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해태 타이거즈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해태 왕조|1986년~1989년]] === ||<width=35%> [[파일:/image/295/2011/08/16/%25BD%25BA%25C6%25F7%25C3%25F7%25C3%25E1%25C3%25DF.%25B1%25E8%25C0%25C0%25BF%25EB5.jpg|width=100%]] ||<width=31%> [[파일:/image/295/2011/08/16/%25BD%25BA%25C6%25F7%25C3%25F7%25C3%25E1%25C3%25DF.%25B1%25E8%25C0%25C0%25BF%25EB6.jpg|width=100%]] ||<width=34%> [[파일:/image/295/2011/08/12/%25BD%25BA%25C6%25F7%25C3%25F7.jpg|width=100%]] || ||<-3> 우승 9회라는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세운 해태의 상징 '''검{{{#ff0000,#ff0000 빨}}}'''유니폼[[선동열|.]] || 1986년, 해태는 팀 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내부적으로 코칭스태프에 [[김인식]] 전 동국대 감독, 재일교포 박정일 코치를 영입했고[* 원년부터 함께한 조창수는 롯데로, 유남호는 청보로 떠났다.] OB와의 트레이드로 국가대표 3루수 한대화를 라인업에 더하게 되었다. 해태에 우수한 신인 선수들이 합류한 시즌이기도 했다. 차동철(광주일고, 건국대)과 까치 김정수(광주진흥고, 연세대), 장채근(광주상고, 성균관대), 이건열(군산상고, 동국대), 신동수(광주상고) 등이 이 시즌에 한꺼번에 팀에 합류했다. 이전까지 고질적인 선수부족에 시달렸던 해태 입장에서 좋은 선수들의 대거 가세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 또한 연세대로 진학하기로 한 송유석은 일이 꼬이면서 해태에 연습생으로 입단했고 1987년부터 1군에서 기회를 잡기 시작했다.] 실제로 차동철은 데뷔 첫 해 10승을 따내며 마운드에 큰 힘이 됐고 김정수는 정규 시즌 9승에 그쳤지만 [[1986년 한국시리즈]] 3승을 혼자 쓸어 담으며 시리즈 MVP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에 2년차에 접어든 선동열이 무려 24승에다가 불멸의 기록인 0.99의 평균 자책을 기록하며 역대 투수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부상에 신음하던 원조 에이스 이상윤도 10승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해 해태 마운드의 시즌 팀 평균 자책은 2.86으로 투수진 전체가 에이스급 성적을 낸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해태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단 둘뿐인 대기록을 세웠다.[* 이후 4년 연속 우승은 2011~2014년까지 연속 우승을 차지한 [[삼성 라이온즈]]가 달성했다.][* 특히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횟수도 2011년 [[SK 와이번스]]가 5년으로 갱신하기 전까지 최다 연속 진출 기록이기도 했다. 이후 SK는 2012년에도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으며 기록을 6년 연속으로 늘렸고 삼성 라이온즈가 2015년에 5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해태의 기록을 3위로 몰아냈다. 이후 두산 베어스가 2015~2021년까지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한국시리즈 최다 연속 진출 기록을 갱신하면서 해태의 기록은 4위로 밀려났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왕조였다. 참고로 1986 시즌 우승에는 그해 변경된 규정의 덕을 좀 봤다. 전해 시즌인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를 전부 싹쓸이하면서 한국시리즈를 소멸 시키는 통합 우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흥행 참패를 하자 KBO는 전후기 모두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후기 중 한 번만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플레이오프를 거치는 방식으로 포스트시즌 규정을 변경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전후기 모두 2위를 한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고 전기 1위인 [[삼성 라이온즈]]와 후기 1위인 [[OB 베어스]]는 플레이오프로 밀려나게 된다. 하지만 규정 변경이 없었다면 해태 타이거즈의 페넌트 레이스 전략도 당연히 바뀌었을테니 반드시 해태가 규정 변경 덕을 봤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후기리그가 끝난 후 해태와 OB는 동률로 공동 1위였다. 그런데 당시는 동률인 경우 3전 2선승제로 순위결정전을 치르게 되어 있었고, 포스트시즌 대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후기리그 우승결정전을 치렀다. 여기서 해태가 져서 2위. 