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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종, 군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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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 === * [[경복궁]] 1875년에 설계를 시작하여 1886년에 중영의 대업을 마쳤다. 처음 설계를 할 때만 하더라도 심심찮게 존재하던 유럽식 전각은 그래도 명색이 나라의 법궁인데 국초의 제도를 함부로 변경하기 저어된다고 하여 경무대만 남기고 [[경운궁]]으로 넘겼다. 경무대 일대는 경복궁 중건 당시 [[경복궁 북원]]이었던 곳이었는데, 본작에서는 청와대에 더 익숙했던 귀남이 경복궁 북원 대신 경무대 일대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공사의 특성상 원 역사와 달리 [[경희궁]] 해체가 일어나지 않아 무사할 가능성이 높으며,[* 다만 대군들이 창덕궁, 창경궁 일대에 거주한다는 것을 보아 사실상 빈 궁전인 듯.] [[경복궁 건청궁]] 권역은 짓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침전 권역 북쪽에 왕이 기거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원 역사의 건청궁과 본 작의 경무대의 기능이 겹친다. 여기에 본 작의 경무대는 건청궁에 없는 편전 기능까지 추가되었다.] * [[경복궁 근정전|근정전]] 정전(正殿). * [[경복궁 사정전|사정전]] 편전. 기무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안에 있는 서양 기물은 천장에 달린 전등 하나 뿐이다. 일월도 병풍 앞에 용평상 놓였고, 어떤 나라가 어디 붙어있는지 아무리 들어도 잘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는 [[김귀남|귀남]]을 위해 용상 앞에 좌우로 늘어선 서안들 뒤편에 새로 그린 천하전도와 신증동여도가 서 있다. * [[청와대|경무대]](景武臺) 후원에 위치한 전각. 양옆에 청기와 올린 행랑채를 끼고 있는 복층 전각으로 귀남이 저의 기억 속에 경무대, 즉 [[청와대]] 있던 자리에 반쯤 장난삼아 세웠다.[* 경무대는 실제로 이승만 정부 시절에 청와대의 명칭으로 사용하던 이름인데, 이승만 시절 이미 성인이었던 귀남이 당시 명칭을 기억하고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편전과 침전을 겸할 수 있도록 큼직하게 지었으며, 입식과 좌식 두 방식대로 차린 방이 각각 따로 있다. 서양식 난방 기능이 구비되어 있어 겨울에는 사정전 대신 경무대에서 모임이 또 하나의 상례가 되었다. * [[경복궁 교태전#s-6.3|건순각]] [[경복궁 교태전|교태전]] 부속 전각. 창호만 열면 곧장 정원 정경이 눈에 들어와 자영이 교태전 본전보다 더 자주 머무르는 곳이다. * [[경복궁 흥복전|흥복전]] 침전. 귀남과 주요 정당 영수들이 경연을 하는 곳이다. 테슬라가 발명한 전기장판 시제품 검증 과정에서 발생한 작은 화재 때문에 일부 훼손됐다. * [[경복궁 만춘전|만춘전]] 사정전 보조 편전. 흥복전을 대신하여 잠시 경연장으로 사용됐다. * [[경복궁 향원정|향원정]] 후원에 위치한 정자. 귀남이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곳으로 종종 사용한다. * [[창덕궁]] [[경복궁]]을 복원하기 전까지 사실상 조선의 정궁이었다. 원 역사보다 경복궁 중건이 늦어져 먼저 전구가 설치되었다. * [[창덕궁 선정전|선정전]] 편전. [[김귀남|귀남]]이 오페르트를 접견한 곳이다. * [[창덕궁 대조전|대조전]] 침전. [[철종(조선)|철종]]이 숨을 거둔 곳이다. 철종 사후 민자영이 처소로 사용했다. * [[창덕궁 중희당|중희당]] [[동궁]]. 귀남이 왕세자 시절 침소로 사용했다. 민자영이 간택된 곳도 여기다. * [[창덕궁 희정당|희정당]] 편전. 귀남이 박규수에게 자신의 뜻이 개화에 있음을 알려준 곳이다. * [[창덕궁 기오헌|기오헌]] 전각. 흥선대원군과 벨로네 백작이 이곳에서 [[을축양요]]를 어떻게 수습할지 논의하였다. * [[창덕궁 주합루|주합루]] 누각. 귀남이 경연장으로 애용했다. * 춘당대 후원에 위치한 석대. 원래 경복궁에 지으려던 양관 하나를 축소하여 이곳에 올려 기무회의 장소로 사용했다. * [[창경궁]] [[창경원]]을 기억하고 있는 귀남이 경복궁이 중수된 김에 창경궁 한 곳 정도는 백성들이 즐길 수 있는 공원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신료들의 필사적인 반대로 없던 일이 되었다. 귀남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이후로는 작첩이 금지되어 빈 방이 많아서 창덕궁과 더불어 장성한 대군들의 처소로 사용되고 있다. * [[창경궁 통명전|통명전]] 침전. 서태후가 조선으로 파천했을 때 처소로 사용했다. * [[창경궁 집복헌|집복헌]] 처소. 귀남이 작첩을 금하여 이곳을 사용하는 후궁이 없어 빈방이 됐다. 마당이 넓찍하면서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어 지금은 경양대군이 체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경운궁]] 경복궁 중건할 때 더불어 고쳐 지었다.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부지이다 보니 국격을 고려하여 여차하면 행궁 정도는 될 수 있도록 고치고 남은 터는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쓸 수 있도록 유럽 양식으로 전각과 정원을 두었다. 세자 척의 가례가 이루어진 곳도 경운궁의 유럽식 전각이다. * 구성당 원 역사의 [[덕수궁 구성헌]]. 공연장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구성헌과는 규모에서 큰 차이가 있다. 무성 사극 활동섭영(영화) '실록영연'의 첫 작품 '조개홍업(肇開鴻業)'이 처음으로 상영된 곳이다. * [[온양행궁]] [[행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왕실 박물관이다.[* 수도 밖 궁궐이라는 점에서 [[베르사유 궁전]]과, 왕실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고궁박물원]]과 비슷하다.] 본래 귀남은 전생에 즐겼던 [[창경원]]을 미리 조성한다는 생각으로 [[창경궁]]을 개방하여 백성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려 했으나, 차마 추억 어린 창경궁을 민간에 개방할 수 없었던 후대의 왕들이 창경궁 대신 온양행궁을 궁궐 비슷하게 꾸미고 왕실 관련 문화재 몇몇을 전시하며 민간에 개방하였다. 활동섭영(영화) 찍을 때 세트장으로 쓰거나, 궁궐의 후원과 똑같이 꾸며진 후원을 구경하러 서울에서도 종종 내려오곤 하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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