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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종, 군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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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아래 모든 종교에는 신자 수에 맞춰진 종교세를 매긴다. 또한 을축변법 이래 신교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예조의 문교참판이 혹 다투거나 강상 어기는 일 없도록 지켜본다. * [[천주교]]([[가톨릭]]) 1865년(을축년), 을축변법의 시행과 함께 나라의 금령이 풀리면서 베르뇌 주교가 조선으로 와 천주교 조선관구를 맡아 포교를 하고 문명개화를 전파하는 서양이라는 뒷배 덕분에 빠르게 세를 불리고 있다. [[을축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비극 이후 조선 측의 배려로 경일학당을 세웠다. 김옥균 내각에서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교첩제를 폐지하면서 집안 눈치 보던 이들도 대거 세례를 받기 시작하며 꽤나 세력이 강해진 종교다. 하지만 각 교당에는 일괄적으로 종교세를 부과한다. * [[천도교]](=동학) 을축변법 당시 정식으로 종교로 인정받았지만 워낙 가톨릭의 교세가 강해 포교에 어려움을 겪던 중에 원 역사와 달리 종교의 자유 인정으로 목숨을 부지한 [[최제우]]가 차라리 해외로 진출하자고 하여 만주로 이동, 길림성과 연해주 일대에서 세를 구축하고 있다. * [[개신교]] 선교사들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워낙 천주교의 위상이 두터워 공략에 난항을 겪고 있다. * [[불교]] 흥선대원군 생전에는 을축변법으로 인한 [[숭유억불]] 정식 폐지와 흥선군의 든든한 후원 덕분에, 사후에도 흥선군을 그리워하는 하늘같은 나랏님 덕분에 전국의 수령들이 사찰에 함부로 트집잡지 못하고 있다. 을축년 이후로는 종교의 자유화와 함께 신도들이 당당하게 사찰을 오가며 시주도 늘었다. 최근 들어서는 승려의 수도 늘고 있으나, 조선 500년간의 숭유억불 탓에 선승(禪僧)은 많아도 학승(學僧)이 적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는 숭유억불을 위해 세종 시기에 [[선교양종]]이 벌어지며 교종이 사실상 선종에 흡수된 것이 원인이다. 선종은 행동을 통한 깨달음을, 교종은 경전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파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승이 선종에서, 학승이 교종에서 주로 나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 * [[유대교]]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몇몇 유대인들이 왕실 사유지였던 곳에 정착했고 [[키부츠]]가 [[농협]]이라는 이름으로 전래되었다. * [[무속|무교]](巫敎)(=한민족 전통신앙) 신분제 폐지로 정식으로 양민이 되었으며 평등을 내세우는 만민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회를 꾸려 음사를 제외한 무속의 체계를 정비하고 있다. 일부는 영국에서 그리 잘 나간다는 진령군처럼 개화한 주술을 배워 명성 드높일 생각으로 꿈풀이 용하게 한다는 [[오스트리아]]의 선비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가 공부하기도 한다. 결국 1930년대에는 학문의 경지에 도달해 무당들이 [[정신분석학]]을 다루며 정신상담을 전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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