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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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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 === [include(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죽음의 수용소(Todeslager)라고도 한다. 나치가 세운 수많은 수용소가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는 아래의 6곳이고 그 외는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이다. 다른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도 부차적으로 인체실험이나 학살 등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이루어졌으나, 절멸수용소는 1차적인 목적이 노동이나 교화, 형벌이 아니라 살인(절멸)을 목적으로 운용되던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강제 수용소와 차이가 있다.[[https://ko.wikipedia.org/wiki/%EC%A0%88%EB%A9%B8_%EC%88%98%EC%9A%A9%EC%86%8C|#]] '''"라인하르트 작전의 일부"'''로 표기되는 절멸수용소들은 1942년 3월 부터 1943년 11월 까지 운영되었던 수용소들을 지칭한다. 나치의 국가보안본부장(RSHA)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도한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 '''절멸'''로 확정된 뒤, 세 곳의 절멸 수용소가 건설되었고 루블린 SS 경찰 지도자인 [[오딜로 글로보츠닉]]이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이 세 곳의 절멸수용소들은 여타 나치 강제수용소의 강제노동이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와 같은 '선별 작업' 조차 전무했으며 오로지 대량학살을 위해 가동되었다.[* 베우제츠,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수용소 수감자들의 사망률은 99%였으며, 어차피 이 수용소에 도착하는 모든 수감자들은 극소수의 존더코만도들을 제외하면 즉시 학살되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와 같은 전기철조망도 없었으며 경비도 그렇게 삼엄하지 않았다.] 특히, 1942년 4월에서 12월 사이에 단 8개월 동안 무려 유대인 120만 명을 학살해내 '''역사상 가장 빠른 대량학살률을 선보였다.'''[* Stone, Dan (2023). The Holocaust: An Unfinished History (1st ed.). Pelican Books. p. 191. ISBN 978-0-241-38871-6.] 이 세 곳의 절멸수용소들은 라인하르트 작전이 종료되자, 증거인멸 차원에서 폐쇄되었다. 하지만, 전후에 극소수의 생존자들의 증언과 발견된 나치의 공문서를 바탕으로 세 곳의 위치가 특정되게 되었고 그 장소에서 다수의 건물 터와 유골들이 발견되게 되면서 나치가 은폐한 절멸수용소로 밝혀지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에 비해 낮은 인지도로 인해 '잊혀진 죽음의 수용소(Forgotten Camp)'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다. 이 절멸수용소들은 "가해자들의 심리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대규모 가스실과 소각장을 구현해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가스실을 가동하는 SS 대원들도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이는 복수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는데, 홀로코스트 생존자 블라덱 슈피겔만의 증언을 다룬 만화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도 뉘른베르크 출신의 SS 대원이 유대인 수감자 블라덱에게 (다른 SS 대원들과 달리) 꽤 친하게 굴다가 어느 날 "비르케나우(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 다녀왔다"면서 반쯤 정신이 나가서는 이전과 달리 닥치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근무했던 SS 대원이었던 프란츠 수호멜(Franz Suchomel)도 초기에 배치받고 나서 그 참상에 충격을 받고 맨정신으로는 근무할 수 없는 지경이라 술에 항상 취한 채로 근무해야 했다고 증언했다.] 친위대 총수 [[하인리히 힘러]]는 이들에게 특히 육류 위주로 많은 식량과 술을 공급해 이들의 '심신을 달래려고' 했다. 그래서 생명과 가장 거리가 먼 공간임에도 SS 대원들을 위한 '일상적인 공간'들이 배치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경우 SS 대원들을 위한 [[카페]]는 물론 [[동물원]]까지 건설했으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의 수용소 바로 옆 저택에는 화단은 물론 수영장까지 있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width=600>[youtube(rZMuLU94HTc?si=1z4BrfXH8nKdnEwp)] || || 네메시 라슬로 감독의 [[헝가리 영화]] 《[[사울의 아들]]》 의 도입부에서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가스실 시퀀스. 열차로 이송되어 비르케나우에 도착한 희생자들이 존더코만도들의 안내를 받아 수용소 내로 들어오면 [[친위대(나치 독일)|친위대]] 장병들은 거짓말로 그들을 안심시킨다.[* 우선 위생을 위해 샤워를 실시한 후, 각자의 직무능력에 따라 적합한 일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안내한다. 샤워를 마친 후 본인의 옷을 찾을 수 있도록 옷걸이 번호를 기억하라는 말을 통해 별 일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머뭇거리는 희생자들에게는 식사로 나온 [[수프]]가 식고 있다고 재촉한다. 물론 이렇게도 진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친위대원들이 몽둥이질을 가하면서 그들을 강제로 가스실에 밀어넣는다.] 그동안 희생자들은 탈의하고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에 수용된다. 문이 닫히는 즉시 [[치클론 B]] 가스가 투입되며, 안에서 사람들이 가스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동안 존더코만도들은 희생자들의 짐을 모아 정리한다. || 나치는 강제 노동 수용소들의 존재는 인정했고 신문에서도 숨기지는 않았지만 절멸 수용소들의 존재는 '''아예 부정되었고''' 절멸 수용소들의 간부들은 비밀 유지 서약을 해야 했다. 이는 나치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끔찍한 행위이며 국제적으로 지탄받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영내 *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나치 독일 영토로 합병.(현재는 [[폴란드]] 영토)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제2수용소) - 사망자 '''110만 명 이상''' * '''[[헤움노 절멸수용소]]''' - 사망자 '''15~20만 명 이상''' 독일 점령지 수용소 * [[폴란드]] 지역 ([[폴란드 총독부]])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 사망자 '''70~90만 명 이상'''//'''라인하르트 작전의 일부'''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 사망자 '''17~20만 명 이상'''//'''라인하르트 작전의 일부''' *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 루블린 절멸수용소로도 불린다.] - 사망자 6~8만 명 이상 *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 사망자 '''43만 명 이상'''//'''라인하르트 작전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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