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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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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1982년 === ||<-2><tablealign=center><tablebgcolor=#f01e23> '''{{{#ffff00 캐치프레이즈}}}''' || ||<bgcolor=#000000> {{{#ffffff 1982년}}} ||<bgcolor=#ffffff,#1c1d1f> '''야구를 통해 호남인의 긍지를 심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21600329209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2-16&officeId=00032&pageNo=9&printNo=11195&publishType=00020|출처]]] || [[KBO 리그|한국프로야구]]를 출범할 당시 기업주의 고향이 호남 출신인 기업 내지는 호남에 연고를 둔 기업 중에서 [[해태제과]]를 택해[* 해태제과 창업주 4인 중 1인이자 [[박건배]] 구단주의 부친인 송당 [[박병규(기업인)|박병규]] 사장의 고향이 광주인 점이 고려됐다. 해태제과의 생산 시설이 광주에 들어선 것은 V1 직후인 1984년의 일이고 창단 당시엔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본사를 두고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과 경기 안양시에 공장을 뒀다.] 창단한 구단. KBO에서는 당시 호남 연고 구단 창단을 위해 호남 출신 기업인들이 세운 호남 기반 3대 기업이었던 [[삼양사]][* [[김연수(기업인)|김연수]] 창업주가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이다.], [[금호그룹]][* [[박인천]] 창업주가 [[전라남도]] [[나주시]] 출신이며 금호그룹의 모태가 된 [[금호고속|광주고속]]도 원래는 광주에서 출발한 택시 회사였다.], [[교보생명|대한교육보험]][* [[신용호]] 창업주가 [[전라남도]] [[영암군]] 출신이다.]에 프로 야구단 창단을 제안했으나 모조리 거부 당했다.[* KBO 리그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호헌(前 MBC 야구 해설)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호남 출신 후보 기업군 중에서 프로 야구단을 맡을 만한 능력이 되는 대기업은 매우 적었다"라고 했을 정도로 호남의 기업 경제 기반은 수도권이나 영남권에 비해 매우 취약한 편에 속했다. 참고로 저 세 기업 모두 스포츠 쪽 보다는 문화 예술 분야나 학술 지원 분야에 더 관심이 많은 기업들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을 통해서 클래식 음악과 순수미술 분야 쪽을 꾸준히 지원해 왔고 교보그룹은 창업자 [[신용호]] 회장의 [[아호|호]]를 딴 대산문학상을 통해 문학계 인재 양성 쪽에 큰 공을 들였다. 그리고 2020년대에는 금융권은 별도 법인을 세워야 하는 프로 스포츠단을 보유할 수 없다는 법령 때문에 [[키움 히어로즈]]처럼 구단 메인 스폰서를 맡는 정도가 한계다. 다만 [[하나금융그룹]]의 [[대전 하나 시티즌]]처럼 법을 우회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삼양그룹 역시 창업자 [[김연수(기업인)|김연수]] 회장의 호를 딴 수당재단을 통해 중고교 장학 사업을 전개해 왔다. 그나마 삼양사는 휘하에 [[사이클]] 실업단을 두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정말로 금호가 프로 야구단을 창단했다면 그 이전부터 망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현대 유니콘스|반면교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호남만 빼놓고 프로 야구를 출발할 수는 없었기에 정말 궁여지책으로 호남과 연관 관계가 있는 기업 중에서도 [[중소기업]] 수준이었던 [[해태제과]]를 선정한 것이다. 그만큼 '''호남 연고 대기업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해태의 참여가 확정되기 전 광주일보의 김종태 사장은 만에 하나 해태가 단독으로 창단할 능력이 없다면 [[일본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경우처럼 전라도민들의 공모 주를 모아 도민 구단을 만들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처음에 [[지역감정]]이 심화될까봐 지역연고제를 반대했던 [[청와대]]도 그것을 허락했는데, 다른 지역에 하나씩 야구단이 생기는데 호남만 비어 있다면 소외론이 나올수도 있고, [[3S 정책|호남 지역민의 정치 관심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프로 야구 원년(1982년) 시즌이 개막하기 2년 전에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어떤 사건]]이 터졌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금방 나온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포츠경기는 사람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많이 모일 수 있고, 시끌벅적해도 아무렇지 않은 행사이다. 