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프랑스 침공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프랑스의 항복 === ||<-3><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Second World War Europe 06 1940 de.png|width=100%]] || ||<width=34.2%><nopa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2px-Adolf_Hitler_in_Paris_1940.jpg|width=100%]] ||<width=32%><nopa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H28708,_Paris,_Eiffelturm,_Besuch_Adolf_Hitler.jpg|width=100%]] ||<nopad> [[파일:external/www.museumsyndicate.com/56512.jpg|width=100%]] || ||<-3><nopad>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417335-1BC1D281000005DC-652_964x654.jpg|width=100%]] ||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The Eiffel Tower during the Nazi occupation, 1940.jp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에펠탑|{{{#fff 에펠탑}}}]]에 내걸린 독일 국방군의 선전 문구[* Deutschland siegt auf allen fronten: "독일은 모든 전선에서 승리한다" 라는 뜻이다.]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s2Pi8reTezU, start=1764)]}}}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1940년 6월 26일 프랑스 침공 승전을 보도하는 독일 주간 뉴스 512호.[* 35분 08초부터 시작되는 에투알 개선문을 배경으로 포슈 거리를 행진하는 독일군 앞에서 말을 타고 손을 흔들며 사열하는 장교가 바로 30사단장 쿠르트 폰 브리젠 소장이다. 연주되는 행진곡은 Helenmarsch 이다. 참고로 Helenmarsch는 군대 행진곡용으로 작곡된 곡이 아니라 크리스마스 파티 왈츠로 작곡된 곡이다.][* 37분 03초부터 콩피에뉴 휴전 협정 협상 보도가 시작된다. 시작과 동시에 독일군기가 걸리는 기념물이 프랑스의 승전을 기념하는 알자스-로렌 승전비이다.]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youtube(8uv4dzxe35c)]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1940년 6월 14일, 항복 직전 프랑스 국영방송이 마지막으로 송출한 [[라 마르세예즈|{{{#fff 라 마르세예즈}}}]].[* 여기서 자세히 들어보면 어떤 목소리 같은 잡음이 들리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프랑스 국영방송의 주파수를 탈취하기 위해 일부러 방해하는 소리이다. 심지어 더 방해하려고 영상의 0:20 쯤에 [[The Army Goes Rolling Along|미국 포병대가]]를 틀기까지 한다 ] || >“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적에게 요청했습니다. 군인으로서 이런 가슴 아픈 결정을 내린 것은 군의 상황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 >― [[필리프 페탱]], 항복할 당시 연설에서 프랑스는 항복했다. [[독일]] 방송은 항복 연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라디오로 내보냈고 이 항복 연설을 들은 전 독일인들과 독일 병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는 모스크바로부터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보낸 축하 전보를 받았고 독일의 승리로 부터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는 심산으로 앞선 10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날린 무솔리니는 18일 뮌헨으로 달려와 히틀러의 승리를 축하하였다. 이를 보도한 독일 주간뉴스 512호에서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주며 두 국가의 우정을 과시하였지만 실상은 준비가 아무것도 되지 않은 상태라 전쟁이 지금 끝나면 얻을 것이 없던 무솔리니가 히틀러에게 자신들의 공격일정에 맞추어 항복일자를 미루어줄 것과 항복 후 프랑스 함대를 이탈리아 함대에 귀속시켜줄 것을 부탁했지만[* 출처:이안 커쇼 히틀러 하편]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독일선전 뉴스에 승리를 축하해주는 들러리 역할로 히틀러의 승리를 돋보이게만 해주고 얻은 것은 없었다. 6월 17일, 신임 프랑스 수상 [[필리프 페탱]]은 독일에게 휴전을 제의했고, 6월 22일 콩피에뉴에서 [[콩피에뉴 휴전협정|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 