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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고종, 군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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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변된 역사 == * '''조청 철도사업''' 월남 문제가 끝난 뒤 [[서태후]]의 자기 정치로 조선 내에서 반청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어떻게든 유혈 사태를 피하고 싶었던 귀남이 조청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자 '선의'로 [[동삼성]] 철도 공동부설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런 월척을 내버려둘 수 없었던 이홍장이 판에 뛰어들면서 단순히 만주에 공동으로 철선과 전신을 깔자는 정도였던 제의가 '''양광(兩廣)[* 광둥성과 광시성.]에서 [[경상도]]까지''' 철도를 놓는 넉넉잡아 50년간 추진할 일대 대사업으로 확장됐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공상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기던 시절이니 당초 '만주 철도사업' 입찰에 뛰어들었던 영프독 삼국의 철도회사들이 난색을 표했으나, 사업의 타당성은 떨어져도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천장을 뚫고 치솟을 것이 너무나 명백하므로 결국 청과 조선 양국에 제철소 건설, 기술학교 설립, 설비 국산화 지원 등 대규모 기술이전을 감수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참고로 조선측 제철소는 해주 인근에 짓게 된다. 해주 인근 재령군과 은율군 일대의 철광을 이용하려는 듯. 작중에서 장지동이 30년 정도면 양광에서 경상도까지 노선이 완성될 거라고 말하는 걸 보면 순탄하게 진행하고 있는 듯하다. * '''서태후의 동아철도회사 지분 확보''' 서태후가 양이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장지동의 말에 낚여 [[원명원]] 증건 예산을 빼돌리고 비장해 두던 자신의 재보들까지 적잖이 헐어내어 청의 양광에서 조선 경상도에 이르는 철도 사업을 책임질 '동아철도회사' 일명 '동철'의 최대주주가 됐다.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초거대 공사에 경악했던 서양 투자자들은 뒤이어 서양식 주식 제도를 이해하고 절반 이상 투자하면 동철 공사를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태후가 진짜로 과반액을 투자하자 그 재력에 경악하게 되었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홍장이 북양군을 육성하기 위해 황실 지분 일부를 처분해 서태후가 여전히 최대주주는 맞지만 과반선이 붕괴했다. * '''[[마신이]] 암살 미수 사건''' 심복 장문상에게 공격당해 중태에 빠진 것은 원 역사와 같지만 본작에서는 조선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소(小) 파리 등 서양인 거주지에 살던 서양 의사들의 발빠른 응급처치 덕분에 마신이가 죽지 않았고 다리를 저는 정도의 후유증을 가진 채로 끝나게 되었다. 참고로 마신이 암살 미수 사건이 입소문을 타면서 양의들이 거의 죽어가던 마신이 공을 살려냈다는 등으로 소문이 퍼졌다. 이러한 것 때문에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양의학 유학을 오는 사람도 몇 있다고 한다. * '''[[동삼성]]의 지방정권화''' 새로운 왕이 즉위함과 동시에 빠르게 문명국으로 발전하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은 공친왕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관총 등 선진 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가장 중요한 [[동치제]]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해 거사가 사실상 무위로 돌아갔다. 