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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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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의 자르 공세 ===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지난 6개월 동안 [[그단스크|단치히]]의 영유권 문제로 갈등한 끝에 폴란드를 [[폴란드 침공|침공했다.]] 당시 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기도 한 이 침공을 제대로 된 전쟁보다는 앞선 체코 합병과 유사한 무력 시위 혹은 퍼레이드 정도로 여겼다. 히틀러는 앞선 1차 대전 당시 양면 전선의 악몽을 기억하고 불안해하는 장성들에게 폴란드와의 전쟁 역시 세계 대전으로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며 전쟁에 돌입했다,[* 애초에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 수뇌부는 [[크릭스마리네|해군]]의 [[Z 계획]] 등 군사력 증강 및 군수 공업 시설 건설이 완료되는 1945년 전후를 프랑스 침공 시점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독일의 군수 생산은 연합군의 폭격에 시달리면서도 1944년 가을에 정점을 찍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건설했던 군수 공업 시설이 그때야 완전히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 현재 국제 정세상 영국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도 병력이 부족한 상태며 군비도 빈약하다. 포병만 해도 매우 노후하다. 프랑스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해, 영국은 사실상 폴란드를 지원할 수 없다. (중략) 적들의 군사적 개입은 불가능하다. 적들은 나의 위대한 결단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적들은 하찮은 벌레 새끼들에 불과하다. 나는 뮌헨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 > 1939년 8월 22일 폴란드 침공 직전, 히틀러가 장성들에게[* 출처: Befehl im widerstreit.Schicksalsstunden der deutschen Armee 1923~1945] 히틀러는 대외적으로도 영국과 프랑스에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폴란드를 침공한 구실도 폴란드 군이 독일 국경을 넘어 침공한 것처럼 조작해 만들었고[* 그렇기에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전쟁이나 침공이 아닌 '''반격 작전'''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말리스 슈타이너트 : 히틀러. CH Beck, 1994, ISBN 3-406-37640-1 , p. 398) [[6.25전쟁]]을 한국군에 대한 반격 전쟁이었다고 주장한 [[김일성]]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수 군사 작전이라고 부르게 한 [[블라디미르 푸틴]]의 원조격 짓을 한 셈.] 전쟁이 개시된 9월 1일 베를린 크롤 오페라 하우스[* 독일 국회의사당은 방화사건이후 복원이 되어있었지만 히틀러는 크롤 하우스를 더 선호해 이곳을 아예 국회의사당으로 삼아버렸다.]에서 폴란드에 대한 선전포고 연설 중 프랑스와 영국에 적대할 의도가 없다고 강조했다. > Ich habe es feierlich versichert und wiederhole es, daß wir von diesen Weststaaten nichts fordern und nie etwas fordern werden. Ich habe versichert, daß die Grenze zwischen Frankreich und Deutschland eine endgültige ist. Ich habe England immer wieder eine Freundschaft und, wenn notwendig, das engste Zusammengehen angeboten. Aber Liebe kann nicht nur von einer Seite geboten werden, sie muß von der anderen ihre Erwiderung finden. Deutschland hat keine Interessen im Westen. Unser Westwall ist zugleich für alle Zeiten die Grenze des Reiches. Wir haben auch keinerlei Ziel für die Zukunft und diese Einstellung des Reiches wird sich nicht mehr ändern. > > 저는 엄숙히 약속하건데, 우리는 서방국가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프랑스와 독일 간 국경은 확정되었음을 보증했습니다. 저는 영국에 대해 [[영국-독일 해군조약|여러 차례 우정]]을, 그리고 필요하다면 [[뮌헨 협정|가장 긴밀한 협력을]] 제안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한쪽에서만 줄 수 있은게 아니며, 반드시 반대쪽에서도 응답이 있어야합니다. 독일은 서쪽에 아무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크프리트 선|서부 방벽]]은 영원한 독일국의 국경입니다. 우리는 또한 미래에 대해 아무런 목표도 없으며, 독일국의 이러한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 > 1939년 9월 1일 독일 의회에서 진행된 히틀러의 연설 중[[https://www.1000dokumente.de/Dokumente/Adolf_Hitler,_Erkl%C3%A4rung_der_Reichsregierung_vor_dem_Deutschen_Reichstag|#]] 한편 폴란드 침공 소식을 들은 영국과 프랑스는 더 이상 독일의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고 독일에 진지하다는 군사 행동을 보이면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중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에 따라 9월 3일 정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앞으로 5시간 내에 폴란드 침공을 중지하거나 침공을 중지하겠다는 확실한 보장을 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전달했다. 