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토마스 상카라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대통령 취임 후의 행보 === 취임 후 그는 자신이 구상한 개혁 정책들을 추진해 나갔다. 우선 취임 1주년이던 [[1984년]] 8월 4일에 [[오트볼타]]라는 프랑스 식민 지배 잔재의 [[국명]]을 버리고 현지어인 모시어와 듈라어 표현을 조합해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를 뜻하는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로 개명했으며 이전까지 쓰이던 [[국기]]를 버리고 직접 새 국기를 만들었고 기존의 [[국가(노래)|국가]]도 버리고 〈디타녜(''Ditanyè'')〉[* '단 하나의 빛'을 의미한다.]라는 국가를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하기까지 했다.[* 이 국명, 국기, 국가는 전부 상카라가 살해당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쓰이고 있다.] 정부가 민중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장관용 관용차(벤츠, [[르노 25]])들을 전부 매각하고 당시 부르키나파소에서도 가장 값이 쌌던 경차([[르노 5]])로 바꾸었다.[[https://twitter.com/AfricaFactsZone/status/1271708633705963520?t=9Eb7Z68u9iWfUWqD67Mx4A&s=19|#]] 물론 그는 대통령 월급을 450달러로 낮추고 자동차 1대, 자전거 4대, [[기타]] 3대, 냉장고, 고장난 냉동고만 가지고 소수의 부르키나파소인들 외에는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없다며 [[에어컨]] 사용도 거부하는 등 극도로 검소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부유한 공무원들의 봉급을 줄이고 정부 운전기사와 비행기 1등석 사용을 금지했는데 당연히 상카라 본인은 이 요구를 충실히 지켰다. 물론 그의 아이들은 일반적인 공립학교에 다녔고 아내는 일반적인 공무원이었으며 부모도 이전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는 "토마 상카라가 700만 명이다."라고 말하며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달리 공공 장소에 자신의 초상화를 전혀 걸지 않았고 오히려 조깅을 하거나 공개 행사 속에 군중 속으로 눈에 띄게 들어가는 탈권위적 면모를 보였다. 정치적으로도 [[참여민주주의]]의 논리로 민중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혁명수호위원회(CDR)를 만들고 지역 문제의 관리를 보장하고 주요 활동을 조직했는데 그는 이에 대해 "투표용지와 선거 기구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따금 선거를 조직하고 선거를 할 때마다 국민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권력 등의 모든 형태의 권력이 없는 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통해 부르키나파소의 경제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행정 개혁을 통해 과감하게 전국을 30개 자치구로 나누고 각각의 자치구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여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자치구를 관리하게 하는 "자주관리정책"을 시행했으며 프랑스 식민지배 이후 계속 이어져 왔던 과중한 인두세를 과감하게 폐지하고 토지 재분배 정책, 그러니까 전국에 할거한 부족장들이 지배하던 토지를 몰수하여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도 실시했다. 국가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여 주택 건설을 돕기 위해 벽돌 공장을 건설하거나 도로, 우물, 저수지, 상하수도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만들었고 각 지역의 특산 수공예 산업 육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망가니즈]] 추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도로와 철도를 외국의 지원과 외부 자금 없이 깔면서 아프리카 국가가 외국의 도움이나 원조 없이 번영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으며[* 실제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프랑스의 경제 원조는 무려 80%나 감소했고 상카라는 [[IMF]]와 대출 계약도 맺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르키나파소 남서부의 농작물 섭취를 장려하기 위해 과일 및 채소의 수입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이는 후술하듯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90%가 넘는 문맹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을 중시하였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 여러 학교가 설립되어 취학률은 6%에서 22%로 증가했으며 국가 발전에 기여할 역군들을 키우기 위해 600명의 아이들을 [[쿠바]]로 보내 의학, 공업, 농업 교육을 받게 했다. 사회정책에서도 상당한 개혁적 조치들을 단행했다. 