그렇다보니 군부독재 타도와 같은 구호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당시에는 2000년대의 응원가 문화가 아직 없었지만, 현재의 야구팬들이 경기가 끝나고 구장앞에서 응원가를 부르며 뒷풀이하는 문화처럼, 이 당시에도 응원이후 시위로 번질 가능성을 청와대는 두려워 했다. 그래서 후술되어 있듯이 '''[[5.18 민주화운동|5월 18일]]'''에는 82년부터 99년까지 광주 홈경기를 잡지 않았다.] 꼭 구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1981년]] [[10월 28일]] [[동아일보]]에서 프로 야구 창립 과정이 처음 세상에 공개됐다. 프로 야구 창립 과정에서 호남 연고 구단을 맡기로 지명된 기업은 호남 최대의 기업인 [[금호아시아나그룹|금호그룹]]이었다. 당시 [[박인천]] 금호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인 '''[[박삼구]]''' 금호실업 사장이 프로 야구 참여에 대해 긍정적인 뜻을 밝히고 부친이자 그룹 회장인 [[박인천]] 회장에게 건의를 하기로 했는데 부친이 고령에 병환이 있어서[* [[박인천]] 회장은 결국 1984년에 세상을 떠났다.] 말을 못하고 있다가 뉴스를 통해 박인천 회장이 금호의 프로 야구 참여 소식을 알고 화들짝 놀라게 됐다. 프로 야구 창립을 주도하던 인물 중 하나인 이상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의 말에 의하면 보도가 나간 뒤 [[박성용(기업인)|박성용]][* [[박인천]] 회장의 장남으로 앞서 언급된 박삼구 회장의 맏형이다.] 금호그룹 부회장이 청와대로 찾아와 금호가 호남 프로 야구단 담당 기업으로 지명된 것이 [[전두환]] 대통령의 뜻이냐고 물었고 이상주 수석은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박성용 부회장이 "그러면 우린 빼달라"라고 말해서 사실상 금호의 참여는 [[김칫국|물 건너갔다]]. 프로 야구 참여 거부가 박성용 부회장 본인의 뜻인지[* 실제로 박성용 회장은 스포츠보다 클래식 애호가로 더 유명했다. 서울에 있는 금호아트홀에는 박성용 회장의 지정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광화문 금호아트홀은 2019년 5월 1일부터 경영 악화로 폐관했고 [[연세대학교 서울캠퍼스]]에 금호아트홀 연세를 지어 명맥을 잇고 있다.] 박인천 회장의 뜻인지 둘 다 같은 생각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는 창업주의 상의 없이 아들들이 멋대로 정한 일에 분통을 터뜨려서[* 실제로는 금호그룹이 프로 스포츠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풍토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에도 금호그룹은 계열사인 금호생명에서 잠깐 여자 농구단([[OK저축은행 읏샷]]에서 [[부산 BNK 썸]]으로 바뀌면서 역사 단절)을 운영한 것을 제외하면 프로 스포츠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1988년에 축구계의 요청으로 호남 연고 컨소시엄 구단을 창단하려다가 포기했고 2003년에도 서울 연고 프로 축구단을 창단하려 했으나 [[광주광역시|광주]]/[[전라남도|전남]]권의 초강력 반발로 재차 포기했다. 그뿐만 아니라 [[삼성그룹|삼성]]처럼 체계가 탄탄하지 못한 것도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불발되었다고 하나 단순히 그 이유 하나만은 아니라는 게 더 합리적이다. [[현대그룹|현대]], [[LG|럭키금성]], [[대우]], [[SK|선경]] 같은 최상위권 재벌은 참여하지 않고[* 당시 [[현대그룹]]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해야 된다는 이유로 고사했고 [[LG|LG그룹]]은 [[구자경]] 회장이 해외에 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실무진에서 책임질 수 없는 큰 결정을 할 수 없기에 고민만 하다가 결국 [[MBC 청룡]]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때문에 구자경 회장에게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이후 현대그룹은 1995 시즌 이후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LG는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하면서 야구판에 들어가게 된다. [[SK|선경그룹]]은 본디 야구뿐 아니라 스포츠단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전두환]]의 반농담으로 인해 [[http://gall.dcinside.com/football_k/3546651|축구단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게 바로 [[유공 코끼리]]였다. 그리고 선경그룹은 2000년 [[쌍방울 레이더스]]를 해체 후 재창단 방식으로 인수해 [[SK 와이번스]]를 창단하며 야구판에 입성했지만 2020 시즌이 끝나고 [[SSG 랜더스|신세계그룹에 야구단을 매각했다.]] 