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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부와 정치권을 잇는 가교 === 야전군인으로서는 저렇게 소련군의 거대한 패배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무능한 사람임에는 틀림없고, 스탈린의 [[대숙청]]을 도왔다는 점에서도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지만 정치권과 군부를 잇는 가교 역을 하면서 정부의 예산을 끌어와서 효율적으로 전력을 배분한 군사행정가로서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보로실로프의 동료원수들이 숙청된 이유는 사실 소련 체제 입장에서는 이유가 있었다. 어떤 지휘관이 유능하냐 무능하냐 이전에 따져야할 더 중요한 부분은 체제에 복종하느냐 안 하느냐이다. 이런 면에서 프랑스 혁명군을 이끌다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해 [[프랑스 혁명]]을 사실상 끝장낸 [[나폴레옹]]은 소련공산당에서 두고두고 [[반면교사]]가 되었다. 투하쳅스키는 귀족-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처음부터 공산정권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고, 내전 시기부터 작은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듯이 그는 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예고로프도 제국군 장교 출신에다가 당내 분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으며 블류헤르는 극동에서 독립 군벌마냥 행세했다. 부됸니조차 기병 병과를 개인왕국-사병화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스탈린의 권위가 흔들리면 언제든지 자기를 따르는 부대를 몰아 반란이나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다. 보로실로프가 국방장관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보로실로프는 정통 군인 출신은 아니지만 적백내전부터 군부에 몸담으며 군부와 혁명세력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고, 군부에 전반에 대한 장악력이 있었다. 일단 군대나 지휘관은 통수권자에 복종을 해야지 유무능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당장 무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통수권자에게 복종을 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순간에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니 말이다. 게다가 특히 일반적인 나라의 군대도 아니고 당시 소련이라는 근본적으로 군대, 경찰 같은 조직과 불편할 수밖에 없는 좌익 혁명가들이 설립한 공산주의란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지향하는 신생정권이란 특수한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당시 신생 공산 혁명정권이었다는 근본적인 체질 때문에 소련에서 보로실로프 같은 최고 지도자와 군부의 관계를 조율할 정치군인의 존재 자체는 불가피했다. 그나마 보로실로프 같이 정계에서 목소리를 내어 예산과 인력을 끌어 올 수 있는 군인이 있었고 1920-30년대 아직도 실험적인 국가였던 소련에서 그나마 군부와 정계를 연결하면서 혁명가들에게 선동되어 가담한 의용병 및 제국군 탈영병의 집합이었던 붉은 군대가 기계화를 앞세운 기술군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노농적군]]에서 마찬가지로 원수직에 있었던 [[세묜 부됸니]]가 기병의 축소와 군의 기계화에 극히 부정적이었고 기계화와 기병대의 축소는 고의적인 사보타주에 해당된다는 증언까지 남겨 [[대숙청]]에서 기계화 지지자들의 비참한 최후에 기여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보로실로프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사례다.[* Montefiore, Simon Sebag (9월 14일, 2005). Stalin: The Court of the Red Tsar가 해당 부분 출처.] 보로실로프가 국방장관을 맡고 있을 당시의 붉은 군대의 기계화율은 그후 야전에서의 삽질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30년대말에 세계에서 선두권을 다투었다. 예를 들어 당시 서유럽에서도 전차전 이론이 개념에 머무르고 있을 때, 소련에서 여러 실험적인 전차가 개발된 것이 바로 그의 국방장관 재임시였고 개발 중이던 [[KV 전차]]의 개발이 중단 위기에 몰렸을 때 도움을 줘서 이후 [[T-34-76|T-34]]와 더불어 파죽지세로 몰려 오던 독일군 기갑 부대에 대적할 수 있는 강력한 장갑의 [[중전차]]가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보로실로프가 붉은 군대의 기계화를 반대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투하쳅스키의 급진적 기계화는 반대했지만, 점진적인 기계화는 찬성'''했다. 국방장관을 맡았을 때, 후임 세묜 티모셴코와 마찬가지로 점진적 기계화를 주장했다. 최선임원수로서 보로실로프는 대숙청때 다른 동료원수들을 죽음으로 몰기는 했지만 공범자들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 있던 여러 유능한 군인들을 구하기도 했다. 숙청대상이었던 [[이반 코네프]]를 구하고, 주코프를 발탁해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맡기고 일본과의 국경분쟁이 나자 바로 [[할힌골 전투]]의 지휘관으로 임명해 승전한 것은 모두 보로실로프의 공적인 것이다. 사실 이런 야전 지휘관이 아닌 정치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보로실로프가 당장 공포스런 절대권력자 앞에서 할 말은 하면서도 객관적으로 필요한 정책, 인사는 군말없이 지지했다는 점에서 업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국면에서 자신의 야전지휘에서의 무능을 순순히 인정하고 주코프, 코네프 같은 유능한 인재에게 맡겼다는 면에서 소련군이 초반의 재앙과 삽질을 극복하고 숙련된 강군으로 거듭난 발전에 아예 기여한 바가 없다곤 할 수 없다. 그나마 자기 객관화는 되었다는 점에서 히틀러보단 확실히 나았다. 결과적으로 야전지휘관으로는 무능했고 2차대전 초반 참패의 원흉이며, 대숙청의 공범이기도 했지만, 국방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군인정치가로서나 군사행정가로는 나름대로 상당한 업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이 격하되던 흐루쇼프 시기에도 그는 실권을 잃었지만 군부에서 상징적인 위치는 계속 가지고 있었고, 소련이 망할 때까지도 붉은 군대 창건자의 한명으로 기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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