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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멘트 보로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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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전과 스탈린의 군사적 동지 ===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보로실로프는 [[우크라이나]] 임시 정부 수반과 내무인민위원(내무장관)을 맡았다.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5군의 사령관으로 활동하는 것을 시작으로 공산당의 차리친(훗날의 [[스탈린그라드]]) 방위전 때 10군을 지휘하면서 스탈린과 친해졌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민간인에 군 경력도 짫았지만 [[적백내전]] 당시에는 군단급 제대를 이미 지휘해본 사람인 건 맞다. 이 스탈린-보로실로프 인맥은 나중에 [[붉은 군대]]의 중추가 되는데 [[대숙청]]에서 무사했던 군인들 중 상당수가 이 인맥이었고 대숙청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거 승진한 것도 이 인맥이었다. [[세묜 티모셴코]]나 [[이반 코네프]]가 바로 이 인맥이다. 2차대전 때 보로실로프가 무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백내전에서의 그의 전과를 과소평가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전의 서술에서는 그가 얇게 무장하고 지휘 체계가 엉망이며 고립되었던 반혁명군을 진압했을 뿐이고 전략전술적으로 의미있는 승리를 거둔 적은 없다고 심하게 폄하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오히려 백군쪽이 영국에서 원정온 전차 사단이 동행할 정도로 높은 무장 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지휘관도 데니킨, 브란겔, 크라스노프 등 남러시아 백군에서 쟁쟁한 인물들 뿐이었다. 지휘 체계라고 하면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하는 적군쪽이 훨씬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방어하던 볼가 강 유역은 남러시아 백군과 시베리아 백군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야하는 요충지였고 실제로 이곳을 잘 막아내면서 두 세력이 하나로 합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고참 볼셰비키(10월 혁명 이전에 볼셰비키에 참여한 자)로서 트로츠키 몰락과 프룬제 사후 붉은 군대의 넘버 원이었다. 1935년에 군에 계급이 부활되자 다른 4명(투하쳅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 부됸니)과 함께 원수 계급을 받았다. 다섯 원수 중에서도 그가 가장 서열이 높았기 때문에 당시 선전매체나 군가 등에서는 보로실로프를 따로 '제1원수'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width=400> [[파일:attachment/St_060.jpg|width=100%]] || || [[1935년]]에 제작된 [[국방장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左)과 함께 영웅으로 숭배되던 시절의 포스터.[* 아랫쪽 가운데에 그려진 [[전차]]는 [[T-35]]이다.] || 당시 붉은 군대는 [[국방장관]] 겸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 [[레프 트로츠키]]가 총지휘하고 있었고,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하고 적과 동지를 동시에 많이 두고 다녔던 트로츠키에 비해 언변이 서툴고[* 스탈린은 고향 조지아에선 시인이었지만 러시아어는 모국어가 아니라서 그런지 고교생 수준 밖에 안되었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성격을 지녔던 스탈린은 당의 중진 정도 간부였으며, 10월 혁명에서 큰 두각을 끼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차르의 은행이나 열차를 강도질해 혁명자금을 모아오는 일을 맡았고 그 와중 범죄조직과의 관계도 많아져서 당 입장에서 드러내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처음부터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보로실로프는 트로츠키가 이끈 군사 혁명 위원회에서 트로츠키에 맞서서 스탈린을 옹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탈린은 그럴 위치도 아니었고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처세술에 뛰어나[* 그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 이를테면 부하가 아닌 외국인들 앞에선 절제를 잘했다. 대소련 봉쇄정책으로 유명한 조지 케넌은 자기 후임자인 찰스 볼렌이 스탈린이 부하를 노려보던 순간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예의바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https://www.johndclare.net/cold_war7_Kennan_interview.htm|CNN 인터뷰]][[https://m.dcinside.com/board/war/1208315|번역문]]] 당시 얌전하고 별 문제되지 않는 인물이란 평판을 받고 있었고 트로츠키는 유능하지만 남들을 깔보는 일이 많아 적이 많았다. 이때도 트로츠키가 일방적으로 모스크바에서 남러시아 전선을 잘 지키고 있던 스탈린을 공격했다. 이렇게 스탈린이 어려웠을 때 보로실로프가 나서서 스탈린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그는 스탈린의 가장 믿을만한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일등공신이었으나 오만한 성격 탓에 적이 많았고, 초기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을 따르던 [[볼셰비키]]가 아니라 뒤늦게 참여한 인물이라서 볼셰비키 당 내에 추종자들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급 인물들은 군부를 장악한 트로츠키가 제2의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이 되어 혁명을 전복시키고 [[독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힘을 모아 트로츠키가 내전 당시 드러냈던 여러 약점을 들춰내며 공격했으며, 트로츠키는 이 때문에 군직에서 사임하고 [[미하일 프룬제]]가 그 자리를 맡았다. 스탈린은 당시엔 그렇게 요직은 아니란 평가를 받던 [[서기장]] 직위와 민족문제위원직을 이용해 하급 당원들과 소수민족들의 지지를 받아갔다. 레닌이 뇌일혈로 와병하자 당은 스탈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덩달아 보로실로프의 지위도 강화되었다. 레닌은 유언장에서 스탈린을 극렬하게 비판하고 서기장직에서 해임하라고 했지만, 다른 간부들이 오만한 트로츠키보단 겸손한 스탈린이 낫다고 여겨 스탈린을 지지해 무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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