대우는 훗날 [[쌍방울 레이더스]]를 인수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소문으로 그쳤고 쌍방울 구단보다 그룹이 먼저 해체되었다.] [[롯데]][* 2000년대 이후로 한국 5대 그룹으로 언급될 정도로 성장한 롯데지만 1980년대 당시 롯데는 재계 서열 49위의 그저 그런 기업이었다.], 삼미, 해태 등이 선정되자 '''[[삼성]]은 이런 피래미들과 같이 못 놀겠다'''고 창단을 포기하려는 걸 억지로 주저앉혔다고 한다.[* 일본도 사실 프로 야구 참가 기업 면면을 보면 재계 일류 기업은 아니다. 언론사([[요미우리 신문|요미우리]], [[주니치신문|주니치]]), 철도 회사([[한신 전기철도|한신]], [[세이부]]), 유통 기업([[라쿠텐]]), 식품 회사([[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니혼햄]], [[야쿠르트]], [[롯데]]), 인터넷 기업([[DeNA]]), 2선급 자동차 회사([[마쓰다]]), 금융업체([[오릭스 버팔로즈|오릭스]]) 등. 그나마 일류 기업이라고 할 만한 게 [[소프트뱅크]] 정도다. 과거에는 한신을 포함해 [[고쿠테츠]](국철, 야쿠르트 전신), [[니시테츠]](세이부 전신), [[난카이]](다이에 - 소프트뱅크 전신), 한큐(오릭스의 전신), [[킨테츠]](오릭스에 합병) 등 아예 철도 회사로 12개 구단 중 절반(6개 구단)을 채웠고 특히 칸사이권 4개 구단(한신, 난카이, 한큐, 긴테츠)은 모두 철도 회사 산하 구단이었다. 그래서 일본도 한국과 같이 기업명제로 운영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은 다이요가 연고지를 요코하마로 옮기고 이름을 바꾸면서(다이요 웨일스→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지역명 호칭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삼성 입장에선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삼성이 지금처럼 대한민국 원탑에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현대, 럭키금성, 대우와 더불어 대한민국 4대 재벌이고 프로 야구단을 창단하기로 한 타 기업(롯데그룹, 해태제과, 삼미그룹, 문화방송)은 다 삼성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삼성이 아닌 타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경쟁자들을 비하했던 삼성은 프로 야구가 시작되자마자 MBC에게 7:11 대역전패라는 매운맛을 본 것을 기점으로 2001년까지 그렇게 비하했던 기업들이 세운 구단들에게 매운맛을 제대로 보게 된다. 당장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OB에게 우승을 내줘야 했고 해태에게만 우승을 3번 빼앗겼으며(86,87,93) 져주기 게임까지 감행하며 한국시리즈 상대로 골랐던 롯데에게도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한 방 먹으며 준우승에 그쳤다.] 해태가 프로 야구에 참여한 건 굉장히 의외인 일이었다. 롯데는 프로 야구 창립 계획서에 '경쟁 대상인 같은 업종은 가급적 피한다'라고 써있는데 왜 해태가 들어오냐며 반대를 했다. 급기야 참여 안 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나중에 알려진 것에 의하면 롯데 [[신격호]] 회장이 부산 대신 서울을 연고지로 얻어내려고 강하게 나가기로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한다. 해태를 반대하던 롯데는 결국 추진위원회를 못이기고 부산을 연고로 정했다. 호남 연고가 붕 뜬 상황에서 [[박건배]] 회장이 참여 의사를 표력하여 탄생하게 됐는데 이때 해태는 [[김동엽(1938)|김동엽]]을 감독으로 선임할 권리를 약속 받는다.[* 박건배 해태 회장과 김동엽 감독은 서울 [[경복고등학교]] 선후배였다. 프로 야구 창립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감독 한 명쯤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실 상징성을 감안하면 호남 야구를 대표하는 인사인 [[김양중(야구)|김양중]]이나 최관수가 감독을 맡는 게 합당했지만 김양중은 이미 일선 지도자에서 물러난 지 15년이 지난 상황이었고 최관수는 이 시기에 [[파킨슨병]] 투병 생활 중이라 일선에 나설 수가 없었고 원래 호남 출신도 아니었다.(인천 출신) 즉, 인맥도 인맥이거니와 마침 호남 대표 야구인들 중 감독을 맡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네임벨류가 있는 감독인 김동엽은 환영받을 인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1982년 1월 30일 해태제과 본사에서 타이거즈는 절대적인 선수 수의 부족으로 창단 당시 6개 구단 중 가장 적은 '''15명'''의 선수로 창단식을 치렀다. [[실업 야구]] 시절 [[스파르타 교육|스파르타식 훈련]]으로 대성공을 거둔 김동엽 감독은 자신감에 넘쳤다. 선수는 15명으로도 충분하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해태는 1982년 내내 선수 부족으로 고전했다. 창단당시 해태 엔트리에는 투수로 등록된 선수는 딱 5명. 