예상 밖의 영국과 프랑스의 반응에 히틀러와 나치 독일 수뇌부의 반응은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내가 통역을 마치자 그곳은 침묵으로 휩싸였고...(중략)...히틀러는 돌처럼 굳은 채 가만히 전방을 바라보았다. 알려진 것처럼 흥분하거나 미쳐 날뛰지 않았다.'''[* 히틀러는 대중에 알려진대로 고함치고 날뛰는 성격이 아니라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다만, [[뮌헨 폭동]] 사건에서처럼 극한 상황에서는 절제력을 잃곤 했으며 대중매체에서 묘사하는 격정적인 모습은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암살미수 사건]]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화 <[[다운폴]]>에서 묘사한 미쳐 날뛰는 모습은 그야말로 극한에 처해 정신이 완전히 붕괴했을 때였다.] 그는 자신의 의자에 미동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영원처럼 느껴진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갑자기 히틀러는 창백한 모습으로 창가에 서 있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를 울분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며 이렇게 물었다. > >"이제 어떻게 할 건가?" > >마치 리벤트로프가 영국의 외교적 반응을 잘못 알렸다고 지적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리벤트로프는 목멘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 >"아마 프랑스도 머지않아 '''우리에게 동일한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낼 것 같습니다.'''" > >[[헤르만 괴링|괴링]]은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 >'''"이번 전쟁에서 또 다시 패배한다면 과연 신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 >---- >'''- 히틀러의 통역실장 파울 슈미트의 회고 -'''[* 출처: 칼 하인츠 프리저 저 《[[전격전의 전설]]》(Blitzkrieg-Legende) 2-1장.] 이 상황은 회의론자들에 의해 이미 독일에서 매우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침공을 전후로 군부에서 [[슈바르체 카펠레|반 히틀러 움직임]]이 재점화되기 시작했으며, 군부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과 관련해서 서방, 특히 영국을 자극하지 않을 것임을 반복적으로 다짐해 왔었다. 심지어 만일에 대비해 대영 - 대프랑스 방어전을 계획하던 참모 본부의 친히틀러파 참모 장교들에게 "영국이나 프랑스가 이걸 핑계로 쳐들어올지도 모르오! 그걸 당신들이 책임질 거요?"라며 면박을 주기도 했고 전술한대로 선전포고문을 의회에서 낭독하면서도 영국과 프랑스에는 절대 공격할 의도가 없다고 전 독일 국민 앞에서 선언까지 했으니 히틀러로선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1939년 9월 3일부로 독일은 양면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히틀러도 양면전쟁의 말로를 잘 알고 있어서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폴란드 공격을 위해 거의 모든 전력이 동부전선에 몰려있었고, 서부전선은 두 강대국에게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때 반 히틀러 진영은 히틀러가 한시라도 빨리 제정신을 차리거나, 차라리 정말 그의 말이 현실이 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개전이 확실시되던 8월 26일, 프랑스는 선제적인 동원령을 개시했고, 9월 1일에는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9월 7일, 프랑스는 선전포고 4일만에 약 20개 사단을 투입해 자르 공세를 시작했고 프랑스군은 공세 개시 당일에만 10km를 진군하는데 성공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Ofensiva_del_Saar2.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1939년 9월 21일까지 프랑스군이 자르 공세로 점령한 독일 영토 || 하지만 독일의 대응은 소극적이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 개시 하루 전인 8월 31일, 독일군에게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금지하는 '전쟁 수행을 위한 지시 제1호(Weisung Nr. 1 für die Kriegführung)'를 하달했고 제 1군은 이를 철저히 따랐다. 1군은 자르 일대의 주민들을 소개하고 지뢰를 매설했으며 프랑스군을 향해 산발적인 지역 단위 반격 및 기만 작전을 실시했다. > Im Westen kommt es darauf an, die Verantwortung für die Eröffnung von Feindseligkeiten eindeutig England und Frankreich zu überlassen. Geringfügigen Grenzverletzungen ist zunächst rein örtlich entgegenzutreten. Die deutsche Westgrenze ist an keiner Stelle ohne meine ausdrückliche Genehmigung zu überschreiten > > 서부에서는, 적대 행위 개시의 책임이 명확히 영국과 프랑스에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미한 국경 침범에 대해서는 우선 순전히 현지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 독일 서부 국경은 나의 명시적인 허가 없이 어느 지점에서도 넘어서는 안 된다 >---- > 1939년 8월 31일 하달된 히틀러의 '전쟁 수행을 위한 지시 제 1호' 중 놀랍게도 프랑스군의 진격 속도는 자르 공세 2일만인 9일부터 매우 저하되었다. 