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홀로코스트/방식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가스 처형 == [[파일:majdanek gas chamber1.jpg]] ▲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마이다네크 노동 및 절멸수용소]]의 가스실. 푸른 얼룩은 [[치클론 B]] 독가스의 흔적이다. 총살법은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전쟁 통에 귀한 총알을 사형에 쓰느라 낭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을 쏴 죽인 SS대원은 [[PTSD]] 증상을 호소했고, 지휘부는 이들의 고충을 받아들여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마침 당시 독일에는 [[T4 작전]]이라는 장애인 학살 계획이 이미 실행 중이었다. 독일 정부는 장애인들이 열등 유전자를 가졌다고 판단하였으며, 그들을 요양원과 병원에서 안락사시켰다. 해당 과정은 우생학적이고 산업적인 학살이란 측면에서 홀로코스트와 대단히 유사한데, 실제로 이때의 경험은 가스실과 수용소를 통한 유대인 학살의 청사진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친위대원이 끔찍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1942년 6월 5일 베를린. >제국 기밀 업무(Geheime Reichssache) > >현재 사용중이며 생산중인 특수차량(spezialwagen)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 > >1941년 12월 이래로 세 대의 특수차량을 이용해 97,000명을 '''처리'''했고 차량에 별다른 결함은 없었음. (중략) 이전의 사례들로 판단컨데, 다음의 사항들이 개선되면 좋을 것임. > >1) 과잉압력을 막고 일산화탄소가 빠르게 퍼지게 하기 위해 차량 후방 벽면의 위에다 10x1cm의 구멍을 뚫을 필요가 있음. 압력 과잉은 밖에서 이 구멍을 막는 덮개를 여닫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음. > >2) 통상 적재 시 평방미터 당 9~10명임. 사우러(Saurer) 사[* 스위스의 차량 제작 회사. 사우러 사가 직접 가스 밴을 제작한 건 아니었고 사우러 사의 트럭을 독일의 Gaubschat Fahrzeugwerke사가 가스바겐으로 개조했다. 사우러 사의 제품 외에 르노, 오펠 사의 트럭이 가스바겐으로 개조되었고 이렇게 전쟁 중에 개조된 가스바겐의 수는 약 20여 대로 추정된다.]의 더 커다란 차량에도 그리 많이 적재하진 않음. 과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적재 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때 차량 안정성에 문제가 있음. 적재공간의 축소가 필요해 보임. (중략) 이를 위해 지금껏 했던 것처럼 '''화물'''의 양을 줄여선 안됨. 화물의 양이 줄면 남는 공간에도 일산화탄소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가동 시간이 늘어나게 됨. 반면 적재공간이 줄면, 공간이 완전히 화물로 가득찬 상태이므로 '가동 시간'을 줄일 수 있음. 제작자들과의 회의에서 적재공간을 줄일 경우 무게중심에 문제가 생겨 앞 차축에 과부하가 걸릴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사실 적재공간의 화물들이 가동 중에 언제나 뒷문으로 몰리기 때문에 무게중심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음. 따라서 앞 차축 과부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음. > >4) 차량 내부 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밀봉된 배수구를 설치해야 함. 배수구의 지름은 20~30cm로 하고 여기에 사이펀을 설치해 '가동 중에' 액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 함. 파이프 위에는 거름망을 설치해 오물에 의해 막히는 것을 방지해야 함. 큰 오물들은 가동 후 차량을 청소할 때 배수구의 뚜껑을 열어 제거할 수 있음. 적재공간의 바닥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도록 해서 오물들이 중앙으로 모아져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함. > >6) 적재공간 내 램프를 더 철저하게 보호해야 됨. 램프에 철망을 씌워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함. 램프는 필요 없다고 없애버리자는 말도 있음. 하지만 관찰 결과, 문이 닫히려 할 때 깜깜해지기 시작하면 '화물'들은 언제나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기에 문을 닫기 어려워짐. 이는 화물들이 어둠 속에서 조금의 빛이라도 드는 곳으로 향하려 하기 때문임. 또한 어둠으로 인한 공포로 '화물'들이 소음을 일으킴. 따라서 가동 초기엔 램프를 켜 두는 것이 더 적절함. 또한 야간 운영과 차량 내부 청소에도 도움이 됨. > >상기한 사항들은 수리를 위해 입고될 경우에만 적용될 것임. 이미 주문한 10대의 사우러(Saurer) 사 차량들에는 가능한 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임. 제작사는 회의 때 사소한 몇가지를 제외하고 개조가 당장 이루어지긴 어렵다고 함. 따라서, 10대 중 최소한 한대의 개조를 위해 다른 제작사를 알아본 결과 호엔마우트에 있는 회사가 적격이라고 제안함. 