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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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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맹 세력의 비협조 === 프랑스의 패전 책임은 프랑스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벨기에의 중립이었다. 벨기에의 중립은 연합군의 대독일 전략 수립에 큰 골칫거리로 작용했다. 1차 대전 시기에 독일이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해 온 일은 누구나 알고 있던 일이었고, 프랑스 - 독일 국경에 마지노선이라는 요새를 쌓아놨으니 물어볼 것도 없이 벨기에 방면이 독일군의 주공이 될 터였다. 그러나 벨기에는 중립을 선언한다. 그렇다고 벨기에의 중립이 스위스처럼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벨기에는 대독일 안보 체제에 동참했고, 유사시에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이 벨기에로 이동하여 독일군과 싸운다는 딜 계획을 입안했다. 브레다 변경 이전까지, 딜 계획은 굉장히 효과적이면서도 벨기에의 중립을 고려한 현실적인 계획이었다. 딜 계획의 골자는, "유사시 알버트 운하의 방어선(Albert Canal-Meuse line)에서 벨기에군이 버티며 시간을 버는 사이, 연합군 병력이 딜 강을 낀 방어선(K-W line)까지 진출해 수도인 안트베르펜과 벨기에 서부의 방어를 겸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효과적인 계획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딜 계획의 원안은 하천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강화해 방어선 전체의 길이가 짧았다. 하천 방어선은 클라우제비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단하지만 깨지기 쉬운 소재로 된 도구"와 같은 성질을 지니는데, 이는 산악 방어 대비 방어를 위한 요소들을 활용하기에 용이한 한편, 한 곳이 뚫릴 시 방어선 전체가 붕괴하며 종심상의 잔류 저항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높은 경도를 지니는 만큼 강도를 충분히 높여줄 필요가 있었는데, 이 곳에 배치될 계획이었던 병력의 규모는 절대 부족한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프랑스 - 벨기에 국경(Franco-Belgian border)에 위치한 전 병력이 일종의 전략적 예비대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방어선에 배치되기까지 어떻게 보면 불필요할 수 있는 기동을 해야만 했지만, 벨기에 영토만큼의 면적이 일종의 종심으로서 작용하여 독일군의 주공 방향에 따라 딜 계획을 발동하지 않는 대신 보다 결정적인 지점에 전력을 투입하여 수적 우위를 누리기 용이했다는 얘기다. 스핏파이어를 프랑스 전역에 투입하는 것을 거부한 영국 공군 사령부의 결정으로 인해 이미 파일럿 부족과 정비 미흡, 신형기 부족으로 인해 독일 공군에 비해 질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 공군은 절망적인 수적 열세에 놓였으며, 이는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다수의 전투기 기종이 Bf 109에 뒤쳐졌음은 사실이나, D.520 같이 일단은 상대하는 것이 가능한 기종도 분명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상당히 신형기였기에 기종 전환에 시간이 들었고, 1940년 6월 25일까지 351대라는 나름 괜찮은 수량을 뽑아내긴 했으나 개전 시점에서는 30여대 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공군에 대한 도외시라고도 보일 정도였고 그러한 태도의 결과는 참담했다. 신기종을 개발할 능력이 있음에도 구식 기종의 양산을 계속했고 이것이 조종사가 신형기에 적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 공군의 폭격과 공수부대의 공작으로 개전과 동시에 전선에 인접한 비행장 수 곳이 무력화 되는 등 자체적인 대응 태세에도 문제가 있었다.] 영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200대의 스핏파이어를 프랑스에 투입하는 것이 프랑스 전역의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을지언정, 독일 공군의 작전 환경을 악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가능했고 영국 본토 항공전을 늦추거나 루프트 바페의 공세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국 본토 항공전의 성과가 단지 기체의 성능이 아닌, 체인홈이라는 조기경보 및 지상 관제의 통합 체계에 의한 요격에 기반했음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방자로서 누린 우위는 확고했고, 해당 우위를 쥐어 짜내는 수준의 전략으로 싸웠기에 얻어낼 수 있었던 성과였다.] 결국 영국은 1939년 ~ 1940년 내내 프랑스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영국은 독일과 전투를 벌이겠다는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체임벌린 내각에게 있어 전쟁은 실제적인 행동보다는 히틀러가 국제 협약을 어겼다는 실수를 최대한 빨리 깨닫도록 만들 상징적인 행위였을 뿐, 그들은 유혈사태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최대한 회피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파리의 달라디에 내각은 영국이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에 동의했을 때, 영국의 이러한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칠이 수상이 되었을 때, 그는 영국의 전쟁 수행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나, 그 역시 1940년 여름에 영국이 보유한 군사 자원이 얼마나 제한적인 상태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병력의 완전한 투입을 자제했다. 최후의 순간, 레노는 영국군이 기꺼이 투입하고자 하는 병력이 얼마나 소규모인가를 알고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처칠이 전시 내각을 잡은 후에는 보다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려 했는데,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을 해협 너머로 보내려는 처칠과 그것을 뜯어 말리는 휴 다우딩의 일화는 나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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