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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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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1997년 ===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해태의 강력함은 변함없었다.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3연패로 물러나며 한 해를 쉰 해태는 1991, 1993, 1996, 1997년 네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마운드에는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 야수진에는 [[이종범]]과 [[이호성]], [[홍현우]], [[장성호]]가 등장하여 [[선동열]], [[김성한]], 이순철, 한대화의 뒤를 이었다. 1996년과 1997년의 한국시리즈 2연패는 선동열의 [[주니치 드래곤즈|일본 진출]]과 [[김성한]]의 은퇴로 인해 '해태도 한물갔다'라는 평을 뒤엎고 나온 것이라 더 큰 의미가 있었다. 1991년은 너무 타 팀을 압도했던 관계로 생략. 1992 시즌은 [[빙그레 이글스|빙그레]]가 워낙 전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해태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그 상황에서 1992년 4월 11일 OB전에 [[선동열]]이 무리한 투구[* 당시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이 경기에서 선동열은 [[김시진]]이 보유하고 있던 KBO 통산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우는 동시에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이 된 29번째 완봉승을 기록했다.]를 하다가 건초염 부상을 입게 된 이후로 투수진의 뎁스가 얇아지게 되면서 더욱 불리해진 것이다. 1992년 6월 12일 해태가 롯데전에서 승리하고 빙그레가 OB전에서 패배하며 잠깐 1위를 탈환하기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고, 그 이후로는 줄곧 2등에 머물렀다. 결국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빙그레 이글스|빙그레]]를 12승 6패로 압도하고도 중하위권 팀에게 열세를 보이며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KBO 플레이오프/1992년|포스트시즌]]에서는 2승 3패로 [[롯데 자이언츠|롯데]]에게 패하였다. 1993년의 해태는 전해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게 통한의 패배를 씻고 완전히 다른 팀으로 바뀌어서 91년 수준의 압도적인 팀으로 변했다. 투-타에서 [[이대진]], [[이종범]]이 들어오고, [[선동열]]이 92년 부상에서 완쾌되면서 93년 [[중무리]]역할을 했다. 특히 이 시기는 92년의 타격 몰빵 팀에서 벨런스 팀으로 변모하는데 성공한 시즌이기도 하다. 이종범의 젊은 혈기와 홍현우, 한대화, 이순철의 괜찮은 장타력을 기반으로 한 타선의 힘이 여전한 상황에서 조계현-이강철-김정수-송유석-이대진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선발진을 바탕으로 81승3무42패로 91년의 승률을 넘어서는데 성공한 것이다.[* 다만 밸런스적으로는 91년보다는 약했다. 그래도 선동열이 마무리 전향을 계기로 몬스터 시즌을 만들어낸 덕분에 91년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투수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즌에 10승 투수가 앞에 나온 5명은 당연하거니와 마무리였던 선동열도 10승을 찍은덕에 무려 6명에 달했고 이 기록은 24시즌이 시작된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즉, 이시기 해태의 투수진은 르네상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93년 한국시리즈는 그것의 백미였다. 비록 해태가 정규 시즌은 압도적이었어도, 그해 삼성한테는 7승11패로 좀 약했던 덕에 "이번에는 삼성이 드디어 해태를 깰 수 있는 건가?"라는 얘기가 나왔으나, 해태는 자신들이 왜 해태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세한 상황은 [[1993년 한국시리즈]] 참조. 1994 시즌은 개막전에서 응원가를 발표하는 등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타자 쪽에서는 이종범이 그야말로 리그를 지배했으나 김성한, 이순철의 노쇠화와 한대화의 LG 이적에 따른 공백을 이종범 혼자 메우기는 역부족이었다. 투수 쪽에서는 조계현이 18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에 오르고 이강철도 6년 연속 10승-100탈삼진 이상을 기록하며 분전했지만, 국보급 투수 선동열의 부진이 치명적이었다. 