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프랑스 침공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독일의 반응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youtube(cLKG9kFkL2o)]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external/c8.alamy.com/adolf-hitler-and-julius-schaub-back-in-berlin-after-their-troop-visit-CPMN69.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파리를 점령하고 돌아온 히틀러''' || 독일의 프랑스 혐오 감정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부터 심각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프랑스가 가한 가혹한 보복에 독일인들은 복수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고, 승전 소식에 독일 전체가 히틀러에 열광했다. 심지어 과거 [[독일 제국]]은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대패했는데, 히틀러는 '''두 달도 되지 않아 고작 12만 명, 많이 잡아도 16만 명'''의 손실만 내며 유럽 전통의 강국이자 영국과 함께 세계를 지배해온 그 프랑스, 그리고 덤으로 [[베네룩스 3국]]을 정복한 것이었다. 개전하기 전만 해도 독일 국민들과 군부[* 잘 알려졌다시피 1차 대전 패전의 주역들이 그득했던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프랑스와 영국이 가짜 전쟁으로 적극적인 공세가 아닌 수비적 태세를 보이자 히틀러의 프랑스 공격의도를 좌절시킬 엉터리 작전이나 심지어 쿠데타까지 계획했을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스스로가 프랑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고,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도 모두 아무리 독일이 강해졌다 한들 [[제1차 세계 대전|전례]]가 있는 만큼 절대 프랑스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넘어 아예 프랑스 북부를 통째로 점령하고 [[비시 프랑스|남부에 친독 괴뢰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하자 군부 장성들도 비로소 히틀러를 신용하게 되었고, 몇몇은 그의 전략적 판단력이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6일 만에 털어버리고 베를린까지 점령했다.] 수준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독일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1939년 9월 시작된 2차 대전은 히틀러조차 의도하지 않은 전쟁이었듯 독일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는 전쟁이었다. 1914년 1차 대전 발발때처럼 많은 독일 청년들이 자원입대를 하지도 않았고 독일 국민들은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깔끔하게 이를 해냈고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프리드리히 대왕]]의 재림으로 바라보며 열광하였다. 1940년 7월 9일 히틀러와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돌아왔을 때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와 독일군에게 꽃비를 만들어 뿌렸고, 독일 전역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졌다. '''[[https://youtu.be/g3xRVKkvx9A?t=91|프랑스에서 독일로 돌아온 당시의 히틀러와 그를 맞이하는 독일 국민들의 모습]]''' 이러한 독일 국민들의 열광, 그리고 믿음에 발 맞추어 괴벨스의 선전부 역시 프랑스 침공의 모든 공을 히틀러에게 집중시켰다. 국방군 역시 히틀러 신격화에 발을 맞추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 침공 승리를 다룬 여러 선전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41년 1월 개봉한 폴란드-프랑스 침공에서의 승리를 다룬 선전 영화 '서부에서의 승리'이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괴벨스의 선전부 작품이 아니라 '''육군 최고 사령부'''에서 제작한 영화였다.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는 이 영화에서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의 승리를 '''번뜩이는 혜안을 가지신 총통께서 이끄시고 국가사회주의로 무장한 국방군 병사들이 만들어 낸 승리'''로 규정하며 전쟁의 공을 철저히 히틀러에게 돌렸다.[* 나치당을 위주로 다루지 않은 것에 삐진 괴벨스는 육군 최고 사령부에서 제작한 이 영화의 초연을 지연시키며 방해공작을 펼쳤다고 한다. 