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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종, 군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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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추거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94153e><tablebgcolor=#ffffff,#1c1d1f><bgcolor=#94153e> [[고종, 군밤의 왕/조선|[[파일:대한제국 국장.svg|width=40]]]][br]'''{{{#ffd700,#ffd700 역대 총리대신 및 참의대부 추거 결과}}}''' || ||<^|1><bgcolor=#ffffff,#1c1d1f><height=3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4><bgcolor=#999999> {{{#ffffff 1888년 제1회 전국 참의대부 및 총리대신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총리후보 || [[김병시]] || [[최익현(고종, 군밤의 왕)|최익현]] || [[민태호(조선)|민태호]] || ||<bgcolor=#F0F0F0> 결과 || 2위 || '''당선''' || 3위 || ||<bgcolor=#F0F0F0> 의석수 || 3당 || 2당 || '''1당''' || ||<-4> 비밀선거와 평등선거의 원칙이 보장된 첫 전국단위 추거. 진보적인 정책 공약들로 백성들의 반향을 일으킨 공산당이 과반을 차지하여 다수당이 되었으며, 박규수 사후 방향성을 잃은 개화당이 참패를 겪었다. || ||<-4><bgcolor=#999999> {{{#ffffff 1892년 제2회 전국 참의대부 및 총리대신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총리후보 || [[박정양]] || || [[민태호(조선)|민태호]] || ||<bgcolor=#F0F0F0> 결과 || 2위 || {{{-2 ''불출마''}}} || '''당선''' || ||<bgcolor=#F0F0F0> 의석수 || 3당 || '''1당''' || 2당 || ||<-4> 개화당은 금권선거란 비난을 무시하며 재보를 열심히 뿌려댄 결과, 세도가의 과거사 문제가 불거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선거보다 약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에 반해 공산당은 호황을 만끽하던 시골 유지들이 등을 돌리며 원내 2당으로 내려앉았다. 양당 사이에서 자유당이 어부지리로 다수당을 차지하며 각 3당이 미미한 차이로 비슷한 의석수를 가져갔다. 총리 추거는 자유당이 인재 부족으로 후보를 내지 않고, 개화당 유력 후보 김옥균도 출마하지 않으면서 일명 '여의[* '너나 가져라'라는 뜻에 한강 여의도의 이름을 따왔다.] 총리 추거'라 불리게 되었다. || ||<-4><bgcolor=#999999> {{{#ffffff 1894년 제3회 총리대신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총리후보 || [[김옥균]] || ??? || ??? || ||<bgcolor=#F0F0F0> 결과 || '''당선''' || || || ||<-4> 민태호 사직 여파로 공산당이 힘을 못쓰는 가운데 구관이 명관이라 최익현이 자연스레 돌아올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난 추거 때 끝내 나서지 않았던 김옥균이 방대하고 짜임새 있는 경제공약을 내세워 본래 자유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단자까지 빨아들여 총리 자리에 올랐다. || ||<-4><bgcolor=#999999> {{{#ffffff 1896년 제3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의석수 || '''1당''' || ??? || ??? || ||<-4> 1894년에 총리대신 보궐추거를 치렀기 때문에 참의대부만 선출하였다. 개화당이 황란 극복, 북양군 정벌 등 김옥균 내각의 업적을 내세웠으나 하는 일은 옳아도 그 뒤에 있는 마음씨 옳지 못하다 여기는 이들, 다시 늘기 시작한 공장 노동자들이 각각 자유당과 공산당에 표를 던져 개화당이 과반에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는 의석을 확보했다. || ||<-4><bgcolor=#999999> {{{#ffffff 1898년 제4회 총리대신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총리후보 || [[어윤중]] || [[김홍집]] || [[전봉준]] || ||<bgcolor=#F0F0F0> 결과 || || '''당선''' || || ||<-4> 김옥균이 총리대신 임기를 늘려 참의대부와 같이 선거를 치르게 하는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실패하여 원래대로 임기가 끝난 후 이뤄진 총리대신 선거.