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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종, 군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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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 === * 농업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에 걸맞게 나라의 근간으로서 아직까지 가장 중요한 산업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개항 초기에는 인삼이 주요 수출품이었다. 동삼성[* 봉천, 흑룡강, 길림 일대의 만주]과 연해주의 자유로운 왕래가 허용되면서 벼농사를 중심으로 활발한 식민개척이 이뤄지고 있다. 연병법 실시 이후 북변으로 가지 않고 삼남지방에 남은 병력을 활용해 제언 확충에 힘쓴 결과 1880년대 후반 기준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호남 땅 갯벌도 나날이 개간하여 과장하여 말하기를 지금 김제 한 곳 소출이 [[철종(조선)|선왕]]대 팔도의 소출에 맞먹는다는 말도 있으며, 1899~1901년 3년간의 흉년이 들었을 때는 촌로들 사이에서는 "이만하면 나 젊을 때는 소풍(小豊, 작은 풍년)이었다"라고 평했다. 민간에서는 정미소가 세워지고, 신촌향약을 통해 농촌 환경 개선도 점차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 이후 정착한 유대인들의 [[키부츠]]가 [[농협]]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소개되었다. * 축산업 김병학이 프랑스에서 젖소를 들여와 누구나 마음껏 우유를 마실 수 있게 됐다. 1902년 기준으로 이전에는 [[이팝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이팝에 고깃국]]이 평생 숙원이었던 백성들도 저들 생일에는 그 바람을 이룰 수 있게 됐다. * 경공업 * 방직업 인천 제물포의 공장들에서는 방직업이 발달하여 인천목이 청과 일본을 상대로 주요 수출품으로 떠올랐다. 청국 내륙까지 조선이란 나라는 몰라도 인천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 제지업 박규수가 반남 박문의 가산을 그러모아 스위스 포목상 쥘 브리너와 협력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제지공장을 세웠다. 비싼 닥종이가 대량의 값싼 양지로 대체되며 신보, 상소문, 서책의 양도 훨씬 늘어났다. * 화장품 산업 매헌규방보국(원 역사 박승직상점)이 원 역사보다 16년 빨리 [[박가분]]을 출시했다. 하지만 녹화회가 박가분에 들어간 납 성분의 유해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곧바로 대체 상품 개발에 착수했다. * 양조업 전봉준 내각에서 각 군현 공상을 진흥코자 소소하게 집에서 담그던 것을 고을마다 한데 모아 공장처럼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자 더 이상 집안에 내려오는 비법을 전할 도리가 없는 청상 과부 몇몇, 그리고 막술보다 품격 있는 약주가 개화된 백성들에게 어울린다며 뜻있는 선비 혹은 이름난 술꾼들이 가주 만드는 법을 고을 양주창(양조장)에 전해주었다. * 기타 자전거가 도입된 뒤에는 안인수가 코뮌 사람들로부터 기술을 배워 자전거 부품 제조업까지 가업을 확장하였다. * 중공업 * 토목/건축 개화기 접어들며 전국에 도로와 다리, 양식 건물 등이 활발히 지어지고 있다. 이에 김병학·김병국 형제가 창립한 '''광통이도국'''(廣通理道局)이 대표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의 현재 기술력은 [[한강철교|한강을 횡단하는 교량]]을 독자 기술로도 거뜬히 짓고 전국팔도에 대로를 놓아 막힘이 없을 정도의 수준까지 이르른 상태이다. 