그때 귀남이 무탈하게 동삼성을 지키고 일굴 이가 있으면 좋겠다며 이 기회에 딴집 살림 차려 나가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하였고, 이홍장이 서태후를 견제하고자 이를 받아들여 얄팍한 수[* 자신과 이홍조의 이름이 비슷하다고 우기며 마신이를 저격하고 달아나다 조선 관군에 붙잡혀 실토한 장문상의 자백을 왜곡했다. 중국어 발음으로는 전혀 다르겠지만 [[지록위마|권력자가 그렇다고 우기면 할 말이 없는 법이다]].]로 모든 잘못을 이홍조를 비롯한 청류파에게 뒤집어씌워 반역죄로 숙청하고 공친왕을 신설한 동삼성총독에 제수했다. 비록 당초의 바람대로 [[문공(주)|주공]]은 되지 못하였으나 공친왕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신해혁명|청국이 끝내 고꾸라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을 때]] [[만주국|만인들이 살아갈 터전]]을 미리 닦는 대업이라며 마신이와 기타 만주족 사람들을 꾸려 동삼성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추워서 농사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양 농법을 도입하고 일전부터 간도에 들어와 묵묵히 땅 가는 조선인과 한인을 받아들여 소출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뜻있는 만인 젊은이들이 넘어오고 있다. 만주에 많은 철광과 석탄을 이용해 역사대로 만주에서 중공업을 발전시킬 계획도 있으며, 생각 외로 잘 돌아가서 아예 독립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고. 이에 더하여 [[만주어]]를 정비하여 동서고금의 명저들을 만주어로 옮기고 동삼성에 만주어를 보급하고 있다. * '''서태후의 조선파천''' 이홍장이 실권을 잡고 난 후 한인과 만주인을 가리지 않고 능력주의 채용 정책을 펴서 만주인 사이에 불만이 높아진 걸 본 서태후가 이들을 이끌며 서양 나라 사이의 다툼을 이용해 정권을 되찾기 위해 러시아 교회로 어린 [[광서제]]를 데리고 피신한다. 이를 옆에서 본 조선, 주로 김옥균이 중재에 나서 친러시아파 만주인으로 구성된 새 정권을 세우고, 영국을 달래기 위해 이홍장에게서는 실권을 빼앗되 군권은 남겨두고, 서태후는 조선으로 잠시 피해 있게 된다. * '''[[https://ko.wikipedia.org/wiki/일리 조약|일리 조약]]''' 원 역사와 거의 동일한 조건으로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청국 내부의 정치변동(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치적으로 포장하려는 이그나티예프)과 맞물리면서 러시아의 인식 상으로 훨씬 자신에게 호의적인 조건으로 체결되게 되었다. * '''[[청불전쟁]] ×''' 조선의 개입, 흑기군의 활약, [[을축양요|조선 건으로 크게 사고를 쳤던]] 군부를 불신하는 프랑스 내각의 변심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겹쳐 청불 양국이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았다. * '''[[이화원]] 재건 ×''' 서태후가 실각하여 조선으로 떠나게 되자 이홍장이 이화원 재건에 들어갈 돈을 북양군 육성에 투입했다. * '''강남 [[만인소]] 운동''' 강남 향신들 사이에서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선처럼 의회를 설치하여 천하의 공의를 모으고 부세의 쓰임을 놓고 가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강유위]]가 '천하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는 '조선변정고'의 마지막 문장이 문제가 되어 투옥당했다. 이에 역시 만인 조정을 믿을 수 없다는 반감이 확산되었으나 졸지에 흥한 운동의 구심점이 된 유영복이 무력 투쟁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우연히 강남에서 관광중이었던[* 류큐 항목 참조.] 