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후 자유당에 영입된 김홍집이 '민생지질(삶의 질)'을 아젠다로 내세워 공산당으로 갈 표심을 뺏고, 개화당이 경제공약 아래 내세운 어윤중을 꺾고 당선되었다. || ||<-4><bgcolor=#999999> {{{#ffffff 1900년 제4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의석수 || '''1당''' || ??? || ??? || ||<-4> 개화당이 추거를 앞두고 학제개혁이라는 정책안을 내놓으면서 이를 두고 공산당과 자유당 내에서 당론이 크게 갈려 개화당이 일찍 우세를 점했다. 김옥균이 논설 '무비시론'을 낸 직후 라이트형제의 비행이 성공하면서 곤란에 처할 뻔 했지만 근근이 1당을 차지하였다. || ||<-4><bgcolor=#999999> {{{#ffffff 1902년 제5회 총리대신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총리후보 || [[홍영식]] || [[최익현(고종, 군밤의 왕)|최익현]] || [[전봉준]] || ||<bgcolor=#F0F0F0> 결과 || || || '''당선''' || ||<-4> 1902년 쌀소동을 계기로 세계 최초의 대선 토론 '국사공론회'가 유·무선 생중계로 열렸다. 유권자들 중에서는 쌀 태워먹은 일에 대해 이제 쌀만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으니 이해할만 하다는 이들이 좀 더 많았고, 양당을 논박한 최익현에게 개화당으로 갈 표가 옮겨가며 근소한 차이로 만민공산당이 총리직을 차지했다. || ||<-4><bgcolor=#999999> {{{#ffffff 1904년 제5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의석수 || ??? || ??? || '''1당''' || ||<-4> 공산당이 또 다시 득세하여 자유당과 손잡으면 쉽게 과반석을 넘을 수 있게 됐다. || ||<-4><bgcolor=#999999> {{{#ffffff 1906년 제6회 총리대신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총리후보 || [[김옥균(고종, 군밤의 왕)|김옥균]] || ??? || [[김개남|김기범]] || ||<bgcolor=#F0F0F0> 결과 || '''당선''' || || || ||<-4> 자유당 유력 후보였던 이완용이 출마하지 않고, 다음 후보로 거론되던 김홍집도 자유당이 개화당의 협력 제의를 수락하며 나서지 않게 되었다. 공산당에서는 지난 전형회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김기범이 나섰다. 전봉준 재임 중 이룩한 일도 많고 경제 공약도 대개 지켜진데 비해 예상했던 것만큼 성과가 크지 않아 김옥균이 다시 총리직을 탈환할 수 있었다. || ||<-4><bgcolor=#999999> {{{#ffffff 1908년 제6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의석수 || ??? || ??? || '''1당''' || ||<-4> 힘 잃을 것 같던 자유당이 일진회 덕에 젊은 층의 지지를 받으며 도로 약진하여 순위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정립한 세 당 간의 차이는 확연히 줄었다. || ||<-4><bgcolor=#999999> {{{#ffffff 1912년 제7회 전국 참의대부 및 총리대신 추거}}} || ||<width=16%><bgcolor=#F0F0F0> {{{#000000,#e5e5e5 정당명}}} ||<width=28%><bgcolor=#45436C><color=#ffffff,#1c1d1f> {{{#ffffff 개화당}}} ||<width=28%><bgcolor=#EBBC6B><color=#ffffff,#1c1d1f> {{{#000000 자유당}}} ||<width=28%><bgcolor=#B82647><color=#ffffff,#1c1d1f> {{{#ffffff 만민공산당}}} || ||<bgcolor=#F0F0F0> 총리후보 || ??? || [[박은식]] || ??? || ||<bgcolor=#F0F0F0> 결과 || || '''당선''' || || ||<bgcolor=#F0F0F0> 의석수 || ??? || '''1당''' || ??? || ||<-4> 전임 내각의 2년 임기연장으로 20년만에 동시에 치러진 추거. 유럽 전란에서의 최익현의 활약과 종전 확정 소식이 알려지며 자유당 일색의 결과로 끝이 났다. 총리 당선인 박은식은 자신의 지재가 아닌 최익현의 덕으로 당선되었다며 이와 같은 국정 기조 이어가겠다고 천명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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