양옥 건축법이 빠르게 도입되며 10층 이상의 고층건물도 지을 능력이 되며, 초기에는 [[불경죄|주상전하께서 계시는 궁궐을 내려다본다]]는 비난을 받을까봐[* 이와 유사한 이유로 일본에서는 1920년부터 시행된 '백척규제(百尺規制)'라는 [[고도제한]]으로 인해 [[도쿄역]]과 [[황거]] 사이에 있는 [[마루노우치]]에는 31m 이상인 건물을 세울 수 없었다가, [[고이즈미 내각]] 당시인 2002년에 해제되었다.] 서울에는 짓기를 꺼렸으나 현재는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부터 조금씩 조금씩 지어지는 추세다. 제2차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에 따라 [[허버트 후버]]의 제안을 듣고 춘천 소양강에 [[소양강댐|댐]]을 짓고 있다. * 전기/통신 1881년, 전영(특허)에 관한 법을 제정해 선제적으로 특허를 보장해줌으로써 미국, 유럽의 첨단기술 관련 특허가 다수 유입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맥안전기공행'''의 사례와 같은 각종 기술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1881년 창덕궁 앞 거리에 노명등이 켜진 이래로 전등의 보급이 급속히 이루어져 한성 각지에서는 발전기를 하나씩 들여오고 있다. 조만간 [[발전소]]를 지어 발전기 없이도 요금만 내면 전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 한다. 전화는 특허법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 이후 민간에 먼저 널리 퍼져 조정에서도 왕명 출납을 제외한[* 전화로 왕명 등 예를 갖추어야 할 일을 전달할 때의 예법이 문제되었는데, 귀남이 "그러면 예를 차릴 일이 아닌 것만 우선 전화를 쓰면 어떤가?"라고 별 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가 그것이 그대로 굳어졌다.] 사무에 한해 사용하기로 하였다. 테슬라의 자산기[* 1호는 진공관, 2호는 기계식, 3호는 천공카드, 4호는 시연 중 폭발, 5호는 개발 중단] 발명으로 컴퓨터 및 전자 기술에서 빠르게 앞서갈 수 있었다. 맥안공행과 태씨공행의 반도체 기술은 원체 선구적이라 공장 지하에서 [[외계인 고문|도깨비 고문]]이 이뤄지고 있다는 농담이 돌 정도의 수준이다. 가호자산기(PC)로 대표되는 전자기술의 발전과 그 이후 [[1990년대|개국 600년대]]의 효수대혁([[디지털 혁명]])은 조선 경제를 이끌었다. * 조선/화기 무인년, 세곡과 바꿔온 은 사백만냥으로 청국 강남에서 여러 숙련공들을 데려와 조선 공인들에게 기술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그렇게 세워진 선정국에서 함선을 건조하고 있으며, 한때 동맹국인 일본에 수출하였다. 알프레드 노벨이 설립한 다이너마이트(낙씨작약) 공장이 가동되어 광업이나 토목업 등 비군용 목적 하에 판매하고 있다. 공조 소관의 공기업 융비총국과 맥안공행이 병기 기술개발에 힘쓰고 있다. 맥심이 발명한 [[기관총]](다발총) 등의 무기를 생산해 트란스발 공화국, 아비시니아, 발칸 국가를 비롯한 약소국에게 공공연하게 판매하고 있다. 1900년에는 융비총국에서 반자동소총인 자장방총 시제품을 개발하였다. * 철도/제철/광업 서태후가 큰돈을 출자해 삽을 뜬 동아시아철도회사에 의해 착실하게 건설이 진행됨에 따라 1876년(병자년) [[경인선]]이 개통되어 상업운영을 시작하였고, 1891년 기준 [[경부선]]에 이어 [[경의선]]도 개통이 되었다. 이들 노선을 연결하기 위해 한강철교(차도 병행)가 독자기술로 건설되었다. 1890년대에는 한양에서 [[서울 전차|노면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동아시아철도회사 조선지국은 훗날 '조철'로서 독립한다. 황해도 재령에는 동철의 자금으로 세운 제철소 철정국이 완공되어 철강을 생산하고 있다.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으로 많은 예산 투자가 있었다. 