5월 한때 팀 자체 최다연승 타이인 12연승을 기록하며 선두권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그 해 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강의 압도적 기량을 선보인 [[LG 트윈스]]를 넘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한화 이글스]]와 공동 3위로 정규시즌을 마친 후 팀 사상 처음으로 준플레이오프를 치렀지만, 과거 한국시리즈에서 3번이나 털었던 한화에게 2연패로 패퇴하여 시즌을 마감했다. 이후 1995 시즌은 상당히 치욕적으로 마감했는데 85년 이후 10년만에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다만 순위 자체는 4위였는데 왜 포스트시즌을 못 갔냐면 당시 KBO에는 3-4위 격차가 3.5게임 이상이면 준플레이오프를 생략한다는 이해하기 힘든 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룰이 제정된 이유도 다소 황당한데 1992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부터 올라온 롯데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자 정규시즌 승률이 낮은 4위팀이 준플레이오프 1차전을 승리로 시작해 우승할 가능성도 제기되어 이를 막기 위함이었다...] 당시 3위였던 롯데와의 승차가 4.5 게임차라 준플레이오프를 열 수가 없었던 것.[* 결국 이 룰은 1999년 양대리그제로 개편되며 폐지되고 2001년 단일리그로 복귀하고나서도 적용되지 않게 된다.] 특히 1995 시즌 이후 또다른 위기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선동열과 김성한이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벗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선동열은 선수로서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했고, 김성한은 은퇴를 선언한 뒤 코치 연수생으로서 주니치 드래곤스로 일종의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자 당연히도 1993년 이후 두해 연속 4위권에 머물며 부진(?)했던 해태 타이거즈를 향한 우려의 시선은 한층 깊어졌다.[* 현시점에서 본다면 2시즌 연속 4위면 그래도 포스트시즌 진출인데 왜 부진이냐 할 수 있겠지만 당시 해태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해태가 4위에 랭크된다는 사실도 사람들이 이해를 못한 것이다.(...)] 94~5시즌 들어 확실히 뒷걸음치는 것으로 보이던 해태의 전력에서 80년대와 90년대 전반부를 통틀어 해태 타이거즈 투수와 타자를 상징했던 두 사람의 이름까지 빼고 보면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하위권으로 떨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야구 전문가들을 설문해 시즌 판도를 예상하던 언론들의 해태에 대한 전망도 그리 좋지 못했다. 1996년 봄에 나온 언론들의 2강, 4중, 2약의 전망에서 해태가 쌍방울과 함께 2약에 머문 것이다.[* 여담으로 2강은 현대와 롯데 4중은 LG, OB, 삼성, 한화였다. 물론 결과가 말해주듯 언론들의 예측은 현대를 제외하면 완벽하게 빗나갔다. 2약으로 예측한 해태와 쌍방울이 명백히 정규리그 1, 2위를 찍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해태가 기대하는 것은 1996년에 입단할 예정인 두 명의 걸출한 신인들인 박재홍과 김동호였다.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92년에 일찌감치 1차 지명으로 찍어 놓았고 일단 대학부터 다녀오라고 해태 측에서 권유해서 연세대로 진학했던[* 원래 해태의 지명을 피하려고 연세대로 진학했다 알려졌으나 박재홍 본인이 해태 측에서 대학을 먼저 다녀오라 권유해서 대학으로 간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대표 외야수 [[박재홍]]이 졸업하는 해가 96년이었고 계명대에 진학 중이던 오른손 정통파 투수 김동호는 96시즌 1차 지명자였다. 이들이 온다면 선동열과 김성한의 공백도 어느 정도 메꿔볼 만 했겠지만 프로야구판에 진출하려던 현대그룹이 [[현대 피닉스]]라는 공룡 실업 구단을 만들며 이 판을 뒤집어 엎어버린다. 현대 피닉스는 무시무시한 자금력을 동원해 그해 고교와 대학을 졸업하던 선수들을 훓어갔고[* 당시 현장의 회고에 따르면 사실상 인질극과 비슷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수들이 대처할 방법도 없었다고.] 박재홍과 김동호 역시 여기에 걸려버리며 돈이 없던 해태는 이들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박재홍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무려 홍현우를 요구했는데 해태 입장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다.] 거기다 당시 연고지 출신 고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세 명씩 지명할 수 있게 했던 고졸 우선 지명에서 골라냈던 세 명의 선수들 중에서도 [[서재응]]과 [[김상훈(1977)|김상훈]] 두 명이 대학행을 선언하며 그나마 진흥고의 김상진이 합류한 것을 빼면 사실상 보충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김상훈은 대학 졸업 후 합류하며 2000~2012년까지 타이거즈의 안방을 지켜줬지만 서재응은 대학을 중퇴하고 메이저리그로 가버리면서 지명 후 12년이 지난 2008년이 되고 나서야 타이거즈에 합류하게 된다.] 