협정 체결 직전인 21일 앞서 히틀러에게 정전 협정 연기제안이 까여 마음이 급해진 무솔리니의 재촉으로 뒤늦게 [[이탈리아 왕국군]]이 참전하긴 했지만[* 선전포고 자체는 6월 10일에 이루어졌지만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이탈리아군 수뇌부가 잘 알고 있었기에 병력 투입이 늦어졌다.],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역시나 신나게 얻어맞고]] [[르네 올리]] 대장이 이끄는 프랑스 알프스군에게 패하며 극히 작은 영토 확장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독일은 이미 5월 시점에 이탈리아에게 참전할 거면 당장하라면서, 더 이상 지체하면 독일의 모든 호의를 잃을 수 있다고 엄중히 경고했으나 이탈리아는 참전을 결정했다면서도 차일피일 미루었고, 독일은 이탈리아에게 이미 질려버린 후였다. 6월 24일 로마에서 이탈리아-프랑스 사이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6월 25일 새벽 1시 35분을 기해 최종적으로 정전이 이루어지며,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다. 6월 20일 시점에서 이미 독일군은 프랑스 해안가까지 질주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프랑스의 항복을 준비하면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장군들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포슈 원수의 객실 열차를 가져와 항복이 조인되었던 콩피에뉴 숲에 조성된 휴전의 숲(Clairière de l'Armistice)에 갖다놓으라고 명령했다. 휴전의 숲에는 1차 대전에서 승리를 이끈 포슈 원수의 동상과 독일 국가수리를 칼로 찌른 알자스 로렌 기념물이 세워져 있었다. 6월 20일 앞서 파리를 입성하는 공을 세웠던 30사단은 파리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개최하였다. 퍼레이드를 실시하기 이전 여러 프랑스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30사단장 쿠르트 폰 브리젠 소장과 참모장들은 에투알 개선문 아래에 있는 무명용사 묘를 참배하였다. 이후 브리젠 소장과 18군 고위 장교단이 사열하는 가운데 샹제리제 거리에서 에투알 개선문을 둘러 포슈 거리를 따라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벌이며 승리를 만끽하였다.[* 쿠르트 폰 브리젠 소장은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에서의 공으로 진급하여 52군단장으로 독소전쟁에 참전한다. 1941년 11월 20일 도네츠에서 소련공군의 공습으로 독일군 군단장 중 제일 첫 번째로 전사했다. ] 6월 21일 오후 3시 25분, 히틀러는 괴링, 에리히 레더 제독, 브라우히치 장군, 빌헬름 카이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루돌프 헤스를 거느리고 콩피에뉴 숲에 도착하여 패전의 상징인 열차를 관람하였다. 히틀러는 프랑스에 역사적인 수치를 안겨줄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승리를 기념하는 국가수리를 칼로 찌른 알자스-로렌 기념물은 국방군 병사들이 경비하는 가운데 하켄크로이츠기로 덮어 버렸다. 객차 안에서 히틀러는 프랑스 대표단을 기다렸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프랑스 대표단을 맞이했다. 프랑스에서는 제4집단군 대장인 [[샤를 욍치제]] 장군이 대표로 왔다. 프랑스 대표단 앞에서 히틀러는 10분간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카이텔에게 모든 것을 대신 말하게 했는데 이는 히틀러가 1918년의 패전에 대한 분노로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텔이 정전협정의 조건을 프랑스 측에 전달하자 히틀러는 즉시 자리를 떠나 자신의 사령부로 돌아갔다. 그날 밤 히틀러는 괴벨스와 통화하면서 마침내 수치를 씻어냈다고 기쁨에 넘쳐 말했다. 히틀러가 떠난 후 독일 통역관은 프랑스가 이유 없이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는 내용의 비판 내용을 이야기했고,[* 물론 아주 엄밀히 말하면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지도 선제공격을 가하지도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의 군사협약에 따라 독일에 전쟁을 먼저 선포했고 독일영내로 선제 진군한쪽도 영국과 프랑스쪽이긴 했다. 실제로 히틀러 역시 폴란드 침공에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방위조약을 이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전포고에 히틀러는 날뛰며 이를 막지못한 리벤트로프를 비난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절대 넘지말라고 경고해둔 폴란드를 억지로 구실을 조작하여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한 것은 나치 독일이니 히틀러가 할 말은 아니다.] 