김병국의 조언을 받아 강유위 신원, 의회 설치를 주장하는 만인소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병국은 [[대륙의 기상|중국의 엄청난 인구와 저력]]을 미처 고려하지 못해 양가 일대의 서생이 결코 일만 명으로 끝나지 않고 더 퍼져나갈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주만인소, 항주만인소, 소흥만인소, 통주만인소를 시작으로 강남 전역에 만인소 행렬이 퍼져나가며 이후엔 강소성과 절강성을 넘어 안휘, 호북, 강서에서도 소가 올라오니 만인소가 아니라 '''수백만인소'''에 가까웠고 이러한 향신들의 열정이 [[광서제]]를 각성시켰다. * '''의회 설치''' 그동안 허수아비 천자로 [[예스맨]] 노릇만 하느라 제왕의 화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광서제가 비밀리에 조선에 도움을 요청했고, 귀남은 흔쾌히 대국의 천자를 위해 국내, 국외 가리지 않고 다양한 서적을 진상하고 신하들에게 계책을 내놓는 방법 등을 알려 주었다. 귀남의 도움을 받아 이론 무장을 마친 광서제가 이홍장의 주장을 친히 논파하고 옥음을 내려 원 역사에서 [[흠정 헌법 대강]] 선포와 동시에 이루어진 자의원(하원), 자정원(상원) 설치를 앞당겼다. * '''[[1887년 황허 홍수]]'''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앙리 뒤낭]]이 국제 모금 활동을 벌여 청에 적잖은 지원금을 전달하였다. * '''자의국 설치''' 각 성에 지방 의회라고 할 수 있는 자의국을 설치하였다. * '''남양군 강화''' 서태후가 가지고 있던 동철의 지분 절반을 독일에 넘기고 함선과 무기를 받아와 장지동이 이끄는 남양해군에게 넘겨주면서 북경 정계에 복귀하였고 그로 인해 북양군의 무력 독점이 깨어졌다. * '''백가쟁명 백문제개''' 의회 설치를 계기로 한족과 만족의 갈등이 본격화될 것이라 내다본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중국 진출의 야욕을 드러내자 청이 계속 유지되어야 [[중국공산당|중공]]의 발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귀남이 시무책을 올렸고 광서제가 이를 받아들여 백가쟁명 하듯 만백성이 하등의 꺼림 없이 나라에 도움 될 방도를 진언케 하겠다고 포고하였고 거기에 더불어 청이 한 나라에만 마음을 주면 다툼이 일어나니 백문제개, 즉 시장 전면 개방을 선포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광대한 중국시장이 열리는 셈이니 손해를 보는 입장은 아니라 청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식민지 경쟁의 후발대라고 할 수 있는 독일과 미국은 당연히 이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영국은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터라 영 마뜩찮았지만 나머지 유럽 대륙 전체와 맞서지 않기 위해서는 독일에게 조금은 양보할 필요가 있어 부득이하게 이 문호개방 정책을 찬동했다. * '''공자개제고 조기 출간''' 요순의 성세란 실제 있던 것이 아니라 만세사표 공자가 탁고하여 당대와 후대에 널리 가르침을 펴기 위해 만들어낸 이상이라 주장한 [[강유위]]의 저서 공자개제고가 동아시아 유학 만방대회를 맞아 원 역사보다 8년 일찍 출간되었다. * '''광서제의 국혼''' 서태후의 조카딸 예허나라 정분(효정경황후)이 아니라 원 역사에서 광서제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 각순황귀비 타타라씨가 황후가 되었다. * '''[[중국국민당|국민당]]과 흠정당의 창당''' 조선에서 지내며 천자만을 쥐고 있으려는 것보다 백성의 지지를 받는 것이 권세 잡기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태후가 의회 설치를 지지하고 유영복과 강유위 등 혈기 넘치는 서생들을 영입하여 국민당을 차렸다. 놀랍게도 서태후가 직접 정한 이름이다. 그리고 이홍장이 국민당에 대항하여 흠정당을 꾸렸다. * '''[[의화단 운동]]''' 원세개가 자의원 집회일에 의화단을 동원하여 국민당 의원들을 습격할 생각이었으나 때마침 북경에 체류하고 있었던 전봉준이 김가진의 부탁을 받고 이들이 '''"땅을 달라! 일을 달라!"'''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를 하도록 유도하여 북양군의 뜻과 달리 오히려 서태후가 주도하는 개혁 여론에 힘이 실렸다. 