기둥 두개를 들어냈지만 새로 쓸 재목은 아직 베지 못한 형국. 타이거즈가 그렇게 앞뒤로 막히고 몰린 상황에서 맞이한 것이 1996 시즌이었다.[* 물론 그상황에서도 들어올 명선수들은 들어왔다. 오늘날도 타이거즈 대표 프랜차이즈로 기억되는 [[장성호]]와 [[김종국(야구)|김종국]], 타이거즈에서 프로 데뷔를 해서 SK와 NC의 강타자로 명성을 날린 [[이호준]]이 데뷔한 시즌이 바로 1996년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선수진의 구심점을 맡아준 것이 [[이순철]]이었다. 1985년 선동열과 함께 입단해 그해 신인왕을 차지한 데 이어 세 차례나 도루왕에 올랐던,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외야수비 능력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 대 선수이자 해태 왕조시대를 이끌어간 또 한 명의 주역이었던 그는 그 무렵 후배 선수들에게 '''선동열, 김성한이 없다고 우승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허깨비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며 결속을 다지고자 했다. 특히 이순철의 이 생각은 모든 선수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고 그에 따라 혈압 올리면서까지 집중해야할 버거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즉, 1996~7년의 연속 우승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이시기에 [[이대진|젊]][[임창용|은]] [[이종범|선]][[홍현우|수]][[김상진(1977)|들]][[박재용|이]] 기대보다 빠르게 성장하며 선동열과 김성한의 공백을 완벽히 메꿔주었던 것도 주목할만 하다. 특히 이들 중 가장 인상깊은 대상은 단연 이종범이었다. 이종범은 프로팀에 입단하기 전 부터 아마추어 야구를 평정한 국가대표 유격수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입단 첫해였던 1993년에도 신인왕 경쟁에서는 0.341의 타율에 23개의 홈런을 날리며 프로 야구사에서 처음으로 괴물 신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삼성의 양준혁에 밀리긴 했지만 0.280의 타율에 16개의 홈런 73개의 도루를 기록한데 이어 한국시리즈 MVP 까지 휩쓸며 아마추어 시절의 기대를 넘어서는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이종범은 2년차였던 1994년에 제대로 폭발했다. 그해 이종범은 무려 196개의 안타와 19개의 홈런을 쳐내며 .393의 타율을 기록했고 동시에 도루를 84개나 성공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한 시즌 최다 도루 부분에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통산 최다기록이며[* 최다 안타는 2014 시즌 [[넥센 히어로즈]]의 [[서건창]]이 201안타로 경신하였다.] 타율 역시 원년 [[백인천]]에 이은 역대 두 번째 고타율이었다. 19개의 홈런도 그해 홈런왕 김기태의 25개에 6개가 뒤지는 것이긴 하지만 경이로운 수준의 타율과 도루를 기록한 타자가 동시에 만들어낸 수치라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충격적인 요소였다. 그해 이종범의 타율이 워낙 높아서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1994년도 투고타저의 시기-'''3할 타자가 고작 8명에, 2위가 .323로 무려 7푼! 차이다'''-였다. 그리고 이어진 세 시즌 동안 3할 3푼대의 타율과 60개 안팎의 도루를 유지하면서도 1996년에는 박재홍, 1997년에는 이승엽과 끈질기게 홈런왕 경쟁을 벌이며 각각 25개와 30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재차 삼차 그리고 좀더 높은 수준에서 그런 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타선에선 이종범이라는 거대한 신성이 등장했다면 마운드에서는 신구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이전의 명성을 유지해갔다. 당장 선동열의 대를 이어 에이스 자리를 맡아준 것은 [[조계현]]이었다. 선배 선동열보다는 롯데의 최동원을 더 닮은 듯 싸움닭이라고 불릴 정도로 근성있는 승부를 즐기던 그는 90년대 들어 완숙미를 더한 모습으로 정점에 올랐다. 1993년과 1994넌에는 17승과 18승을 기록하며 다승왕에 1995년에는 1.71의 기록으로 평균자책점왕에 등극하며 리그 최강의 선발투수로 인정 받게 되었던것이다. 그 조계현에게 1996년은 에이스급 활약을 보여준 전성기의 마지막 해가 되고 말았지만 무려 11경기를 완투하는 등 191.2이닝 을 평균자책점 2.07로 버티며 16승을 올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아주었다. 조계현이 1차적으로 마운드의 중심을 잡아줬다면 1989년 데뷔 이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두 자릿수 승리를 올려준 [[이강철]]이 뒤를 받쳐줬다. 물론 첫 4년 동안처럼 해마다 200이닝 안팎을 감당하며 15승 이상을 기록하는 놀라운 페이스는 아니었지만 5년차였던 1993년 이후로도 그는 기복 없이 해마다 150이닝 이상을 던지며 2점대 중반에서 3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과 두 자릿수 승리를 이어가며 조계현의 부담을 덜어줬다. 