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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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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딜(Dyle) 계획 === >'''"지휘부에서는 적을 찾아내 쳐부수라는 명령이 내려왔단다. 아무리 바보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순 없었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었어. 하지만 군대란 원래 그런 곳이지."''' > >'''"그런데 아빠는 왜 명령에 따랐죠? 영웅이 되고 싶었나요? 아니면 친구들에게 자랑하려고?'''" > >'''"닥쳐, 너도 해보면 알 거야.'''" > >'''"해보다뇨?'''" > >'''"군복무 말야!'''" > >(르네 타르디, 프랑스 육군 기갑 [[중사]], [[호치키스 H35|호치키스 H39]] 전차장[* 프랑스 침공전에서 독일 전차 1대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혔다. 다만 이때 전과는 R35로 올렸다.]) 전쟁 전 프랑스는 독일의 주공이 어디일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일단 상술했듯 독-프 국경선은 이미 마지노 선의 1차 구축이 완료되었으므로, 일정 규모의 병력만으로도 확실히 저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군]]이 프랑스 본토에 두고 있던 병력의 1/3에 해당하는 36개 사단을 배치했으니 마지노 선에 한해서 병력과 장비 부족 문제는 없었다. 따라서 독일이 이런 강력한 방어선에 정면 공격을 할리 없고, 오히려 이쪽으로 와주면 고맙겠다는 것이 프랑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지노 선 북쪽의 룩셈부르크 및 벨기에 남부 방면[* 독일 A집단군의 실제 침투 경로이다.] 역시 방어도 문제 없을 것으로 여겼다. 독일군이 프랑스-벨기에 국경 일대에 흐르는 [[마스 강]]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병력들이 기동하기 어려운 험지를 돌파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의 아르덴 삼림지대는 공격 부대가 충분한 밀도로 전개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곳을 주공으로 삼으면 이건 이거대로 방어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앞서 말했듯 마스 강변에도 마지노 선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장갑벙커가 다수 설치되었다는 것도 감안되었다.[* 이 마스 강의 방어선은 독일군 상층부도 파악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만슈타인의 계획이 나왔을 때 할더가 '이색히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라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바로 묻어버린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군 상층부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지리적 유불리와 유사시 침공 루트에 대해 몇십 년 동안 준비해왔기 때문에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마스 강의 주요 도시인 스당은 앞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은 곳이었기 때문에 마스 강으로의 돌파가 얼마나 힘든지 독일군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독일군은 [[메스(프랑스)|메스]]를 따라 북상하는 루트를 선택했다.] 문제는 벨기에 중북부 및 네덜란드 남부에 이르는 [[플란데런|광대한 지역]]이었다는 거다. 이 지역은 마스 강처럼 방어선 삼을 하천이 없었고, 지형 역시 매우 평탄해서 대군을 일시에 투입할 만한 조건이 확보되는 곳이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주공으로 삼았던 바로 그 방향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군의 주력이 벨기에 북부로 올 것이라 예상한 것은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결국 프랑스가 설정한 방위선은 됭케르크에서 마지노 선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선 전체를 감싸는 양상이었지만,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벨기에군]] 단독으로 독일 주공의 저지를 맡겼다가 벨기에가 [[연합군]] 전열에서 탈락해버린 전훈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불해협에서 [[알프스산맥]]까지 끊기지 않는, 전체적으로 튼튼한 방어선의 구축이므로 최종적으로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모리스 가믈랭]]은 초기안, 즉 프랑스와 벨기에 간 국경선에서 방어하겠다는 지침을 개정한다. 그 내용인즉슨 프랑스군을 벨기에로 진입시키고, [[마스 강]]과 연결된 벨기에의 하천들을 방어선으로 삼아 대략 22개 사단 규모의 벨기에군과 함께 독일군을 격퇴한다는 계획이었다. 프랑스군이 벨기에에 설정한 방어선은 크게 두 개였다. 그 첫 번째 '''에스코 계획(Plan E)'''은 투르네-에스코(Escaut) 강-[[안트베르펜]]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두 번째 '''딜 계획(Plan D)'''은 나뮈르-딜(Dyle) 강-안트베르펜을 잇는 방어선으로 전자보다 더 동쪽에 위치했다. 개전 초기 프랑스군 총사령관 겸 [[연합군]] 총사령관이던 가믈랭은 본래 에스코 계획을 실행할 예정이었다.