현 상황에서 이 차량의 개조엔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임. > >II D 부서장 SS 상급돌격대지도자 발터 라우프(Walter Rauff) 귀하. > ---- > -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 베를린의 가스실 총책임자 발터 라우프에게 자신들이 사용 중인 학살용 가스 트럭의 개선점을 보고한 서한. [[https://phdn.org/archives/holocaust-history.org/19420605-rauff-spezialwagen/|서신 전문]], [[http://www.gelsenzentrum.de/spezial_wagen_t4_rauff.htm|독일어 원문]][* 본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대량 학살을 다루는 문서임에도 ''' 담담하고 이성적인 문체와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파일:gas van.jpg|width=570]] ▲ [[헤움노 절멸수용소]] 근방에서 불태워진 채 발견된 마기루스 도이츠(Magirus-Deutz)의 트럭이다. 이 사진은 헤움노의 가스바겐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가스바겐과 동일한 차량 모델이지만 가스바겐으로 개조되지 않은 상태의 평범한 수송용 트럭이다. 현재 남아있는 헤움노의 실제 가스바겐 사진은 없다. 어느 날, [[발터 라우프]](Walther Rauff)[* 이 사람은 나중에 [[칠레]]로 [[나치의 남미 도주|탈출한다]].] SS[[대령]]은 한적한 교외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는 시동 끄는 것을 깜빡 잊었고, 문득 잠에서 깨보니 배기가스에 중독되어서 사지가 굳어 있어 꼼짝 못하고 죽을 뻔 했다. 그는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했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가스실 방식 살해 방법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사용했다. 이후 가스실은 홀로코스트의 상징과도 같은 처형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다만 라우프가 최초의 개발자는 아니었다. 또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가스형]] 자체는 홀로코스트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생각보다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1920년대부터 [[미국]]의 일부 주와 [[리투아니아]]에서는 공식적인 [[사형]] 집행 방식으로 가스형을 실시했고, 그 중에서도 미국은 1999년까지 가스형을 집행하다 온갖 반발에 시달린 끝에 약물형이나 전기의자형으로 거의 대부분 전환했다. 다만 [[캘리포니아]] 주 등지에서는 여전히 법적으로는 남아 있다. 집행을 하지 않을 뿐이다. 형벌이 아닌 집단 학살로써의 가스 처형도 나치의 등장 이전과 이후에 여러 사례가 있다. 1804년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군은 [[아이티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10만에 가까운 아이티 흑인들을 배에 짐칸에 태운 뒤 이산화황 가스로 살해하고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1937년 [[대숙청]] 당시 스탈린의 소련 [[NKVD]]는 모스크바 주 주민들을 대상으로 가스 밴을 이용한 학살을 자행했다. 나폴레옹의 흑인 학살에 대해서는 학술적인 공방전이 오가고 있으며, 사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NKVD의 학살의 경우 [[모스크바]] 시 외곽의 부토보 처형장에서 외상 없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시신들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다만 소련의 가스 밴은 [[대숙청]] 와중인 1938년에 주동자인 이사이 베르그가 NKVD에 의해 반동 혐의로 처형되면서 중단되었다.] 그 외 2012년 폐쇄된 [[북한]] [[함경북도]]의 22호 관리소([[회령 수용소]]) 또한 생체실험 목적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다만 이들 중 그 어떤 곳도 나치의 가스 학살과 비교될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돌아와서, 독일에서는 라우프의 등장 이전인 1939년과 1940년에 폴란드와 바르테란트 제국대관구에서 폴란드인들을 대상으로 가스 학살을 벌였다. 주로 배기가스 호스를 화물칸에 연결하곤, 희생자들을 실은 채 차를 몰아 한동안 이리저리 쏘다니다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학살은 총살로 집행되었다. 그러던 1941년 친위대 국가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동부전선 시찰 도중 총살 장면을 목격하곤 구역질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신을 차린 힘러는 아인자츠그루펜 B의 사령관인 친위중장 [[아르투어 네베]]에게 개선된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네베 중장은 1940년에 졸다우 강제수용소에서 1500명의 장애인들을 살해할 때 썼던 가스 밴을 가져와 소련인 정신질환자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실험'했으며, 결과가 만족스럽자 자신의 휘하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들에 가스 밴을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최초의 가스실은 배기가스의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방식으로, 지하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 수감자들을 가두고 꼼꼼히 빈틈을 막은 후 자동차 배기구에 호스를 달아 지하실에 연결한 뒤 열심히 공회전을 돌려 일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산소부족으로 질식해 죽은 사체를 처리하는 방식이 한동안 유지되었다. 