이 비판이 끝난 직후 히틀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열차에서 내렸다. 프랑스 대표단에게는 휴전 조건이 제시되었는데 그중 한 가지 조건은 프랑스로 도피해온 반나치 독일인들을 모두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욍치제가 협상을 해보려 시도했지만 독일은 거절했고 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협상은 끝나버렸다. 조인식이 끝난 후 히틀러는 이 열차를 베를린으로 가져갔는데, 이 열차는 독일이 점점 패망해가기 시작하자 히틀러가 [[게슈타포]]에게 명령하여 이 열차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버렸고 콩피에뉴 휴전의 숲은 포슈 원수의 동상을 제외하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6월 24일, 프랑스는 별개의 정전협정을 이탈리아와도 체결하였고 6월 25일 오전 1시 35분에 기해서 모든 싸움이 멈췄다. 히틀러는 이를 두고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라고 선언했다. 한편 드골 장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휘하의 병력을 인솔하여 마르세유를 통해서 북아프리카로 철수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의 승리를 상징했던 기념물들은 모두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 앞서 언급한대로 콩피에뉴 숲에 전시되어 있던 알자스 로렌 승전기념물은 독일군기로 덮혀졌으며 1차 대전의 승리를 이끈 포슈 원수와 그를 기념하는 동판은 승자로 돌아온 독일군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선전물로 전락해버렸다. 1차 대전 프랑스군의 대표적인 승전지인 [[베르됭]] 역시 독일군의 조롱을 피할 수 없었다. 독일 제16 군은 베르됭의 프랑스 승전 기념물을 군기로 덮어버리고 그 앞에서 16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슈가 지켜보는 가운데 퍼레이드를 벌였고 독일 주간 뉴스는 베르됭의 파괴된 방어시설물과 독일군기로 덮힌 승전탑을 보며 지난 전쟁에서는 승리가 프랑스군을 빛내주었지만 이제는 승리의 여신이 독일군을 빛나게 해주고 있다며 조롱했다. 또한 히틀러와 병사들 또한 막 점령한 [[마지노 선]]을 보며 강력한 방어시설도 독일군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며 프랑스를 비웃었다. 프랑스 침공에서 전리품으로 탱크 2,000대, 대포 5,000문, 소총 30만 정과 400만 발에 달하는 총알을 얻게 되었고 또한 프랑스군에게 제공되려고 했던 [[셔츠]] 등 피복류들도 상당수 독일군이 가져가 버렸다. [[크릭스마리네]]가 접수한 프랑스 해군 보급창에서 프랑스 해군 수병용 [[텔냐시카|줄무늬 셔츠]]를 [[U보트]] 승조원들의 출동 중 입고 버리는 소모성 피복으로 써 버린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프랑스군의 총기들은 압류당하여 모두 독일군의 손에 쥐어졌으며 얼마 전까지 조국 프랑스를 지키던 [[르노 B1]], [[소뮤아 S35]] 등의 기갑차량들과 열차, 대포들은 모두 독일에게 양도되어 귀중한 무기로 쓰여졌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만약 프랑스가 그렇게 무력하게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독소전쟁 때 소련을 유린했던 독일군 소유의 프랑스 무기들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제대로 싸우지 않고 나치에 무기만 조공한 프랑스도 추축국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영국과 미국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저런 식으로 따지면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까지 독일과 붙어서 침략전쟁을 벌이고 독일에 물자를 퍼주고 불가침조약까지 맺은 소련이야말로 추축국에 가깝다.] 프랑스의 모든 공장과 항구, 그리고 모든 프랑스의 재산 역시 독일이 당연히 얻어야 할 전리품이 되었고, 전쟁을 선포한 것 또한 프랑스였으니 하루에 무려 1억 달러에 해당하는 독일의 점령비용을 프랑스가 부담할 몫이 되어버렸다. 한편 프랑스와 함께 독일군에게 점령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의 운명 역시 가혹하였다. 룩셈부르크는 독일 본토로 편입되었고 벨기에의 경우 알자스로렌 지역과 묶여서 벨기에-북프랑스 군정청의 지배를 받다가 1944년 플란데른과 발로니엔을 독일 본토로 편입당하게 된다. 네덜란드에는 국가판무관부가 들어서게 된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각각 설치된 국가판무관부들은 굉장히 가혹한 정책을 펼쳤는데 우리가 잘 아는 [[안네 프랑크]]의 도피 생활은 바로 이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의 억압을 피해 이루어진 것이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국가판무관부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는데 독일인들과 같은 대접을 해주겠다는 약속과 달리 독일은 네덜란드인과 벨기에인들을 2등 시민 취급하였다. 