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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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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전장: 19기갑군단의 [[스당]] 돌파 ==== B 집단군과 연합군이 장불루 인근에서 격돌하는 한편, A 집단군 쪽으로 시선으로 돌리면 아르덴 일대의 프랑스, 벨기에 양군은 명확히 구역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의 벨기에군은 2개 사단에 불과했으며, 집단군의 공세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 가믈랭은 아르덴 일대에서의 전력 공백에 대해 '그들(벨기에군)은 싸우지도 않고 증발해 버렸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는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의 치명적 오해(grave malentendu franco-belge)에서 비롯된 것이다. 양국은 서로 상대방이 아르덴에서 각자의 책임 지역을 굳건히 방어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는, 어떠한 협조체제도 없이 각각의 독립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르덴을 돌파하려는 A집단군에게는 최적의 상황이었다. A집단군 공세의 선봉이 된 것은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19기갑군단''' 소속 '''1기갑사단'''이었다. 이들은 주공 중의 주공으로, 계획된 시간에 정확히 [[스당]]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양호한 기동로를 부여받았다. 19기갑군단장 구데리안은 1기갑사단에게 '필요시 본인은 귀관들에게 최소한 3일 정도는 취침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령을 남길 정도였다. 이에 1기갑사단 군수참모가 2만 정에 이르는 [[메스암페타민|각성제]]를 직접 관리하고 있었을 정도로 1기갑사단의 임무는 중차대한 것이었다. 독일군은 제1 기갑사단과 1기갑사단의 우측방을 방호하는 제2 기갑사단의 기동로를 개방하기 위해 벨기에 후방 요새지대를 공략하기 위한 공중강습작전을 펼쳤는데 이 공중강습작전 부대를 펼친 부대는 제14 군단 소속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였다. 독일군의 주력 수송기였던 [[Ju 52]]의 경우 벨기에 북쪽과 네덜란드 암스트레담 방면으로 진행되는 B 집단군 배속 7항공사단과 22 공수사단에 대부분 할당되어 있었기 때문에 괴링은 3인용 소형 연락기인 [[Fi 156]]을 대규모 투입하여 병력을 강습시키는 기가막힌 방안을 제안하였다. 강습 목표지점인 벨기에의 니베와 비트리의 이니셜을 딴 니비 작전은 그로스도이칠란트 3대대의 2개 중대가 배정되었다. 공격 암호가 전달된 5시 35분 그로스도이칠란트 병사들을 태운 항공기들은 벨기에 국경을 넘었고 3대대 11중대 병력으로 구성된 북부강습대는 2기갑사단 진격로에, 니베로 3대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10중대로 구성된 남부강습대는 1기갑사단의 기동로에 위치한 비프리에 강습하는 것이 목표였다. 두 강습부대는 작전 개시와 함께 난관을 맞이했는데 새벽 국경지대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북부강습대 수송기들을 향해 벨기에 국경 수비대에서 총격을 가하면서 양 강습부대의 수송기들은 뒤엉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최초 강습작전을 수행한 남부강습대의 경우 9명의 병력으로 작전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남부강습대를 지휘하는 오이겐 가르스키 제3대대장은 9명의 병력으로 보당주 후방지역의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비트리-뇌프사토 도로를 봉쇄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이후 08시에 차질없이 진행된 2차 강습대와 합류하여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벨기에군의 공격을 좌절시켰고, 1파 북부강습대와 북부강습대를 따라간 남부강습대 1파 병력이 합류하여 보당주 일대 벨기에 국경요새를 후방에서 공격하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이들은 오후 5시 30분 1기갑사단과의 접촉에 성공하면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한편 북부강습대의 경우 남부강습대와 뒤섞여 목표지역보다 15km 남쪽에 위치한 레글리제에 착륙했다. 신속히 목표지점으로 복귀해야 했던 북부강습대는 현지인들의 차량을 탈취하여 북상했지만 벨기에군 정찰대의 공격을 받고 도보로 이동하여 남부강습대와 합류했다. 