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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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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반응 === 프랑스의 처참한 패배는 타국들에게도 매우 크나큰 충격을 줬다. 연합군은 구시대적 전략전술로 참패하고 그 일부의 군대만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통해 영국으로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또한 이 작전은 프랑스보다는 영국과 영연방이 중심이 된 철수작전이었다. 그러나 됭케르크가 실패했다면 영 육군 정규병과 소수인 영연방군 병력까지 잃어 아프리카를 비롯한 비유럽 전장까지 손쉽게 내어줬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무너지자 홀로 유럽에서 독일과 싸우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에 독일은 영국에 여러 외교 및 선전 노선으로 평화 협정 사실상 항복을 요구하지만 영국은 [[윈스턴 처칠]]의 저 유명한 '우리는 싸울 것이다'라는 연설 아래 위로는 [[조지 6세]]부터 말단 시민들까지 모두 거국의 대의 아래 일치단결하여 독일에 대항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 돌입하게 된다. 영국의 항전 이유는 분명했다. 6월 15일, 처칠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루스벨트]]에게 보낸 친전에서 만약 영국이 독일에 맞서지 않으면 유럽대륙을 석권한 히틀러 제국의 속국, 다시는 독일에 저항할 수 없게 철저히 수탈당하는 친독일 괴뢰국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실제로 독일은 1942년, 북아프리카 전황이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2차 콩피에뉴 휴전 협정을 위반하고 비시 프랑스 해군을 탈취하려 시도하였으니 처칠의 시각은 정확했다.] >“프랑스 패배의 뉴스를 듣고 스탈린의 신경은 거의 마비지경이었다. 소련은 이제 역사상 가장 막강하고 위험한 세력과 당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 스스로 이 엄청난 위협에 대처해야 하리라고 느꼈다.” >---- >― [[니키타 흐루쇼프]] 비단 영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혼란에 빠졌다. 이제 독일은 훨씬 강성해졌고 더 이상 양면전선을 걱정할 필요 없이 소련에 선전포고할 가능성이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고려된다.[* 이 가능성은 결국 독일이 소련에게 [[바르바로사 작전|선전포고조차 하지 않고 냅다 쳐들어오면서]] 현실화되었다. ] 애초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도 [[제1차 세계 대전]]처럼 영국, 프랑스와 독일이 오랫동안 전쟁을 지속하며 서로 국력을 소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이렇게 프랑스가 금방 무참히 무너져버릴 것이라는 건 [[스탈린]]의 계산 밖이었다. 이후 소련은 서쪽에 큰 위협이 없어진 독일이 루마니아와 발칸 반도 방면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독일을 크게 경계하기 시작한다.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는 3국 동맹에 소련까지 얹어 반영국 동맹을 창설하려 했지만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로 불타는 히틀러는 미지근했다. 1940년 11월 12일부터 14일 개최된 몰로토프와의 회의에서 리벤트로프의 중동에 대한 소련의 이익을 되찾아야 되지 않냐는 질문에 몰로토프는 응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의 루마니아 진주, 3국 동맹의 체결, 독일군의 핀란드 진주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소련의 관심사는 대영제국의 중동과 인도양 방면 이권이 아닌 발칸반도와 발트에 있다고 전했다. 11월 26일 몰로토프는 리벤트로프가 요청한 4국 동맹의 조건으로 독일의 핀란드 철수, 불가리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인정, 터키에 소련군 진주 허용, 발트해를 컨트롤 하는데 남은 유일한 관문인 스웨덴에 대한 독일의 입장정리, 소련의 페르시아만 진출 수용,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받아간 남사할린을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이미 히틀러와 국방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이던 7월 말 소련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방면으로 남하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하여 소련과의 전쟁을 고려하고 있었다. 결국 이 회담이 결렬되며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을 결심하고 12월 18일 총통 명령 21호를 하달한다.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는 본격적으로 추축국으로 변절한다. 이는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상은 고작 [[이스트리아 반도]]와 1920년 획득한 [[자다르]][* 이것마저도 연합국이 특별히 선물해준 것이 아니라 신생 [[유고슬라비아 왕국]]과의 타협으로 얻은 것이다.], 1936년 점령한 [[에티오피아]]의 식민지화에 그쳤고, 특히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들에게 퍼부은 비난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축적된 국가적 차원의 불만이 프랑스 침공에 이르러 폭발한 것이었다. 프랑스 일각에서는 이를 '배신 변절 충격'이라고 평하였으나, 상기한 사건들로 이탈리아 내에서의 분노가 결국 히틀러의 지원군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을 탄생하게 만들었기에 업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탈리아는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심산으로 말기에 [[이탈리아의 프랑스 침공|프랑스를 침공]]했지만 '[[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힙니다|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혀]]' 오히려 프랑스군의 반격에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이탈리아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독일군이 제때 프랑스를 항복시키지 않았으면 독일은 프랑스 남부 전선까지 달려와야 할 뻔했다.