이광도감의 후신 광무총국은 오페르트의 지휘 아래 조선국 내 금은광을 주도적으로 개발하는 중이다. 운산금광의 막대한 금이 금본위제를 위해 쓰였으며, 황란 극복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광무총국 소속인 허버트 후버의 제안에 따라 광산 전력 수요를 충당할 댐을 운산에 짓게 되었다. * 자동차 [[카를 벤츠]]가 오씨양행의 예를 따라 조선 현지에 세운 [[벤츠|번씨차창]]이 있다. 자동차가 비교적 빠르게 보급되면서 20세기가 되기도 전에 차량번호판이 도입되었다. 여담으로 조선에 최초로 들여온 차량은 초창기 벤츠 자동차를 본 귀남이 지적한 것을 바탕으로 대폭 수정한 것이었다.[* 작중은 아직 자동차산업 초창기이기에 자동차의 속도가 느린데 귀남은 전생의 자동차와 비교해 엄청 느리다고 평가하고 있다. 나중에는 40km/h로도 충분히 달릴 수 있고 안양대군의 자동차 사고 이후 속도제한을 도입할 정도로 개선되었다.] 이후엔 광통이도국의 주도로 아스팔트 포장법이 도입되고, 사람들이 자동차를 사서 자주 타고 다니며, 1900년 아주대회에선 자동차 레이스가 경기종목이 될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 항공/우주 미래에 [[공군]]이 중요해질 것을 아는 귀남이 라이트 형제를 수소문해 조선 국내로 불러와 비행장으로 쓸 궁방전과 제작비 등을 흔쾌히 내어주며 지원을 해준 덕분에 [[라이트 형제]]가 만든 '건비호'의 첫 비행이 원 역사보다 3년 빨리 조선에서 성공하였다. 라이트형제는 시험비행에 성공한 후 융비총국에 소속되어 비행기에 기관총이나 진천뢰, 화포를 실으라는 정강사의 지시에 따라 후속 연구를 하였다. 1908년 500리(약 200km) 비행이 가능한 수준까지 발전했고, 납품이나 수출까지 하고 있다. 우주 기술도 발전하여 21세기에는 성한(星漢) 3호라는 발사체를 운용하고 있다. * 서비스업 * 금융 조선, 일본, 러시아가 참여하는 아시아개발은행에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식주공회라는 이름의 [[증권거래소]]가 운영되고 있다. 1890년, 아르헨티나가 원 역사대로 밀 흉작과 공원혁명의 실패로 인해 혼란에 빠지자 미국을 통해 투자를 진행하던 유럽계 자본들이 국운 융성한 조선으로 모여들고 있다. 하지만 황란 당시 여러 난립하던 은행들이 문을 닫기도 했다. * 무역 세도가 중에서는 풍양 조씨가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오페르트의 사기업 오씨양행 또한 대표적 무역회사이다. 조선 상인들은 청국 지주들과 친분을 맺고 결탁하며 수출루트에 있어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진 틈을 타 일본에게 많이 따라잡혔으나 중공업 투자로 수출 품목을 확장 중이다. * 관광 옛적부터 산천유람을 즐겨하던 민족답게 대원군이 유구국 유람을 다녀온 뒤로 관광업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부자들은 대원군 따라 유구, 또는 청국 강남으로, 중산층은 국내 관광을 떠났다. 노동자들도 이를 보고 휴가를 제공해달라며 요구할 정도.[* 이게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골때리는게, 그냥 휴가를 늘려달라는거라면 얼마든지 트집을 잡아 막을 수 있지만, '''나랏님이 말씀하신대로 관광을 다니고 싶다'''라며 지엄한 어명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지라 잘못하면 어명을 어긴 죄로 [[코렁탕|공안서에 끌려갈 수도]] 있어 함부로 거부할 수도 없다.] 이런 흐름에 맞춰 이용익으로 대표되는 부보상들과 여러 거족들이 손탁 호텔을 모방하여 성대하게 빈관과 여각을 세웠다. 북경에도 조선인이 세운 서양식 호텔 '경사대반점(그랜드 페킹 호텔)'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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