그리고 저들도 모르는 사이 저들 비호해주던 북양대신의 등을 찔러서 후원자가 사라진 의화단은 조선의 소개로 먹고 살 길을 찾아 트란스발 공화국으로 외국인 노동자가 되어 향했다. [[아편전쟁]]을 잊지 않고 반영감정으로 똘똘 뭉친 의화단은 역시나 영국이라면 치를 떠는 [[아프리카너]]들과 죽이 맞아 트란스발 공화국에 쉬이 정착하였고 비슷한 처지의 흑인들에게 권법을 전파하였다. * '''[[https://ko.wikipedia.org/wiki/금단도|금단도의 난]] ×''' 상술한 의화단 운동으로 유민들이 대거 해외로 나가 금단도의 난으로 차하르부의 몽골인들이 대거 학살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몽골인들의 민족의식도 원 역사에 비해 약한 편이다. * '''[[은허]]와 [[막고굴]] 발굴''' 조선과 청의 학자들이 성현의 발자취를 찾는다고 중국 곳곳을 쑤시고 다니는 중에, 원 역사보다 6년 정도 일찍 왕의영이 [[용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기자의 흔적을 찾느라 눈이 벌개진 조선 학자들[* 조선에서 평양의 기자묘를 발굴해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면서 기자의 존재성 자체가 의심받고 있었던 시기였다.]이 그것을 보고 혹시 고대 갑골문이 아니냐고 추측하여, 역사보다 빠르게 갑골문의 출처를 추적하고 은허를 발굴하게 되었다. 원 역사에서 왕의영은 1900년 [[의화단 운동]]의 여파로 서양 군대가 중국에 쳐들어오자 절망에 빠져 자살했고 중화민국 시기가 되어서야 은허 발굴이 시작되지만, 작중에서는 의화단 사건이 훨씬 빠르게, 소규모로 터져 유야무야된 데다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은허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결국 직접 은허를 발견하는 영예를 누렸다. 한편 돈황에서 막고굴도 발굴되었는데 중원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 중원에선 묻혔다. 그 발굴에 형 에른스트 오페르트에게 떠밀려 참가한 동양학자 구스타프 오페르트에게 김옥균은 출토한 유물을 조선이 사들이겠다고 했지만 구스타프는 공친왕의 선양에 새로 지을 대학교의 동양학 석좌교수 자리와 위약금 지불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여 막고굴의 유물들은 불교를 숭앙하는 만주에 남게 되었다. * '''[[서태후]] 독살 미수 사건''' 자의원에서 국민당 영수 노릇을 하던 서태후가 독살을 당할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이홍장은 자신 밑에 있던 원세개가 수를 썼든 서태후에 불만을 품던 국민당의 청년들이 일을 내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래도 서태후가 만인이니 자의원에서 나온 정책에 불만을 품었더라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몽고와 토번의 왕공들이 경각심을 가져 대청이 흔들리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몇 년간 서태후를 보필한 김옥균이 보기에는 서태후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고 실제로 서태후가 국민당 내에서 자신에게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이를 걸러내고자 만든 자작극이었다. * '''[[1893년|광서 19년]] 환국''' 서태후의 독살 미수 자작극이 조선에 의해 광서제에게 들켜 약점을 잡히게 되어 서태후가 이끄는 국민당도 황제의 뜻을 따르게 되고 이홍장 또한 하직한다. 이홍장의 후계로 원세개가 북양대신 자리에 올랐으며 무근전에서 손덕명, 양계초, 담사동 등이 변법하여 자의원에서 통과시키고 있고 이에 불만을 느낀 세력들은 원세개가 총칼로 다스리고 있다. 서양 언론에서는 이를 '''친위 쿠데타'''로 해석했다. * '''남양군 해체 및 [[주방위군|성 방위군]](?) 창설''' 광서제의 개혁에 반발하는 몽골, 티베트의 왕공들이 남양대신 장지동에 접근하자, 이를 우려한 중앙 조정은 남양군을 해체하여 북양대신 원세개의 신군으로 흡수하되 운영을 각 성의 자의국에서 맡게 하였다. 위험한 조치지만 강남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어쩔 수 없었고, 난이 일어나도 강력한 구 북양군이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다. * '''차하르 반란 진압''' 청 조정의 변법에 불만을 품은 몽골(차하르)의 왕공족들이 젭춘담바 후툭투 8세의 만류도 뿌리치고 옛 조상들처럼 말에 올라 반란을 일으킨다. 