괴벨스가 아닌 육군 최고사령부에서 직접 주도한 영화라 당시 괴벨스 선전부에서 제작한 타 선전 영화들 처럼 프랑스군을 깎아내리며 국방군을 조명하기보단 프랑스군의 분전을 그대로 반영하여 국방군의 공을 더 강조하였다. ]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484848><nopad> [youtube(F1N42CwgHZU)] || || '''1941년 1월 개봉된 독일 선전 영화 '서부에서의 승리'[* 대부분 전투 장면은 1940년 야전 선전부에서 독일 주간 평론 보도용으로 촬영한 장면을 사용하였지만 프랑스 포로들과 독일군을 동원하여 연출한 장면도 끼어있다. 재연 장면 촬영 당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매우 좋아했던 에르빈 롬멜이 앞장서서 도왔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영화 속 에르빈 롬멜 씬은 1초도 안된다~~][* 영화 초반부 복무신조를 제창하는 국방군 병사들을 시작으로 독일은 평화롭게 살며 번영을 꿈꾸어왔지만 식민지 지키기에 혈안이 된 영국과 프랑스로 인해 1차 대전을 치루게 되었고 치욕스러운 패배로 혼돈에 빠진 독일을 히틀러가 구원했다고 강조한다. 이후 폴란드 침공의 당위성을 강조하는데 히틀러가 제안했던 단치히 회랑 반환을 조명하며 독일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영국의 전쟁 선동을 믿은 폴란드 정권이 독일의 요청을 거부하고 선제 공격을 하였다며 2차 대전 시작의 책임을 영국과 폴란드로 떠넘긴다. 이후 본격적인 프랑스 침공을 다루는데 이른바 낫질 작전의 계획을 모두 총통의 혜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시종일관 강조한다.]''' || 현대 사가의 시점에서 히틀러는 배째라 전략을 관철하며 극적으로 주변국의 양보를 이끌어내어 자신의 인기를 유지해 왔었고, 당시 독일 국민들은 이런 히틀러의 [[치킨 게임]]을 탁월한 식견으로 예견한 철저한 전략의 '''결과물'''이라고 믿었다.[* 아주 틀린 건 아니다. 모험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그 모험을 통해 무엇을 얻을지 정도는 가뿐하게 내다보는 사람만이 감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정치적인 역량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타고났으며, 정치에서 협상이나 교섭을 할 때 벼랑 끝 전술은 [[4딸라|제법 효과가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대승리 때문에 전쟁은 정치와 다른 논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히틀러는 몰랐다.] 히틀러와 [[괴벨스]]를 위시한 [[나치당]]의 선전 부서는 이런 환상을 더욱 부추겼으며, 프랑스 침공이 결국 성공으로 돌아가자 이후 독일의 국가전략은 히틀러에 대한 광적인 맹신으로 점철되어 자정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맹신은 독일 국민은 물론이고 군부와 히틀러 본인조차 망치게 되는데 이는 국방군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치명적인 오판을 야기했고 그 산물이 바로 [[독소전쟁]]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7년 전쟁]]에서 남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으로는 러시아, 북으로는 스웨덴, 서로는 프랑스와 동시에 전쟁을 벌여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렸던 전례가 있던 독일은 서부와 동부에서 강대국과 동시에 충돌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했다. 이를 고려해서 서쪽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러시아와 협력관계를 만들었던 것이 바로 비스마르크였고 그 비스마르크는 서쪽에 적이 있는 이상 러시아와 절대 전쟁을 벌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이를 무시한 결과는 1차 대전 당시 독일이 오스트리아군의 땜빵을 위해 동부전선에 병력을 분산시키면서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하다가 패배하는 원인으로 작동하였다. 히틀러도 이때 교훈을 얻어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해 양면전쟁을 막고자 했지만 1차 대전에서 러시아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던 기억과[* 비록 러시아 영토로 깊숙히 진군하진 않았지만 독일군은 거진 러시아군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유럽 영토 절반을 뜯어냈었다.] 프랑스 침공에서의 눈부신 성과, 소련의 겨울 전쟁 삽질을 지켜보며 히틀러는 물론 군부 전체도 국방군 전력 정도면 러시아를 10월까진 밀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가지게 만들었고 이는 1941년 12월 [[바르바로사 작전]] 실패로 비싼 값을 치르게 되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