한편 08시 목표 지역에 성공적으로 강습한 북부강습대 2파 병력은 1파 병력이 자신들보다 한참 남쪽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북부강습대는 절반의 병력으로 뇌프사토~바스토뉴 사이의 도로를 차단했고, 북쪽에서 내려온 벨기에군의 아르덴 방어 병력과 남쪽에서 지원하러 온 프랑스군 제5기병사단 수색부대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북부강습대는 10일 오후 프랑스군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졌는데 프랑스군이 북부강습대가 설치한 위장 장애물을 본 뒤 날이 저물고 있다는 이유로 공격을 다음날로 미룬 후 철수해 버렸다! 이어서 11일 오전에 독일군 제2기갑사단과 북부강습대가 접촉에 성공하면서 프랑스군은 스당을 향해 돌진하는 제1기갑사단의 측방을 위협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1기갑사단은 마르틀랑주(Martelange)를 신속하게 점령했으나, 보당주(Bodange)에서 8시간이나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전술한 그로스도이칠란트 공중강습부대가 너무나 성공적으로 강습작전을 실시한 나머지, 보당주 일대에서 잠시 지연전을 펼칠 예정이었던 벨기에군 중대에게 철수 명령이 전달되지 못했고, 성공한 강습 작전이 오히려 기갑군단의 전진을 방해한 것이다. 여기에 벨기에 영내의 기동로가 체계적으로 파괴되면서 1기갑사단의 진격은 크게 늦춰졌다. 본래 목표대로라면 5월 10일 저녁 벨기에의 제2 요새선이 구축되어 있는 뇌프샤토(Neufchâteau)를 공격해야 했지만 그 다음날 아침까지 공세가 미뤄졌고, 결국 지연전 임무를 받은 프랑스군 5경기병사단이 리브라몽(Libramont)과 뇌프샤토를 축으로 진지 편성을 완료했다. 이런 촉박한 상황에서 사단장 키르히너 중장은 뇌프샤토가 아닌 5경기병사단 간격 사이를 돌파, 프랑스군 후방 깊숙히 진출해 방어선을 붕괴시켰다. 이 신속한 돌파로 보당주에서 소요한 시간을 벌충하는 데 성공했고, 프랑스군은 세무아(semois) 강 차안으로 줄지어 퇴각한다. 이 틈을 타서 독일군은 스당에 도착하기 전 최후의 천연 장애물 지대로 꼽히던 부용(Bouillon)을 기습했다. 개전 이래 독일군에 계속 휘둘리던 프랑스군은 부용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도 보병 하나 없는 1개 전차대대의 기습 공격에 말이다. 이러한 양상은 부용 서쪽의 무재브(mouzaive)에서도 이어졌다. 전투지경선을 넘은 독일군 1개 중대가 무재브에 기습공격을 가했는데, 무재브의 교량을 방어하던 3스파히여단이 5경기병사단보다 좀 늦게 철수하면서 생긴 틈을 독일군 중대가 파고든 것. 문제는 돌발상황에 당황한 3스파히여단장이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철수해 버렸다는 거다. 결국 좌측방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는 위기감을 느낀 5경기병사단 역시 철수하면서 세무아 강변의 프랑스 전선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되었다. 결국 스당(Sedan) 방어선은 독일군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되었다. [[스당]] 일대는 프랑스 제2군의 좌익을 형성하고 있던 10군단이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10군단은 예하에 55보병사단과 3북아프리카보병사단의 두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스당 방어의 핵심은 55보병사단이었다. 프랑스군은 [[뫼즈강]]과 마르페 고지라는 천연의 방어물이 있는 스당은 2선급인 55보병사단 하나로도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상대적으로 스당의 동쪽인 무종(mouzon) 지역에 치중했다. 이때 스당 지구의 55보병사단은 공격에 대비하여 진지 구축 작업 중에 있었는데, 무리한 수준의 공사가 문제가 되었다. 55보병사단은 30세 이상 예비역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단이었고, 그 점을 감안하면 훈련을 통해 사단의 전투력을 재고하는 것이 절실했건만 사단장 라퐁텐 장군은 부족한 훈련도를 더 많은 벙커로 커버해야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진지 공사는 공사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방어선을 어떻게 지켜야 할 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55보병사단 내부의 문제로 취약성은 더욱 증대되었다. 초기에 방어선을 축성하여 그나마 방어선 구조를 파악하고 있던 병력들이 교대 원칙에 따라 이동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교대 병력들이 해당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 거기다가 부대 간의 지나친 교대로 인해 각 부대 결속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거기다 기존의 예비대로 있던 71보병사단이 증원이랍시고 55보병사단의 방어 구역 내로 진입하면서 전투지경선 문제로 혼란만 더해졌다. 