전후기 통합'''승률'''은 70승 1무 37패를 마크한 삼성이 653으로 1위, 67승 4무 37패를 기록한 해태가 644로 2위였지만 이 규정 때문에 삼성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해태는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해태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결국 삼성과 OB는 플레이오프 끝에 삼성이 이기고 체력을 비축해 놓은 해태가 그 삼성을 잡고 통산 2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86에 대해서는 해태 팬들도 말이 많다. 87이면 모를까 아싸리 단일리그해도 선동열의 힘이 장난이 아닌지라... 1986~89 시즌 해태의 페넌트레이스 성적을 보면(괄호 안은 통합 승률 순위) 1986 시즌 67승 4무 37패 .644(2위) (1위: [[삼성 라이온즈]] 70승 1무 37패 .654) 1987 시즌 55승 3무 48패 .532(2위) (1위: [[삼성 라이온즈]] 64승 44패 .593) 1988 시즌 68승 2무 38패 .642(1위) 1989 시즌 65승 4무 51패 .558(2위) (1위: [[빙그레 이글스]] 71승 3무 46패 .604) 즉 16승 투수 둘(선동열, 이상윤), 30홈런(김성한), 26홈런(장채근)으로 56홈런을 합작한 슬러거를 앞세운, 팀 타율도 .283으로 압도적이었던 1988년만 절대적으로 리그를 지배했을 뿐 나머지 시즌에서 해태는 강팀 수준일 뿐 리그를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4년 연속으로 우승을 달성한 것은 어찌보면 대단한 일인 셈. 1986 시즌엔 전, 후기 규정이 있는 데다 투타를 보면 삼성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방어율, 실점은 비슷했으며 타율은 삼성이 무려 1푼 5리나 앞섰고 나머지 타격지표는 삼성의 우위지만 홈런은 해태가 25개나 많이 쳤다. 말 그대로 단일 시즌으로 시즌을 치렀다면 비슷하지만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 거기다 제일 중요한건 86 해태가 대 삼성전에서 11승 1무 6패로 다소 강했다는 점이다.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은 향후 두 팀의 운명을 가른 명승부였다. 삼성은 천하의 선동열을 상대로 김성래가 7회 홈런을 쳐내며 2대0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해태 타선은 삼성 에이스 김시진이 등판한 8회 뒤늦게 폭발했다. 8회말 김봉연의 적시타로 1점을 만회한 뒤 1 대 3으로 뒤진 9회말에 김일권의 1타점 3루타와 만루에서 나온 김성한의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으로 극적인 동점에 성공했다. 그리고 11회 말 2사 2루에서 김성한의 끝내기 중전 안타가 터지면서 4시간 9분 간의 혈투가 끝이 났다. 삼성으로서는 에이스 김시진믈 투입하고도 당한 패배라서 아픔이 두 배였다. 하지만 1987년의 경우 다윗과 골리앗 수준이었다. 1987년의 삼성은 팀 타율 3할을 기록했으며 23승의 다승왕 [[김시진]]까지 건재한, 말 그대로 그 다음해의 해태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팀이었다. 해태는 2위권에서 아슬아슬하게 치고받는 수준에다 주전의 줄부진 내지는 부상 때문에 팀타율 .252의 빈타까지 겹쳤다. 하지만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만나 4승 무패로 완벽한 우승을 차지했다. 고비 때마다 홈런을 터뜨린 김준환이 시리즈 MVP가 됐다.[* 김준환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밝히길 부인이 첫째를 낳고 중병(혈소판 감소증)에 걸려 집, 야구장, [[전남대병원]]을 왔다갔다 하느라 정규 시즌에서 2할을 간신히 넘는 타율을 기록했으나 한국시리즈에서 활약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명실상부한 '왕조'를 세우는 해가 되었다. 참고로 1987년 한국시리즈 우승은 광주에서 거둔 첫 우승이며 해태-KIA의 나머지 우승은 원정구장 또는 중립 구장(잠실)에서 대부분 했다. 그 후 2024년에 광주에서 우승을 거둔다. 이렇듯 정규 시즌에서 [[롯데 자이언츠]]보다 8승을 더 거두고도 한국시리즈조차 나가지 못한 1984년의 [[OB 베어스]], 1986년에도 한국시리즈에 나가지 못한 [[OB 베어스]], 통합 우승을 거두고도 해태 타이거즈에게 작살난 1987의 [[삼성 라이온즈]]가 겹치며 1989년부터는 아예 전ㆍ후기리그 제도를 폐지하고 단일 시즌의 체제로 나가게 된다. 1988~1989년에는 상대가 삼성 대신 빙그레로 바뀌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98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문희수]]가 눈부신 호투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선동열은 1차전에서 빙그레 타선을 압도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지만 이 때 생긴 손가락 물집으로 인해 더 이상 등판을 하지 못했다.] [[198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박철우(야구)|박철우]]가 맹타를 휘둘러 각각 시리즈 MVP에 올랐다. 1989년은 [[빙그레 이글스]]보다 사실상의 전력은 조금 약해 보였다. 물론 기존의 선동열에 [[이강철]], [[조계현]]이 가세한 투수진은 [[이상군]], [[한희민]]의 빙그레와도 막상막하였지만 타선이 그해 홈런왕을 차지하면서 최초로 20-20을 달성한 [[김성한]], 이해 제2의 코끼리로 등극하며 .318을 찍은 [[박철우(야구)|박철우]] 이외에는 믿을 만한 타자가 별로 없었다. 반면 빙그레는 [[이정훈(1963)|이정훈]], [[이강돈]], [[장종훈]]에 말년의 [[유승안]]마저 타점왕에 홈런 2위를 달성한, 그야말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절정을 찍던 시기였다. 하지만 오히려 4승 1패로 빙그레를 압도하면서 4연패를 이뤄내고 만다. 이러한 4년 연속 우승에는 [[선동열]], [[이상윤(야구인)|이상윤]] 등을 중심으로하는 강력한 마운드와 [[방수원]][* 패전 처리조로도 출전하였다.], [[신동수(1966)|신동수]], [[김정수(1962)|김정수]] 등이 중심인 불펜진, [[김봉연]], [[김성한]], [[한대화]], [[김종모]], [[이순철]] 등으로 구축된 공포의 타선, 그리고 뛰어난 용병술과 팀 장악력, 카리스마를 발휘한 [[김응용]] 감독의 수완이 절묘하게 맞물려 이뤄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파일:attachment/1989kbopopularvote.jpg|width=400]]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인기팀으로 성장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