프랑스군은 9월 12일 바르트 숲 일대를 거의 대부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당일 아르빌에서 열린 영불최고 전쟁 평의회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는 지크프리트선으로부터 1 km 이내로 진군 하지말라는 사실상 공세 중지 명령을 하달했다. 자르 지역의 방어를 맡은 독일군 제 1군의 지역 방어작전과 기만작전은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서부 전선의 독일군 상황을 크게 오판하게 하였다. 프랑스군은 투입한 20개의 사단 중 절반 이상이 독일군과의 교전을 보고하였다는 점을 통해 독일군이 폴란드 전선에서 최소 6개의 사단을 차출하여 서부 전선에 투입하였다고 판단하였고 지크프리트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중포 역시 부족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 벌어진 [[브주라 전투]]에서의 독일군의 결정적 승리는 프랑스 군의 공격의사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브주라 전투로 22만명에 달하는 폴란드 주력군인 포즈난군과 포모제군이 증발해버리며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에서의 승기를 완전히 잡았고 9월 21일 가믈랭은 프랑스 군에게 마지노선으로의 복귀를 명령했다. 프랑스군이 독일 제 1군이 방어하던 지크프리트선을 돌파하기만 한다면 독일 최대 공업 지대인 루르 지방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독일 군부가 가장 우려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프랑스군 일부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영불 최고사령부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것을 확인한 독일군은 폴란드 전선이 정리되자마자 병력을 보강하여 프랑스군이 차지한 독일영토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실시하였고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완전히 몰아낸 10월 17일까지 프랑스군은 2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기록한 반면 독일 제1군의 사상자는 500여명에 그쳤다. 자르 공세 이후, 서부전선은 한동안 [[가짜 전쟁|기묘한 소강사태]]가 계속 유지되었다. 영국이 프랑스로 해외 원정군을 파병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즉, 히틀러에게 폴란드와의 전쟁을 서둘러 끝낸 다음 프랑스를 격파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39년 9월 27일, 그동안 미뤄왔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폴란드가 항복한 이후인 10월 6일, 히틀러는 의회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자신은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하며 평화 제안을 하는 동시에 전쟁을 선택한다면 독일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내용의 전승 축하 연설을 발표했다. > Wohl aber habe ich statt einer Forderung an Frankreich immer nur einen Wunsch gerichtet, die alte Feindschaft für immer zu begraben und die beiden Nationen mit ihrer großen geschichtlichen Vergangenheit den Weg zueinander finden zu lassen. > 저는 프랑스에 어떤 요구를 하기보다는, 오래된 적대 관계를 영원히 묻고 양국이 위대한 역사적 유산을 바탕으로 다시 손을 맞잡기를 바란다는 뜻을 항상 전했습니다. > (중략) > Nicht geringer waren meine Bemühungen für eine deutsch-englische Verständigung, ja, darüber hinaus für eine deutsch-englische Freundschaft. Niemals und an keiner Stelle bin ich wirklich den britischen Interessen entgegengetreten. Eher musste ich mich nur zu oft britischer Eingriffe deutschen Interessen gegenüber erwehren, auch dort, wo sie England nicht im geringsten berührten. > 영국과의 화해, 나아가 독일-영국간 우호관계를 위해 저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그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 영국의 국익을 침해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영국의 이해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영국의 간섭에 맞서야 했습니다. > Vor einigen Tagen kam es erneut zu einem Gefecht an der Grenze zwischen den deutschen und den französischen Truppen. Ich blicke nun auf die Ruinen der noch verbleibenden Städte und auf die zahllosen Friedhöfe. > 며칠 전, 국경부근에서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다시 교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자르 공세를 말한다.] 