또는 상술한 대로 트럭 짐칸에 배기가스가 들어가도록 개조한 뒤 희생자들을 싣고는 공회전시켜 살해하기도 했다. 이것이 'S바겐[* 특수차량(Spezialwagen)의 준말.]', 또는 '가스 밴'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아인자츠그루펜]]에서 사용하거나 최초의 절멸수용소였던 [[헤움노 절멸수용소|헤움노]] 및 크로아티아의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에서 사용되었다. 세르비아인들과 동슬라브계 소련 주민들은 이 트럭을 영혼 살해자라는 뜻의 'Dušegupka/душегубка(두셰구프카)'라고도 불렀다. [[파일:Wirth,_Christian[1].jpg]] ▲ 친위대 [[대위]]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의 소장이며, 가스실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인물.[* 비르트는 1944년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에게 처단 당한다.] > 하켄홀트 하사[* 라인하르트 수용소들의 가스실을 설계한 친위대 하사 로렌츠 하켄홀트를 의미. 1945년 적인 이탈리아 [[파르티지아노]]들에게 몰래 무기를 팔아넘기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고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죽음을 위장하고 위조 신분으로 도피했다고 여긴다.]는 엔진을 움직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비르트 대위[*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의 소장이었던 친위대 대위 크리스티안 비르트를 의미.]가 다가왔다. (''중략'') 나는 스탑워치를 보았는데 50분, 70분이 지나도 엔진은 가동되지 않았다. (''중략'') 분노한 비르트 대위가 하켄홀트 하사를 돕던 우크라이나인 경비병 얼굴에다 12, 13회 채찍질했다. 2시간 49분 후 디젤 엔진이 가동되었다. (''중략'') 28분 뒤 소수만이 살아 있었고 32분 뒤 모두 사망했다. 치의사들이 들어와 금니와 치관을 빼냈다. 그 시체들 한가운데에 비르트 대위가 서 있었다. 그는 물 만난 고기가 되어 희생자들의 금니와 귀금속으로 가득한 통을 들고서 이렇게 말했다. "이 황금의 무게를 느껴보시오! 이게 어제랑 그제 얻은 것들이오. 당신은 우리가 매일 얼마나 얻는지 모를 거요. 돈, 다이아몬드, 황금들 말이오. 직접 와서 보시오!" > ---- > - [[https://www.jewishvirtuallibrary.org/the-gerstein-report|게르슈타인 보고서]] 한편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처리 방침이 절멸로 확정되고, 라인하르트 작전이 벌어지며 폴란드 지역의 유대인 학살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세워진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 Treblinka extermination camp, 희생자 70~90만.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상당수가 이곳으로 보내졌다.], [[베우제츠]][* Bełżec extermination camp, 희생자 약 60만. 르부프 게토의 유대인 대부분이 보내졌다.],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소비보르]] 절멸수용소[* Sobibór extermination camp, 희생자 약 20만.]에서는 가스 밴 방식을 더 대량의 살인이 가능하도록 개량한 '가스실' 방식을 사용했다. 말이 수용소지 사실상 완벽히 산업화된 살인 공장의 기계나 다름없던 이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은 철도를 통해 이송된 유대인들 중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특수임무반)이라 불린 최소한의 보조 인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넘겨받는 즉시 바로 살해하여 화장해버렸다. 그러나 기존에 쓰던 가스 밴의 작은 용적으로는 이송되는 희생자들을 전부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나치는 가스 밴을 개량하여 가스실을 개발하게 된다. 이 아이디어를 최초로 내놓은 이는 베우제츠의 소장이었던 크리스티안 비르트 친위대 대위, 그리고 설계자는 로렌츠 하켄홀트 친위대 하사였다. 우선 간수들은 희생자들에게 이곳이 환승역이라 속인 뒤, 위생 검사를 핑계로 희생자들이 자발적으로 탈의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는 좁은 길을 통해 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에 희생자들을 인솔하곤 가스를 주입해 살해하였다. 다만 이들은 후술할 치클론 B 가스를 도입하지는 않았고 여전히 [[일산화탄소]]를 사용했다. 가스실 외부의 엔진실에 소련군 전차에서 떼어낸 디젤 엔진을 부착했고, 갖가지 연료(주로 석유)를 이용해 엔진을 공회전시켜 나온 가스를 배기 파이프를 통해 각 방에 흘려넣음으로써 희생자들을 질식시켰다. 이 4개 절멸수용소에서만 약 200만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작전이 단 몇 개월만에 폴란드 유대인들을 거의 절멸시키면서 이 가스실을 이용한 학살은 ''효율적''인 학살방법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한 번 '개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아이디어가 일산화탄소 대신 '[[치클론 B]]'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치클론 B]]는 밀폐된 공간에 터트려서 방역을 하는 살충제로, 당시 [[독일 국방군]]은 마구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만 해도 물자 수송에 있어 [[말(동물)|말]]의 비중은 매우 컸다.] 