당연하지만 기병도 쇠퇴하고 있는 와중인 산업혁명의 시대에 먹힐 리가 없어서 기관총 등의 근대적 신무기로 무장한 원세개의 신군에게 순식간에 진압당했다. * '''[[을미정난]]''' 북양군 파벌의 남양 병공창 장악을 두고 병공창에 투자지분이 있던 조선과 마찰이 발생하자, 조선의 요구를 수용하면 북양군 파벌이 권력을 잃고 조선이나 일본의 군부처럼 내각의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군대가 될 것을 우려한 원세개와 휘하 제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온건파 광서제를 자금성에 사실상 유폐시킨 뒤 병기창 접수를 강행한다. 이에 반발한 조선이 군을 출동시켜 압록강을 넘으면서 조청전쟁이 발발한다. 원세개는 처음엔 '조선군 병력 3만이 압록강을 건넜다'라는 보고를 받고는 이 정도면 쉽게 대응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고, 이후의 보고들도 같은 '조선군 병력은 3만'이라는 내용이라서 더욱 안심하였지만, 저 보고가 '''제각각 다른 부대들'''을 지칭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경악한다. 한편, 조선군은 '''총병력 30만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북경으로 향했으며 선두에 최익현과 황현 등 도끼를 든 유생들을 앞세워 천자께 지부상소를 하러 가는 중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결국 원세개와 최익현의 협상이 결렬되자 산해관에서 무력충돌이 있었고, 때맞춰 광서제가 직접 산해관에 행차해서 원세개를 파면하고 천조질서를 폐기했으며 황명은 정부의 뜻을 따르겠다며 임시 공화정을 선포했다. 그리고는 이번에 조선이 쓴 노잣돈과 사상자들에 대한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한 뒤 조선군 일부를 데리고 북경으로 향했다. * '''천조질서 붕괴 및 연방제 도입''' 광서제가 스스로 천조를 내려놓으면서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었던 동아시아의 천조질서가 막을 내렸고 조선은 대청과 동등한 국가로 인정받으며 [[삼전도의 굴욕]]을 설욕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손덕명이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의 예를 들며 연방제를 천조의 대안으로 내놓았다. 분구필합 합구필분[* 分久必合 合久必分. [[삼국지연의]]의 첫 구절로 천하가 분열된 지 오래면 반드시 통일되고, 통일된 지 오래면 반드시 분열된다는 뜻이다.]이라지만 나뉘어질 때도 합쳐질 때도 백성들의 고생이 크니 아예 [[합중국|금간 채로 묶어놓겠다]]는 이론이다. * '''변발 폐지령''' 광서 19년, 보국회가 막 변법을 추진하던 시절에 변발 폐지령이 내려졌다. * '''과거제 혁파''' 1902년, 자의원에서 만장일치로 과거제를 혁파했다. * '''베네수엘라 채무불이행 사태 개입''' [[베네수엘라]]가 서양 각국에 대한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중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체불하자 그동한 나름대로 육성했고 [[청불전쟁]]이나 [[청일전쟁]]으로 날려먹지 않아 동아시아에서는 꽤나 규모 있는 청나라 해군 함대를 보내 베네수엘라 해양봉쇄 대열에 합류하며 서양 나라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을 해보려는 시도를 했다. 결국 미국의 개입으로 청국은 교섭에서는 배제되었지만 자신들의 원래 요구 사항인 중국 노동자 임금 문제는 해결받을 수 있었고 오랜만에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 '''난징 아주대회 개회''' 청나라 [[난징]]에서 제3회 아주대회가 열렸다. * '''만국연합(유엔) 평화유지이사회 이사국 지위 획득''' 대전쟁 종전 이후 유럽, 소련, 신대륙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 분배된 이사국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였다. 원 역사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달리 임기제이지만, 사실상 동아시아 대표국으로 계속 이사국으로 선출될 것으로 보인다. * '''[[삼민주의]]''' 삼민주의가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가 아니라 중민(重民)·교민(敎民)·부민(富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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