조계현과 이강철이 선동열이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은 활약을 해준 반면 약진하며 선동열의 빈틈을 메워준 신진 에이스는 [[이대진]]이었다. 입단 첫 해부터 상대 팀 에이스들을 차례로 굴복시키며 전 구단 상대 승리 투수가 되는 심상치 않은 내력 속에 10승을 올리며 실한 떡잎을 보였던 이대진은 방위복무를 마치고 제대로 발을 들은 1995년부터 에이스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5년에 2점대 중반의 평균자책점으로 14승을 올리며 조계현에 이어 2선발급으로 부상한 그는 이듬해인 1996년에 16승을 올리며 조계현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다시 1997 시즌엔 다시 17승으로 하며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조계현과 이강철 그리고 이대진이 이룬 삼각편대에 더해 고졸 우선 지명으로 합류한 김상진이 예상밖의 힘이 되어주었다. 김상진은 묵직한 직구를 주무기로 삼아 입단 첫 해였던 1996년과 이듬해인 1997년에 각각 9승씩을 거두며 바로 몇해 전 이대진이 보여 주었던 것과 닮은 출발을 보였다. 이 행보를 본다면 김상진이 또 한 명의 이대진이 되줄것은 너무나도 확실해 보였고 이들을 주축으로 이전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빈자리를 말끔히 채워 넣을 2세대가 형성되는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96년이 되면 2약으로 분류되었는데도 연속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강력했던 무적 해태의 전설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궁금해질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우선 1980년대 이후 호남 지역의 아마추어 야구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것을 들 수 있다.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일고]],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광주상고]], [[군산상일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 등 호남권 학교에서 매년 마다 전국 최정상권의 우수 선수가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해태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1차 지명을 통해 즉시 전력감의 유망주를 꾸준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특히 안그래도 아마리그를 씹어먹던 신인들은 우승경험이 있는 좋은 선배들을 보고 배우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기량이 향상됐다. 거기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한 김응용 감독의 지도력이 더해지며 저마다 개성이 강한 해태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하나의 팀으로 뭉칠 수 있었다. 또한 매년 코치진을 갈아 버리는 몇몇 팀과 달리 해태는 코치진에 큰 변화가 없었기에 지도 방식에도 연속성과 일관성이 있었고 코칭스태프의 지도력이 흔들리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이것이 해태 전설의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러한 강력한 위계질서는 코칭스태프뿐만 아니라 선수단 내에서도 존재했다. [[MBC 청룡|MBC]], 해태. [[빙그레 이글스|빙그레]] 등 세팀을 경험한 [[유승안]]은 해태는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광장히 엄격한 팀이었으며 심지어 1년 차 선후배 간에도 위계가 분명했다고 밝혔다. 다만 역시 해태 선수였던 [[신동수(1966)|신동수]]는 위계질서가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해태에서는 팀에 확실한 구심점을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차동철]] 역시 투수조는 선동열을 중심으로 타자 쪽에서는 김일권 김봉연 김준환 등 고참들을 중심으로 구심점이 형성되어 선수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큰 경기에서 더욱 강한 힘을 발휘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구심점의 존재는 해태 특유의 끈끈하고 강인한 팀 분위기로 이어졌다.[* 물론 이것이 타이거즈 특유의 똥군기 문화를 나았다는 비판도 존재하며 이런 비판은 타이거즈 올드팬덤과 현대팬덤을 불문하고 전부 수긍되는 편이다. 실제 해태 문화를 경험한 이종범과 이대진이 괜히 고참이 되고 나서 이런 문화를 전부 정리한 것이 아니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해태가 짠돌이 구단이었던 것도 한국시리즈에서 선수들이 힘을 발휘한 원동력이었다. 