그중에도 이상윤과 방수원, 최영조는 대학 4학년을 앞두고 중퇴한 선수로 대학 중퇴자는 선수로 뛸 수 없는 KBO 규정상 선수 자격에 문제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 투수 3명으로 시즌을 시작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창단식을 강행한 셈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프로팀 입단을 주저하며 혹은 연고지 팀의 지명을 받지 못하며 실업무대에 남아 있던 선수들 중에 서울 출신의 김경훈[* 원래는 광주 출신이지만 그가 다니던 [[광주동신고등학교]] 야구부가 해체하면서 [[신일고등학교 야구부|신일고]]로 전학했다.]과 대전 출신의 홍순만을 각각 원래 서울 지역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MBC 청룡과 OB 베어스 측에 양해를 얻어 충원했고 시즌 개막 직전 역시 서울 출신인 [[조충열]]을 급히 데려오게 된다. 전국을 서울, 인천·경기·강원, 충청, 부산·경남, 대구·경북, 호남 등 6개 권역으로 나누어 각 구단이 각자의 연고지 출신 선수들을 배타적으로 그리고 무제한으로 선발할 수 있게 했던 것이 프로 원년의 규정이었다. 하지만 그 출신 지역의 기준은 본적지나 출생지가 아니라 졸업한 고등학교로 설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대구에서 태어나서 중학교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지만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진학에 실패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서 [[대광고등학교 야구부|대광고]]를 나온 [[김재박]]이 대구 연고 구단 삼성이 아닌 서울 연고 구단 MBC 청룡으로 가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해태 타이거즈가 뽑을 수 있는 선수는 광주를 포함한 전라남도와[* KBO 리그 출범 당시만 해도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반시였다.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된 시점은 해태가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직후인 1986년 11월 1일이다.] 전라북도 지역 내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 지역 안에서 걸출한 선수를 배출할 만한 학교가 당시로서는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현시점에서 호남권의 전통 강호로 평가받는 광주일고와 광주동성고(이당시는 광주상고), 광주진흥고는 이시기에는 이제 막 비상을 시작하던 시기라 비상을 주도하는 선수들이 프로무대에 오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 해태의 대표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광주일고, 광주상고의 핵심 선수였던 선동열과 이순철도 프로야구 창단 당시에는 대학생이라 이미 대학중퇴자 3명을 영입한 해태 입장에서는 영입이 불가능했고 이들은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85년에 입단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후술되는 표처럼 선수단의 절반은 군산상고 출신으로 짜여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금도 그렇지만 1980년대 당시에도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선수라고 하더라도 고등학교는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서 졸업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호남 지역의 고등학교가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1949년 청룡기 대회에서 김양중이 이끌던 광주서중 이후 1972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의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호남 야구의 붐을 타고 그 뒤를 이은 것은 1975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우승한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일고]]와 1977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우승한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광주상고]]였다.[* 정작 광주상고의 첫 우승 주역이었던 3학년 선수들은 한 명도 프로에 입단하지 못했다. 광주의 또 다른 학교인 [[진흥고등학교 야구부|광주진흥고]]는 프로 야구 출범 시점에서 1977년 봉황대기 준우승, 1981년 황금사자기 준우승이 전부였을 정도로 출발이 늦었다.] 1975년과 1977년이 되어서야 전국 무대에서 우승을 다툴만큼 경쟁력이 갖추게 된 호남 지역 고등학교의 졸업생이 프로 무대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왜냐면 프로 야구가 생기기 전까지 야구 선수에게도 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될 서른 안팎의 나이부터 직장 생활의 무기가 되어줄 학벌을 챙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장종훈]], [[이승엽]], [[장성호]] 등 고졸 선수들이 성공 신화를 대거 쓰면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선수로 가는 것이 대세가 되었고 대학 진학은 고등학교 때 드래프트에 실패해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기 위해 가거나 유사시 체육교사 자격을 얻기 위해 가는 정도가 되었긴 하지만[* 실제로 이걸 준비했던 대표 사례가 나성범이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특기생으로 대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을 만한 실력이 갖춘 선수들의 경우에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였다. 