저는 지금 남아 있는 도시의 폐허와 수많은 공동묘지를 바라봅니다. > Ich habe selbst in dieser Lage Ruhe und Zurückhaltung bewahrt und niemals versucht, die Lage zu verschärfen > 저는 이런 상황에서도 차분함과 절제를 유지해 왔으며, 결코 사태를 악화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 Aber ich glaube, ich muß nun – nach meiner eigenen Überzeugung – diese letzte Warnung aussprechen: > 그러나 제가 스스로 판단하기에, 이번 마지막 경고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Wenn Herr Churchill und seine Anhänger diese Warnung weiterhin mißachten, dann werden wir kämpfen! > 만약 처칠 씨와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해서 이 경고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싸울 것입니다! >(후략)... >---- > 1939년 10월 6일, 독일 베를린 크롤 오페라하우스에서 진행된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승전 연설 중[[https://www.reichstagsprotokolle.de/Blatt2_n4_bsb00000613_00062.html|#]] 하지만 히틀러에게 속을대로 속은 프랑스와 영국의 반응은 차가웠다. 다음날인 10월 7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는 진정한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한 휴전은 없다고 일갈했고, 10일 대국민 연설에서 히틀러가 뮌헨 협정 이후 저질러온 수많은 약속 위반을 꼬집었다. 체임벌린 역시 10월 12일 하원에 출석해 히틀러의 제안은 불분명하고 애매하며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협정 위반을 고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일갈했다. > 히틀러가 최근 국회에서 한 연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이것입니다."나는 폴란드를 파괴했고, 나는 만족한다. 전투를 멈추자. 나의 정복을 신격화하고 평화를 위해 회의를 열자." 불행하게도 우리가 이미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 후, 독일은 세계에 말했습니다: "나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몇 달 후,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요구하며 [[뮌헨 협정|이를 들어준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몇 달 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국회 앞에서 세계에 말했습니다: "독일은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폴란드를 짓밟은 후, 지금 그는 과거와 똑같은 확신 찬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항상 민족들 사이에 진정한 협력과 충실한 이해가 확립되기를 원했고 지금도 원하지만, 우리는 폭력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침략에 맞서 무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6개월마다 벌어지는 침략 행위에 대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안보 보장이 있을 때만 무기를 내려놓을 것입니다. >---- > 1939년 10월 10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대국민 연설문 중[[https://www.ibiblio.org/pha/policy/1939/1939-10-10a.html|#]]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 전제 조건이 '''뮌헨 협정 이후 확장한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더 이상 침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안전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것을 파악한 히틀러는 1939년 10월 9일을 기해 <총통 지령 6호>(Führer-Anweisung N°6)를 발령하며, 국방군 내 프랑스 침공 계획을 공식화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600><bgcolor=white><nopad> [[파일:plus forts.png|width=100%]] || || ▲"Nous vaincrons parce que nous sommes les plus forts[br](우리가 이긴다, 우리가 최강이니까.)"[* 지도에 몇 가지 오류가 있는데, 큰 오류로 [[튀르키예]]가 칠해져 있지만 영•프의 [[식민지]]도 아니었으며 참전 시기도 1945년 2월이었다. 또한 [[아이티]]도 칠해져 있지만 이미 1804년 프랑스에게서 독립했고, 참전 시기도 1941년 12월이었다.] || > "내 손에 들려 있는 신문 제1면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었다. 그날은 1939년 9월 1일이었고 나는 페스의 빌 누벨에 있는 호텔의 발코니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독일은 자살행위임이 분명한 멍청한 짓을 하고야 말았다. 영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해군을,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중략) 상황이 끝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마 크리스마스 전에, 별 어려움 없이 '''독일이 패망할 것은 자명했다.'''" >---- > 패트릭 턴불이 자신의 저서《뒹케르크》에서 이렇듯 독일 입장에서 상황이 어떻게든 조금씩 풀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독일이 영국-프랑스 동맹과 정면으로 싸워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아무리 독일이 발빠른 경제 성장과 공업력을 자랑하고 있다 한들, 상대는 전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최강국인 영국과, 그 영국과 나란히 경쟁한 프랑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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