[* 10월 24일 가믈랭이 내린 작전명령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방어 중점은 에스코 계획에 따르는 것이었고, 딜 계획은 어디까지나 독일군 공격 이전에 방어진지를 점령할 여유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 실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폴란드 전역 이후 독일군과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길어지고 벨기에군이 성공적으로 방어진지를 확보하면서 가믈랭은 딜 계획을 통한 방어선의 연장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최종적으로 연합군은 11월 9일 열린 회의를 통해 딜 계획을 확정지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은 벨기에 중부에서 발원하여 [[안트베르펜]]으로 이어지는 하천인 딜 강을 따라 주력부대를 신속 전개, 이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브뤼셀 전면, 벨기에 영토의 거의 중앙을 가르는 방어선을 형성하여 독일군을 막아내기로 계획했다. 벨기에 정부 또한 과거 [[중립국]]이었음에도 [[독일 제국군|독일군]]에게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기에 프랑스의 이런 작전 계획을 인정했으며, 벨기에군 역시 프랑스군의 전투 효율성을 위해 각종 방어시설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실 벨기에로서는 프랑스에 협력하지 않으면 1차 대전 때처럼 최후의 항전거점으로 방어선이 구축된 안트베르펜으로 전군을 철수시켜 독일군의 우회기동로를 열어주면서 자국 영토의 70% 이상을 독일군의 점령지로 내줄 수밖에 없었으므로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1차 대전 때 독일군은 사소한 저항이 있었다는 핑계를 대고 벨기에에서 [[벨기에 학살|도시에 불을 지르고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발포하는 일]]을 숱하게 저지른 바 있다. 이 문제는 당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날렸다. 물론 대전기 동안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은 많았지만 잔혹성의 수위 자체는 유대인 등의 [[인종차별]] 문제를 제외하면 절대 낮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벨기에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독일 역시 벨기에에게 영토의 전술, 전략적 가치 이외의 일로 이를 갈고 있었다. 과거 루르 공업지대를 프랑스와 벨기에가 강제 점령했던 과거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도 벨기에를 손봐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로써 프랑스군은 벨기에 한복판의 딜 방어선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운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그리고 이 방어선을 확보함으로써 프랑스군은 중요한 이점을 세 가지 얻었다. 1. 딜 강을 따라 전개하는 방어선은 에스코 계획에 따른 방어선/프랑스-벨기에 국경보다 훨씬 짧으므로,[* 딜 계획에 따른 방어선은 에스코 계획이나 프-벨 국경선보다 약 7~80km 가량이 짧았다.] 그만큼 많은 병력을 좁은 전면에 집중해서 방어력을 높일 수 있다. 1. 벨기에가 완충지대가 되기 때문에 북프랑스의 주요 공업지대 공격 가능성이 극히 낮아졌다. [[현대전]]은 물량전이므로 북프랑스의 보호는 프랑스군의 전쟁 물자를 확실히 지켜낼 수 있다. 1. 만약 벨기에에서 독일의 공격을 받아내고 역습을 할 수 있다면, 반대로 [[네덜란드]]를 거쳐 바로 독일의 주요 공업지대인 루르를 공격할 수 있게 된다. 이어서 딜 계획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바로 상술한 1940년 1월 10일의 라인베르거 소령 사건으로, 이때 벨기에는 독일군이 벨기에 영내로 2개의 주공을 투입하는 작전 계획서 전문을 입수했다. 그리고 이 주공 중에서도 특히 무게가 실린 것이 바로 딜 방어선 방면의 두 개의 강력한 기갑부대 제파였다.[* 이 두 개의 제파에는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10개 기갑사단 중 9개가 투입되며,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사실상 이 사단도 네덜란드 제압만 끝나면 곧장 딜 방어선에 투입된다고 봐야 했다.] 이에 따라 딜 방어선의 사전 구축 계획은 매우 시의적절한 조치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해당 기갑부대 제파에 대응하기 위해서 프랑스군 역시 최대한 빨리 기갑부대를 배치해 독일군 딜 방어선 선착을 저지하고, 후속 부대를 투입하여 확실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개전 시 [[르네 프리우]](Rene Prioux)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유일한 군단급 기계화부대인 기병군단(Corps de Cavalerie)을 동쪽으로 돌입시켜 지연전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노출된 작전 계획서에서 벨기에와 네덜란드 전선이 동시에 개전된다는 것, 독일군 핵심전력 대부분이 [[벨기에 침공]]에 투입되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생각 이상으로 오래 지연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모리스 가믈랭]]은 기존 딜 방어선의 좌익단을 연장시켜 네덜란드의 도시 '브레다(breda)'까지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브레다 변형(Breda variant)'''을 기한다. 