한편 독일군도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교통 문제로 여전히 마스(뫼즈) 강변에 19기갑군단의 전부대가 집결하는 게 불가능했던 것. 구데리안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클라이스트]]에게 도하의 연기를 요청했으나 클라이스트는 공격 일정의 준수를 명령했다. 결국 구데리안은 당장 손에 쥔 패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군의 가용 전력 대부분을 투입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 였을 것이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Battle_of_Sedan_(13_May_1940).svg.pn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5월 13일 스당 전투 전개도 [br] 파란색 실선은 프랑스 55사단의 방어선이고 점선은 오후 도하에 성공한 독일군이 형성한 돌파구이다.[* 중앙에 배치된 주공 독일군 1기갑사단 예하 1보병연대와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가 마스강을 도하하여 프랑스 55사단 방어선 깊숙히 돌파구를 형성한 것을 볼 수 있다.] || 그리고 드디어 공세의 날이 밝았다. 5월 13일 오전 8시부터 스당 지역에는 독일 공군의 롤러식 폭격[* 대체로 이런 공격 준비 사격 계열의 폭격은 일거에 대규모의 화력을 동원해 방어선을 분쇄하는 식인데, 구데리안은 이러한 형식의 공습의 효과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큰 규모의 공습이어도 강변의 포대를 포함한 모든 저항을 무력화시키지는 못하고, 공습의 충격에서 회복한 방어군은 곧 도하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들 것이 뻔했다. 따라서 구데리안은 도하 시작 시점 부터 지속적으로 공습을 가하는 방식을 구상한다.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포반들은 불을 뿜을 것이고 이렇게 노출된 위치에 폭격을 가해 포병들이 제 구실을 못하게 만들 심산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합동 공격을 맡은 비행군단의 뢰르처 장군과 논의 했는데, 폰 클라이스트 장군은 공군의 슈페를레 장군과 결정한 바대로 일회적인 집중 폭격을 명령했다. 이에 구데리안은 반론을 제기하며 그의 원래의 작전의 실행을 요청했으나 끝내 반려되었고, 도하 개시 시점인 16시 정각, 긴장한 채로 공군의 공격을 예의주시한다. 공습은 기존에 뢰르처 장군과 논의한 소규모의 공습이었고, 포병을 효과적으로 마비시키는 폭격에 힘입어 도하는 성공한다. 그날 밤 전화로 물어보니 슈페를레의 명령이 너무 늦게 도달해 폭격기 부대의 배치를 조정할 수 없어 기존안을 강행했다는 것.]이 몰아쳤다. 독일 공군은 310대의 폭격기와 200대의 슈투카, 300여 대의 전투기/전폭기를 투입했고, 기갑집단이 마스 강을 도하하기 직전의 90여분 동안에는 750여 대에 이르는 슈투카와 폭격기가 집중되었다. 08시부터 시작된 독일 공군의 폭격은 보병부대의 도하작전 개시 직전인 16시까지 집중적으로 프랑스군을 때렸다. 구데리안이 큰 위협으로 평가한 55보병사단의 포병대는 이 폭격으로 무력화된다. 뿐만 아니라 폭격으로 인한 프랑스군 사상자는 56명에 불과했지만, 스당의 거의 모든 야전 통신선이 절단된 데다 훈련이 부족한 55보병사단은 공황 상태에 빠지면서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아군의 폭격을 마스 강변에서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독일군은 16시 마스강 도하 작전을 개시한다. 제1 기갑사단은 앞서 벨기에 종심에서 공중강습작전을 수행한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와 제43 강습공병대대를 지원받아 도하 작전에 돌입했다. 본래 제1 기갑사단은 스당 북부의 [[퐁네프]] 교량을 통해 도하하려 하였지만 무력화되지 않은 프랑스군 벙커의 강력한 저항으로 수시간 동안 실패하였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수시간의 탐색 끝에 프랑스군의 벙커 위치를 파악, 88mm 대공포로 파괴한 이후 본격적으로 마스강 도하에 착수하였다. 