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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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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시절 (1980년대 중반 - 1990년) === 1988년, 키노는 '소련 락 역사상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고 불리는 앨범 '[[그루파 크로비|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를 내놓으며 명성의 정점을 찍는다.[* 이 앨범은 기술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키노의 앨범들 중 가장 음질이 좋은 앨범이다. 카스파랸은 [[미국인]]인 아내 조애나 스팅그레이를 통해 야마하 MT-44 등 유럽과 미국의 더 나은 장비들을 들여올 수 있었다.] 이 앨범은 1989년에 [[미국]]의 유명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Robert Christgau)를 통해 미국에서도 출시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초이는 이 앨범을 캐피톨 레코드를 통해 [[미국]]에서만 발매하고 [[소련]]에서는 발매할 생각이 없었다. 1987년 제5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에서 해당 앨범 수록곡들을 거진 공개하긴 했지만. 허나 "이건 사랑이 아니야"의 프로듀서이자 키노의 동료 음악가였던 알렉세이 비시냐가 이를 소련 내에 유출한 것. 소련 내에서 앨범은 대박을 쳤지만, 이로 인해 초이와 비샤나 간 관계가 서먹해졌다.] 키노는 소련의 중앙 TV에서 공연했으며, 1987년 초이가 러시아 락에 대해 다룬 영화 'Assa'에서 '[[https://www.youtube.com/shorts/X6Ao9trQQpo|나는 변화를 원한다(Перемен)!]]"라고 외치는 퍼포먼스로 유명해졌는데[* 참고로 Assa에서 [[빅토르 초이]]는 그냥 [[특별출연]]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공연 소리도 앨범의 중저음보단 좀 떴다.-- 근데도 개봉 당시에는 마치 주연이라도 맡은 양,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초이를 마케팅 차원에서 전적으로 앞세웠다(...). ~~[[소련 해체]]도 되기 전에 불어온 [[자본주의]]의 바람~~ 이 영화의 진짜 주연 배우는 소련 아티스트인 [[아프리카]](본명은 세르게이 부가예프)다.], 이는 영화 맨 마지막에 나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erJ1ce5iQ0s|영상]].[* 참고로 영상 초반 부분은 빅토르 초이가 분한 한 젊은 가수가 음식점에 도착하고 공식 공연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규칙에 대한 설명을 여성에게 듣는다. 허나 그걸 가만히 서서 듣는 대신 그는 자신이 시인이라면서 음식점을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밴드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되고 이게 계속되면서 카메라는 빅토르와 밴드가 대규모의 군중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빅토르 본인은 이 영화나 엔딩의 퍼포먼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이후 이 곡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리믹스 앨범 '마지막 영웅'에 수록된다. 이후 키노는 동구권을 포함한 외국 순회 공연에 나선다. 덴마크에서는 당시 아르메니아 지진에 대한 구호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으며(1989년 1월), 부르주(Bourges)에서 개최된 프랑스 최대의 락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했다. 1989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영화 [[이글라|'이글라']]의 시사회와 소규모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1990년 1월 미국 유타 주에서 개최된 선댄스 영화 페스티벌에서도 참가했다. [[https://youtu.be/dvkUUV8TbRU|당시 음원]]][* 당시 [[크루이즈]], 고르키 파크, [[아크바리움]] 등 많은 소련 락 밴드들이 미국 등지의 서양에 진출하고자 했으나 이들의 행보는 무관심 속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 서구 사람들은 '소련하면 [[체호프]]나 [[차이코프스키]] 정도 있는 줄 알았는데, 이 곳에도 [[락]] 밴드가 있네?' 정도의 태도로 일관했지 이들의 음악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 고르키 파크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 등이 활동하긴 했으나, 냉전이 끝난 뒤 이들은 잊혔다. 이에 초이와 마이크 등은 실망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이는 영화 [[레토(영화)|레토]]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table align=center><table width=650><table bordercolor=#000><bgcolor=#ffffff,#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youtube(Y-vyx4JDZ8Q, width=100%)]}}} || ||<bgcolor=#000> {{{#ffffff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앨범 '[[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수록}}} || 1989년, 밴드는 '[[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앨범을 내놓는다. 어둡고, 우울한 톤의 노래가 주를 이룬다. 이후 키노는 러시아 유명 프로그램인 브즈글랴트(Vzglyad)에 출현하고, 몇몇 비디오도 찍는다. 초이는 이걸 상당히 꺼렸지만, 이 비디오는 TV에 자주 상영되었다. 또한 이 당시 밴드는 가벼운 노래와 초이의 심오한 노래[* 45, 46 앨범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원래 초이는 비유하자면 '활기찬 20대 백수'처럼 노래를 했는데 후기 앨범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가사에 은유적 표현이 많이 삽입되고 음 자체가 낮아지기 시작했다.]를 구분하기 위해 독립된 팝 밴드를 세우기로 계획했다고 한다. ||<table align=center><table width=650><table bordercolor=#000><bgcolor=#ffffff,#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youtube(14QJDnydXmg, width=100%)]}}} || ||<bgcolor=#000> {{{#ffffff 재결성 이전 마지막 공연인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 라이브, 1990.06.24.}}} || 1990년, 키노는 인기의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키노는 모스크바에 위치한 위치한 러시아 최대 경기장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 때 경기장에 모여든 관중들은 공식 집계로 62,000여 명에 달했고, 심지어 [[1980 모스크바 올림픽|모스크바 올림픽]] 때나 볼 수 있었던 [[성화]]까지 점화되는 등 전설적 이벤트를 연주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까지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성화가 올라간 적은 딱 네 번 뿐이며, 이들 모두 국제적인 페스티벌이었다. 이후 7월, 마지막 콘서트를 마치며 초이는 '[[https://www.youtube.com/watch?v=tXRcuq1sLsQ|이번 가을에 출시할 앨범도 기대해 달라]]'라고 말했으며, 8월 무렵 키노는 라트비아의 스튜디오에서 새 앨범의 녹음을 대부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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