그리고 특별히 국제대회에 우승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병역특례를 받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당시로서는 운동선수들도 평범한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재학 중에 혹은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육군(경리단), 공군(성무)이 각각 운영하는 팀으로 입대해 병역을 마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이마저도 1984년 각 군에서 운영하던 팀들이 [[국군체육부대]]로 일원화되면서 문턱이 좁아지게 된다. 프로 선수들은 그조차도 지원이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현역 일반병으로 입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선수 생활 끝을 의미했다.(실제로 노상수, 양세종, 정학수, 최계훈 등 현역 일반병으로 입대한 선수들은 전역 후 이렇다 할 커리어를 남기지 못했다.)] 즉, 호남지역 고등학교에서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프로로 오려면 더더욱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선수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었기에 시즌 개막을 한 후에도 마산 출신의 임정면과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을 앞두고 결성한 국가대표 선수단에서 무단이탈한 [[김일권]]을 우여곡절 끝에 영입하여 간신히 21명의 선수단을 구성할 수 있었다.[* 김일권은 그해 53도루로 초대 도루왕을 차지하며 해태에 큰 보탬이 되었다.] 또한 약속대로 초대 [[감독]]으로 [[김동엽(1938)|김동엽]]이 선임되었지만 불과 13경기를 치렀을 때 조창수와 유남호 두 코치가 감독의 폭력적인 행동 등을 문제삼으며 [[조창수·유남호 코치 잠적 사건|구단을 이탈하는 사건]]이 터졌고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전에 자존심이 상한 김동엽 감독은 5승 8패라는 성적만 남긴 채 스스로 옷을 벗고 구단을 떠나버렸으며, [[조창수]] 코치의 감독 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르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부터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한국프로야구였지만, 해태는 워낙 선수층이 얇았던 탓에 가끔 [[지명타자]] 없이 [[김성한]]이 [[투타겸업|선발투수와 타자의 투잡을 뛰기도 했다]]. 한 구단이 선수 9명만으로 한 경기를 치른 사례(그러려면 지명타자가 없어야 하고 선수 교체도 없어야 한다)는 한국프로야구에서 딱 두 번 있었으며 '''전부 원년의 해태가 기록한 것'''이다.[* 참고로 2024년 현재에도 이 기록은 유효함으로 절대 깨지지 못할 기록으로 남겼다. 순위가 결정된 일회성 경기에서 강우 콜드가 나오면 모를까 투수가 완투할 일도 별로 없는 요즘 시대에서는 희귀할 수밖에 없다.] 김성한의 투타겸업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참고로 김성한의 [[1982년]] 성적은 투수로서는 10승 5패(7위), 방어율 2.89(6위)였는데 다승과 방어율은 팀내 1위였다. 타자로서는 타율 0.305, 홈런 13개(4위), 타점 69점(1위) 도루 10개였다. 둘 중 하나에 더 전념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김성한은 원래 투수 출신으로 [[동국대학교 야구부|동국대]] 시절까지 투수를 했으나 타격에 더 재능이 있는 걸 발견한데다 결정적으로 팔꿈치 부상이 생기며 타자로 완전 전향했다. 다만 세간에서 당시 선발 투수로 활동했다고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26경기 출장(김성한은 원년 모든 경기에 출장했으며 26경기란 잠깐이라도 투구를 한 경기를 의미한다.) 중 5경기만 선발로 나왔다. 즉 주로 나온 포지션은 구원 투수라는 것. 