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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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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코민테른은 1919년 레닌과 소련 공산당(이 당시에는 전 러시아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지만)의 주도하에 창설되었다.[* 의장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 1926년까지 맡았다.] 그러나, 이 당시 서유럽의 사회당이나 공산당들은 이미 제2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적 연합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코민테른은 창설 당시부터 제2인터내셔널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이로 인하여 당시의 국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 정확히 말한다면 유럽의 운동.]은 대분열을 겪게 되었다. 이 갈등 국면에서 사민주의와 온건 노선을 지향하는 제2인터내셔널에 대하여 코민테른은 혁명적 사회주의와 강경 노선을 주장하였다. 초기의 코민테른은 후발주자라는 불리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세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국가인 소련의 막대한 영향력에 힘입어 세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럽 각국의 사회당이나 공산당들이 자국의 전쟁수행 노력에 동참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의 응집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으며[* 제2인터내셔널의 양대 주축이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사민당이었는데, 1차 세계대전에서 양 당이 자국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해 버렸으니 회의장에서도 당연히 전쟁이 나지 않겠는가?] 평화주의를 주장하던 국제주의적 좌파의 신뢰도 잃은 상태였다. 이로 인하여 이탈한 지지 세력들을 흡수함으로써 코민테른은 급속하게 세를 불리게 된다. 또한 당시 유럽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시달리던 지역, 특히 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자 사이에서는 코민테른에 대한 지지가 더욱 확고했다. 이는 서유럽 열강국가의 공산당들이 자국의 식민지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기 힘든 데 비해, 일단 캅카스, 중앙아시아 등의 러시아 제국의 기존 지배 지역들을 일단 형식상 [[연방제]]로 재편한 소련은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반대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고, 단순한 합의체인 제2 인터내셔널이 영향력을 외부에 투사하기 어려웠던 데 비해 소련을 중심으로 통일된 행동이 가능한 코민테른은 공산주의자가 참여한 각 식민지 국가의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으며, 소련이라는 국가(=돈 나올 구멍)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지원에 필요한 비용 역시 마련하기 쉬운 입장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십여 년이 실질적인 코민테른의 [[리즈 시절]]이었다. 당시 서유럽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던 프랑스 공산당은 사실상 코민테른 요원인 오이겐 프리트의 통제 하에 있었고, 당 서기장인 모리스 토레즈 등 간부진들 역시 소련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비 유럽지역의 경우를 보더라도 식민지로 강점된 국가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은 1국1당이 되기 위해 서로 암투를 벌일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등의 사례가 있다.[* 독립운동계열에서는 차라리 안 받느니만 못했다 싶을 정도로 뒷맛이 나쁜 사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자금 지원을 한 건 사실이고, 당시에 다른 나라 독립운동하라고 돈 주는 나라가 소련 말고 딱히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 이 제2인터내셔널의 모습을 담은 기록 사진 중에는 [[태극기]]가 발견되기도 한다.[[http://www.imbc.com/broad/tv/culture/world/news/1535593_14066.html|#]] 즉 한국인 또한 코민테른에 참여했다는 증명이다. 그리고 인권운동이나 인종차별 반대 운동, 각종 사회운동이나 문화적 운동에도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한 국제공산주의의 영향력은 막대하게 성장하여 노골적인 공산주의자들 뿐 아니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나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친소적인 분위기가 크게 신장되었으며 특히 [[이사도라 덩컨]], 랭스턴 휴즈 등의 미국 예술가들이 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소련을 방문[* 덩컨은 아예 소련으로 거점을 옮겼고, 휴즈는 소련 공산당의 독재와 문화적 획일성, 억압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는 했지만 인종차별 문제에서는 소련이 얼마간의 성과를 이루었음을 인정했다.]하는 등의 성과를 이루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928년 제6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기존의 국제연대 노선에서 벗어나 스탈린주의 노선으로 변경'을 채택한 이 시점부터 코민테른은 초심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30년대 중반 이후, 스탈린의 공포 정치와 대숙청 등으로 소련 체제의 잔인함이 알려지면서 코민테른의 인기 역시 감소하기 시작하였고,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이 조인되면서 코민테른의 정당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말 그대로 전쟁 반대로 흥한 코민테른은 전쟁 반대를 외치면서 망한 셈이다. 특히 서유럽에서 코민테른의 최대 세력 근거지였던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전쟁으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소련에 대한 실망과 적국인 독일과 소련이 동맹을 맺었다는 것에 대한 충격으로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을 정도.[*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프랑스 공산당은 소련 말을 따르다 보니 독소 불가침조약을 찬성하고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려는 것에 대놓고 사보타주를 했으며 프랑스 침공 후에도 독소전쟁 이전까지 갈팡질팡하기만 했다.] 더구나 소련이 자기 땅 지키는 데 바빠서 코민테른의 활동을 더 이상 지원하지 못하게 되면서 코민테른의 활동은 유명무실해졌으며, 결국 1943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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