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창끝을 [[그리스 침공|동쪽의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전역|남쪽의 이집트]] 쪽으로 겨눌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와 별개로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프랑스 침공에서 지지리도 도움이 되지 않은 것 때문에 옛날의 우상으로 우러러 보던 무솔리니에 점차 실망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는 이제 추축국에서 기껏해야 독일 본인들의 조수 역할만 맡아야 하며 감히 프랑스-독일 정전협상에 참여할 자격도 없다고 보고 이탈리아측 대표 참가를 거부했다.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을 통해서 이미 [[히틀러]]와 [[나치 독일]]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즘 [[이탈리아 왕국]]과 은밀히 동맹을 맺으며 겉으로는 중립국임을 표방하면서 나치 독일을 지지하였고 [[포르투갈 제2공화국|포르투갈]]도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무솔리니 파시즘 노선을 계승한 영향으로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였다. [[폴란드]]도 프랑스의 항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본래 폴란드 망명정부의 계획은 프랑스에 망명한 폴란드 서부군을 육성하여 연합군의 동진에 참여하고 그 동안 국내 저항군으로 독일의 점령군을 최대한 붙들어놓아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며, 연합국이 독일을 점령했을 때 저항군이 발맞추어 일제히 봉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프랑스가 몰락하면서 연합국의 승리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고 이미 육성한 폴란드 서부군도 반갈죽을 당하니 기존 저항군도 세력 확장은 고사하고 절망한 이탈자만 속출하여 오히려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었다. [[일본]]은 독일군의 눈부신 승리에 발맞추어 앞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로부터 칭다오를 탈취해왔던 것처럼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반도 식민지를 노리고 육군 제5 사단을 투입한다. 또한 [[네덜란드]]에 인도네시아 식민지 자원의 80% 독점권을 요구하였고 이어 1940년 9월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며 이탈리아 - 독일 - 일본 간의 삼국 동맹을 맺었다. 당연히 영국은 자꾸 자신들의 인도와 말레이 반도 식민지 쪽으로 남하하는 일본에 불안감을 느꼈고, 이는 영국에 망명했던 네덜란드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미국은 이러한 일본의 남하 정책과 중일전쟁 지속에 경계하고 있었고, 일본이 아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에 눌러앉고 군대를 주둔시키자 1941년 석유 금수 조치를 내리게 된다. 이에 일본은 유럽에서 독일이 영국을 괴롭히고 있으니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처부수면 [[미국]]이 협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프랑스는 둘로 나뉘어 북부는 독일의 [[괴뢰]]정부인 [[프랑스 군정청]]이 수립되었고, 남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했던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프랑스]]라는 독일의 [[괴뢰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프랑스 식민지 대부분이 비시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영국은 식민지 주둔군이 해군이 빈약한 독일의 명령에 따라 본토를 위협할 가능성을 경계하여 식민지의 [[캐터펄트 작전|프랑스 군함들을 기습해 모두 철저하게 침몰]]시켰다.[* 이렇게 그나마 남아 있던 해군을 모두 잃어버린 프랑스는 실질적인 통제 수단을 잃어버려 전후에는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게 된다.] 하지만 캐터펄트 작전 시행 당시 독일은 정말로 비시 프랑스 해군을 동원하는 방안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비시 프랑스는 영국이 아쉬울 땐 손 벌리더니 이젠 공격하냐는 배신감을 느끼고 단교를 선언한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앤서니 이든이 캐터펄트 작전 실시이후 국왕 [[조지 6세]]를 알현한 자리에서 '이제 우리 곁에 친구가 없다'라고 고했다고 전해진다.] 1942년 독일은 2차 콩피에뉴 협정을 위반하고 비시 프랑스를 점령하였지만 영국에 대한 배신감으로 불타던 비시 프랑스군은 훗날 미국이 [[튀니지]]에 횃불 작전을 펼칠 때 오히려 연합군에게 강력하게 저항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이때 상륙작전 중 비시 프랑스군의 기관총 세례에 겁을 먹은 한 미군이 울고 있자 패튼이 그를 구타하며 욕설을 퍼부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독일군은 점령된 프랑스를 철저하게 억눌러 국가의 외형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분열 억압 통치를 일삼았기 때문에 프랑스가 해방되고 십년이 지나도 독일 점령 이전의 국력의 절반도 회복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6주 만에 독일군에게 항복했지만 사실 프랑스와 영국은 40만에 달하는 전상자를 내고 10만여명의 독일군을 살상하며 독일군에게 격렬히 저항했다. 스당 전투 초반에도 독일군에게 일부 방어선이 돌파당한 것을 제외하고 독일군의 도하를 저지하고 있었고 저지대로 침공해온 B집단군의 거친 공격도 잘 버텼다. 문제는 낫질 작전으로 마지노선과 딜계획에 투입되지 않고 남은 프랑스 정규군 대부분과 예비군이 전멸하며 프랑스를 반갈죽 내버렸기 때문에 시기의 문제일 뿐 독일의 승리는 기정사실이었다는 거다. 하여튼 이처럼 체면과 스타일도 구기고 국가 자체도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에 있어서 [[제2차 세계 대전]]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흑역사]]가 되었고 드골을 중심으로 한 자유 프랑스가 설립되고 처칠이 독일의 휴전 제의를 거부하고 항전 의사를 밝히면서 영국 본토와 해협에서 독일 공군과 영국 공군은 대규모 항공전을 벌이게 된다. 한편 추축국으로 변질한 이탈리아가 지중해 지역은 추축국에 호의적인 중립국 정도로 유지하겠다는 독일의 뜻과 다르게 [[그리스 왕국]]과 [[이집트 왕국]]을 침공했다가 탈탈 털리면서 전쟁은 북아프리카 지역과 지중해 지역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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