법적으로 [[서아프리카]] 지역 최초로 [[매춘]]과 [[강제결혼]], [[일부다처제]]를 금했으며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너무도 가혹했던 풍습인 [[여성할례]]를 금지시켰고 여성의 날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특히 아프리카 지도자 중 최초로 적극적으로 [[여군]]을 모집했으며 여성을 고위공무원직에 대거 임명하여 여성 인권을 신장시켰다. [[피임]]을 장려하고 소아마비, 수막염, 홍역을 막기 위해 어린아이들에 대한 [[예방접종]]도 대대적으로 시행했으며 그 결과 1983년부터 1985년까지 200만 명의 어린이들이 예방접종을 맞게 되어 매년 1.8만~5만 명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마을마다 병원과 약국을 세워 미신이나 그릇된 지식의 치료법 대신 근대적인 의료체계를 확립하려 했으며 [[에이즈]]의 실체를 아프리카 최초로 정부차원에서 인정하기도 했다. 덕분에 부르키나파소의 영유아 사망률은 그가 집권하면서 단 4년 만에 20.8%에서 14.5%로 감소했다. [[사막화]]가 진행되는 황폐화된 부르키나파소의 자연환경을 복구하기 위한 재녹화 사업을 추진하며 땔감의 무절제한 사용을 줄이는 것을 장려하고 나라를 동서로 횡단하는 50km의 숲을 심으려고 했으며 7천 개의 마을 양묘장을 만들어 천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기도 했다. 그의 일련의 개혁 정책들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부르키나파소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각 자치구에 부여한 자주관리제도는 성공적이어서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부족갈등이 사라지고 토지재분배 정책도 큰 효과를 거두어서 1983년에 11억 톤에 가까웠던 곡물 생산량이 1987년에는 16억 톤으로 증가하여 부르키나파소는 집권 4년 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될 정도로 경제가 살아났다. 1986년에 부르키나파소 국민들은 1인당 하루 두 끼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 UN 식량권 특별보고관은 그를 "그는 굶주림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부르키나파소를 4년 만에 자급자족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측정한 부르키나파소의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은 1984년 1545kcal였던 것이 1986년 2042kcal로 '''단 2년 만에 1.32배나 성장했는데''' 단 2년 만에 국민 대다수가 하루 한 끼도 챙겨먹기 힘든 나라가 국민 대다수가 하루 두 끼라도 챙겨먹으며 굶지는 않을 수 있는 나라가 된 셈이니 그가 극찬을 받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2018년 기준 부르키나파소의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은 2737kcal로 다시 1.34배 성장했지만, 뒤집어 말하면 콩파오레가 27년 동안 집권하고 물러날 정도의 시간 동안 이룬 성과를 상카라는 '''단 2년 만에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한강의 기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박정희]]도 1961년부터 1973년까지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을 2141kcal에서 3058kcal로 '''12년 동안 1.4배로 성장'''시키는 정도에 그쳤다. 물론 그것도 하루 두 끼 먹는 나라를 세 끼 먹는 나라로 바꾼 대단한 수준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상카라에 비할 바는 아니다.] [[https://ourworldindata.org/grapher/daily-per-capita-caloric-supply?tab=chart®ion=Africa&country=~BFA|참고자료]] 실제로 쿠데타 직후인 1984년에는 -1.8%를 기록했던 경제 성장률도 1985년에는 8.5%, 1986년에는 8%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부르키나파소의 GDP는 단 3년 만에 15.5억 달러에서 23.7억 달러로 크게 올랐다. 1인당 GDP는 188달러에서 281달러로 괄목할 성장은 아니었지만, 그의 집권 기간이 너무 짧고 부르키나파소의 출산율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이다. 그가 외부의 지원을 모조리 거부한 채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하여 나라를 운영했다는 것, 그리고 부르키나파소가 '''[[내륙국]]'''으로써 경제 성장에 매우 불리한 환경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기적]] 수준으로 경이로운 성과였던 셈이다. 여담으로 그는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987년 7월 29일에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 통일 기구 정상회담에서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부자와 착취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갚을 의무가 없다고 말했으며 가끔 정책적인 실패가 일어나긴 해도 아프리카의 독재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말년의 탄자니아 전 대통령 니에레레와 더불어서 공개적으로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는 시정 조치를 취했다.[* 실제로 1987년에 부르키나파소의 경제성장률은 -0.2%를 기록했는데 사실 이때쯤이면 상카라의 혁명이 너무 과열된(?) 나머지 국민들의 열정이 약해졌고 상카라의 정책으로 권력이 약해진 전통적인 족장들을 위시한 일부 국민들은 상카라 정권에 대한 좌절감을 품기도 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