연봉에 대한 개념이 처음부터 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버티는 곳이었던 해태에서 그나마 선수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한국시리즈 우승밖에 없었다. 어느 한 인터뷰에서 김응용 감독은 연봉이 워낙 짜다 보니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통해 보너스를 받으려는 열망이 컸다고 회고했고 유승안 감독은 같은 보너스라도 해태에서 주는 천만 원과 빙그레에서 주는 천만 원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고 밝혔다. 좀 과장하면 해태 선수들은 그 천만 원을 1억으로 보는 반면 삼성이나 빙그레 선수들은 백만 원 쯤으로 봤다고 보면 된다. 해태 선수들은 기필코 보너스를 받아내겠다는 마음으로 필사적이라면 다른 팀 선수들은 받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런 식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준플레이오프나 플레이오프와 같은 작은 무대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는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을 나았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1990년대 들어서 타이거즈는 준플레이오프나 플레이오프에서 전부 떨어졌으며 이는 팀명이 KIA로 바뀐 현재에 와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이에 대한 반작용인지 아직까지도 타이거즈는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서 무릎을 꿇은 적은 없다는 징크스가 아직까지는 유지되고 있다. 또한 해태 선수들에게는 승리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있었는데 '''해태의 승리는 광주와 호남 팬들에게 단순한 야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영호남 지역갈등]]의 최대 피해자이자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에서 김대중의 전략으로 본격화된 지역갈등, [[5.18 민주화운동]]에서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저항했다가 [[광주학살]]이 일어난 호남 지방은 문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이 [[5.18 민주화운동]]을 짓누르고 출범한 [[전두환 정부]]가 [[3S 정책]]으로 출범한 게 [[한국프로야구]]였으며 호남 연고 구단이 없으면 프로야구는 출범할 수 없다고 선언 할 만큼 어떻게든 호남 지방의 저항을 누르려 하고 있었다.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밟히면서 차별과 억압에 울던 그들에게 해태의 야구는 얼음 계곡물에 몸 한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번 물어 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한 몸짓이자 일종의 정치 사회적인 대리전이었고 권력에 대한 통쾌한 복수와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해태 왕조의 마지막 해에 열린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4수 끝에 [[김대중]]이 아주 적은 표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며 그렇게도 갈망했던 숙원을 풀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이 대통령에 될 수 있었던 것은 [[김영삼 정부]]의 [[1997년 외환 위기]] 때문이었고, 그 [[1997년 외환 위기]]는 해태 타이거즈의 모그룹인 [[해태그룹]]을 부도로 몰고 가면서 마침내 해태 왕조도 함께 저물어 가게 되었다. 이후 인수된 [[KIA 타이거즈]]도 이전의 해태와 달리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 팀이 되었으며 [[엘롯기]]라는 굴욕적인 멸칭을 얻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김대중부터 노무현까지 이어지는 민주당 집권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타계한 2009년 8월, [[KIA 타이거즈]]는 [[우주의 기운]]을 받아 8월에만 KBO 월간 최다 승인 20승을 싹쓸이하며 2009년 페넌트레이스를 제패했고, 두 달 뒤 열린 [[2009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한국시리즈|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그렇게 타이거즈를 괴롭혀 왔던 아홉수를 풀어내고 V10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KIA 타이거즈/2009년]] 참고. 여러모로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연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타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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