아는 역사 지식이라고는 '[[친미|미국은 좋은 나라]], [[반일|일본은 나쁜 나라]], [[명성황후|민비]]는 [[악녀|글러먹은 여인]], [[흥선대원군|대원군]]은 [[영웅|대단한 사람]], [[이완용]]은 [[매국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은 [[제국주의|왜놈 두목]], [[공산당]] [[반공|나쁜 놈]], [[마오쩌둥|모택동]]과 [[김일성]]은 [[조선로동당|공산당]] [[중국공산당|수괴]]' 정도[* 여기에 더해, 서울에서 전해 내려오던 [[원세개]]의 일화를 몇 마디 주워들은 바 있다고 한다. 즉 귀남옹이 아는 당대 인물 중 가장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원세개. 이외에도 이등박문을 안다면 한국인으로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이등박문의 최후]]도 당연히 알 것이기에 [[안중근]] 의사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을 것이다.]에 그치고, 미래 지식까지 포함해도 자동차, 비행기, 관광업 등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해서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수준이다. 거기에 머리도 특출나게 좋은 편은 못 되어서, 잠저 시절 스승이었던 [[오경석(조선)|오경석]]의 평가에 따르면 "주의가 산만하고 명석함도 둔재를 겨우 면한 수준". 때문에 일반적인 대역물 주인공과 비교하면 역사개변을 일으킬 지식이나 정치적 능력은 부족한 편이라 실제 계획을 짜고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대부분 휘하 신료들의 몫이다. 다만 수십 년의 노점상 경험으로 연마한 '사람 보는 눈'은 뛰어나고, 고된 세월동안 쌓여온 노인으로서의 지혜가 2번째 생의 시절까지 더해져 더욱 완숙해져 있기 때문에 (작가의 필력 덕도 크겠지만) 작중 대화에 있어서도 말문이 막히거나 중언부언하는 일 없이 유창하게 말하는 등 단순히 못 배워 무식한 노인이라고 만은 할 수 없다. 대신 '''군밤 굽는 실력'''만큼은 현생에서도, 전생에서도 가히 '''천하일품'''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단순히 군밤을 굽는 것을 넘어 [[율란]]같이 밤을 재료로 한 과자도 만들기도 한다.[* 이 율란의 경우엔 질화로 쓰기 어려운 여름철에 주로 즐긴다고 한다. 율란 제조법 특성상 수라간에서 만들어야 하지만 '''왕이 부엌에서 불 때며 굽는 게''' 가당치도 않으니 율란만큼은 귀남의 지시를 따라서 나인들이 조리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만든다. 숙수들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 나중엔 어제군밤 비슷하게 맛있게 나온다고.] 전생한 것 부터가 장사 단골 손님인 산신령이 그동안 맛난 군밤을 맛본 값이라고 귀남에게 선물로 선사한 것이며, 효자군밤으로 온 도성을 휩쓸던 당시에도 효를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우긴 했으나 손님이 몰려든 결정적인 원인은 귀남의 절묘한 군밤 굽는 실력[* 이 때문에 귀남과 효자군밤 사업파트너 관계였던 만덕은 귀남이 궁궐로 입궁한 이후에는 손님이 줄어서 고생이였다고 한다.]과 우수한 군밤 맛[* 작중에서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갖가지 군것질거리들과의 처절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결과물'이라고 묘사되는데, 이를 다르게 말하면 귀남이 굽는 군밤은 설탕과 합성감미료를 잔뜩 집어넣는 21세기의 여러 간식들과 비교해서도 그 자리를 지켜낼 만큼의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는 의미다. 당연히 설탕은 국외에서 수입하는 매우 귀한 식재료에 합성감미료 따윈 유럽에서도 나오지도 않은 시대인 작중 배경인 구한말 기준으로는 무조건 통할 수 밖에 없다.] 덕분이었다. 왕위를 정식으로 물려받고, 완전히 장성하여 대리청정과 섭정도 하지 않게 된 이후에도 군밤 굽기는 취미로 계속 이어나갔는데 주변에선 일국의 왕이 취미라지만 군밤을 굽는다는 것에 품위걱정을 했지만 '''그러기엔 어제(御製)[* 왕이 직접 만들었다는 의미다.]의 군밤이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너무나 구수하고 맛있던지라]]'''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으며[* 박규수가 귀남이 갓 구운 군밤을 먹고 [[조청]]보다도 맛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외려 날이 선선해지는 가을이 되면 귀남의 질화로 가져오라는 어명을 내심 기다리고 있는 판국이다. 이러한 간식 하사하기는 주변 나인들은 물론,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해당되어 부족한 자신을 도와 나랏일 하느라 고생한다고 몸소 한두 톨 구워내서 쥐어주기도 하며 때로는 반대의견을 내놓는 신료를 살살 달래면서 뇌물 삼아 쥐어주기도 한다. 가령 박규수의 경우, 심각한 안건을 가지고 귀남에게 갔다가 정신차려보니 귀남이 몸소 구워낸 군밤을 엄숙하게 받으면서 '''이 자리에서 바로 먹는 게 예의인지, 아니면 조심히 집까지 들고 가서 먹는 게 예의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개그씬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어제군밤을 하사받은 신하가 대표적으로 정학과 개화의 거두인 문경공 [[이항로]]와 문충공 [[박규수]]였던 탓에 어제군밤을 하사받는다는 것이 일세의 명신(名臣)만 받을 수 있는 대접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작중 조정에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온 외교관들에게 군밤은 물론이고 율란을 비롯한 여러 간식거리를 대접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국제 외교계에서 조선의 국왕이 자신이 맞이한 타국의 외교관에게 군밤을 대접하는 것도 일종의 [[외교적 수사]]로 여겨지게 되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닌 상황에서 타국의 외교관을 불렀을 때 군밤을 대접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 나라의 행동이 아니꼽다'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귀남이야 이역만리 만리타향에 와서 고생한다며 군밤 먹고 힘 내라고 매우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지만.], 마찬가지로 타국 외교관들에게도 매우 뛰어난 맛이라고 호평을 받았다. 시간이 흘러 당분이 두뇌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확인되자 이런 간식거리를 궁궐에 상비해두면서 근무나 회의 중에도 중간중간 입을 달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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