특히 네덜란드 국가판무관으로 재직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독일에 저항한 네덜란드 시민 20만 명을 처형하였다. 1944년 9월부터 연합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방면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이들 국가판무관부들은 더더욱 가혹하게 이들을 수탈하였다. 본국으로 부터 물자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인들을 수탈해갔고 이로 인해 많은 베네룩스 민간인들은 식량부족과 장작부족으로 힘겨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오드리 헵번]]이 자신의 자선활동이 이 시기 굶주림의 경험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다. 각설하고 1940년 6월로 돌아오면 킬 군항의 반란으로 촉발된 [[독일 11월 혁명]]으로 네덜란드에 망명을 가있던 [[빌헬름 2세]]는 독일군 B집단군 병력이 네덜란드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고위 장교단이 저택에 찾아와 그를 예방하자 매우 기뻐했고 프랑스의 항복 소식과 영국이 패퇴하여 위기에 빠지자 그 기쁨은 절정에 달했다. 앞서 1934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가 왕정복고 주의자들을 해산시키는 것을 보며 호엔촐레른 왕가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날뛰었던 빌헬름 2세는 히틀러를 'Mein Führer' 즉 총통각하라고 부르며 앞선 1차 세계 대전의 복수를 성공적으로 한 것에 대해 축하의 뜻과 함께 승리한 독일국의 황제로 다시 복고하고 싶다는 뜻을 담은 축전을 보낸다. 하지만 시종일관 왕정과 프로이센의 귀족들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던 히틀러는 매우 정중하게 거부하는 뜻을 전하며 대신 승리한 조국 독일로 돌아와서 살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히틀러가 보낸 전문은 현재 대략 그 내용이 어떠하였는지는 두루뭉술하게만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히틀러의 제안에 빌헬름 2세는 기뻐했지만 자신의 복고의사가 거부당한 것에 실망하였는지 이를 거부하고 1941년 네덜란드에서 사망한다. 싸움이 완전히 멈춘 후, 히틀러는 나치당 출판부장 막스 아만, 에른스트 슈미트,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두 전우를 불러서 승리를 만끽하기 위한 프랑스 능욕 관광에 나섰다. 히틀러는 먼저 자신이 복무하였던 플랑드르의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투 장소들을 돌아본 후 6월 28일 새벽 5시 30분에 파리를 찾았다. 미국 선전영화 'Divide and Conquer'에서는 이 '지배민족의 주인'이 파리에 강림했을 때 파리 시민 그 누구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고 조롱하고 있지만, 히틀러의 계획 자체가 파리 시민들이 대부분 자고 있을 새벽 시간에 방문하는 것이었음으로 딱히 파리 시민들의 기개와는 별 관계 없는 일이었다. 히틀러는 그날 딱 3시간 동안 파리를 방문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는 나름 미학도였던 히틀러가 자신의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알베르트 슈페어, 건축가 헤르만 기즐러,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 등 히틀러가 총애하는 예술가들이 히틀러를 수행하였고, 히틀러는 르 부르제 공항에 착륙했다. 히틀러는 처음으로 유명한 파리 오페라 극장을 방문하였는데, 히틀러를 위해 새벽부터 불려나온 늙은 프랑스 가이드가 히틀러를 안내했다. 히틀러는 오페라 극장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고, 수행자들에게 자신의 오페라 극장에 대한 지식을 뽐냈다. 관람을 끝낸 히틀러는 부관을 시켜 가이드에게 50마르크의 팁을 주었으나 가이드는 거절했다. 다음으로 히틀러는 마들렌 사원(La Madeleine)을 찾았으며 고대 그리스적인 건축양식을 보고 히틀러는 또 흥분했다. 히틀러는 샹젤리제 거리와 에투알 개선문을 거쳐 잠시 무명용사묘지를 방문한 후 에펠탑 인근에 가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그 이후 앵발리드에 가서 나폴레옹 1세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파일:external/taylorrockhill.files.wordpress.com/hitler-at-tomb-of-napoleon.jpg|w=236&h=300]] 이때 히틀러는 앵발리드를 들러 말없이 나폴레옹의 관을 지켜보았다고 하는데,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앵발리드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다고 한다. 