방역용으로 종합화학회사인 [[이게파르벤|I.G 파르벤]]에서 대량의 치클론 B를 납품받아서 석유보다 공급이 넉넉했다.[* 당시 치클론 B의 주 원료인 [[메탄]]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천연가스|연료]]로 활용되었다.][* 훗날 [[전범 재판]]에서 이게파르벤은 [[치클론 B]]를 학살용으로 공급한 것 아니냐는 추궁에 자신들은 [[살충제]]로 팔았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이 변명은 씨알도 안 먹혀서 이게파르벤은 해체되었다. 전술했다시피 다른 참여 기업들과 Degesch(1986년 Detia Freyberg에 합병되어서 Detia-Degesch라는 사명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사는 살려두었지만 Tesch und Stabenow사는 주요 인물인 브루노 테슈의 죄질이 너무나도 흉악했으므로 아예 강제로 청산시켜 버렸다.] 어찌되었든 치클론 B는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였고,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치클론 B의 치명성을 본 나치들은(출처:The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권 p113, Jozef Buszko) 이전에 쓰던 배기가스식 가스실보다 더 싼 값에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 다만 치클론 B는 [[아우슈비츠]](희생자 110만~120만),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마이다네크]] 수용소(희생자 최소 8만)에서만 사용되었다. 특히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경우, 부속 수용소인 모노위츠에 거대한 이게파르벤 공장이 들어서서 치클론 B를 공급했다. 전쟁 중기 이후 치클론 B의 납품이 대규모로 가능했음에도 각 수용소마다 가스실의 작동방식이 달랐고 그것을 바꾸기 싫었던 수용소장들은 기존의 일산화탄소 방식을 고수했다. 루돌프 회스의 표현에 따라 ''덜 효과적인'' 일산화탄소를 이용하는 절멸수용소들은 대부분 1944년 이전에 폐쇄되었고, 남아있던 절멸수용소들, 더 ''효과적인'' 치클론 B를 쓰는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는 1944년 7월까지, 아우슈비츠에서는 1945년 1월까지 학살을 지속했다. 독일 언론들은 수용소에 대량의 방역용 약품이 공급되는 것을 보고 나치 수용소가 정말 위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고 기사를 쓰는 짓을 저질렀다. 어차피 당시 독일 언론은 히틀러와 괴벨스에 의해 검열 중이었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밖에 기사를 쓸 수 없었다.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공간이었던 이들 절멸수용소(Todeslager, Vernichtungslager)들은 나치 독일에서조차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부정되었으며, 이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특히 라인하르트 작전 기간 세워졌던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등의 수용소들은 작전 종료 직후 증거 인멸을 위해 철저히 파괴되어 현재는 그 터만이 남아있다. 심지어 트레블링카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의 증언에 따르면 나치 정부는 여기서 일한 간수들마저 목격자로 취급했고, 그들이 사라지길 원했다고 한다. 때문에 라인하르트 작전 종료 직후, 수용소 간수들은 주로 위험 지역이었던 발칸 반도의 대 파르티잔 전선으로 보내져 소모되었다. 각종 서류 등의 증거 자료들 또한 다수가 파기되거나 암호화되어 있으며, 학살 공정을 찍은 사진은 비르케나우에서 찍힌 단 4장만이 남아있다. '존더코만도 사진'이라 명명된 이 네 장의 사진은 수감자였던 그리스 유대인이자 [[그리스군]] 장교였던 알베르토스 에레라(추정)가 카메라를 밀수해 간신히 찍은 것이었다. 집단 총살에 대한 증거 자료가 차고 넘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가스 밴들도 마찬가지로, 도합 수십 대가 넘었으나 전부 파괴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차량은 없다. 그나마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와 마이다네크는 노동수용소도 겸하여 그 크기가 굉장히 컸고, 시간이 촉박하였기에 미처 파괴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소련군이 이 지역을 접수하고 나서 전세계에 실상이 밝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에 맞먹는 희생자들을 낸 라인하르트 작전 수용소들은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울의 아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또한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쇼아(영화)|쇼아]]》에서는 바르샤바 게토와 아우슈비츠 외에도 헤움노와 트레블링카 등의 잊혀진 절멸수용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