이를 위해 프랑스군은 북동부 전선의 전략 예비대인 제7군을 벨기에 북부 방면에 배치하였고, 유사시 브레다까지 진격해 네덜란드 일부 지역의 방어를 겸하도록 하였다. 다소 무리해보이는 이 결정은 프랑스는 [[라인란트 재무장]] 당시의 침묵, 체코와 폴란드 합병을 방기한 건으로 벨기에로부터 그렇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런 외교적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딜 방어선은 원래 그다지 길지 않은 방어선이었고, 때문에 당초 프랑스는 벨기에군 22개 사단, 프랑스군 10개 사단과 영국군 5개 사단이면 방어에 충분하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어선 확장을 커버하기 위해 20개 사단을 추가 투입하게 되는데, 문제는 해당 병력이 프랑스군이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예비 병력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해당 병력의 기동은 독일군의 주공이 확실히 벨기에로 향할 때에만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프랑스와 벨기에군, [[네덜란드군]]이 딜-브레다 선에 완전히 전개된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벨기에 중앙을 돌파하는 독일군의 주공을 뿌리째 잘라버리는 결정적인 수단으로 써먹거나 심지어 전력 일부를 북부로 돌려서 독일의 루르를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만약 독일이 전혀 다른 작전으로 프랑스를 공격한다면 그때 프랑스군 최고 사령관은 말 그대로 대사건의 방관자로 전락하기 십상이라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략적 예비라는 것이 본디 후방에서 대기하며 유사시 적절한 지점에 투입되어 전략에 유연성을 부여하는 것인데 이를 전방에 배치하는 것은 그야말로 오만한 행동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다만 공교롭게도 당시의 프랑스군은 사전에 잘 계획된 공격 계획에 따라 공세를 했다가 자칫하면 쫄딱 망할 뻔했던 1차대전 이후 계획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하나일 뿐이며 실질적인 작계는 개전 뒤 적의 의도가 확실해지면 그때 가서 실시하는 것으로 교리를 재정립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교리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계획 누출과 외교적 압박 등 여러 요인으로 프랑스군은 이와 정반대로 행동하고 만다.[* 독일군은 이와 정반대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몰트케의 금언이 이를 가리키는데, 'Kein Plan überlebt die erste Feindberührung(적과의 첫 접촉 이후까지 살아남는 계획은 없다).'] 더군다나 프랑스군이 지닌 약점은 [[사령부]] 체계에도 있었다. 전군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과 북동부군 사령관/전군 부사령관인 알퐁스 조르주 간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당장 가믈랭이 조르주와 의견 조율을 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약 75km를 차로 달려 조르주의 전용 지휘소로 가야만 했다. 조르주가 주재하는 북동부전선 사령부는 가믈랭 사령부에서 약 56km가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가믈랭과 조르주 간의 의견조율을 담당할 북동부전선 참모들이 소재지는 총사령부와 북동부전선 사령부의 중간 지점이었다. 그리고 총사령부에 직속하는 참모 조직도 보유하지 못한 가믈랭은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또한 가믈랭의 사령부는 [[무전기|무선통신]]이나 텔레타이프 설비조차도 없어서 전선의 상황 전파는 [[오토바이]]를 이용한 전령을 이용하여 통상 48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이에 [[전신기]] 1대 정도는 설치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으나, 이에 대한 답은 '군사 명령을 하달하는 것을 경마 경기 결과를 전달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하다 못해 [[고대]]부터 사용된 장거리 연락 수단인 [[전서구|문서 전달용 비둘기]] 한 마리조차도 없었다. 그나마 나중에 가믈랭이 해임되고 새로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막심 베이강]]이 선택한 지휘소에는 [[전화기]]가 단 1대 있었는데, 이것도 12시~14시 사이에는 사용금지였다. 왜냐하면 전화 교환수들이 점심시간을 꼭 지켜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기 [[프랑스군]]의 통신 체계에 대한 인식은 이전 시대의 기준으로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심히 낮았다. 이것은 비단 사령부의 지휘 체계뿐 아니라 무기 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프랑스 전차들은 하드웨어 성능에선 독일 전차를 확실히 앞섰지만, 무전기의 부재로 실전에서는 따로 놀다가 모조리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통신체계 경시로 인해 프랑스군은 독일군보다 훨씬 많은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도 지휘 통신 체계의 혼란으로 하위 부대의 현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패전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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