그로스도이칠란드 연대 2대대는 선두로 마스 강 도하 이후 신속하게 퐁뇌프, 심티에르 일대 프랑스군과 시가전을 벌여 제1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며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2대대는 돈 셰리- 스당간 도로에서 프랑스군의 포격에 잠시 저지당하지만 신속하게 프랑스 군 방어선의 측후방으로 접근하여 도하 개시 3시간이 지난 19시 어간 프랑스군의 2차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 프랑스군 중대 방어거점이 위치한 라 프라이엘을 백병전 끝에 20시 경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1기갑사단의 또다른 도하작전의 주축인 1보병연대는 군단장 구데리안이 직접 현장에서 도하작전을 통제하였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연대와 달리 헤르만 발크 대령의 1보병연대는 공군의 공습으로 프랑스군 방어선이 무력화된 사이 손 쉽게 도하에 성공했다. 무난하게 도하에 성공한 1보병연대는 신속하게 남하하여 70년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선언한 벨뷔 요새를 향해 진격, 함락시키며 55사단 종심을 향해 진격하였고 일부 제대는 2 기갑사단에 강력한 저항을 펼치고 있는 돈 셰리의 프랑스군 측방을 공격하여 2기갑사단의 도하를 지원하였다. 5월 13일 도하 첫날 발크가 이끄는 1보병연대의 공격으로 프랑스군의 3개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8km에 달하는 길쭉한 돌파구를 형성되었다. 하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도하에 성공한 1기갑사단과 달리 2기갑사단, 10기갑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2기갑사단은 마스 강변까지의 기동로에 은/엄폐물이 거의 없는 데다 프랑스 포병대의 위협에 사단의 좌익이 노출되어 있었다. 거기다 1기갑사단 방면으로 포병 전력을 집중시킨 터라 가용할 수 있는 경포뿐이었는데, 아르덴 숲 어딘가에서 탄약 운반 차량들이 헤매고 있는 통에 그나마도 애물단지인 상황이었다. 다행히 먼저 도하를 마친 1기갑사단 병력들이 마련한 교두보 덕분에 2기갑사단도 이어서 도하를 성공한다. 10기갑사단의 도하 작전 역시 파괴되지 않은 프랑스군 벙커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여기서 독일군의 임무형지휘가 또 다시 큰 빛을 발휘하게 된다. 10기갑사단 예하 49공병대대 2중대의 일개 소대장이던 루바르트 중사가 이끄는 10여 명의 병력이 유일하게 도하에 성공하였고 7개의 벙커를 장악하며 10기갑사단의 돌파구를 개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들의 활약으로 형성된 돌파구로 10기갑사단은 마스 강 도하를 시작하였고 21시경 먼저 도하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와 조우하며 1기갑사단과 연결된 돌파구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주공을 스당 서쪽의 개활지로 잡지 않는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사례였고, 해당 방향으로 주공을 주장했던 클라이스트도 구데리안이 옳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서부전선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알려진 55보병사단의 와해가 발생한다. 사단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던 뷜송(bulson) 일대에 독일 기갑부대가 출몰했다는 풍문이 돌면서 사단 전체가 사실상 붕괴되어 버린 것. 하지만 실제로는 뷜송 일대에는 기갑부대는커녕 독일군 보병 하나 없었다. 뷜송 북쪽의 고지에서 포탄이 발사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프랑스군 포병 장교가 '혹시 전차포탄일수도?'라는 뉘앙스의 보고를 했고, 이것이 순식간에 확산되면서 '뷜송으로 독일군 기갑부대가 몰려오고 있다!'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단 몇 시간만에 55보병사단은 산산조각나며 상당한 숫자의 방어 거점들을 방기하고 말았다.[* 이후 이 사태의 원인 규명을 위한 조사 위원회에서 당시 55보병사단의 장교와 병사들은 "우리가 전차를 보았다! 거짓말이 아니다!"라며 팔딱댔지만... 독일군 기갑부대는 와해 뒤 12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도착했음이 밝혀졌고, 보고서들은 이 사태를 집단 [[환각]] 증상으로 평가했다. 이 사례는 [[타란툴라|무도병]]과 함께 심리학계에서 대표적인 집단 환각 사례로 자주 거론하는 사례이다.] 이처럼 [[스팀팩|각성제를 포함한 오만가지 약물을 잔뜩 빨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72시간 동안 미친 듯이 진격한 19기갑군단 예하 1기갑사단의 진격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고, 결과적으로 그 시간 안에 전차의 최대 속도로 갈 수 있는 거리를 초과해서 진격해 버린다. 이 보고를 들은 히틀러가 '혹시 허위로 보고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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