이후 같은 해 12월 15일에는 [[나폴레옹 2세]]의 시신을 앵발리드로 이장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12월 18일에는 소련 침공 계획을 작성하라는 총통 명령 21호를 군부에 하달한다. 비록 히틀러의 지시로 이장된 것이긴 하지만 프랑스인들도 아들을 아버지 곁에 두는 것이 맞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치 독일]]이 패망한 뒤에도 나폴레옹 2세는 여전히 파리 앵발리드 한 켠에 잠들어 있다. [[파일:external/www.histoire-fr.com/retour_napoleon_II.jpg]] 나폴레옹 2세의 관을 옮기는 [[독일 국방군]]. 각설하고 히틀러는 이어 판테온을 방문했다. 히틀러는 판테온이 외양은 멋있으나 내부 인테리어는 매우 형편없다고 혹평했다.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성당을 방문해서도 중세적이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크레쾨르 대성당]](Sacré-Coeur) 방문을 마지막으로 히틀러는 파리를 떠났다. 한편 이 과정에서 수도를 비시로 하는 괴뢰 정부 [[비시 프랑스]]가 태어났는데 수도가 비시로 정해진 이유에는 단순히 비시에 호텔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7월 초에 필리프 페탱 총리는 남은 정부인사들을 싹싹 끌어모아서 그들을 이끌고 함께 비시의 호텔로 들어갔다. 여담으로 히틀러가 프랑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에펠탑]] 앞을 바라보는 모습이 담긴 당시 영상이 있는데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에게는 프랑스 건국 이래 사상 최악의 치욕스러운 순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6월 14일 나치 독일의 군기가 독일군들에 의해 에펠탑에 게양되는 모습 또한 프랑스에서는 최악의 치욕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파일:파리 시민의 눈물.png|width=100%]] 이는 소위 '흐느끼는 프랑스인(Weeping Frenchman)'이라고 하여, '''마르세유에서 북아프리카로 철수하는 프랑스 군대를 보면서'''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영상 버전을 찾아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프랑스 군대를 향해서 박수를 치고 모자를 흔들면서 환호하고 있다. AP통신 아카이브 뉴스릴에서 이 사람의 모습을 프랑스 함락 뉴스 사이에 끼워넣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독일군이 입성하는 것을 보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파리 시민의 모습으로 착각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미 1943년에 나온 미국의 선전영화 'Divide and Conquer'에서는 이 영상이 드골의 철수 당시 마르세유에서 찍힌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코르시카계 마르세유 시민 제롬 바르제티(Jerôme Barzetti)로 1940년 9월에 사진작가 마르셀 드 렌지스(Marcel de Renzis)가 촬영한 사진이며, 1941년 3월호 라이프지에 실리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당시 라이프지는 이 사진을, 어느 프랑스인이 그의 조국의 마지막 연대가 아프리카로 망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애국적인 통한을 담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a Frenchman sheds tears of patriotic grief as the flags of his country’s last regiments are exiled to Africa”)라고 설명했다. [[https://rarehistoricalphotos.com/weeping-frenchman-1940/|#]] 바르제티의 옆에서 박수를 치고 있는 여인은 다름아닌 바르제티의 아내인 샤를로테 바르제티다. 그의 정체는 종전 후인 1949년에야 밝혀졌는데, 바르제티가 전후 해외여행을 갈 때면 그를 알아본 외국인들이 악수를 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바르제티는 이 사진이 자신이 알지도 모르는 사이에 찍혔으며, 자신은 그저 모든 마르세유 시민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겸손한 반응을 보이면서 자신에게 비춰지는 세계적인 주목을 사양했다. 바르제티는 1976년 11월 27일에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https://davidlamars.blogspot.com/2014/07/paru-dans-la-marseillaise-9-juillet.html|#]]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