실제로 이렇게 투수로 뛰면서 팔꿈치에 다시 문제가 생기기도 했던 탓에 1982 시즌 후 인터뷰에서 "너무 힘들어서 자청해서 마운드에 올라 죽도록 던지고 다시는 투수를 할 수 없도록 팔이 영영 고장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물론 훗날에는 나중에 생각해보니 힘들었던 건 생각 안나고 재밌었다고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시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투타 양면에서 모두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2><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0000><tablebgcolor=#000000><bgcolor=#ff0000> {{{#ffff00 '''1982년 원년 멤버'''}}}[* 창단은 14명이었지만 뒤에 [[김일권]]을 포함에서 몇 명이 더 들어오기는 했다.] || || {{{#ffffff '''투수 (5명)'''}}} ||[[강만식|{{{#ffffff 강만식}}}]] [[김용남(야구)|{{{#ffffff 김용남}}}]] [[방수원|{{{#ffffff 방수원}}}]] [[신태중|{{{#ffffff 신태중}}}]] [[이상윤(야구인)|{{{#ffffff 이상윤}}}]] || || {{{#ffffff '''포수 (3명)'''}}} ||{{{#ffffff 김경훈}}} {{{#ffffff 박전섭}}} {{{#ffffff 홍순만}}} || || {{{#ffffff '''내야수 (6명)'''}}} ||[[김봉연|{{{#ffffff 김봉연,,(주장),,}}}]] [[차영화|{{{#ffffff 차영화}}}]] {{{#ffffff 최영조}}} [[조충열|{{{#ffffff 조충열}}}]] [[임정면|{{{#ffffff 임정면}}}]] {{{#ffffff 차정득}}} || || {{{#ffffff '''외야수 (5명)'''}}} ||[[김우근|{{{#ffffff 김우근}}}]] [[김일권|{{{#ffffff 김일권}}}]] [[김종모|{{{#ffffff 김종모}}}]] [[김준환|{{{#ffffff 김준환}}}]] {{{#ffffff 김종윤}}} || || '''[[투타겸업|{{{#ffffff 투타}}}]][[오타니 쇼헤이|{{{#ffffff 겸업 (1명)}}}]]''' ||[[김성한|{{{#ffffff 김성한}}}]] || ||<-2><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0000><tablebgcolor=#000000><bgcolor=#ff0000> {{{#ffff00 '''출신 고교별 원년 멤버 현황'''}}} || ||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ffffff '''군산상고 (9명)'''}}}]] ||[[김봉연|{{{#ffffff 김봉연}}}]] [[김준환|{{{#ffffff 김준환}}}]] [[김일권|{{{#ffffff 김일권}}}]] [[김우근|{{{#ffffff 김우근}}}]] {{{#ffffff 김종윤}}} [[김용남(야구)|{{{#ffffff 김용남}}}]] [[김성한|{{{#ffffff 김성한}}}]] {{{#ffffff 박전섭}}} {{{#ffffff 차정득}}} || ||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ffffff '''광주일고 (4명)'''}}}]] ||[[강만식|{{{#ffffff 강만식}}}]] [[차영화|{{{#ffffff 차영화}}}]] [[이상윤(야구인)|{{{#ffffff 이상윤}}}]] [[방수원|{{{#ffffff 방수원}}}]] || ||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ffffff '''광주상고 (2명)'''}}}]] ||[[김종모|{{{#ffffff 김종모}}}]] {{{#ffffff 최영조}}} || || {{{#ffffff '''기타 고교 (5명)'''}}} ||{{{#ffffff 김경훈,,(신일고),,}}} [[조충열|{{{#ffffff 조충열,,(선린상고),,}}}]] [[신태중|{{{#ffffff 신태중,,(전남고),,}}}]] {{{#ffffff 홍순만,,(대전고),,}}} [[임정면|{{{#ffffff 임정면,,(마산상고),,}}}]] || 선수층은 양적 기준으로 타 구단보다 허약해 보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선수 개개인 수준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투수진을 보면 [[김용남]], [[이상윤]]은 국가대표 출신이고 [[강만식]], [[방수원]]도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이름 좀 날리던 투수였다. 야수 중에서도 [[김봉연]]은 실업야구계를 평정하던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이자 원년 연봉 1위였고[* 프로 야구 출범 당시 KBO에서 선수들의 롤 모델로 지정한 것만으로도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김일권]]은 국가대표팀 리드오프였고, [[김준환]]도 실업야구계에서 명성을 날렸다. [[김성한]], [[김종모]]도 대학야구의 강타자로 유명했다. 한 마디로 '''소수정예'''로 원년 리그를 보낸 셈이다. 이름과 달리 스타 선수 하나 없다고 감독이 푸념할 정도로 약체였던 [[삼미 슈퍼스타즈]]보다 '''더 얇은''' 선수층으로도 어째서 4위를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수비 핵심인 포수와 유격수 자리에 마땅한 선수가 없었던 점, 선수단에 좌타자가 전혀 없었던 점, 주전들이 부상 당하거나 체력이 떨어지면 뒤를 받칠 백업 선수들이 부족했던 점. 이 세 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얼마든지 날아오를 수 있는 잠재력 있는 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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